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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01 14:53
[영상] 1592년 임진왜란 - 총통, 조총을 만나다.
 글쓴이 : 나무와바람
조회 : 1,646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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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각수 21-08-01 15:52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에 '류성룡'이 '신립'장군에게 왜군의 조총을 어찌 상대할거냐 ?" 물은적있죠
신립은 "조총을 쏜다고 해서 다 맞는답니까?" 돼받아 친적 있습니다
신립은 조총을 모른게 아니라 '알았던 겁니다' 알게 모르게 조총을 구비한 사냥꾼들도 있었고
조총의 장, 단점을 다 간파했죠...

신립의 패배는 지형과 전략미스 그리고 병사들 훈련 수준이 저질이였던 겁니다...조총이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아니었던거죠..
당시 왜군은 훈련된 밀집대형과 긴창을 이용한 기마병을 견제하는
거리싸움 그리고 각개전투에서 유리한 '야리'를 이용하여
밀집대형을 모르는 '조선군'과 '문관 출신'의 장군들 바보같은 지휘통제,겁많은 농부출신 병사들이
각개로 흩어 지면서 '단병접전'도 못하면서 병사가 흩어지니 일본도에 각 개개인이 녹아 내렸던겁니다

'임진왜란'의 패배는 신무기 '조총' 때문이다" 라는 결론은 우리의 아픈 패배역사를 신병기
출현이고 이에 대처를 못했다'라는 것으로 수치심을, 단지 나태함으로 치환 시키려는 겁니다..
당시 조총의 위력도 무시 못했지만, 전쟁 승패의 결정적 도구는 아니었던거죠.

'조총'의 장 단점을 안것은 '병자호란'때이죠...청나라 기마병들이 조총의 위력을 알았지만
바람의 세기와 기후...그리고 병사들의 훈련강도 그리고 지휘부의 능력을 간파하고
조선군의 조총 배틀라인을 정면으로 들이닥치니 조선군이 겁먹고 조선장군들은 나 살려라
도망친거죠...

전쟁의 승패는 무기 뿐만 아니라 이기려는 확신과 장수의 능력 고도의 훈련 되야 하는겁니다
거기다가 국가 총력전으로 하나가 되야 하구요.
     
밀덕달봉 21-08-01 17:26
   
신립이 조총이나 승자총통류의 개인화기 잘몰랐으니 그런 삽질을 한겁니다.
조총 승자총통 사용을 보면 영화에서 보듯이 일렬로 서거나 방진을 이루고 서서 동시에 쏴서 탄막을 형성 합니다.
현대판 클레모아라고 보면 됩니다.
신립이 니탕게난에서 크게 공을 세운것도 따지고 보면 신립이 출정하기 전에 700명이 니탕게 2만 병사를 승자총통에 의지해서 여러번 지켜냅니다.
여기서 여진족 스스로 안에서 분란이 일어났고, 개판오분전 상황에 와서 신립이 기병으로 큰공을 세운거죠.
따지고 보면 애초 저 700명이 신립보다 전술적 전략적 능력이 한수 위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총통류 무기로 다수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지를 알앗고, 이순신도 전방에서 근무하면서 이런 전술을 경험해봣기 때문에 이를 판옥선에 적용해서 임진왜란 크게 성공한 겁니다.
신립의 무능함은 비온날 질척이는 허허벌판에 조총부대에 기병으로 돌격시킨게 큰 잘못입니다.
조총, 장창이 애초 나오고 많이 사용된것이 기마부대 상대로 용병애들이 재미를 봐서 크게 많이 쓰면서 기사계급이 몰락하면서 기병의 시대서 보병의 시대 포병의 시대로 넘어 갑니다.
근데 이를 신립은 전혀 이해를 몰랐기 때문에 1400년대부터 조선은 이점을 알아 여진족에게 이를 이용해서 영토도 늘리고 국토도 지켜냈는데, 신립은 이를 간과하고 삽질 한겁니다.
신립이 데려간 병력은 지금으로 따지면 707이나 udt급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전서 종종 활로 쏴서 적군을 쏴서 죽였는데,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컨디션이 좋아서 기록을 세우고 일기 쓰날 기록이 신립이 데려간 병력의 실력에서 뒤에서 2,3등 할정도의 성적 밖에 안됩니다.
얼마나 활을 잘쏘는 엘리트들을 데려 가서 임진왜란 초반에 신립이 삽질했는지 알 수 잇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부산에서도 몇백명 정도 저 급의 군인들을 임진왜란 발발 직전 보내 놧는데, 저 인원이 일본의 기록과 일본군 따라간 포루투칼 선교사들 기록에 보면 굉장히 잘 싸웠고, 왜군 보병이 상당히 밀렸단걸 알 수 있고, 화를 내면서 성벽에서 뛰어 내려 창술로 여러명의 왜군을 꽤어 죽였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정예중 정예였습니다.
부산이 무너진것도 측면으로 걸어 들어올정도로 성벽이 다 허물어진 상태였고, 아예 준비를 안한게 큰거죠.
그래서 성이 함락 당하고 나서도 저 정예들이 울부 짖으면서 끝까지 싸웠고, 왜군이 상당히 놀랐다고 기록되어있죠.
도나201 21-08-02 01:58
   
우선은 조총에 대해서 성능파악이 잘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고니시가 .. 조총을 보내서 경고하고 부산항 및 동래항을 개항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으니까요.
또 고시시 자체가 화포에 대한 위력도 잘알고 있던 장수였습니다.

우선은 상륙전에 대규모 병력이 .. 들어올줄은 몰랐죠.  많아야 15000천명정도로 추산했던게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가끔 일본이 쳐들오네 마네로 시간을 허비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중요맹점은 일본이 전군을 들여서 10만이상의 병력이 쳐들어올것인가.
아니면 왜구침략처럼 소수병력으로 수천의 병사로 올것인가의 싸움이 더 정확하다고 합니다.
거기에 북방의 만주족의 결합으로 후금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북방도 신경을 써야 했기에 병력을 한없이 차출할수 없었던 것도 있습니다. 
상당히 복합적인 주제로 서로간에 공방이 펼쳐졌죠.

결국 대규모병사를 이끌고 오는 주장을 한곳이  대부분 지방고향에 내려가서 의병을 자체적으로 키우게 됩니다.
실제로 원균이 욕을 많이 먹기는 해도 바로 원씨집안에서는 이미 의병을 키우고 있었고 원균의 동생과 사촌동생이 의병장으로 굉장히 활약을 하기도 해서 원균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래성 부산성에 정예병력보다는 감시병력으로 소수만 있었고,

시간끌기를 주목적으로 하고 있었죠.


우선 조총의 보다는 활의 연사능력이 3배좋앗습니다.  이를 너무 맹신했죠.
둘째로는 활이 사거리가 조총살상거리다보다 2배는 좋았습니다.
거기에 격노에 의한 연사속도....  애기살의 존재등..
조총에 대한 전반적인 성능에 밀리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신립이 이끄는 결사대는 대부분 기병이였습니다.
왜 기병을 육성했냐면 바로 왜구의 치고빠지는 히트앤드런으로 인해서
그전법을 구사하려는 것을 기병으로 바로 동래성으로 집결해서 방어하는 ....
또 어디로 진입할지 몰라서 원균과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보내면서
원균은 왜구규모를 생각해서 ..... 빠른 정찰임무로 한정짓게 됩니다.

즉,  왜구적인 규모로 생각해서 많아야 15000여명으로 적규모를 상정하고서 대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산성앞에  수십만의 대군이 결집하게 되면서
부산성 , 동래성은 순식간에 떨어지게 됩니다.

당시 신립은 바로 듣고서 달려가게 되지만, 규모와 동래성의 함락에 1차 작전실행에 혼선을 가져오게 됩니다.
경주성으로 잡을지 아니면 울산성을 잡을 하다가.. 결국 한양 진격이라는 노선에서
거점방어준비도 제대로 되지않았던  충주성을 거점으로 잡으면서
이것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기병으로서 .. 성방어라는 입장은 .. 애매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총의 특성.......보이지는 총알에 사람이 픽픽쓰러져나가니....
그 공포감을 제어할 길이없다라는 것을 후에 알게 됩니다.

실제로 조총은 위력적으로 볼때나 실제로 가져온 수량으로 비춰볼때 조총부대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가토휘하의 기병대의 활약이 너무도 뛰어나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공성전을 잘 하는 실전병력들이라서

당시 성곽의 방어거점을 삼기에는 우리의 성구조는 너무나도 쉬웠습니다.

조총때문에.....진게 아니라. 실제적인 병력의 군사적자질자체가 실전병력과 너무나도 차이가 낫고,
기병대의 운영과 그에 따른 방어적개념이 너무나도 미흡했다라는게 신립패전의 이유였고,

특히나 조총의 보이지 않는 공포감에 대부분 병사들의 공포감을 제어할 길이 없었고
실제로 탄금대로 가기전에 이미 탈영한 병사들이 많았던 것이 주요원인으로 꼽혔습니다.

거기에 아직까지 미스터리가 탄금대 전투 이야기는 ....
선조의 몽진계획이 이미 잡혀 있어서 ..
충주성에서 전과도 그렇고. ..  조령을 이미 장악한 상황에서
내려왔다라는 것은...........

중앙지시가 있지 않았었나  의문시 되는 상황입니다.

몽진을 위해서 한강이남에서 방어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나 하는
그래서 조령에서 급하게 몽진길에 방어작전을 하기 위해서 내려오지 않았나.

신립장군의 행로를 보면 북방에서 사고쳐서 간신히 인맥으로 살아남은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준비하던 장수였습니다.    즉, 선조로서는 최대병력을 가진 장수를 최대한 자신의 말에 복종할수 있는 장수를 배정한것입니다.

결국 신립장군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위에서 내려온 장계에 이리휘둘리고 저리휘둘린게 아닌가 보여집니다.
조령까지 올라가서 내려왔다라는 것이 ..

장수로서는 정말이지 .... 자신의 의지가 있던 장수라면 절대로 조령에서 내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탄금대 전투는  몽진준비를 하던 선조를 방어하려는 입장에서 바로 내려와서 용인에서 거점방어를 하려다가
뒤를 잡힌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듭니다.

이미 조총의 보이지않은 총알에 쓰려져가는 병사들의 두려움을 잘알고,
왜구의 병력이 수십만이고, 
거기에 기병의 능력도 높아서 ....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었던 장수가.
조령을 포기한다라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후에 탄금대 전투 이후에  몽진하고서 바로 권율이 급히 병사를 모아서 용인전투의 처참함을 당했습니다.
10만병력이 단 7천의 기병에 처참히 살육당했죠.

아마도 용인전투의 10만병력과 합류해서 선봉에 나서기로 했던것 아닌가 보여집니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서 잡힌것 아닌가 보여집니다.

탄금대에서 대기해서 죽었다.. 이건 좀 말이 안되는게
보급 및 모든 거점을 충주성에 잡아 놓은 신립이.......  탄금대로 집결했다라는 것은
충주성거점이 뺏긴이후에  보급노선과 더불어서 탈영병의 증가에..  더골머리를 앓고  특히 중앙정부의 장계가 쏟아져내려왔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확실히 신립은 왜군의 규모, 조총의 보이지 않는 총알의 공포감 등을 계산에 넣지 못햇고,
중앙정부에 절대적인 명령이행을 우선시 한 장수가 아니였나 싶습니다.
이미 신립이라는 인물은 양가의 처녀를 첩을 삼아서 좌천되고
 병졸을 임의로 사망하게해서 좌천된 상황의 극히 성격적으로 능력적으로 문제가 있던 인물이였습니다.
인맥으로 인해서 이문제를 잠시 좌천되었어도
바로 복귀해서 선조의 명령을 잘듣는 인물로 배정된 인물로 보여집니다.

즉, 장수로서 가장 옹졸하고 치졸한 인물을 선조가 기병대등.... 가장 조선에서 최고의 병력을 지휘하게 맡길만한 인물을 말잘듣는 인물을 선정했다라는게 맞다고 보여집니다.
한마디로 신립의 명장설은 개뿔  임진왜란의 최대역적중 하나라고 보면됩니다.

사실 원균보다 더욕을 처먹어야 맞는 인물이 바로 이 신립이라는 작자입니다.

모든 병력을 위에서 내려오는 장계맞춰서 전쟁을 수행한 아주 어리석고 자리보존에 미쳐환장한 늙은이로 보면됩니다.

조총이 위력적이라서 .. 밀렸다가 아닌.
후에 조총의 이러한 습성과 성능 그리고 운영전술을 보고 연구해서 승승장구하던 인물이 바로
의병장 곽재우였습니다.

바로 화살의 사거리가 2배라는 것을 알고 기병으로 순식간에 접근  쏜다음에...
퇴각    그리고 조총의 사거리를 벗어나면 다시 화살로 쏘고 ..

그렇게 따라오던 왜군을 결국 미리 배치한 병사에게 몰상하는 전법으로
조총의 성능을 잘파악하고 활의 능력을 잘이용한 장수였습니다.

문제는 왜군이 공성군에 천재적으로 파쇄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고
공성전에 특화된 전력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왜성을 축조하면서 엄청난 축성기술을 하면서 울산성을 위시로 축성술에 엄청난 방어를 해내게 됩니다.

약 200년간의 공성전을 치루면서 발전해온 왜군을 감당하기에는 조선의 성은 너무나 왜소했습니다.

그리고 왜군의 조총전술운영을 보면 조총병사들이 막 양민을 쏴서 죽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총병사들의 기병을 상대로 조총전술운영이 가장 핵심이였고 가득이나 부족한 화약 총알등 보급의 문제때문에..  조총은 상급장수의 명령없이는 운영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반병사가 조총을 들고서 마구 쏴대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전선을 구축했을시..... 집단적 전술운영에.....  진주성에서 공성전 지원사격으로 운영되는등.
실제로 일반병사가 조총을 지금의 소총처럼 마구 쏴재끼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칼로 난도질 당하고 사무라이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결국 당시 왜군의 실전으로 다져진 병사들에게 처참히 당한 것입니다.
조총은 초기 보이지 않는 총알에 쓰러지는 병사들에 대한 공포심에 . 대항의지가 없게 만드는 물건이였습니다.
거기에 갑옷의 귀면갑 과 각 병사들의 귀면갑에 귀신들이 난동부리는 것이라고 해서 엄청난 공포감을 조성했고,

당시 보지 못했던 빨간 귀면마스크로 인해서 거기에 귀신처럼 분장한 병사들로  야간에 기습을 주로 사용해서  굉장한 두려움을 초기에 가졌다고 합니다.

후에 의병장들이 나오면서 확실한 정보를 알게 되면서
그러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여기저기서 의병활동을 이어가게 됩니다.

엄청난 칼싸움.
공성전에 달인.
예상보다 10배이상의 병력.
빨간귀신가면으로 인한 공포감조성 및 기타 귀신관련 분장의 병사의 심리적 공포감.
조총의 보이지 않는 총알로 쓰려져가는 병사에 대한 공포감.

한마디로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투방식으로 인해서
마치 폴란드의 기병대가 독일의 전차에 돌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상황이 연출된것입니다.
정확히는 엄청난 심리전과  빠른 기병대의 움직임에.....
속수무책을 당한것이 임진왜란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이미 조총에 관한 내용을 류성룡에게 전해들었고 실제로 보았다고 하며
류성룡 은.....이에 대해서 상당히 우려하는 목소리도 전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은 조총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에 따른 왜군의 전술방법과 진주성의 전투에서 왜군의 형태와 공격방법을 정확히 전달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위에서 준비한 거북선과 화포의 운영에 대해서 철저하게 대비하는 모습을  1년간 준비하게 됩니다.
     
밀덕달봉 21-08-02 03:44
   
1. 조선 중앙 정부서 부산으로 보낸 화약량을 유추해 봤을 때 대규모 침공이 있을거라는건 알았습니다.
소규모라고 유추했음 부산에 그렇게 화약을 몰아주진 않았을 겁니다.
울산왜성 두번 전투로 조선화약 1년치 생산량을 씁니다. 그당시 화약 비쌌고, 생산량도 적었는데, 부산에 그렇게 화약을 쟁겨둔건 애초 전쟁날거 다 예상했고, 규모도 예상했으니 부산에 그정도 화약이 있었던거고, 김성일이 침략 없다고 하고 10만 양병설이 류성룡이 반대한 동네다보니 전쟁 준비가 엉망이었을 뿡입니다.
성함락 과정도 왜구 키가 150이 안되는데, 선교사 기록에 의하면 깃발창대 들고 허맃춤도 안되는 성벽을 그냥 걸어 넘었다고 나옵니다.
2. 소승자총통등 화약무기및 조총보다 더위력적이고 , 더 큰 핸드캐논류의 총통을 대규모로 1400년대부터 쓴 조선군 입니다.
조총에 대한 안보이고 소음이 나서 쫄아서 못싸웠다? 말이 안되는 억측입니다.
그냥 창고서 꺼내지도 못하고 박홍 원균 판옥선 둘이 싸우지도 않고 200척 가까이 불태우고 육지로 튑니다.
첨병? 그런건 개소리고, 인맥으로 꽃았는데, 군인으로 전혀 재능이 없는 인간들이 하필 부산에 둘이나 있었을 뿐입니다.
원균이 산건? 류성룡이나 선조라인 이었고, 선조는 항상 정통성 컴플레인과 이성계가 위화도서 회군해서 왕 되었듯이 이순신에게 권력이 필요이상으로 쏠리는게 싫어서 원균을 통해 견재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선조는 명나라 장수들을 이순신보다 더 신뢰했음.
     
밀덕달봉 21-08-02 03:56
   
3. 왜군 조총병은 전체병력의 7프로 수준이었고, 조총보단 장창에 대한 피해가 컸으며, 근접전에선 환도등 산악지대서 산성을 들어가 싸우는 조선군 전술상 나무가지나 수풀에 걸리는 장검을 지양하고 30센티내외 단검류를 애용했는데, 카타나의 길이에 손목을 그렇게 절단 당하면서 고전 했고, 대부분 장창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활의 연사속도를 말씀하시는데, 화살은 칼로 보고 쳐내기도 하고 일본애들이 대나무를 다발로 묶어 방벽삼아 화살을 피했고, 깃발을 앞뒤열 여러겹 들어서 화살이 명주천이나 마로된 깃발에 다 걸려 이렇다할 피해를 주지 못합니다.
승자총통의 경우 지금으로 따지면 샷건이며, 12미리에서 14미리 구슬을 적게는 7,8개에서 15개 까지 넣고100미터에서 150안으로 들어오면 때리는데, 이게 이순신만해도 거북선이나 판옥선에서 쏴서 다 쓸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의병이나 관군이 이승자총통을 가지고 조총든 왜군 많이 때려잡고 승기 잡았습니다.
승자총통에서 조총으로 간건 소모되는 화약량이 조총이 적어서이고, 미국 남북전쟁 전까진 조총의 정확도가 그닥이었습니다.
나중에 강선이 파이고 총알이 구슬형태에서 탄두로 넘어가면서 정확도가 올랐습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우리가 가진 조총으로 이렇다하게 정확한 사격이 안이루어 집니다.
조총의 한계는 명확했고, 유성룡이 징비록등 기록을 남기면서 현장에 없던 글쟁이들 뇌피셜이나 변명등이 들어가면서 왜곡되거나 부풀려진 면이 다소 있습니다.
그당시 현장 지휘관들 수기나 일기만 봐도 차이점이 많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