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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0-14 22:43
[전략] 대한민국의 핵무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
 글쓴이 : 사랑하며
조회 : 3,811  

북한의 핵무장이 일반화 고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핵무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상황으로 미국에서도 이와 관련된 다양하면서도 신중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6ㆍ25전쟁 71주년을 맞는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 하원에서 미 대통령의 주한미군 감축 권한을 엄격히 제한하는 법안이 나왔다. 지난 2018년부터 해마다 발의되는 내용이지만, 병력을 2만2000명 밑으로 줄이려면 미 국방장관이 '한국의 독자적인 핵 억지력 개발 의지' 등을 분석해 미 의회에 사전 보고하라는 단서가 달려 주목된다.

법안은 주한미군을 2만2000명 밑으로 줄일 경우 미 국방장관이 의회에 정당성을 사전에 보고할 의무도 담았다. 이에 따르면 주한미군 감축이 ▶한반도 억지력 유지에 미치는 영향 ▶북한의 예상되는 반응 ▶한국의 독자적인 핵 억지력 개발 의지에 미치는 영향 ▶한ㆍ미, 미ㆍ일 간 장기적 군사ㆍ경제 협력에 미치는 영향 ▶미ㆍ중, 미ㆍ러 간 군사적 균형에 미치는 영향 등 5가지 항목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토록 했다.

이중 한국의 독자적 핵 억지력 개발 의지는 주한미군 감축에 대비한 한국 내 핵무장 논의와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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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21-10-14 22:44
   
사랑하며 21-10-14 22:46
   
박정희 비밀 핵개발 프로젝트 왜 좌절했나

'핵무기=고슴도치' 표현도…미국 철저한 감시 방해
1979년 박정희 사망이후 핵개발 포기…전력생산에 치중
북한 핵개발에 '월북 물리학자'들 대거 참여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과 한국 정부의 문서 등을 보면 박정희 정권과 카터 미 행정부와의 갈등의 내막이 적나라하게 나오는데요, 박 전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1985년께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증언도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박정희 피살 이후 12·12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핵개발을 포기하고 1981년 1월 충남 대덕 공단을 원자력연구소와 통합, 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후 한국은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엄격한 감시하에 전력생산을 위한 원자력발전에 치중하게 됩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81119104200888
사랑하며 21-10-14 22:51
   
BBC, 한국의 핵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 핵무장론의 역사

비록 성공한 적은 없지만, 한국의 핵무장 추진 역사는 대한민국 자체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0년 국무회의에서 미국의 원조가 끊어질 때에 대비하여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제지로 포기했다.

역사적으로 미국이 한국의 핵개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왔기 때문에 한미동맹을 중요시하는 한국 보수층 내에서도 자체 핵무장을 주장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북한이 점차 완전한 핵보유국에 가까워지면서 한국에서도 핵무장 주장은 결코 '소수의견'이 아니게 됐다.

https://www.bbc.com/korean/news-41377195
사랑하며 21-10-14 22:53
   
50년대 전술핵 스토리…어떻게 들여왔나

① 전술핵 들어올 수 있을까=미군의 전술핵은 1950년대 말 배치됐다가 1991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하면서 철수했다.

② 60년 전 전술핵은 어떻게 들여왔나=처음 전술핵이 한국에 배치됐던 건 1950년대 이승만 정부 때다.

③ 지금의 안보 상황은=북한의 핵개발이 완성 단계에 접어든 현재의 안보 상황은 60여년 전과 묘하게 맞물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938557#home
사랑하며 21-10-14 22:58
   
되새겨야 할 '이승만의 투쟁'

평화협정과 조약이 반드시 평화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25년 독일은 영국·프랑스 등과 불가침 내용 등을 담은 ‘로카르노조약’을 맺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1938년 독일과 영국 간 ‘뮌헨협정’,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조약’ 등도 마찬가지였다. 1973년 미국, 남·북베트남이 맺은 ‘파리평화협정’도 2년 뒤 북베트남의 기습 남침으로 무위가 됐다. 평화협정을 어기면 북베트남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약속한 미국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핵폐기 하더라도 핵위협 여전할 것

설사 북한이 핵을 폐기하더라도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안전한 한반도’를 보장할 수 있을까. 3000여 명에 달하는 ‘핵두뇌’와 이들이 남긴 ‘핵지식’이 있는 한 북핵 위협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 중국의 패권욕은 무엇으로 막나. 본격 북한 핵 담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불거진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대보다 냉정과 이성이다.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 주둔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이승만 대통령의 ‘고독하고 냉정한 투쟁’도 상기해봤으면 한다.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18051566761
사랑하며 21-10-14 23:01
   
대전의 원자력 시대… 이승만 대통령이 심은 씨앗 거름 준 장인순·한필순 박사

우리나라에 최초로 원자력의 씨를 심은 사람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1956년 미국 전력협회 시슬러(Cisler) 회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는 이차대전후 파괴된 유럽의 전기 시스템을 복구하는 책임자였다.

시슬러 회장은 원자력이 석탄의 300만 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대통령은 이 말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심각한 에너지 부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즉시 그해에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설치케 했는데 그때는 과학기술부가 없었던 것.

이어 1958년 10월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원자력 연구소 간판을 달았으니 이것이 대한민국에 처음 원자력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듬 해, 그러니까 1959년 7월14일 국내 최초의 열출력 100㎾ 원자로 기공식을 갖게 하고 자신이 직접 참여하여 첫 삽을 떴다.

이렇게 집념을 갖고 원자력을 추진하던 이 대통령은 4·19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고, 원자로 역시 우여곡절 끝에 1962년 3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준공될 수 있었다.

세계 최강의 원자력 기술을 갖게 된 첫 걸음은 이렇게 미약하게 출발했다.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6670
사랑하며 21-10-14 23:04
   
1956년 이승만의 원자력 결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승만은 한국 발전의 버팀목이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1953년 체결 후 3년 만인 1956년에 미국과 원자력 협정에 조인했다. 1956년이 어떤 해인가. 북한의 김일성은 천리마운동을 시작했고, 대한민국 국민의 상당수는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아 끼니를 때우던 때였다. 그해, 증권거래소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거래될 수 있는 주식은 12개뿐이었다. 2008년 한국 GDP의 약 80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던 당시의 GDP는 그나마 1.3% 하락할 정도로 먹고살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원자력을 언급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상황에서 이승만은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1959년에는 35만달러를 들여서 교육용 원자로를 들여왔다. 당시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한반도 밖의 동향에 밝았던 이 대통령은 원자력 산업 투자가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꿈은 박정희로 이어져 1978년 고리 1호기가 가동돼 한국 원전 발전시대를 열었다. 이승만이 뿌린 '원자력 씨앗'은 한전이 미국 회사를 하도급업체로 삼을 정도로 기술발전을 이뤄 곧 만료되는 한미원자력 협정 개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400억달러의 초대형 원전 공사를 따낸 배경에는 그의 과오(過誤)가 크게 부각돼 기념관 하나 갖지 못하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혜안(慧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한 해를 마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30/2009123001508.html
사랑하며 21-10-14 23:11
   
이승만이 경제무능했다고 생각한다면 읽어라

포항제철은 이승만 시대에 시작되었다! 휴전 논의가 한창이던 1953년 4월, 이승만의 특별지시로 철강 산업진흥책이 마련된다. 대한중공업공사가 국영기업으로 출범하고, 연산 5만톤 규모의 평로(구식 용광로)를 건설하기로 한다. 1959년 평로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이 세워진 뒤 정부는 철강공업육성 5년 계획을 수립해 연산 20만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안을 준비해 미국 국제원조처에 자금지원을 요청한다. 이것이 포항제철의 시작이다.

“국민소득 60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미래의 에너지였던 원자력산업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것은 국가 지도자의 통찰력이었다. 이승만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노망이 들었다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력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p. 304

원자력의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현실을 보면 이승만의 통찰력은 놀랍다. 1956년 2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 협력 협정'을 맺고 1957년 8월에 국제원자력기구에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한다. 1958년 3월 원자력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듬해에는 대통령 직속 원자력원을 설립한다. 당시 2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영국으로 유학 보냈고 그들은 한국 원자력산업의 중추가 됐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당시 정책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인터뷰와 기록들을 소개하면서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라는 결론을 이끈다.

건국의 아버지로 부국의 밑그림까지 그린 이승만

이승만의 정책이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 비현실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승만은 거대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실제 5.16 주체들도 처음에는 이승만이 세운 중후장대한 계획부터 추진하려다 전략을 바꿔 가발이나 봉제 섬유부터 추진하면서 이후에 중공업 원자력 등의 산업을 성공시켰다.

https://www.dailian.co.kr/news/view/387025
     
수퍼밀가루 21-10-14 23:14
   
그래봐야 지 혼자 살려고 한강다리 끊고 도망간 하와이 갱스터!!!!

그 이후는 말 안해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더 말 안할께요....
          
사랑하며 21-10-14 23:24
   
정부수립과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공과(功過)

어떤 지도자도 시대의 공과 다리를 건너뛸 순 없다. 나라 살림살이의 80~90%를 미국 원조에 매달렸던 가난한 나라의 지도자였지만 미소(美蘇)강대국의 농간을 단호히 뿌리쳤던 거인이었다. 그는 ‘민주’를 대들보로 박고 ‘시장경제’를 서까래로 올려 나라의 집을 지었다. 그 큰 대업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다. 그는 6.25사변 이른바 한국전쟁 때 북의 침략을 끝내 막아냈다.

우격다짐으로 미국을 설득, 한미 방위조약을 이끌어 낸 것은 이승만의 선각자적인 혜안의 결과다. 한미동맹이야말로 후일 ‘한강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시대를 거쳐 오늘로 이어진 번영한국의 큰 밑천이요 소중한 기틀이다. 건국의 이승만과 근대화의 박정희 두 거인을 나란히 세워 나라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으로 비유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렇게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출처 : 의회신문(http://www.icouncil.kr)
https://www.icouncil.kr/news/articleView.html?idxno=32709
          
사랑하며 21-10-14 23:27
   
6.25전쟁의 진실, 소련의 괴뢰였던 김일성

결국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가 힘이 빠져 전쟁 지휘권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힘의 대결장이 돼 애매한 인민들만 죽어갔습니다. 미군 폭격기는 쉬지 않고 북한을 폭격했습니다. 6.25전쟁 중에 무려 520만 명의 인구가 사망했습니다. 그 중에는 저의 가족도 있었고, 여러분의 가족도 있었습니다. 6.25전쟁 때문에 저희 집안의 운명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6.25가 없었으면 50년 뒤 제가 남쪽까지 탈북해 올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원흉인 김일성은 정전 협정을 맺어 이를 끝낼 힘도 없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953년 3월 5일에 스탈린이 급사했습니다.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 짓는 쪽으로 한반도 정책을 바꿨습니다. 스탈린이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전쟁이 1953년 7월이 아니라 몇 년 더, 어쩌면 우리 민족 대다수가 죽은 뒤에도 계속 한반도에서 전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6.25전쟁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전쟁을 지휘하고 휴전을 막아 수백 만 명의 희생을 초래한 스탈린은 우리 인민의 원수입니다.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였을 뿐인 김일성은 전쟁 뒤에 자기를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으로, 미제와 이긴 영웅으로 포장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관리소를 만들어 남로당, 소련, 중국 계열 인사들을 포함한 반대파를 모두 정치범으로 만들어 수감시켜 왕조를 세우고 아들, 손자까지 대대손손 물려줬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이란 인물의 한 껍데기만 벗겨도 부끄러운 거짓의 역사가 끊임없이 따라 나옵니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joosungha/seoullife-06282019111106.html
          
사랑하며 21-10-14 23:31
   
[김씨 왕조의 실체] 한국전쟁의 주범 김일성

사실 한국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지에 관한 진실은 1991년 구소련이 무너지기 전 까지만 해도 논란 속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북한은 남한과 미국이 먼저 일으켰다고 하고 남한은 북한이 먼저 침략한 전쟁이라며 팽팽히 맞서왔습니다. 당시 남한과 북한 모두 침략전쟁으로 통일을 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가운데 1991년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 정부가 수백 점의 한국전쟁과 관련한 자료들을 공개했습니다. 이 자료들을 통해 한국전쟁의 진실은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한국전쟁을 연구해 온 미국의 우드로윌슨 센터의 캐서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 박사는 당시 러시아가 공개한 자료 속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휴전협정 후까지 김일성과 스탈린 사이의 오고간 극비 문서와 대화 녹취록도 포함돼 있다며, 이 녹취록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명백하게 북한의 김일성이 구소련과 중국과의 합의하에 일으킨 전쟁이었다고 말합니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truth_kim_family/kim_dynasty-06212010165149.html
          
사랑하며 21-10-14 23:36
   
원자폭탄이  남북전쟁을 휴전으로 종결

[한국전쟁관련 옛 소련문서 입수의 의미]6·25논쟁 40여년만에 종지부

북침설(北侵說)·남침(南侵)유도설(說) 등 설땅 잃어,
김일성 발의(發議)·스탈린 동의(同意)·모(毛) 묵인 입증(立證)
소련공군 조직적 참전·중국 군사적 개입 낱낱이 소개
미의 원폭투하 겁내 휴전의 길로 들어서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746351
사랑하며 21-10-14 23:22
   
이국서 뿌린 씨앗이 자라 대학을 세우고…

하와이 이민사는 1902년 하와이사탕수수농장주협회 요청으로 시작됐다.
하와이 농장주의 요청을 받은 당시 미국공사 알렌이 대한제국 정부에 이를 요구했다. 이어 대한제국 정부는 하와이 이민을 담당할 수민원을 설치했고, 알렌이 소개한 데쉴러가 인천에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하면서 이민자 모집이 본격화했다. 동서개발회사는 황성신문 등에 광고까지 내고 전국적으로 이민자를 모집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아무리 하와이가 '기회의 땅'이라고 해도 고향을 등질 선택은 누구나 쉽게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당시 인천 내리감리교회 존스 목사가 나서 신도들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교회 신도와 부두 노동자, 좌절한 지식인, 구한국 군인 등이 첫 이민자 대열을 이루게 됐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은 새벽 4시30분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일과를 시작해 6시부터 사탕수수밭에서 10시간 동안 일을 했다. 부지런한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동조건에서도 열심히 일해 번 돈을 한 푼 두 푼 모았다. 농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는 이들도 생겨났고,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학교도 세우게 됐다.
몇차례 부침을 거쳐 1918년 9월 이승만 박사 주도로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이 설립되는데, 이 학교가 인하공과대학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해방 2년 뒤인 1947년 한인기독학원은 해체되고 부지매각 대금 15만 달러가 인하공과대학 설립 자금에 쓰이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4년 10월에 있었던 인하공과대학 개교기념식에서 "(하와이 이민자들이) 그 동안에 번 돈이 15만 달러라. 그 가난한 농장에서 번 돈, 어떤 때에는 떡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서 돈푼 모은(중략) 대학을 하나 만들어서 하와이(이민을) 기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내가 이 학교의 이름을 인천과 하와이의 연락을 만드는 기념으로 한다고 해가지고 그 대학을 '인하'라고 했오"라고 말했다.

http://www.incheon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73
     
수퍼밀가루 21-10-14 23:50
   
결론은 419 망명 ㅋㅋㅋㅋ
          
사랑하며 21-10-14 23:58
   
망명 [ refuge , 亡命 ]

요약 :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민족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외국에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

국민국가에서는 속인주의에 따라 개인은 원칙적으로 어느 한 국가에 속하며 그 관할하에 있으므로, 본국에서의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박해 또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국으로 도피하여 자신을 보호해야 할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망명은 단순히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한 난민과 구별된다. 특히 전쟁 ·혁명 ·동란이 발생할 때 대량적으로 이런 현상이 생긴다. 그 예로 16세기 프랑스에서 신교도의 박해로 국외로 도피한 위그노, 17세기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 프랑스혁명기의 왕후귀족들의 망명이 있으며, 현대에서는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체제에 반대한 백계 러시아인의 망명, 나치스의 탄압에 의한 대량적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의 망명, 일제강점기 때의 한국독립운동가들의 해외망명 등을 들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망명 [refuge, 亡命]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1756&cid=40942&categoryId=31647
               
수퍼밀가루 21-10-15 00:01
   
그렇다고 한들 이강석 따위의 양부일 뿐 ㅋㅋㅋㅋㅋ
                    
사랑하며 21-10-15 00:19
   
이승만

1875년(고종 12)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4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1896년 배재학당 내에서 청년단체인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으며, 협성회의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1891년 박승선과 결혼하였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때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고, 1934년 10월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곧 다가올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미동포 단체들의 분열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만 [李承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랑하며 21-10-15 00:00
   
이민 移民
1.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https://ko.dict.naver.com/#/entry/koko/01359b4f3af645cbbbc6349052d8f5d4
          
사랑하며 21-10-15 00:02
   
문 대통령, 하와이 독립지사 후손에 훈장 직접 전해…“늘 마음 애틋”
 
문 대통령은 “하와이 동포 여러분, 하와이 동포사회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애틋하다”며 “나라가 국민의 삶을 지켜주지 못할 때인 1903년 처음으로 근대이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민 1세대들은 고된 노동과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조국 독립에 힘을 보탰다”고 말했다. 이어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품삯의 3분의 1을 떼어 300만 달러 이상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를 결성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언제 들어도 가슴을 울리는 애국의 역사”라고 의미를 짚었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1012438.html
안전운전 21-10-14 23:36
   
난 정말  수꼴들 머리에 논리가 있는지 궁금함  대한민국 핵보유 좋지 이거 반대할사람있음? 당연없지.. 그런데 반대하는 나라 얼마나있지? 일단 수꼴이 죽고 못사는 미쿡 러샤 중국 일본 ??  미쿡의견에 조금만 반대해도  나라망할것처럼 떠들어 대면서 미쿡부터 반대하는 핵보유? 당장 핵잠수함 기술도 안주는데??  러샤중국일본 좋아라할까?  NPT  탈퇴하고  독자 핵개발 하면 4개 나라가 두눈뜨고 잠자코 있겠냐? 당장 무역제재 쳐할텐데  그럼 또 나라 쳐망한다고 조중동찌라시부터  개쥐랄 떨꺼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진보만 정권잡았음?  보수정권 잡았을땐 머함? 박정희땐  시도하다 들켜서 아닥했다  쳐도  전대갈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는? 몇년임? 하여간 대책도 없으면서 아가리만 ..
사랑하며 21-10-14 23:38
   
"한국 핵보유 정당화 가능…美가 정치적 지원해야" 美학자들

기사내용 요약
"동맹 기반 약화…한국 자체 핵보유가 최선일 수도"
"한국 정부 결정하면 '원인'을 비난해야"…북핵 겨냥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11009_0001608428
사랑하며 21-10-14 23:40
   
국민 93% “北 핵 포기 안할 것”…"한국 핵개발 나서야" 69%

아산정책연구원은 13일 발표한 ‘한국인의 외교안보 인식’ 보고서를 통해 이같은 내용을 밝히며 “2018년 이후 북한의 무력 도발이 재개되면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응답은 90% 내외가 됐다”고 밝혔다. 해당 보고서는 아산정책연구원이 여론조사업체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3~17일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표집오차 95%, 신뢰구간에서 ±2.53%P)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06768#home
사랑하며 21-10-14 23:42
   
미-영, 오스트레일리아와 핵잠수함 협력…한국에도 ‘핵잠 개발’ 열리나

핵잠수함 개발은 북한이 남한을 앞서가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은 지난 1월 8차 당대회에서 “새로운 핵잠수함 설계 연구가 끝나 최종 심사 단계에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우리가 미국의 양해를 얻어 실제 독자 핵잠수함 개발에 나선다 해도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장보고-Ⅲ’ 사업의 3000t급 잠수함을 독자 설계하는 등 잠수함 설계능력은 확보하고 있다. 이는 몇십 년 동안 독일의 기술 지원을 받아 1200t급 잠수함(장보고-Ⅰ사업)과 1800t급 잠수함(장보고-Ⅱ 사업) 10여척을 건조하며 기술 축적을 한 결과이다.
핵잠수함의 추진체인 원자로와 관련해서도 기반 기술은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1990년대 말부터 러시아의 기술 지원으로 해수담수화용 소형 일체형 원자로인 ‘스마트 원자로’(열출력 330㎿)와 이를 5분의 1 규모로 축소한 실증로인 ‘스마트-P’(열출력 65㎿)를 개발한 전례가 있다. 이를 기반으로 개발하면 몇 년 안에 핵잠수함용 원자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군 당국은 기대하고 있다.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012228.html
사랑하며 21-10-14 23:45
   
[2차 북·미 정상회담 특별기획] 북 핵보유국 공인시 남한의 선택

NPT 탈퇴, 국제적 고립 남한 국민들은 견딜 수 있나?
핵보유국 되면 한국·일본·대만의 핵무장 가능성
미국 핵우산 편입도 차선책이지만 文 정부 추진 미지수
‘공포의 균형’이 가져온 억지력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4933
gaist 21-10-15 00:35
   
어휴....어질어질..토나온다
벌레는 좀 일베같은데 가서 벌레들끼리 놀고 인간세상에 출몰하지말자...
     
사랑하며 21-10-15 09:52
   
[국어사전]

1 곤충을 비롯하여 기생충과 같은 하등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어떤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op_hty&fbm=1&ie=utf8&query=%EB%B2%8C%EB%A0%88
     
사랑하며 21-10-15 09:56
   
정신과 말해주는 남자 ᅵ 정신과의사 김기창
비난, 막말에 대처하는 방법. 무례한 사람 상대하는 방법

비난, 비판에 대해 대처하는 법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특히 일반적인 비판의 정도를 넘어선 비난, 막말을 들었을 때 대처하는 법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비난과 막말에 대처하는 5가지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UJmz7Gh6Lk
사커좀비 21-10-15 10:31
   
이승만으로 아주 도배를 하네...
이승만 전기 이미 국딩때 다 읽어 봤다...
이승만이 선조랑 뭐가 다른데?
존내 찌질한 권력욕만 있는 퇴물이지...
왕족도 아닌 전주이씨 방계가 왕이 되고 싶어서 생지랄난리부루스친 게 다여...
존나 쓸데없는 공부를 하셨네...
혼자 물고 빠세요... 여기다 도배하지 말고...
방랑기사 21-10-15 10:31
   
대미 한정으로 외교능력은 있습니다.
내치는 못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왕인줄 알았죠
사랑하며 21-10-15 11:38
   
[뉴스위크] 히틀러가 남긴 역사의 교훈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는 것은 ‘나의 고통’이었다. 어떤 고상한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지 않다. 나치 독재자 히틀러가 1924년 옥중에서 저술한 이 책은 미혹된 자들을 위한 지침서다. 그의 정신병적인 반유대 성명을 담았으며 대학살을 위한 그의 마스터플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나의 투쟁’은 역사에서 확실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문제는 어떻게 읽힐 것인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냥 두면 인간 혐오와 살인을 부추기는 강력한 도구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분별과 이성 앞에서 금방 무너져 내리는 뻔한 헛소리다. 따라서 이번에 새로 나온 학술서는 지극히 바람직한 발전 방향인 셈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9500453
축구사랑인 21-10-15 12:31
   
주변국이 핵무장했는데 비핵 부르짖는 인간들보면 답이 없음.
국제원자력기구에서도 주변국의 핵위협시 탈퇴가 가능하다란 문구를 인용안한다고 하더라도 핵무기를 정치무기라고 뻥치는 인간들보면 사람들을 얼마나 속일려고 그러나.
핵사용하면 핵보복으로 그나라는 멸망하기때문에 그 어떤 나라도 사용못한다고?
물어보자. 러시아가 핵무기를 우주에 띄워 지구주위를 돌다가 필요한 나라에 쏜다는거. 바다에 핵어뢰 띄워서 무한 돌아다니다 유사시 파괴하려하는 무기는 다들 알고 있겠지, 그럼 러시아가 핵 쐈을때 어느나라가 러시아 지역에 핵쏠까? 자국이 핵맞은것이 아니기때문에 미국이 핵맞은 나라 대신 핵전쟁으로 갈까? 그럼 미국이 쐈을때 누가 보복하나?
말 같지 않은 말로 핵을 정치적 무기란 말로 거짓말하지마라.
주변국 반대한다? 이런 황당한 얘기 하지마라. 주변국들 북,중,러 어떤 나라에게 우리가 찬성해서 그들이 핵개발했나?

미,러,영,프,중은 핵을 더 폭발력있게 무서운무기로 계속 실험하고 실전배치중이다. 미국 제니트는 히로시마 핵폭발 40배로 커진 핵이다. 러시아핵도 마찬가지고. 핵을 쏠수 없는 나라는 핵가진 나라뿐이다. 그럴때 지들끼리 재래식무기 전쟁하는거다. 핵에너지는 미래 에너지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생존을 담보하는 끝판왕이다.
     
줄리엣 21-10-15 14:08
   
전술핵이라도 갖다 놔야 할듯... 어차피 요즘 핵우산 믿는 사람들 없지않나요?  ㅋㅋ 미국이 한국을 위해 중국에 핵을 진짜 쏴줄꺼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ㅋㅋㅋ 하물며 북한에 쏘면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  뻔한상황에서 ㅋㅋ 정치적으로 해결 하려고 쏘지도 않을듯.. 애궃은 한국만 아작나고...
점퍼 21-10-15 14:30
   
핵은 쓰면 안된다는 점에서 매우 정치적인 무기 입니다. 북한 이란 처럼 외교 무시하고 만들지 않는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쉽게 가질 수 있는 무기가아니죠.
하지만 이미 투발 수단 까지 모두 완성 되었으므로 정치적 해결점 만 찾는 다면 핵무장은 손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솔직히 한국의 현재 입장에서는 핵무장은 아직 표면화 시킬 주제가 아닙니다.
이번 북미간의 데탕트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아마 자연스레 핵무장이 주제로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랑하며 21-10-15 16:10
   
“북한 ‘핵탄두 소형화·전술핵’…미국·동맹 위협”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가 2022 회계연도 국방수권법안의 전문을 공개했습니다. 위원회는 법안 설명서에서 북한이 제기하는 위협으로 소형화된 핵탄두와 전술핵무기 개발 등을 지목하고 이 같은 무기들로 미국과 동맹국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https://www.voakorea.com/a/am/6242813.html
사랑하며 21-10-15 16:12
   
전직 靑 외교수석들 "전술핵 재배치 준비해야"

전·현직 주미 특파원 모임인 한미클럽(회장 이강덕)은 6일 '북한 핵무장 시대: 역대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에게 듣는다'는 주제로 유종하·임성준·윤병세·천영우 등 4명의 전직 외교안보수석과의 인터뷰를 공개했다. 이들은 각각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을 지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50610560000074
사랑하며 21-10-15 16:15
   
북핵 도발에 美 '전술핵무기 배치'카드 공론화한 국책연구원

조비연 KIDA 선임연구원 보고서 통해 진단
"저위력 핵무기 한반도 배치시 대북억제 효과"
부작용으로는 "군비경쟁 심화 가능성"지적
트럼프 추진 3종 핵무기, 바이든 일부 유지할듯
"W76-2 잠수함발사미사일 생산·배치완료"

조 선임은 트럼프 정부 시절 추진된 이른바 ‘신형 3종’ 저위력 핵무기중 ‘W76-2’핵탄두가 이미 2019~2020년에 긴급생산돼 배치완료됐다고 전했다. 해당 탄두는 잠수함탄도미사일(SLBM)인 트라이던트-Ⅱ에 탑재된다. SLBM의 특성상 핵잠수함에 W76-2를 싣고서 은밀히 잠항하다가 기습발사하면 적 지휘부는 지하 깊은 벙커에 숨어있더라도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신형 3종 저위력 핵무기중 또 다른 하나는 ‘B61-12’ 중력폭탄이다. 이 폭탄의 경우 한반도 안보와 관련해 주목 받아왔다. 유럽 선례를 감안할 때 미국이 대북확장억제 차원에서 핵무기를 한반도에 재배치하거나 한국과 공유한다면 핵미사일보다는 핵폭탄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중 독일 등 5개국과 공유 중인 무기도 핵미사일이 아닌 항공기 탑재형 전술핵폭탄 ‘B-61’이었다

출처 : https://www.seda ily.com/NewsVIew/22L5NPLGMP
사랑하며 21-10-15 16:17
   
‘전술핵’ 내세운 북한...선제 핵공격 가능성 열었다 [박수찬의 軍]

◆핵공포로 전쟁 주도권 장악하려는 북한

북한 매체들이 당 규약 개정을 보도하면서 “조국 통일을 위한 투쟁 과업 부분에 강력한 국방력으로 군사적 위협을 제압해 조선(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적 환경을 수호한다는 데 대해 명백히 밝혔다”고 밝힌 것을 감안하면, 북한 전술핵의 표적은 한국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https://m.segye.com/view/20210116504872
     
사랑하며 21-10-15 16:58
   
北 '전술핵무기'가 다가온다…탄도·순항미사일 모두 핵 탑재 가능성
1월 당대회서 "작전 목적 따라 각이한 수단으로" 개발방향 제시 3월 '신형 전술유도탄' 이어 9월 '신형 장거리 순항미사일' 시험

순항미사일은 목표물까지 비행하는 동안 수십~수백m 수준의 저고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일반 방공레이더로는 탐지하기가 어렵다.

특히 우리 군의 미사일 방어체계에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공격에 대응하는 데 특화돼 있기 때문에 북한이 유사시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함께 쏠 경우 '허점'이 생길 수 있단 지적도 나오고 있다.

https://moneys.mt.co.kr/news/mwView.php?no=2021091819378029209
사랑하며 21-10-15 16:19
   
美 체니 前 부통령 “전술핵 재배치 필요”

한국전쟁 종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미양국의 전현직 고위관리들이 대거 집결한 자리에서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은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정책이 너무 유약하다고 맹공했습니다.

체니 부통령은 유엔 제재로는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없다면서 한반도 전술핵 재배치 등 중국이 영향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을 미국 주도로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680597
사랑하며 21-10-15 16:22
   
북핵 억지하려면…韓서는 “저위력 핵배치” 美서는 “핵선제공격 원칙 유지”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로 북한 억지해야”…“미국, 핵선제공격 금지하면 적들 용기 얻을 것”

CRS는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핵 선제공격을 배제하지 않는 이유는 전시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핵선제공격 가능성이 적의 재래식 전쟁 또는 화학·생물학 무기 사용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관점 때문”이라며 “만약 미국이 핵 선제공격을 금지하면, 북한·중국·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역내에서 미국의 동맹국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고, 그 결과 더욱 대담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어 우려 된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핵선제공격을 금지한다는 원칙을 정하면, 미국의 방위공약에 대한 동맹국들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심지어는 동맹국의 핵무장을 촉진할 가능성도 있다”고 CRS는 강조했다.

방송은 하원 군사위원회 전략소위원회 간사 마이크 터너 하원의원(공화·오하이오)의 말을 전했다. 터너 의원은 “미국이 핵선제공격을 금지한다고 해서 적들이 미국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주장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며 “이런 의미 없는 논의가 앞으로 뿌리를 내리거나 다수의 지지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1/04/20/2021042000210.html
사랑하며 21-10-15 16:26
   
한때 전술핵 950기… 91년 美·蘇 협정이후 한반도서 철수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주둔한 주한미군은 북한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지 내 전술핵 배치를 늘려왔다. 한때 그 수가 950기까지 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술핵은 20kt 이하의 위력을 가진 소규모 핵무기로, 대략 1기가 1945년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원자폭탄 정도의 파괴력을 가졌다.

하지만 1990년대 냉전이 해체되면서 주한미군의 전술핵 철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 지중해 몰타에서 이뤄진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 미·소 정상회담에서 ‘동서 협력시대’가 논의되면서 탈냉전이 화두가 됐기 때문이다. 부시 전 대통령은 1991년 소련과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을 타결했고, 그 연장선에서 주한미군에 배치된 전술핵 철수 구상을 구체화했다.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 잇따라 수교한 노태우 정부도 전술핵 철수에 반대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1991년 9월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된 단거리 전술핵무기 철수를 발표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같은 해 11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한 후 12월 핵무기 부재까지 선언했다. 당시 핵무기가 없던 북한은 주한미군 전술핵이 철수하면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진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1992년 1월 남·북 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핵 개발을 꾸준히 해왔던 북한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일으켰다. 2002년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발견되면서 2차 북핵 위기도 발생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6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했으며, 60기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73001070312054001
사랑하며 21-10-15 16:28
   
전술핵 해상배치 재추진과 확장억제 보장 신뢰성 증대 강조
― 美國의 2018년 ‘핵태세 검토보고서’(NPR) 평가

최근 공개된 트럼프 정부의 ‘핵태세 검토보고서’(NPR: Nuclear Posture Review)는 미국이 단기적으로 저강도(low-yield) 핵무기(즉, 전술핵무기)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에 장착하여 운용하고, 장기적으로는 첨단 핵무기 장착 해상배치 순항미사일(SLCM)을 배치할 것임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전술핵무기의 해상배치는 동맹국들에게 확장억제 보장체제의 신뢰성을 증대할 수 있는 새로운 조치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실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이러한 핵태세 변화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다.

https://kims.or.kr/issubrief/kims-periscope/peri113/
사랑하며 21-10-15 17:04
   
전술핵폭탄 50개 구입에 최소 1조원… “차라리 독자 핵무장이 낫다”

미국 군축 및 핵확산 방지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미국이 보유한 전술핵 무기는 B61 폭탄 약 500개다. 미국은 이 가운데 400개를 개량해 신형 폭탄 ‘B61-12’을 양산하려고 준비 중이다. 일명 ‘스마트 핵폭탄’으로 불리는 B61-12는 레이더와 GPS를 장착해 터널 속 목표물도 타격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위력은 TNT 5만 톤에 달한다. B61-12는 우리나라에 배치 가능한 전술핵 가운데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국내 전문가들은 굳이 거액을 주고 전술핵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우리 공군이 갖고 있는 F-15 전투기로도 B61-12를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면서 “하지만 전술핵을 사오느니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정 연구위원은 “우리나라가 독자 핵무장을 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1조 5000억원으로 추정된다”며 “전술핵 유지비 등을 감안하면 독자 핵무장이 더 효율적”이라고 했다.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