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킷의 명중률은 밀집대형을 사용한다고 해도 거리가 조금만 벌어지면 형편없이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어떤 장교는 "머스킷으로 150야드 표적을 맞히느니 달을 조준해 쏘는 편이 낫다"고 했고, 러시아의
어떤 장교는 "총은 못 믿을 물건이지만 총검은 믿을만하다"고 말했죠. 미국 독립전쟁시 미군 장교들도
"적의 파란 눈동자가 보이면 쏴라!"라는 말로 병사들을 통제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745년 Fontenoy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2,500여 명으로 구성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포격에 100여명이 사상한 상태에서 프랑스군에게 30야드(약 27미터)에서 일제사격을 합니다. 그 결과 프
랑스군의 손실은 600여 명, 약 4분의 1의 총만이 제역할을 한 셈입니다.
만일 거리가 100야드(약91미터) 정도로 벌어질 경우의 명중률은 심각했습니다. 1759년 Minden 전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공히 100~150야드에서 일제사격을 주고받았지만, 양쪽 모두 손실률은 2% 미만이었
습니다. 1811년의 Albuera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랑스군에게 영국군이 150야드에서 일제사격을 가했지만
역시 프랑스군의 손실률은 2% 미만. 이래서 최대한 가까이 붙어 일제사격을 주고받았던 것입니다.
총의 신뢰성도 많이 떨어졌는데, 당시 실험 결과 머스킷 소총의 불발율은 16~7퍼센트 가량이었습니다.
애초에 6정 중 1정은 불발탄이 난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개인이 각개전투를 하기 보다는 집단사격을 하는
것이 지금의 산탄총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고, 전장에서의 병력통제를 위해서도 그게 나았습니다.
'레드코트'로 대표되는 당시 영국군은 최초 일제사격을 아끼는 군대로 유명했는데, 한 연구가의 분석에
따르면, 영국군이 머스킷으로 싸운 전투 19개 중 100야드 이상의 거리에서 최초 사격을 가한 경우는 21
퍼센트에 불과했고, 무려 47퍼센트의 전투에서 불과 20야드의 거리에서 첫 번째 사격을 가했습니다.
평균적으로는 약 75야드에서 첫 번째 사격을, 30야드에서 마지막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최대한 명중률을 높이려는 것도 있었지만, 선제사격을 얻어맞더라도 충분히 그 이상의 타격을
안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비용문제 때문에 타국군이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워
놓고 사격절차 훈련만 하는게 보통이던 시절에 영국군은 실제 화약을 가지고 사격연습을 했고, 그 결과
발사속도가 타국군보다 훨씬 빨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