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투에서 6사단은 5월 19일부터 21일까지의 2연대 확인 전과만
사살 및 포로 4,959명[7],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사단 전체의 전과로는 육본 추정 적 병력 손실 판단 15,930명
[8]이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과를 몇 만명까지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용문산 방어전에서 바로 이어지는 지암리 포위전과 화천발전소 전투까지 모두 포함하는 광의의 용문산 전투를 뜻하는 것일듯. 엄밀히 말해서 제63군 잔여병력을 섬멸한 지암리 포위전과 중공군 중부전선 공세 전체를 끝장낸 파로호 전투는 각각 전자는 6사단을 포함한 미 제9군단 전체, 그리고 후자는 미 8군 전체의 반격작전이므로 6사단만의 전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기간 전체를 포함할 경우, 제6사단 전투상보에 기록된 사단 전과는 5월 19일-30일간 사살 21,550명, 포로 2,617명에 달한다. 반면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실종 97명, 부상 494명으로 경미하다.
제2연대의 끈질긴 우주방어, 미 공군과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지원 등의 요소를 승리의 요소로 꼽을 수 있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단장 장도영 장군의 상식 밖의 전술이었다. 보통 경계부대는 관측, 화력 유도와 원거리 사격으로 적을 교란하고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주저항선으로 철수함으로써 적 공격을 지연, 조기전개를 강요하고 아군 주방어지대를 기만하는 역할을 수행한 뒤 예비대로 전환한다. 그러나 6사단 경계부대인 제2연대는 축차 후퇴하다가 마지막에는 강력한 고수방어를 실시함으로써 경계부대로써는 가급적 회피되는 근접전투를 사단 주저항선 전방에서 수행했고,
상식적인 판단에 따라 이처럼 완강한 방어를 벌이는 2연대 진지가 당연히 주저항선일 것으로 오인한 중공군 제63군은 여기에서 군단 예비대까지 조기 투입하면서 결정적 전투를 벌였다가 돌이킬 수 없는 대패를 맛보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비대를 갖지 못한 지휘관은 대사건의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어록과 함께 중공군의 군단 예비 189사단 조기 투입과 후속 예비대 부재가 오판이었음을 지적하며 예비대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하는 서술이 있었지만 사실 이는 어폐가 있는 게, 당연한 상식에 따라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다가 오판으로 조기투입한 것인 중공군 제63군과는 달리 제6사단에는 아예
예비대가 없었다. 상기했듯 방어작전시 경계부대, 일반전초는 가급적 손실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주저항선 밑으로 철수해 예비대 역할로 전환하는데, 이 전초부대인 2연대가 주저항선 앞에서
정신나간 것 같은 고수방어를 수행하는데 예비대가 있을리가. 사단에 예비가 없으니 당연히 주저항선이 위기에 처할 경우 예비대를 투입하는 역습계획도 없었다. 이 점은 1983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전투사 용문산 전투 편에서 야전교범까지 인용해가면서 특이사항으로 지적한 사안이다. 괜히 미 육군 고문관이 왜 2연대를 철수 안 시키냐고 채근한 게 아니다. 하지만 장도영 장군의 이런 상식 밖의 전술이 제2연대의 놀라운 분전, 중공군의 중대한 오판, 그리고 사단을 뒷받침하는 각종 제반 여건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전사에 남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의 불확실성에 대처할 예비대에 돌아갈 자원을 아측이 유리한 전초지대에 모조리 쏟아부음으로써 불확실성 자체를 감소시키고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제2연대의 시의적절한 축차진지 변경과 용맹한 고수방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2연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 군단급 부대에 맞서 북한강변의 최초진지부터 근접전투를 벌이면서도 제때 몸을 빼내 축차진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는 대대별로 사주방어를 실시하여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수 차례나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해냄으로써 중공 제63군의 주저항선 오인과 예비대 조기투입이라는 치명적인 패착을 유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거의 같은 시기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그대로 무너져 궤주한 한국군 제3군단과 비교해보면 2연대는 6사단은 물론 한국군 전체의 명예를 지켜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미 제9군단과 공군의 엄청난 화력지원 역시 승리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6사단 제27포병대대 외에도 인접사단 포병과 군단포병이 제2연대 방어구역 전면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멈추지 않는 포격지원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2연대라도 9:1 이상의 수적 열세를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중공군 예비대 제189사단은 19일 야간에서 20일 새벽 사이 초월공격을 실시하던 도중 군단포병의 맹렬한 포병사격에 휘말려 주저항선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주방어지대 전방에서 돈좌되었다. 미 공군의 근접지원은 야간에는 운용에 제한이 있었으나 주간에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중공군이 감히 공격이나 기동을 제대로 감행하지조차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 대승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게도 전해져 이를 기념해 화천 저수지를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곳)로 개명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정도니 이 전투의 의의를 짐작할 만하다. 다만 최근 중국 정부가 이를 개명하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자세한 건 밑 이야기거리에서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