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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06 22:23
[기타] 10만 양병설이아니라 10만 상비군 양병설
 글쓴이 : srra
조회 : 3,592  

10만 양병설자체가 이이의후손들이 말을해서 실록에 들어갓네 뭐네 말이많은데

그 당시 조선은 16만명의 군인들을 예비군 처럼돌리고잇엇슴다 문제는 이게집결지가 다정해져잇는데

수군은 도망가고 부산은 너무 빨리털려서;; 이게 만약 몇일만 끌엇어도 조선의 병력이 일본군을 충분히 

막을수잇엇는데 이 작전의 단점이 상대가 전격전식으로 밀고쳐들어오는거에약한데 일본이 작정하고

한양 ㄱㄱ를 시전햇으니 약점을 그대로잡힌것 집결지에 모엿지만 장군이도망쳐서 해산된 병력만해도

수만이라고하니;; 당시 율곡이이는 10만 양병설보단 10만 상비군 양병설을 햇다고하는게 명칭상 맞을듯;;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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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12-11-07 01:38
   
16세기에 조선의 인구가 많아야 1천만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상비군 10만명을 유지시키는 게 가능했을까요? 세금을 배로 올리지 않는 이상은 절대 불가능이었을 겁니다. 이이가 국방력을 강화하자는 말을 했다고 해도 십만양병설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국방력은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굿잡스 12-11-07 19:48
   
중세 고려가 조선보다 인구 딸려도 40여만에 윤관의 북벌 정벌에서 17만 , 혼란상의 고려 말기의 홍건적의 침입과 격퇴에 20만명을 동원했음.
          
황제 12-11-08 01:35
   
고려나 조선이나 몇 십만명을 동원했다고 해도 그게 상비군이 아니란 겁니다. 농사짓다가 전쟁이 터지면 군인으로 참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상비군이란 농사는 안 짓고 군역만 하는 사람입니다. 고려시대이든 조선시대이든 상비군 10만명을 유지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Centurion 12-11-08 03:53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죠.

일본 전국시대에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모리 모토나리
같은 굵직굵직한 영주들이 거느린 각각 1~2만명 거느린거..
농번기를 피해서 동원하는 예비군입니다.

농사지을 때는 전쟁을 안하죠.

그걸 오다 노부나가가 돈빨로 농사안짓는 직업군인제로 바꾼겁니다.
본래 무사들과 그밑에 수하들은 땅에 근거하여 수확을 거둬들이는게 주수입이었죠.

임진왜란 때도 일본군들은 각지 영주들이 대대적으로 모병을 하고,
땅(영지)를 취하기 위해 상당한 출혈을 해서 병력을 편성해 올려보낸 겁니다.

명나라 같은 경우에도 3백5십만명을 헤아리는 대군이 있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둔전병이죠.

명나라의 군사제도인 위소제는
강제 징집병 5,600개의 군호가 할당된 위를 설치합니다.
즉, 징집하면 끌려나오는 군인 가정이란 소리죠.

어쨌든, 대략 명나라의 병력 중 80%는 군량생산을 위한 농사를 짓고,
나머지 20%만이 국경수비에 나섰다고 합니다.
대략 300만명 중 60만명만이 제대로 활동하는 군사라는 소리죠.

일종의 교대근무죠.

이는 조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조선도 앞서 말한 명나라처럼 군적에 오른 병력 중에
자기 차례가 되어 실질적으로 근무하는 번상병이라고 해서 수도에 올라와 중앙군에 복무하고,
평시에는 자기 지역에서 비번인 상태로 생업에 종사하며 지방 관료의 지휘를 받는 상태거든요.
(명나라는 땅이 넓으니 자기 위치에서 군무에 종사하거나, 혹은 비번으로 농사짓거나..)

뭐, 사실.. 고려시대 같은 경우에야 대군 동원이 오히려 잘되었지만..
오히려 인구가 늘어난 조선시대에는 후기로 갈수록 군사제도가 유명무실화되서..
병적에 오른 지방군(속오군=예비군)들 동원,훈련도 제대로 안시킵니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도, 지방군이 없어, 중앙군을 동원하는 상태가 되죠.

그래도 일단, 전쟁이 터지고 장기화된상태에서는 이 대부분의 병력들이 상비군화 되는 겁니다.
                    
Centurion 12-11-08 04:30
   
일본은 먼저 작심하고 병력을 동원한 상태고..

일본 전국시대 때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할 무렵에도..
자기 밑에 붙은 영주나 세력들에게 병력을 최대한 동원하도록 압박해서
병력을 쥐어짜내어 그걸로 상대방을 규모로 압도해서 이긴거죠.

사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조선, 명, 일본 죄다 예비군으로 전쟁한 셈입니다.(?)

막 몇년씩 군대에서 녹봉받고,
농사 한번 안짓고 전쟁준비만 한 병력(상비군)은 얼마 안되요.
그런건 궁궐수비나 하는 갑사 같은 전문군인이나 지휘관급 무관인데..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애들도 죄다 한번 떼돈(영지)를 얻어보자고,
혹은 히데요시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출동한 지방 사무라이 + 그 졸개(농민)  or 용병 개념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농사와 무관하게 4계절 내내 동원가능한
직업군인(아시가루, 용병제도)를 만들기 이전까진 일본도 전국시대에서조차
대부분이 평상시엔 농사짓는 예비군이었고..
사무라이들은 이 농부들을 부하들로 삼아서 전쟁 떄 나와서 영지 넓히러 나온 두목 개념입니다.

뭐, 바다 건너 가는 원정군이다 보니,
일본 역시 이 상비군화된 원정군을 뒤에서 식량, 군수 보급을 대주는 애들은 따로 있긴 했죠..
Centurion 12-11-07 04:48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군적에 올라와 있는 병력수는 대략 23~27만명 수준이었습니다.
고려시대만 보더라도 고려 초기 요(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군 30만명이 종종 등장하지요.

이러한 최대동원 병력수는 조선이나 고려나 이미 상당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임진왜란도 본래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각도, 각군, 각현의 수령들이 병력을 뭉쳐와서 이걸 중앙에서 내려온 지휘관이 인솔하는 것인데..
경상도의 경우엔 사실상 일본군의 빠른 진군속도에 병력을 집결시키지 못하거나,
원균이나 박홍 등의 예에서 보듯 병력을 해산시키고 도망가는 장수들도 있었으며,

이일의 예처럼 막상 집결된 병력을 모으러 가보니,
지방 관리들이 다 도망치거나, 이미 소집된 병력도 도망가버렸죠.

반면, 일본군의 초기 진격을 비켜간 전라도의 경우에는
전라도감찰사 이광 아래 4만 대군이 모였습니다.

참고로, 훗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밑에는 대략 2만명 가량의 병력이 있었구요.

당시 조선군의 병력 기록도 징비록 등에 남아있는데..
대략 17만명에 달합니다.

본래는 27만 가량 소집이 가능했으나,
명나라군 참전이래 얘네들한테 지급할 식량을 대느라,
대략 10만 가량을 돌려보냈다는 소리도 있지요.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군 주둔지 아래에선 세금(쌀) 못내면 참수를 당했기에,
그에 불만을 품고 의병항쟁이 드세게 일어났습니다.

사실 인구 천만이면 적은 인구가 아닙니다.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같은 나라의 인구가 고작 94~108만 가량입니다.
최대 동원병력이 대략 10만 정도로 보고 있죠.

사실상 인구 천만 중 남자가 절반인 500만,
그중 군역이 가능한 청장년층이 50%라 잡아도, 250만 병력이 나오죠.

그래서 조선의 경우 실제 군입대를 하는 정군과
그 사람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보인으로 군역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정군 한명을, 보인 2명이 뒷받침하는 구조였죠.

글고, 일본이 대략 조선인구의 3배가량 된다고 봤을 때..
일본의 경우에도 실질적으로 최대 60만 가량의 병력동원이 가능했습니다만,
조선에 건너온건 절반 이하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예 병력을 보내지 않았죠.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양군이 도합 30만명 가까이 싸웁니다.
     
굿잡스 12-11-07 19:53
   
잽의 고대사 인구수는 솔직히 믿을게 못됩니다.

현재 잽쪽 유네스코 기록 유산 전무만 봐도 아시겠지만 조선 정도의 엄정하고 정밀한

행정과 기록 유산을 남길 정도면 문치가 상당히 발달해야 하지만 잽은 제대로된 중앙 정부에

관료 문치주의도 에도 시대 도쿠카와 이에야스 이후에나 겨우 정착되기 시작할 정도이고 임진 시기에

는 지도자라는 장수가 병법서 한페이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들이 천지였던 나라

였어 기록물도 제대로 없을 뿐더러 신뢰하기도 힘듦.

오늘날 와서 잽 우익들이 미화로 에도 시대가 찬란하니 어쩌니 그냥 지들이 대국 어쩌고 할려는 소위 손쉬운 뻥튀기가 인구발 조장이죠.

도리어 조선이야 호패상에 올려진 인구치보다 누락된 인구수도 상당했던걸 알수 있는

기록들이 존재하고 조선 정도면 당시 세계사에서 법률, 행정, 과학, 교육 사화제도에서

선진국에 인구도 실질적으로 대국 수준의 나라였음.(옆에 하도 많은 바퀴들이 존재해서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게 보이는 것일 뿐. 왜보다 조선은 인구에서도 얼마든지 부양할
생산력을 가진 나라였고.)
Centurion 12-11-07 04:56
   
뭐, 사실 춘추전국시대 같은 경우를 보면..
생각보다 인구도 적은 춘추전국시대 각 군웅들이
남자란 남자는 다 긁어서 전쟁하던 시대라서..

조나라 포로 40만을 생매장한 일로 조나라에 남자가 씨가 말랐다는 그런 애기도 있더군요.
(중국 전체인구는 2~3천만으로 추정, 백기가 학살한 병력수만 165만명 추정)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45935&cpage=&mbsW=search&select=stt&opt=1&keyword=%B9%E9%B1%E2
Centurion 12-11-07 05:00
   
글고 북한 인구가 2400만 정도인데..
북한 정규군 숫자가 130만명, 노농적위대 등 예비군 병력이 700만명이죠.
국민의 1/3이 전투에 튀어나오는 체제입니다. 실제로 총력전이면 이 정도 긁어낼 수 있죠.

2차대전 독일이 인구 7천만에 군인 전사자만 9백만명 가량 되죠..
빅터고 12-11-07 09:17
   
조선은 군사 시스템은 정말 엉망이었죠. 임진왜란 당시 제승방략 체제로 지방의 병력을 모아서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가 그 병력들을 지휘하는 체계였는데 문제는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가 아무리 명장이라도 지방의 지리적인 특성을 모르고 평소 합동훈련등을 하지 않은 부대를 통솔하게 되니 군대가 제대로 돌아갈수가 없는거죠.
그 대표적인 예가 배수진으로 유명한 신립장군인데 사실 신립은 명장중에 명장이었죠. 문제는 북쪽의 평야 지대에서 기병전투를 주로 하던 장군이었던거죠. 원래 임진왜란 당시도 왜군이 소백산맥을 넘기전에 소백산맥을 끼고 높은 쪽에서 낮은쪽으로 올라오는 왜군을 막으면서 지리적인 이점을 살렸어야 했는데 신립은 평야에서의 전투에 능해서 자기가 잘하는쪽으로 전략을 바꾼겁니다. 그래서 왜군이 소백산맥을 쉽게 넘어오고 신립이 이끈 병력이 사실상 긁어모은 최후의 병력이었는데 탄금대에서 그게 허무하게 깨지니 그 다음부터는 일직전으로 돌파당한거구요.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어찌됏을런지.... 이런 고생을 겪고도 병자호란때 정신 못차라리고 상황 판단 못하다가 삼전도 굴욕까지 당하고... 정말 저 당시 사대부들은 멍청이 중에 멍청이였죠.
더 큰 문제는 저렇게 나라를 망친 자들이 그 책임을 안 지려고 북벌론을 들고 나온거죠. 분명 나라를 패망까지 몰고간 자들인데 명나라가 사라진 후에도 명나라의 복수를 해야한다는 북벌론을 내세운것은 정말 의리를 지켰다기보다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속셈이었구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정치인들의 수작은 저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모래곰 12-11-08 15:50
   
보통 세종 시절 조선인구는 600만 정도로 추정합니다.
조선 세종 시절에는 육군과 수군을 합쳐서 22만을 보유했다고 들었습니다.
육군이 16만, 수군 5만, 예비군 1만  농민군이 아니라 상비군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시절에도 이렇진 않았겠지만 세종 시절에는 이랬다고 하더군요.
태종 시절에는 30만이 넘은 것을 축소했다는데 아마 유지비가 많이 발생해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도 도성을 지키는 군사를 빼면 지방을 지키는 군사가 적어서 더 키워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임페라토르 12-11-08 17:51
   
10만 상비군은 달성할수도 없는 병력입니다.
한중일국가 모두 대규모 상비군을 동원할 체제가 아니였죠
유럽도 마찬가지구요.. 무기를 자기가 구비해 가야했고, 장교들은 현재 물가로 1억에 가까운 장교용 검과 장비를 구매하지 못해서 진급을 못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죠
그냥 국방력 강화가 와전된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