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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2-20 14:57
[잡담] 6.25전쟁사 용문산 전투
 글쓴이 : 별나라얼큰
조회 : 2,034  




전에는 청천강 전투를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용문산 전투을  올려봅니다.

나무위키에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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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ttle of Yongmunsan.

6.25 전쟁이 한창인 1951년, 국군 제6보병사단경기도 양평군 용문산가평군 화야산 일대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3개 사단(63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의 공세를 격퇴하고 패주 무리를 화천 저수지(현 파로호)까지 쫓아가 섬멸한 대승을 뜻한다.

2. 전투 이전 상황[편집]

1951년 5월(당시 UN군은 '썬더볼트 작전'을 개시하던 시기), 동부전선의 국군을 격멸하기 위해 대공세를 펼친 중공군은 중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으로의 증원을 막기 위한 강력한 조공을 가했다.

이렇게 중부전선에서 펼쳐진 중공군의 공세를 직면하게 된 부대는 장도영 준장이 지휘하던 육군 6사단으로 6.25 전쟁 개전 초기인 춘천-홍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육군을 저지해 유명세를 떨쳤으나, 중공군의 4월 공세 때 화천군 사내면[1]에서 벌어진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추격보다 빨리 방어진지를 버리고 무질서하게 도망친 덕에(...)[2] 패전은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빠른 재편성도 가능했다.[3]

그리고 이 굴욕은 널리널리 퍼져나가 당시 미 육군 장병들은 6사단 마크를 단 장병을 발견하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6사단은 용문산 일대에 배치돼 사창리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장도영 사단장은 제2연대 연대장과 정보주임, 작전주임을 모조리 교체하고 예하 3개 대대 역시 대대장을 모두 후송시키거나 군사재판에 회부시킨 뒤 5월 1일, 2연대의 군장검사를 실시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우리 청성부대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너희가 사창리 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 너희는 앞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이제 후퇴는 없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 말고 전초진지를 사수하라. 진지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최대한 지원하겠다" 며 전투의지를 자극하였고, 이에 연대 장병들은 사창리 전투를 설욕하겠다는 결의로 뭉쳤으며, 특히 2대대는 전방으로 향하며 머리띠나 철모에 決死(결사)를 쓸 정도로 강한 결의를 보였다. 출처: 국방부 6.25전쟁 제 60주년 사업단 블로그
 




3. 전투경과[편집]

전투 직전 6사단 책임구역 내 최대 자연장애물은 북한강이었으나, 강을 따라 주저항선을 설정할 경우 북한강 북쪽의 적 고지에 움직임이 노출되는만큼 사단은 군단 방침에 따라 용문산 일대의 고지에 주저항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사단장 장도영 장군은 북한강을 활용하여 중공군 공세를 둔화시키기 위해 제2보병연대에게 사단의 주 방어선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북한강변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럽산, 3대대는 (후방에 위치한) 353고지를 맡았다. 사실 밑의 요도에서도 보이듯 당시 군단 명령에 의거해 인접 사단도 1개 연대를 경계부대로 전진시켜놓았기에 이 자체는 특이한 일이라 하기 어려웠다. 경계부대 철수를 불허하고 최후에 고수방어를 실시토록 한 점만 빼면. 장도영 장군은 적 공세가 시작되고 최초 진지에서 버티기 어려울 경우 427고지와 나산의 축차진지로 철수한 뒤, 마지막으로는 제2연대 전 부대가 427고지의 최후진지에서 전면방어를 수행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연대 하나를 위험천만하게 돌출시켰다는 점 때문에 미 육군 고문관도 주저항선 이남으로의 완전 철수를 권고했으나 하여간 장도영 장군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18일 저녁. 중공군의 공세가 개시되자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럽산에서 밤새 도강하는 중공군을 강타하고 19일 주간 포병과 미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353고지의 3대대 뒤로 후퇴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그런데 여기서 중공군으로서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전방에서 밀려나던 2연대 1, 2대대가 주저항선 뒤로 빠지지 않고 3대대 뒤의 427고지와 나산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미합중국 공군과 인근의 7개 포병대대(한국군 2개, 미 육군 5개)가 19일 하루에만 포탄 3만발에 달하는 화력을 무지막지하게 퍼부어대자, "이렇게까지 방어가 탄탄한 걸 보면 한국군의 주저항선이 틀림없다!"고 오판한 중공 63군 지휘부는 군단 예비 189사단까지 가세시킨 3개 사단의 총 공세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어진 중공군의 포위공격에 제2보병연대는 연대 지휘소가 피습, 연대 지휘통제가 두절되고 1대대장이 수류탄 폭발로 의식불명에 빠진 사이 1대대가 나산에서 밀려나 남쪽의 마치고개에서 간신히 병력을 수습하는 등 위기상황에 직면했지만, 사전에 선정된 축차 진지[4]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싸는 전면방어(全面防禦)를 실시하고, 이를 포병과 공군이 맹렬하게 지원함으로서 중공군의 공격기세도 점차 둔화되기 시작했다.

20일 새벽 5시, 19일 야간부터 20일 새벽까지 네 차례나 이어진 중공군의 파상공세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용문산 북방 고지군의 주저항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6사단의 나머지 보병 연대인 제7, 제19 보병연대에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제2연대의 활약으로 힘을 비축해 생생한 2개 연대의 뒤치기가 가해지자 이를 사단급 적의 대대적인 포위 내지는 반격이라고 오판한 중공군 3개 사단은 그 즉시 이들에게 쫓겨 패주하기 시작했다.[5]

3.1. 그리고 이어진 추격, 파로호 전투[편집]

승세를 탄 6사단은 중공군 패주 무리를 맹렬히 추격했고, 북한강을 재도하할 여력도 없었던[6] 중공군들은 북한강 남안을 따라 양평에서 춘천, 화천까지 거의 70~80여 km를 쫓긴 끝에 화천 저수지(현 파로호)에 다다른 뒤 우왕좌왕하다 호숫가에서 사살되거나 익사해 그 넓은 호수를 자신들의 시신으로 뒤덮었다.

여담으로 용문산 전투의 마무리성 전투라 그 일부로 치기도 하나, 거기서 공세를 격퇴하고 그로부터 수십km 떨어진 화천 저수지까지 쫓아가 섬멸전을 했기에 화천발전소 전투, 파로호 전투로 별칭하기도 한다.

4. 결과[편집]

이 전투에서 6사단은 5월 19일부터 21일까지의 2연대 확인 전과만 사살 및 포로 4,959명[7],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사단 전체의 전과로는 육본 추정 적 병력 손실 판단 15,930명[8]이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과를 몇 만명까지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용문산 방어전에서 바로 이어지는 지암리 포위전과 화천발전소 전투까지 모두 포함하는 광의의 용문산 전투를 뜻하는 것일듯. 엄밀히 말해서 제63군 잔여병력을 섬멸한 지암리 포위전과 중공군 중부전선 공세 전체를 끝장낸 파로호 전투는 각각 전자는 6사단을 포함한 미 제9군단 전체, 그리고 후자는 미 8군 전체의 반격작전이므로 6사단만의 전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기간 전체를 포함할 경우, 제6사단 전투상보에 기록된 사단 전과는 5월 19일-30일간 사살 21,550명, 포로 2,617명에 달한다. 반면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실종 97명, 부상 494명으로 경미하다.

제2연대의 끈질긴 우주방어, 미 공군과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지원 등의 요소를 승리의 요소로 꼽을 수 있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단장 장도영 장군의 상식 밖의 전술이었다. 보통 경계부대는 관측, 화력 유도와 원거리 사격으로 적을 교란하고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주저항선으로 철수함으로써 적 공격을 지연, 조기전개를 강요하고 아군 주방어지대를 기만하는 역할을 수행한 뒤 예비대로 전환한다. 그러나 6사단 경계부대인 제2연대는 축차 후퇴하다가 마지막에는 강력한 고수방어를 실시함으로써 경계부대로써는 가급적 회피되는 근접전투를 사단 주저항선 전방에서 수행했고, 상식적인 판단에 따라 이처럼 완강한 방어를 벌이는 2연대 진지가 당연히 주저항선일 것으로 오인한 중공군 제63군은 여기에서 군단 예비대까지 조기 투입하면서 결정적 전투를 벌였다가 돌이킬 수 없는 대패를 맛보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비대를 갖지 못한 지휘관은 대사건의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어록과 함께 중공군의 군단 예비 189사단 조기 투입과 후속 예비대 부재가 오판이었음을 지적하며 예비대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하는 서술이 있었지만 사실 이는 어폐가 있는 게, 당연한 상식에 따라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다가 오판으로 조기투입한 것인 중공군 제63군과는 달리 제6사단에는 아예 예비대가 없었다. 상기했듯 방어작전시 경계부대, 일반전초는 가급적 손실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주저항선 밑으로 철수해 예비대 역할로 전환하는데, 이 전초부대인 2연대가 주저항선 앞에서 정신나간 것 같은 고수방어를 수행하는데 예비대가 있을리가. 사단에 예비가 없으니 당연히 주저항선이 위기에 처할 경우 예비대를 투입하는 역습계획도 없었다. 이 점은 1983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전투사 용문산 전투 편에서 야전교범까지 인용해가면서 특이사항으로 지적한 사안이다. 괜히 미 육군 고문관이 왜 2연대를 철수 안 시키냐고 채근한 게 아니다. 하지만 장도영 장군의 이런 상식 밖의 전술이 제2연대의 놀라운 분전, 중공군의 중대한 오판, 그리고 사단을 뒷받침하는 각종 제반 여건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전사에 남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의 불확실성에 대처할 예비대에 돌아갈 자원을 아측이 유리한 전초지대에 모조리 쏟아부음으로써 불확실성 자체를 감소시키고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제2연대의 시의적절한 축차진지 변경과 용맹한 고수방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2연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 군단급 부대에 맞서 북한강변의 최초진지부터 근접전투를 벌이면서도 제때 몸을 빼내 축차진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는 대대별로 사주방어를 실시하여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수 차례나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해냄으로써 중공 제63군의 주저항선 오인과 예비대 조기투입이라는 치명적인 패착을 유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거의 같은 시기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그대로 무너져 궤주한 한국군 제3군단과 비교해보면 2연대는 6사단은 물론 한국군 전체의 명예를 지켜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미 제9군단과 공군의 엄청난 화력지원 역시 승리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6사단 제27포병대대 외에도 인접사단 포병과 군단포병이 제2연대 방어구역 전면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멈추지 않는 포격지원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2연대라도 9:1 이상의 수적 열세를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중공군 예비대 제189사단은 19일 야간에서 20일 새벽 사이 초월공격을 실시하던 도중 군단포병의 맹렬한 포병사격에 휘말려 주저항선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주방어지대 전방에서 돈좌되었다. 미 공군의 근접지원은 야간에는 운용에 제한이 있었으나 주간에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중공군이 감히 공격이나 기동을 제대로 감행하지조차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 대승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게도 전해져 이를 기념해 화천 저수지를 파로호(破虜湖, 를 깨뜨린 곳)로 개명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정도니 이 전투의 의의를 짐작할 만하다. 다만 최근 중국 정부가 이를 개명하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자세한 건 밑 이야기거리에서 후술.

5. 이야기거리[편집]

  • 경계부대인 2연대가 후퇴하는 대신 사단 주저항선 앞쪽에서 사주방어를 실시하도록 한 결정을 장도영 장군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미리 의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사학자들의 의견이 다소 갈린다. 그러나 최전선보다 약간 후방인 427고지에 강화진지를 미리 구축해 둔 점, 부사단장 임부택 대령이 전투 직전 돌아다니면서 "대대 단위로 전면방어를 실시하라"고 교육한 점, 포위기동이 특기인 중공군을 상대로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후퇴 후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는 점, 그리고 미 육군 고문관의 2연대 완전철수 권고를 무시하고 04시까지 427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점 등을 미루어보면 처음부터 선 방어, 후 반격 계획을 짜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은 덕이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단급 총공세를 1개 연대로 방어(약 9배) 해내고, 직후 반격에 성공하여 1개 사단으로 중공 63군단을 와해시킨(약 3배) 장도영 장군은 전쟁사상 희대의 장군이 되었다.
  • 2연대의 방어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 주는 수많은 무용담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최고 격전지였던 353고지에서는 예하 소대장 둘이 전사 혹은 중상을 입고 방어선이 흔들리자 10중대장이 일부 병력과 엉겁결에 대대관측소로 후퇴하면서 10중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는데, 정훈병이 뛰쳐나와 카빈을 연사하면서 장병들을 독려하여 끝까지 버텨 낸 에피소드도 있다.
  • 당시 쫓겨가던 중공군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노무자에게 항복하거나 마을 노인에게까지 잡혀올 정도였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등에 의하면 전투 중에는 이것이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강인하고 끈질기게 싸우는 최정예 전투원이면서도, 일단 총을 놓고 나면 누구보다도 온순해지는 것이 중공군이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이런 에피소드도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 쪽에서도 희생자는 발생했다. 중공군에 비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 대표적인 전사자가 KBS 이정민 아나운서의 친할아버지.
  • 인근 주민들은 시체들로 인해[9] 식수원이 오염되자 외부에서 급수를 해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뒤로도 파로호의 물고기를 사람 시체를 뜯어먹고 자란 물고기라는 이유로 종전 후 10년 가까이 먹지 않았다고 한다.
  • 이 전투 후 국군 6사단은 직전의 참패로 부대 외부 사람들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놀리는 일은 없어졌고, 비웃음을 받아도 흑역사를 가지고 놀려먹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야 주방어선보다 위로 올라가더니 3개 사단을 떡실신시키고 추격해 갈아버린 영웅들인지라(...).
  • 중국 입장에선 치욕적인 대패의 역사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항미원조전쟁(6.25 전쟁) 대승 사례로 상감령 전투장진호 전투를 홍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역사책에도 싣지 않을 정도로 없었던 일로 치지만 그래도 인지는 하는지 패주 무리가 섬멸당한 걸 기념해 개명된 파로호 명칭을 최근 개명하라고 요구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일단 '자국 관광객들이 불쾌하게 생각한다' 는 핑계를 대고는 있지만 진짜 목적은 치욕적인 패전의 기록을 지우려고 하는 걸로 언론과 네티즌들이 추측중이다.패전 흔적 지우려…中, '파로호' 개명 요청 심지어 이를 틈타 문재인 정부가 강원도와 화천군에 파로호 이름을 대붕호(大鵬湖)로 바꾸라는 지시를 했다는 뉴스가 돌기도 했으나[10] 강원도와 화천군 관계자는 정부에게 그런 지시를 전혀 받은 적도, (그런 요구만으로) 지명을 바꿀 이유도 없다고 거듭 부인과 반대 의사를 천명했다.#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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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나라얼큰 19-12-2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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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좀발 19-12-20 15:51
   
중공이 파로호 개명을 요구하기전에
6.25전쟁에 김일성을 지원 남침 한 것부터
공개 사과해야 된는것 아닌감?.
태강즉절 19-12-20 16:57
   
양평 용문 태생이라는 언 노인분께 들었던 썰...
꼬마때...산에서 내려다보니..기차에 뭔가 올려져 허벌나게 오고가더만...몇달후 다시 총소리나고 뭔가 바쁘더니...
전쟁이 일어났다가 끝났다고..용문 깡촌 산속에 살던 사람들중엔.. 전쟁 난지도 모르고 그렇게 지났다고...ㅎ
초록냥이 19-12-22 21:30
   
많이들 모르고 있는 사실이 6.25전쟁 때 중공군 1개사단병력은 7천~8천명 이었고
한국군 1개사단 병력은 2만~2만5천명 사이였음.
즉 병력수로는 중공군1개군단이 한국군1개사단의 3배가 아니라 같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