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 인도 국경분쟁 - 1959년~1962년
이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중국과는 네팔과 부탄을 끼고 긴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거의 전역이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고산지대여서 정확한 국경이 확정되지 않아 사실상 독립하여 달라이라마의 통치하에 있던 티베트에 중국측의 실효지배는
미치지 못하여 양국의 국경분쟁은 1914년의 심라회담의 결렬 이후,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그 후,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에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대륙을 지배하면서 1950년에는 티베트 침공을 계기로 인도는
국경의 해석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중국 공산당은 청나라가 러시아 및 그 외 열강들에게 영토를 빼앗긴 경험에서 군사적
실력이 없던 시기에 국경선을 확정한 것은 무효라는 방침을 세웠다.
저우언라이(周恩来)가 네팔과 평화 5원칙을 체결하자, 인도는 중국에 대해 강한 경계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59년 9월에 인도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양군사이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1962년 10월부터 대규모의 충돌로 발전했다. 이 시기는
쿠바위기가 일어나 세계의 관심이 쏠린 가운데 중국 공산당이 계산한 행동이었다는 견해가 크다.
10월 20일에 시장(西藏), 신장(新疆)의 인민해방군 약 8만명이 카슈미르와 그 동부지역인 아크사이친 및 라다크, 잔스카르, 발티스탄,
부탄의 동쪽인 동북변경지구에서 사전에 준비한 대로 선제공격에 들어가 승리를 거두면서 국경을 인도쪽으로 전진시켜 나갔다.
인도의 보호국이던 시킴왕국에선 나툴라 고개를 낀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져 고개 서쪽은 중국영토가 되었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표면화된 중소대립의 영향으로 소련은 인도를 지원했다. 또 인도 - 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파키스탄을 중국이
지원함으로서 중소양국의 대립색채가 극명히 나타났다. 11월 21일에 인민해방군은 아크사이친에 진주하며 이곳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지배 지역으로 편입했다.
무력에서 밀린 인도는 해당지역을 내줄수 밖에 없었는데, 이 분쟁은 정전 후 인도가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이 분쟁의 영향으로 1965년 8월에 무장집단을 인도 지배지역으로 보내어 제 2차 인도 - 파키스탄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후 인도와 중국간의 직접적인 교전은 없었지만 중국의 파키스탄 지원은 인도에게 적대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2010년 9월에 인도는 핵탄두의 탑재가 가능한 중거리 탄도미사일<아그니2>를 파키스탄과 중국을 향하여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표명했다.
현재 개발중인 <아그니5>는 사거리가 6,000km에 달하기에 인도 본토에서 직접 중국을 향해 발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2013년 4월 15일에
중국군 약 50명은 인도 지배지역에 10km 정도 침입하여 야영지를 건설했다.
인도군도 중국군의 야영지 근처에 부대를 파견하여 긴장이 높아졌지만 5월 5일에 양국군이 철수를 약속하면서 사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현재도 인도는 중국을 상대로 국경지대 및 남중국해에서 중국견제에 나선 국가들과 함게 견제협력을 계속하여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