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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7-17 02:58
세계 1차대전의 발발 원인 및 전쟁의 시작
 글쓴이 : 오카포
조회 : 3,239  

1차대전 관련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궁금해지더군요.
대충 사라예보 사건과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라고만 기억이나서 말입니다.
그래서 한번 1차 세계대전을 쳐보니 위키피디아에 너무 자세하게 설명이 나와있어서
그냥 본문을 긁어 왔습니다.

 연합군은 총 4295만9천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 사망자 552만 5천명, 부상자 1283만1천5백여명,
실종자 412만1천여명을 내었습니다.
동맹국은 총 2524만8천여명을 동원 사망자 438만6천여명, 부상자 838만8천여명, 실종자 362만
9천여명을 내었다고 나오네요. 
 
 이게 민간인을 제외한 군인들만의 손실이 그렇답니다.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World War I)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약 4년 4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에 대한 선전 포고로 시작되었다. 8월 1일에 이르면서 독일은 러시아에도 선전 포고를 벌였으나, 3년 후 러시아에서는 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되어 전쟁을 포기하였다. 이후 독일이 잇따라 잠수함을 이용한 선박의 무차별 공격으로 미국의 상선들을 침몰시키자, 미국이 참전하였다. 마침내 1918년 독일 제국 내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빌헬름 2세는 퇴위하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11월 11일, 연합군과 독일 간의 휴전이 성립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엔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제안으로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다.



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배경


(1) 경제적 배경


 1870년
대부터 본격화된 국가 간의 산업·상업 반목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14년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의 독일은 영국의 경제를 따라 잡아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고,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본래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경쟁자로,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 자원과 무역 기회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 산지인 로렌이 망하자 독일의 산업만이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오스만 제국에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어서 이 지역을 일찌감치 탐내 왔던 러시아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철도 부설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는 보스포러스(Bosporus)에서 티그리스 강바그다드까지 이루는 노선으로, 이것은 다시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고 있어 인도에까지 가는 단축 노선을 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 자본 투자로서 실시하려 하였으나 양국 간 각각의 이해 관계에는 맞지 않아 거절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375마일(약 604킬로미터) 철도선 부설을 강행하여 국제적 반목을 일으키게 된다.


(2) 정치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 원인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자리 잡았으나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대(大)세르비아주의,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였다.


-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가 1908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대세르비아 계획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세르비아로 뭉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이중 왕국에 반대하는 음모가 일어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범슬라브주의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의 감상적인 희망이며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 이 중에서 러시아는 가장 강력한 슬라브 국가로 발칸의 여러 민족의 희망이 되었고, 프랑스의 보복 운동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그 전쟁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데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 다수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잡다한 인종 집단 간에 점증일로에 있는 민족주의 운동의 압력에 직면하여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방대한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5,000만 신민의 반도 안 되는 소수, 즉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헝가리인만이 지배 민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밖에 840만의 체코인슬로바키아인, 500만의 폴란드인, 400만의 루마니아인, 550만의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 77만의 이탈리아인이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피지배 계층에 속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남부 발칸 지역에 분포한 슬라브족이 가장 강력한 발언을 했고 조직도 잘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웃에 위치한 세르비아는 이들 슬라브인에게는 자기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옹호자이며 모범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총참모부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게 되었고 이 보잘것없는 이웃 왕국을 당장 깨끗이 짓이겨 놓을 구실만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츠 폰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사건(사라예보 사건)이 그런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제국은 남부 슬라브인, 체코인,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겠다.
 
육군원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참모총장

그리하여, 황태자 암살에 직접 세르비아 정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에 대한 응징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했다.

 * 사라예보 사건 -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가 그의 부인 조피와 함께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총격 암살 당한 사건.


당시 사건 후 체포당한 가브릴로 프린시페, 이 청년은 과연 자신의 행동이 세계 대전으로 이어
질 것인지를 알고 있었을까.. 알게된 이후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 기타

 범독일운동은 1895년 창설된 범독일동맹의 이념에서 유래하였고 중앙 유럽의 모든 게르만족을 포괄하는 독일의 팽창을 모토로 한 독일 제국을 주장하였다. 이 이념은 고조된 독일 민족주의의 한 형태로서 독일의 팽창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달랐다.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해외 진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이를 조건으로 다른 열강, 특히 영국과 관계를 원활히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과 대립 관계가 된 것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독일이 그와 상반되는 지속적인 해외 팽창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873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3제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터키 영토 문제로 독일·오스트리아와 불편한 관계가 되면서 3제 동맹이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를 다시 가입시킴으로써 삼국 동맹(the Triple Alliance)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정책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변화를 맞는다. 영국과는 1차 및 2차 지중해 협약을 통해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의 이익을 도모했지만, 요컨대 서로 이익을 놓고 타협하기 힘든 대립 구도의 열강을 억지로 화해시키고자 노력한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였다.

 비스마르크의 은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전통적인 남진 정책이 오스트리아와 일전이 불가피했다는 사실, 빌헬름 2세 등장 이후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독일로부터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러시아와 프랑스는 가까워졌다. 그 극적인 예가 프랑스의 군사 재정 지원이었다.

 또한 영국은 파쇼다 사건(곧 프랑스와 화해)과 모로코 분쟁 이후 독일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 독일의 대양 함대 건설을 놓고 건함 경쟁에 들어가면서 위기감은 올라갔다. 결국 영국은 기존의 고립 정책을 버리고, 프랑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이런 외교적 변화의 결과는 삼국 협상(the Triple Entente)의 결성이었다. 1907년에는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는다.

 이렇게 1907년경 유럽의 강대국들은 3국 동맹과 3국 협상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고, 상호 동맹에 소속된 국가 간에 전쟁이나 분쟁이 발발하면 다른 모든 강대국들이 자동으로 말려들게 되어 있는 구조가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그만 불씨 하나로도 큰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안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3국 동맹을 탈퇴하고 중립을 유지했다가 1915년 3국 협상에 가담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 포고하였다.


(3) 외교적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세르비아도 그 동맹국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외교적인 위기를 전쟁으로 몰고 갈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은 니콜라이 2세가 통치하는 러시아에서 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분할한 폴란드, 우크라이나 영토를 누가 더 많이 자국의 세력권 안에 넣느냐 하는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오랜 경쟁 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서도 영토를 넓히려 하고 있었다. 또한, 흑해에게 해를 잇는 중요한 수로인 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전략적 요충지인 반도를 직접 통치하거나 아니면 자국의 영향권 안에 두고 싶어 했다.

 러시아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을 때도 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참패로 군사력이 약화된 터라 개입은 하지 못했었다.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러시아는 전략적인 이득 추구, 범슬라브 운동에 대한 동정, 숙적을 골탕 먹이고 싶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미 독일의 빌헬름 2세로부터 비슷한 지원을 다짐받고 있었다. 독일도 러시아와 같이 동맹국 지원에 나선 동기가 단순치 않았다. 유럽의 통치자로서 자국의 무력에 대해 빌헬름 2세만큼 큰소리를 치는 자는 없었다.

 그는 독일이 완전히 지배하는 중부 유럽을 꿈꾸고 있었다. 독일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국제적인 인정을 하루 빨리 받아내고 싶은 나머지, 그는 필요하다면 "외국에서의 자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칼을 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있었다. 인구는 25%, 자본력은 50%, 국민 소득은 100% 늘어났다. 강철 생산량은 영국의 3배, 프랑스나 러시아의 4배가 되었다. 민족적 자신감이 팽배해진 독일은 대영 제국을 넘보고 있었다.

 1870년, 보불 전쟁에서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긴 사실을 잊지 못하는 프랑스는 인구가 독일 인구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며, 공업력과 군사력에서 점점 낙후해 가고 있었다. 이 세력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첫발을 내딛은 게 1892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인데, 독일이 군대 동원령을 내리면 두 나라가 같이 동원령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독일이 자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영국은 독일로부터 절박한 위협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고손이었으며 조지 5세의 사촌이었다. 양국의 많은 귀족은 공통된 전통과 혈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이 해군력의 경쟁을 촉발하자 두려움을 갖고 대비하게 되었다. 사실, 영국은 섬나라여서 식량과 원자재 공급을 자국 선박의 해로(海路) 확보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해로 확보와 유지는 필수였다.


2.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에 대하여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최후 통첩’을 보냈다. 
                  

  1. 반오스트리아 교육을 금지하라.
  2. 반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하라.
  3. 반오스트리아 성향을 가진 관리가 있으면 파면하라.
  4. 반오스트리아 관련 출판물을 몰수하여 소각조치하라.
  5. 사라예보사건 관계자 재판에 있어서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에 입국할 수 있게 하라.
  6. 무기의 국외 반출을 금지하라.
  7. 48시간 안에 빨리 회답하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이였던 독일과의 마찰을 바라지 않았으므로 세르비아측에게 조항을 받아들일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세르비아는 재판의 관리 참여 조항을 제외한 모든 조항을 무조건 수용하며 재판 참여역시 협상이후에 받아들일 생각이 있음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은 그들의 요구 조건 중 어느 것도 양보하기를 거부하고, 즉각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얼마후 1914년 7월 28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곧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의 시작

 1914년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이 쏜 포탄이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튿날, 러시아와 프랑스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전쟁을 발칸 반도에 국한시킬 생각으로 러시아에 대해 동원령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8월 1일 러시아가 그 요구를 이행하지 않자, 독일은 바로 선전포고해버렸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조약 의무에 따라 취해진 독일 측의 결정이었으므로, 조약상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한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에 대적하는 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경우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즉각 프랑스 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러시아가 병력을 충분히 동원하기 전에 대(對)프랑스전에서 재빨리 승리를 거두려는 속셈이었다. 8월 1일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3일 후에는 벨기에를 침공했고, 프랑스로부터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얻어 내지 못하자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 포고했다.

 영국은 얼마나 빨리, 또 어느 정도의 병력으로 프랑스와의 약속을 실천에 옮겨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발하지 않은 벨기에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마침내 균형을 깨뜨렸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버 해협에 면한 벨기에의 항구들이 독일군에게 함락 당한다면 전략적으로 크게 불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기에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독일이 거부하자,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6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에 선전 포고하고, 12일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했다.


위 그림에서 녹색은 연합군 ,  주황색은 동맹군, 회색은 중립국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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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작은 여기까지 입니다.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전쟁의 이야기 인데 위의 내용이
너무 길다보니 여기서 잘라야 겠네요. 뭐.. 여러분이 이후의 전쟁경과에 대해서도 적어
달라는 요청이 있으시면 더 찾아보도록 하죠. 뭐.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요. 위키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왔으니. 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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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風 11-07-17 09:51
   
아무튼 결과는 일어나면 안되는 끔찍한 전쟁이라는것....
Misu 11-07-17 16:11
   
군인보다 점점 민간인사망자수가 커지는 현대전...
사실 일반 국민들한테는 자국의 승리도 중요하겠지만.. 가족과 친구의 생명이 더 중요하니..
아예 전쟁발발이 안되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죠..
한시우 11-07-18 00:24
   
오 스페인이 중립이였네요

근대개혁에 실패했었나요?

바로 프랑스옆이라 피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듀라한 11-07-19 15:27
   
스페인은 내정문제가 1800년대 후반부터 2차대전말기, 프랑코독재자가 죽을때까지
끈이질않앗습니다.
중립이라고는 하지만 저땐 프랑스의 입김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안달힘을 다할때니까요.

결과적으론 근대개혁 실패죠.
긔엽지영 11-07-18 14:34
   
참호전 부터 화생방전 까지 진정한 현대전의 시작..
듀라한 11-07-19 15:34
   
민족주의전쟁.. 세르비아계인 러시아황제가 세르비아를 지원한다는명목하에(다른 어떤 이득도없엇음)
참전햇고.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독일제국이 지원함에따라 세계전쟁으로 확대..
독일이 산업만 발전시키느라 식민지개척이 늦었는데 이런 껀수만 기다리고 있엇죠.
따라서 이에대한 반작용(식민지보호)으로 프랑스영국이 연합군에가세햇고. 미국도 여론에의해
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