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밀리터리 게시판
 
작성일 : 22-03-25 12:27
[잡담] 임진왜란 당시 명군 식단
 글쓴이 : 아그립파
조회 : 4,648  

중군(中軍)·천총(千總)·파총(把總)에게는 천자호반(天字號飯)을 지급하며, 【고기 한 접시, 두부·소채·절인 생선 각 한 접시, 밥 한 주발, 술 세 잔. 】

각 아문(衙門)의 차인(差人)에게는 지자호반(地字號飯)을 지급하고, 【고기·두부·소채 각 한 접시, 밥 한 주발. 】 

군병(軍兵)에게는 인자호반(人字號飯)을 지급하고, 【두부·절인 새우 각 한 접시, 밥 한 주발. 】 

말은 한 필마다 규례대로 지급하며, 【요(料) 1소두(小斗), 풀 1속(束)인데 점심 때 말먹이로는 삶은 요 4소승(小升)만 지급하다. 】 

상처를 입어 행동할 수 없는 자는 각력(脚力)을 헤아려 지급한다."
- 선조실록 34권 1월 12일 정묘 11번째 기사 -

---
당시 명군은 병사들의 급료를 은으로 지급했는데,
조선에서도 은이 통용되리라 생각하고 식량보급을 현지조달하려다 거래 불가 싸인을 받고는 크게 동요돼 조선 백성을 상대로 식료품 약탈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조정이 생각해낸 관급 푸드서비스입니다.
대금은 명 : 조선이 관급 거래를 하고, 식료품 제공은 각 관할청이 명 주둔군에 제공하는 걸로.

신기한건, 개전 초기 왜군에게 식량을 빼앗긴 조선이 어떻게 두부며, 고기며, 절인생선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는지입니다.

참고로, 임진왜란은 1592년에 발발했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혁신정치 22-03-25 12:33
   
왜란 당시 일반 조선 백성 다수가 양질의 음식 섭취 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그립파 22-03-25 12:35
   
??? 어떤 주제의식을 가지고 쓴 글이 아닙니다만.

굳이 어떤 부분에 초점이 맞아야 한다는 발상의 기저에
어떤 저의가 있는 걸까요?
          
혁신정치 22-03-25 12:38
   
그냥 제 생각 갖고 질문한 것 뿐입니다.
               
아그립파 22-03-25 12:44
   
^^
빅미그 22-03-25 12:38
   
결국 쌀도 만력제 호주머니에서 나온돈으로 중국에서 사들여서 조선쪽으로 보낸걸로 알고 있습니다...ㅋㅋ 현지에선 먹고 죽을려고 해도 남아있는게 없으니...
     
아그립파 22-03-25 12:42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밀덕달봉 22-03-26 04:25
   
그건 임난 후반에서나 그랬습니다.
초반엔 왜놈보다 더한게 명군이란 말이 있었죠.
거지 똥 ㄲㅁ에 콩나물 애기도 이때 나온거라 함 ^^농담입니다.
명군애들 왜란 전체 기간중 딱 7번 싸웟음.
그뒤론 대놓고 엉덩이 깔고 앉아서 먹기만 했습니다.
특히 애네들 소돼지 닭 농가에서 있는대로 끌고 가서 잡아먹었습니다.
임진왜란초기 일본 애들 지들 영지라고 생각해서 영주민들 관리차원에서 초반에 겁탈 약탈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먹을게 있었고, 애네들 쌀이랑 지들 먹을 것도 가지고 왓습니다.
문제는 한양뚫고 북부지방 가면서 부터 이순신이 막아서니 먹을것 떨어지고 추위에 얼어 죽으면서부터 약탈이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미 조선도 청야작전으로 마을 단위로 먹을거 식량 봄에 뿌릴 씨앗들 가마단위로 각자 알아서 땅에 묻어서 숨겨놧음.
그래서 생존자들이 이걸 발견하면 순식간에 식량문제 해결되기도 했죠.
임진왜란 후반 서로 전멸시키는 작전으로 가면서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민심이 움직이니, 명 입장에선 존선이 불리하다고 판단해서 조선에 식량을 보내기 시작했죠.
긴호흡으로써 문제는 명군이 싸우지 않으면서 너무 많은 식량과 술 고기등을 쳐먹어 조선 전체가 식량난에 빠질 지경이었고, 이게 득보다 실이 많다는 애기가 나올 지경이었죠.
 왜란 끝나고는 광해군 인조시절 명군에서 나온 떨거지들이 조선북방에 꼽싸리 껴서 살면서 거짐 전체 조선군이 소비하는 식량을 능가할 정도로 받아 쳐먹었음.
애네 수준이 2만이 안되는데, 거짐 200만 300만이 먹는 식량만큼 쳐 받아갔고, 이걸 팔아서 호가호위했으며, 명에 로비자금으로 바치면서 조선에 빨때 끝까지 꼽았음.
나중에 이게 조선군과 인구 늘리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됨.
결론적으로 애네들의 존재가 나중에 청과의 전쟁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전개되었죠.
사실 따지고 보면 고려천자라고 불리면서 우릴 도와준 명황제도 있었지만 그밑에 애들이 워낙 빼먹어서 조선 전체가 무너질 판 이었음.
왜란 전에 성균관 근처의 푸줏간들 도축현황보면 한양만 100만두 정도가 한해 도축되었고, 조선 전체로 따지면 800만두 정도가 육우용으로 키워졌고, 일하는 소들까지 고려하면 꽤 많은 소가 키워 졌단걸 알 수 있음.
그리고, 당시 노비및 머슴 식사량이 한끼에 16그릇씩 잡곡밥을 주었고, 하루 두번이 정량이었다고 함.
이사람들 밥이 명군 왜군들 입으로 들어간거임.
조선이 가난하단 인식은 잘못 되었죠.
현대 기준으로 따져도 식사량 칼로리로 따져도 엄청난 수준임.
당시 성균관의 반촌에서 기록을 보면 돼지고기는 인기가 없고, 소 위주로 소비 되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경상도 전라도가 인구수가 훨씬 많았으므로 그리고 이지방들이 곡창지대이니, 여기 소를 더 많이 사육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많은 소와 돼지 닭수를 고려해보면 얼마나 먹었는지 계산해볼 수 있죠.
왜군이나 명군 애들보다 조선백성들이 머리하나높이만큼 키가 더 있어서 행군하는 왜군 명군 보고 조선 백성들이 비웃었다는 기록이 잇을정도니, 식생활 수준에서는 비교 불가입니다.
빛둥 22-03-25 12:41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개전한 후,

평양까지 왜군이 치고 올라갔다가, 육전에서는 1593년 2월에 평양수복전이 벌어지고, 3월에 행주산성 전투가 벌어진 후, 강화회담이 벌어지면서 소강상태가 됩니다. 해전에서도 1593년 3월 웅포 해전 이후 소강상태가 되죠.

소강상태 동안 왜군은 보급이 가능한 경상도 해안지대로 이동하고, 조선 대부분의 지역에서 생업이 가능했습니다.

정유재란 벌어진 후에도, 전라도쪽을 왜병이 주로 공략했지만, 나머지 지역에서 일반 생산활동은 여전히 이뤄졌습니다.

조선8도 중에서 대부분 지역에서, 대부분 기간동안 일반생산활동(농업 등)은 계속 이어진겁니다.
     
아그립파 22-03-25 12:43
   
상세하고 살아있는 지식 감사합니다.
의문이 풀렸네요^^
boodong 22-03-25 12:47
   
일단 임진왜란때에는 모두가 농부였습니다.  산에가서도 먹을 수 있는것 없는것 구분도 가능했구...
현재와는 약간 다르기는 하죠.
저는 산에 가면 아예 구분 못합니다...ㅜ

일례로 소련시절 스탈린때 먹을게 없어서 모두가 굶고 있는데, 조선족 분들은 바다와 산에 깔린게 먹을거리라면서 그래도 어느정도 먹고는 있었더랬죠. 예전에 다큐에 나왔었더랬죠.
보신분들 많으실듯합니다.
     
아그립파 22-03-25 12:59
   
저도 산에 가면 까막눈입니다ㅎㅎ
그 다큐는 저도 본 기억이..
그리 오래된건 아니죠 아마?
     
우라망 22-03-26 18:56
   
소련! 스틸린!....  조선족???
          
아그립파 22-03-29 15:27
   
고려인이나 까레이스키라는 단어를 잘 모르는 우리나라분들 의외로 많습니다.
조선족이랑 헷갈리신듯요
빛둥 22-03-25 12:50
   
임진왜란 기간 대부분 조선의 대부분 지역에서 생업을 영위했더라도, 임진년 그 해만 따지면, 수확철 이전에 침략을 당해서 심각한 식량난이 있었고, 특히 파병된 명군을 먹이는 일은, 밀집된 병력이라서 심각했습니다. 조선군도 병력을 집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주된 이유는 식량조달과 수송이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인터넷에 검색한 기사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s://gsnj.re.kr/forum/board.php?code=essay2&kind=TRAVEL2&no=8&stext=&stitle=&page=1&list_cnt=10

"1592년(선조 25) 12월 23일 이여송이 거느리는 명군의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 왔다.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의 군사가 순차적으로 조선에 입국하는 사이 명나라에서 보내는 약 14만 석의 군량도 의주에 야적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의 관량관(管糧官)인 요동도사 장삼외(張三畏)가 선조를 만나 우선 쌀과 콩 각각 4만 석씩, 8만 석이 의주에 도착하였으며 추가로 6만 석이 요동에서 오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조선측은 지충추부사 김응남을 관량관으로, 호조참판 민여경과 의주목사 황진을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의주에서 군량을 인수하도록 하였다. 군량의 수송은 명 나라의 각지에서 의주까지는 명나라가 책임지고 의주에서부터 명군이 주둔하고 있는 조선 내의 각 부대까지는 조선측이 운송하는 것으로 협정하였다."

이렇게 중국에서 쌀과 콩이 현물로 들어왔는데, 그 다음으로 운송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명나라 장수들의 (조선 관리들에 대한) 불만은 이 운송문제(결국 식량보급문제)때문에 발생합니다.
     
아그립파 22-03-25 13:00
   
생산보다 보급이 문제였다..

오늘 처음 알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도나201 22-03-25 12:53
   
가장 큰오류가...

지금이야 전투가 매일 한다고 하지만,
그이전에  역사적인 전투는 매일하는게 아닙니다.
1년내내  전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보급부대 이후에는  점령지에 대한 주둔군이 마을을 통치합니다.
여기서 약탈만 행한다고 생각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보급부대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전쟁물자를 생산해야 합니다.

당시  정유재란이전에.  바로 경작에 들어갔고,  대부분 전라도지역의 경작과  수산물생산이 가능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이 대단한점이 바로 여기에 있죠.
의주로 피난간  조정에  매달 소금과 쌀과 기타등등... 관련 세곡을 세곡선을 통해서 보냈다라는 것이죠.

그만큼 서해상의 해상로가 우리것이기에 가능한 상황이였습니다.

한산대첩이후에... 왜군은 사실상 전투불가판정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후고,
당시 다대포항을 통한 왜군은 물자보급수송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고,

그에 따른 정유재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전쟁을 200년간 끌어온 일본이 아무생각없이 약탈로만 전쟁을 한게 아닙니다.
경상도 지역의 엄청난  곡창지대인 김해평야에서 시작해서 엄청난 군량미를 생산하게 됩니다.

이게 한산도대첩이후...  기존 한양보급로를 통한 의병에 대한 게릴라전술에 손실과 함께.
상당한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심지어 겨울에대한 방책도 허술해서
매번.. 고생하게 되죠.

우선은  임진왜란초기....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조선해군의 한산도대첩 과.    함경도의 여진에게 대패한 사건입니다.

진주대첩이다 하는데  진주대첩에서는 의외로 타격을 입은 것보다는 우리측의 소모가 더 컷습니다.

실제로 왜군이 육상에서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바로 여진족에게 함경도에서 크게 당한 것입니다.
그후 서부 평양성을 공략하던 왜군에게 상당한 전술적인 타격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는  가장 주효했던게 . 바로 추수시기전에 평양성을 함락하고  추수된 곡식으로.
군량미를 마련하게 되는 왜군이였습니다.

그러나 함경도는 다르죠 겨울도 일찍 찾아오는데다  바로... 대규모 주력병력이 타격을 입었으니,

이게 명나라에서 파병을 보내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여진에게 대패했다라는 것에 분위기가 호조되어서 바로 파병결정을 내리죠.

아무리 중국 명황제라고 해도 승산없는 싸움에 들이밀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조선이 약했다로  치부되게 되죠.

명에서는 우선적으로 병력을 파병하면서 많은 부분을 주의를 주었기도 하고 ,

먄약 여진족에게 대패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먹혔을지도 모릅니다.

그후... 선조는 이때 잡힌  두명의 왕자... 를 공신에 넣고서  이전투의 공록을  왕자두명에게 지워지고,
끝까지 보호하는 추태를 보입니다.
정치적으로 ...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    그러나 결국 두명의 왕자는 처형되죠.
처형되도 쌉니다.

그후 함경도 지역에서 사실상 여진에게 넘겼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진은 전투에 승리한 이후에 바로 철수했고,
만주족의 득세로  다시 자신들의 활동무대를 북쪽으로 행합니다.

명군이 들어온것도 있고,  겨울이 닥치면서 패전이후 철군에서  빠르게 남하를 해버립니다.
원산이남까지 말이죠.    그리고  이쪽부대에 대한 지원이 없었습니다.

당장 명군이 지원을 와서  평양성으로 몰리게 되죠.

그와중에서도 전라도 충청남도 지역에서는  계속된 경작과 함께 전쟁물자를 생산합니다.

기존에 동인세력들이 이미 전쟁에 대한 대비가  서인하고는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죠.

한마디로 말해서  전략적인 판단의 실수로 임진왜란은 초기패전은 당연한 상황이였습니다.
     
아그립파 22-03-25 13:04
   
해박하신 분인줄은 알았지만, 임진왜란까지 꿰뚫으실 줄이야..

저는 그저 7년간 제대로 경작을 못하니 전쟁이 끝나고도 조선후기까지 장기간의 기아에 시달린 원인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땡말벌11 22-03-25 13:50
   
당시 함경도 북쪽의 여진 부락은 만주 내에서도 규모가 큰 편이었습니다.
왜놈들이 만주의 여진 부락을 습격해서 여진 기병에 당했죠.
수천의 왜군들이 도륙당하고 일부만 넘어왔고, 여진을 상대로 전쟁을 하였던 조선 토병들은
왜국이 별것 아니라는 분위기로 역전되어 함경도의 수많은 성들을 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진에서도 자신들에게 도륙당한 왜놈들에게 당하는 조선이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여진군이 조선의 국경을 약탈하게 되었죠.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여진을 토벌하기 위해서 조선기병 6천으로 압록강 이북의 여진 부락을
습격해서 수백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초지에 소금 등을 뿌려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 압록강 이북의 여진 부락의 규모도 있었지만 만주 북쪽의 누르아치 세력의
경쟁세력이었는데. 조선 때문에 누르아치가 흩어진 여진부락민들을 거두었고 만주 통일이
더욱 빨라지게 되었죠.
과부 22-03-25 12:54
   
시간이 남아서 잠깐

임진 초기에 왜군은 조선왕만 잡아서 한국을 식민지로 해서 명나라를 같이 칠 생각이었기에 조선인에 대한 수탈이 거의 없었습니다.조선인 집에 들어가 수탈한 왜군을 즉결처분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수탈은 명군과 재침략한 정유재란 이후에 왜군들이 벌인 거죠.
오죽했으면 "왜군은 얼레빗같고 명군은 참빗같다"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명을 칠 생각을 포기한 왜군은 정유재란때부터 코베기로 기록되는 잔혹한 학살을 보여줬고 조선인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정유재란전까지는 전라도가 보전됨으로써 식량사정에 문제가 없었고 명군의 수탈 이후에는 이러한 사정을 명나라 만력제가 듣고 막대한 쌀을 조선으로 공출하는데 역설적으로 명나라 백성들은 굶게 되니 나중에 명나라가 망하게 되는 이시민의 난 즉 농민의 난의 명분을 제공하는 단초가 됩니다.
명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곡량을 조선으로 보냈는지 짐꾼이 없어 양반들도 짐꾼으로 강제 동원하는 일이 발생하여 조선 내부에서 양반 사대부들이 명나라 군대가 괴롭힌다는 상소문을 끝없이 보내는 일까지 벌어지죠.
이렇게 역사의 뒷면에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더군요.

그래서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걸 욕하는 사람이 많던데 솔직히 그때 왜군은 선조가 도망갈거라는 생각은 1도 안했고 아니 못했고 그때 선조가 도망 안갔으면 삼전도의 치욕을 청나라가 아닌 왜군에 하고 식민지배가 시작되었을겁니다.잘했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전략적으로는 도망가는게 최선이었던거죠.
     
아그립파 22-03-25 13:05
   
임진왜란에 대한 여러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것이 흥미롭군요.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됐구요.감사합니다~
땡말벌11 22-03-25 13:41
   
사료가 다양하다보니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다릅니다.
일단 제가 알기로 임진왜란 전에 조총을 공물로 조선 조정에 받쳐지기도 했고,
조총에 의한 소규모 전투도 있어서 조선이 조총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의도가 분명하다는 내용으로 왜국에서 조선으로 비공식적으로
알리기도 했었기에 나름의 준비로 경상남도에 수천의 육군과 1만의 수군을 배치하였으나
왜국의 규모를 오판하여 단기간 격파가 된 것이었죠.
특히 조선 조정에서는 왜국은 해전에서 강하고 육지전에서 약하다는 판단으로 원균에게 전함을 불태우고
수군을 육군으로 참전시켰으나 대파되었죠.
당시 조선의 수군이 왜국 보급과 상륙지를 위협만 했어도 단시일내로 북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신립장군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병력을 모아서 어느정도 훈련 후 문경새재에서 방어를 했을 수도 있었지만
왜국의 빠른 진격에 소수의 병력으로 깨지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이 된 겁니다.

왜국의 빠른 진격으로 수탈은 크게 없었다고(수탈할 시간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는 하지만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잔인한 수탈의 과정이 있었고, 이후에 수상 보급이 힘들어지자 더 끔찍한 수탈이 있었죠.
일본의 내전에 의한 사회상만 보아도 강음과 수탈은 당연시 여기는 문화였으니깐요.
이에 대한 기록도 많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이 7년간 점유당한 곳에서 원숭이의 외모를 닮은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죠. 이후 경상지역의 백성들이 노예로 일본으로
끌려간 것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일본에서의 삶은 노예 그이상 이하도 아니었다고 하죠.

또한 함경도로 도망간 왕자 중에 광해군을 제외한 왕자들의 포악함에 당시 조선 함경도 토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자들을 왜국에 넘겼죠.
오죽하면 충청도에서도 의병장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으로 진격하려다가 추포되어 사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왜란 중에도 조선 관리들의 수탈과 명나라 군의 수탈, 일본군의 수탈로 당시에 조선은 개판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나마 피해가 없었던 전라도는 상황이 괜찮았지만 경상도, 충청도는 백성들이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왜군들이 후퇴하면서 학살한 조선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어떤 마을은 얼굴이 짖이겨져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고, 사람의 내장과 피로 맨땅이 없었으며, 흐르는 피로 피가 굳지도 않았다고 하죠.
특히 여성들 중 제대로 옷을 입은 시신이 없었고, 가슴이 절단된 시체도 많았다고 하죠.
남성 시체 중에는 성기만 떼어간 시체가 많았다고 합니다.
코와 귀만 떼어간 것이 아니죠.

왜놈들의 수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임진왜란 이후 조선민중들의 왜국에 대한 분노가 수백년간 이어졌습니다.
당시의 의병도 조선에 대한 애국심도 있었지만 각 종 수탈에 분노한 민중들이 동참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봅니다. 반대로 병자호란은 임진왜란보다 단기간에 주요 전장에서만 이뤄졌고, 삼전도 사건 이후 인신매매급 수탈로 인한 피해라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과부 22-03-25 16:15
   
하도 오류가 많아 지적하면 지적질한다고 할까봐 못하겠네요.
왠만하면 역사는 유투브로 공부하시지 말고 책으로 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땡말벌11 22-03-25 14:01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조정에서 나름 준비를 했습니다. 군대도 양성했습니다.
문제는 정보의 오류와 적국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파악을 안했습니다.
의병들에게 갈려나간 왜놈들의 기록만 보아도
전쟁준비를 올바른 정보에 맞춰서 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죠.
     
아그립파 22-03-25 14:51
   
맞습니다. 집단의사결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뿌리죠.
정보의 수집, 분석, 정리..
이른바 수분정
승리만세 22-03-25 14:16
   
임진왜란의 전비와 식량은 뭐 전적으로 명나라에 의존했다고 봐도 무방함...
의주까지 피난한 조선이 병력모집과 급료, 군량을 어떻게 구해왔겠음.. 명나라에게 의존해야죠
     
땡말벌11 22-03-25 14:23
   
맞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 구원을 위해서 많은 식량과 군자금을 보냈다고 하죠.
명나라의 멸망에 계기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에 명나라는 두부가 고급음식이었고, 조선에는 두부를 일반 백성들이 반찬으로
먹을 정도로 흔하다는 소문이 있어서 조선 파병 명군이 조선에서 제공한 음식 중
두부가 없어서 이상하게 여기었고 이를 공식적으로 요구하다보니 조선 조정에서
두부를 만들기 위해 수탈을 하였고, 백성들이 명나라에 원성이 컸다고 하죠. ㅋ
특히 조선의 두부가 명나라의 두부보다 맛있다고 하여 매끼니마다 요구했다고 합니다.

평양성 전투 이후 왜놈을 우습게 여기던 명나라가 왜군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요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임진왜란을 계기로 병자호란의 씨앗을 만들었고, 명나라의 멸망을 앞당기게
되었는데.........이 모든 것이 정보 습득에 대한 미흡함이 그 시작이었죠.
반대로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은 빠르고 정확한 정보 습득으로 왜군을 몰아붙였구요.
정보자산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략자산이라는 것은
불문율에 가깝다고 봐야죠.
아그립파 22-03-25 18:39
   
근데 갠적으로 젤 궁금한거..
저 새우절임이 무슨 아르헨티나새우나 독도 꽃새우는 아녔을거고,
심지어 대하도 아녔을텐데..

도대체 뭐였을까요, 민물새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