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치타델 작전이후로 독일군이 공세에서 수세로 몰린게 아니고 그 이전에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6군 파울루스가 도시하나 점령하려고 아웅다웅하는 사이에 이미 전진이 멈췄고 결정적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 30만이 무너지면서 완전히 수세로 몰립니다.
그러다 만슈타인같은 명장들이 후퇴하는 와중에 몇몇 소련군을 박살을 내지만 히틀러의 아집이 다시 살아나면서 치타델 작전을 계획합니다.
치타델은 엄밀히말하면 해서는 안되는 작전을 히틀러라는 괴물이 아집으로 행한 무모한 작전이었죠. 서부전선도 똑같이 전쟁초기의 아르덴의 승리를 재현하려다 발지에서 개털립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소련군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은 입은건 분명하지만. 독일군이. 완전히 수세로 몰린 상황은 아니였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이후. 각방면으로 진격한 독일군이. 키예프 포위전. 타이푼 작전. 블라우 작전 결코 공ㅅㅔ적 입장을 잃지 않다가. 비록 스탈린 그라드에서. 포위당한채. 버티다. 9만명이. 항복한느걸로 결말을 맺어졌지만.
43년 봄
동부전선은 독일군이 오률를 방어하고 있었고 하르코프를 재탈환하는점등 지도상으론 수세지향적 입장은 아니였고.비교적
괴이하게 일그러진채로. 전선이 형성된채. 안정된 상태에서. 대치중 아직은 여력이 남은 독일군의 전력이. 돌출된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를 실행하게 해준것으로 봐도.수세는 아니였을 상황이며.
분명 이 전투의 패배이후. 공세가. 주도권이. 턴이. 소련군에게 넘어간 이후.독일군은. 독소전의 양상과 입장이. 급격한 수세로 바뀌고 궁지로 몰리게 된겁니다.
스탈린그라드 패전이후에도 전선은 유지하였지만. 쿠르스크 패전 이후는..어떻게 해볼 전력. 당시로선 귀중한 전력인. 기갑전력은.
회복될수 있는 수준도 아니였고.
오률.하르코프를 먼저 털러버린 소련군은. 진격에 진격.공세에 대공세에.
칼리린.브랸스크.스텝.스몰렌스크.빌뉴스.민스크등. 많은 지역을 소련군이 빠른속도. 넓은 영토를 점하면서. 독일군은 수세를 유지조차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결과를 남기게 된거죠.
복싱에 비유해보자면. 경기의 막판 12R까지. 간것이. 스탈린 그라드 라면.
쿠르크스 전투는. 경기를 끝맺는. K.0 펀치를 캉타당한 후. 다운
44년 여름까지. 700Km를 진격하여. 폴란드 수도 코앞에 멈춘 소련군은. 이미 경기의 승자 였죠.
쿠르스크 이전에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80만명을 날려먹었을때 독일은 답이 없는 상태였죠. 그것도 동맹국들 군대까지 박박 긁어모은 병력이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독일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작전 자체가 소련의 첩보에 유출되어 있었고 독일측은 소련의 기만작전에 속아 제대로된 첩보를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독일이 자랑하던 기갑부대도 저때쯤이면 이미 만신창이였죠.
어느정도인가 하면 쿠르스크전 직전의 독일군 사단을 보면 기계화 보병대대를 완편으로 보유한 대대가 드물 정도였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기갑사단이 말이 기갑사단이지 전차도 없고 보병수송 장갑차도 없고 측익을 엄호해줄 보병사단조차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만슈타인과 4기갑군의 호트가 다른 것도 아닌 보병사단의 부족을 크게 걱정했을까요.
가장 큰 문제는 히틀러가 판터 도입을 이유로 작전을 수개월이나 지연시킨 것이죠. 덕분에 소련측은 대전차 방어진지를 우주방어급으로 완성했고 스텝 전선군을 비롯한 수많은 부대를 증원 할 수 있었으니 쿠르스크전에서 소련에게 저정도 피해를 입힌 것도 선전한 것이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 패배 이후 독일의 공세 역량이 한번 남았다고 봤고 실제로 기동 방어를 통해 소련의 공격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것에 성공했었죠. 만슈타인의 계획으로는 이 한번의 공세역량으로 대규모 전투에서 이긴 후 전선을 고착시켜 소련과 휴젼을 맺는 것이 목표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정도 가능성도 있었고 말이죠. 다만 히틀러가 그 계획을 완전히 틀어버린 것의 결과가 쿠르스크전투와 그 이후의 상황이죠. (그런데 7월이 아닌 4월에 전투를 시작했어도 소련군 120만과 전차 5000대를 상대해야 하는데 이걸 순삭할 수 있다고 믿은 독일 지휘부도 정신이 좀...)
어쨋거나 안습의 덕국이네요.
제가 생각하는 쿠르스크 전투의 교훈: 정치인이 군사작전에 개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좋은 예시.
문제는 6군이 조기에 후퇴했다먼 a집단군이 6군꼴이 날 수 있었다는 것 아닐까요.
저는 6군 지휘관이 라이헤나우였다면 그래도 좀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호랭이님 말씀대로
A집단군의 퇴각과 6군의 탈출에서 균형을 잘 이뤘을 것 같아요. 파울루스와는 달리 능력도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히틀러가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요.
이미. 쿠르크스 전투시기에는. 소련의 공업생산력.전차생산량은. 독일을.뛰어넘는 단계라.
질적우세로. 수적열세를. 만회하기엔. 어려울수도 있었겠지만..흐음. 개인적인 상상이긴 하지만.
첫 실전 데뷔한. 판터D 형이. 기계적 신뢰성을 가져서. 정상적으로. 기동을 하거나.3~4호나 기타 전차중. 고장나서 주저앉았떤 수량만. 멀쩡하였더라면.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전투에서. 패하긴 하였지만. 그안의 일면을 살펴본다면. 독일 전차들의. 킬 레이스쇼..교전비율은. 무시못할 전과인건 분명하기 때문이죠)
말씀하신. 기갑척탄병이란. 정예병과가. 활약을 한다면. 소련군의 파크 프론트에 적절한 공세를 선보일수 있었겠지만.
학자들이 말한 장갑척탄병이란.일종의 단순한 기계화 보병 사단이 아닌.
왠만한 기갑사단 전력을 뺨치는.전력을 보유한.
제1 SS 장갑척탄병사단 아돌프.제2 SS장갑척탄병 다스 라이히. 제3 SS장갑척탄병 토텐코프
국방군의 엘리트 사단.일명 GD 위대한 독일 그레이스도이칠란트 같은. 최정예 전력 아니였을까요?
판쳐 카일의. 허리를 담당하는. 기갑척탄병 보다는. 차라리. 질적우세를 논할수 있게. 선봉의 티거1 이나. 돌격포 가대량으로 있었으며 승부에 영향을 줬을듯 하네요....주력이 3~4G등 기존 전차론. 무리.티거150여대 만으로는 너무 부족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