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일본의 총리 아베 신조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런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곳이기에 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걸까요?
신사는 ‘신도(神道)’라고 하는 일본 전통 종교의 신들에게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신도는 나무, 바위, 강, 산 등 자연물에 대한 숭배가 종교로 발전했고, 자연물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중요한 인물이나 씨족의 시조도 신으로 섬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마을마다 서낭당이 있어 마을을 지켜 주는 신을 섬겼는데, 신도는 그런 토착 신앙과 비슷합니다.
신도에는 800만이 넘는다고 할 정도로 신이 많습니다.
이렇게 신이 많으니 일본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신의 나라’리고 부를 만도 합니다.
신도는 일본 사람들의 생활 관습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일본에는 신사가 8만 곳 이상이 존재하고, 대다수 일본 사람들의 신도를 믿습니다.
새해가 되면 신사를 찾아 복을 빌면서 시험 합격과 가업의 번창을 기원합니다.
이사를 했을 때, 아기가 태어났을 때, 시험을 앞두었을 때처럼 복을 빌어야 할 일이 있으면 신사를 찾아가 소원을 빕니다.
결혼식도 신사에서 올립니다.
지역 주민들이 신사에 모여 축제를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신도를 일왕 숭배의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일본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하늘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자손이 땅에 내려와 일본을 세웠고 그 후손이 일왕 자리를 대물림했다고 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역대 일왕은 태양신의 직계 후손이라는 관념이 만들어 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일본 사람들은 일왕을 ‘현인신(現人神)’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왕은 신성 불가침한 존재이고, 국민은 일왕에게 죽음으로써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일왕 숭배를 통해 평범한 일본 사람들은 ‘황국 신민(皇國臣民)’으로 길들여졌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메이지 유신 직후 벌어진 내전에서 사망한 정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후 대외 전쟁에서 숨진 군인들의 위패를 이곳에 안치했습니다.
전사자들의 희생정신을 기림으로써 국민의 애국심을 진작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사람들은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면서 그들의 희생 덕분에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들은 자신의 위패가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 참배자들의 기림을 받을 것으로 믿고 죽음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가미카제 특공대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맹세한 후 자폭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떠받듦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을 전쟁의 도구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은 국민이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나라,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현재 246만여 명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데, 그중 245만여 명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입니다.
청일 전쟁(1만 3,619명), 러일 전쟁(8만 8,429명), 만주 사변(1만 7,176명), 중일 전쟁(19만 1,250명), 태평양 전쟁(213만 3,915명) 등에서 전사한 군인들입니다.
일본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강대국이 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승리하면서 외교적 갈등을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나라입니다.
일본은 1894년 청일 전쟁으로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축출한다는 목표를 이뤘습니다.
덤으로 타이완을 식민지로 확보했고, 전쟁 배상금으로 3억 6,000만 엔을 받아냈습니다.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일본은 전쟁 배상금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산업화의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돈이 된다는 것을 경험한 일본 국민들은 정부의 팽창 정책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일본의 국력은 1904년 러일전쟁 승리로 한층 강해졌습니다.
한반도를 식민지화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인정받고, 남만주에서도 다른 열강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전쟁 배상금을 받아 내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국제적으로 열강 대열에 올랐습니다.
두 차례 전쟁은 외교적 갈등을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를 교두보로 삼아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것이 팽창 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화했습니다.
1931년에는 만주 사변을 일으킨 후 다음해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러시아는 남만주는 일본의 세력권,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 소련이 북만주에 대한 이권을 포기하는 바람에 힘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일본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만주를 집어삼켰던 것입니다.
만주에서는 군벌인 장쭤린과 그 아들인 장쉐량이 사실상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관동군은 1928년에 기차 폭발 사건을 일으켜 장쩌린을 암살했고, 1931년에는 장쉐량이 이끄는 군대를 공격해 만주를 점령했습니다.
만주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국가원수로 내세웠지만, 실권은 관동군 사령관이 잡고 있었습니다.
관동군은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명칭입니다.
만주국은 황제, 총리, 대신이 구색 맞추기용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던 괴뢰 국가였습니다.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침략했습니다.
베이징과 난징 등 중요한 도시들을 점령했지만 중국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혀 전쟁이 장기화되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가 마지막으로 치렀던 전쟁은 태평양 전쟁입니다.
미국이 중국 침략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고, 석유와 고무 등 원자재에 대한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면 미국 세력을 축출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장기전으로 가면 국력이 우세한 미국에 패할 수밖에 없겠지만, 속전속결로 가면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에서 일본과 정면 대결할 만큼 여유가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941년 동아시아를 서양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선전 포고도 없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런 뒤 필리핀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등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잇달아 승전 소식을 전하는 언론 보도를 보고, 축포를 쏘고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일본은 개항 초기만 해도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는 식민지를 확보해야 일본이 살 수 있는 논리로 팽창 정책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정책은 군국주의를 탄생시켰습니다,
군국주의는 군사력에 의한 대외 팽창을 국가 정책의 제1순위로 삼고, 정치·문화·교육 등 모든 생활 영역을 이에 전면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사상과 행동 양식입니다.
그래서 일본 국민의 머릿속에는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쳐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주입되었습니다.
일본 국민은 한때 전체 예산의 80%를 웃도는 국방비를 대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습니다.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잘 싸울 수 있도록 후방의 일본 국민은 죽어라 하고 일하면서 아끼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는 일본 사람들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인까지 괴롭혔습니다.
한반도에서 쌀을 헐값으로 착취해 갔던 것도 결국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반도에서 가져간 저가의 쌀을 노동자들에게 공급해 적은 임금만 주고도 군수 물자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쌀을 생산해도 쌀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자, 많은 사람들이 강제 징용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을 겪었습니다.
미국의 반격을 받으면서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일본에 불리하게 바뀌었습니다.
미군은 1945년 4월 오키나와를 점령했고, 이곳에서 발진한 폭격기들이 일본의 대도시를 공중 폭격했습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고 일왕이 항복 선언을 했습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 사령부는 군사 재판을 열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전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처단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78년 A급 전쟁 범죄자 14명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했습니다.
이들은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된 7명과 복역 중 사망한 7명 등 전쟁을 기획하고 지휘한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전쟁 범죄자는 도조 히데키입니다.
그는 관동군 헌병사령관, 관동군 참모장, 육군대신을 거쳤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총리대신을 지냈습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시 중에 육군대신과 육군참모총장을 겸임했습니다.
종전 직후에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8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전쟁 범죄자들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한 이유를 등록하면서 ‘공무 중 사망’으로 기재했습니다.
침략 전쟁을 기획하고 지휘한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했던 군사 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군국주의가 무너지고 전쟁을 할 수 없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1947년에 제정한 일본국 헌법은 ‘평화 헌법’이라고 부릅니다.
제9조에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포기하고 육해공군의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라고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흐르고 국제 정세가 변하면서 일본국 헌법에 명시된 ‘군대 보유 금지’와 ‘교전권 포기’ 원칙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일본은 현재 자위대라는 무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위대의 법적 지위는 군대가 아니라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한 전투 경찰대입니다.
하지만 자위대의 전투력은 웬만한 나라의 군대보다 훨씬 강합니다.
현재 일본 정부와 자민당 세력은 평화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군대 보유를 합법화해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교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군사 대국으로 부활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라면 이웃나라들이 일본의 재무장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침략 전쟁의 역사를 깊이 반성한다면 이웃나라들이 평화 헌법 개정에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일본의 정치인과 국민들 중에는 침략 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겪었던 일본 국민들 중에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사람들은 노인이 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쟁을 겪지 않았던 일본 사람들은 침략 전쟁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른바 ‘우익’ 세력은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을 범죄 행위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반성해야 할 일은 전쟁에 진 것이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조 히데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에 져서 처형당했지만, 국가를 위한 공무를 수행하다가 죽은 애국자이기 때문에 야스쿠니신사에 그 위패를 안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류슈칸’이라는 전쟁 역사관이 있습니다.
청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까지 일본이 해외에서 일으킨 전쟁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 국익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관점에서 각종 사료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고, 침략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성찰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 현직 총리로는 처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아베 신조는 2021년 “나라를 위해 산화한 영령에 대해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 야스쿠니 산사에 참배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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