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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2-24 18:29
[밀리역사] 조총의 위력과 전술(영상)
 글쓴이 : 은단
조회 : 4,230  

일본 조총에 대해 약하다 강하다 여러 의견이 많은데
마침 국내에서 제작한 영상물이 있어 올려봅니다
사거리는 듣던데로 짧지만 위력은 생각 보다 높네요
일본에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위축되지 않는 우리 한국인의 자세에 세계인들이
놀란다고합니다 그런 당당함은 좋지만
임진왜란 당시 처럼 너무 한 수 아래로만 봐서 허를 찔리는 일이 없도록
항상 객과적이고 치밀하게 감시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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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13-12-24 19:13
   
임진왜란때 조총이 무섭기도 했지만 조총보다는 그냥 병력 자체가 너무 후달려서 밀린겁니다.

사실상 조선의 정예병이라고 할수 있는 부대는 거의 북방에 주둔하고 있었고 남쪽 지역은 사실상 전투부대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제승방략이란 바보같은 제도로 인해 사실상 조선의 병력은 북방의 상비군 말고는 없다고 봐야죠.

왜군이 평양까지 쉽게 갔지만 의주에 있는 선조를 못 잡은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보급과 의병의 후방교란뿐만 아니라 조선과 명의 요동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죠.

솔직히 왜군 조총부대보다 여진의 기마군이 더 무서운게 그 당시 현실이었습니다. 신립이 왜군에 패한건 제승방략의 폐해로 인해 훈련된 정예병이 아닌 어중떠중이들을 모아 싸우다 보니 그렇게 된거죠.

조총부대는 상대보다 수가 적고 기습을 당할시에는 거의 호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솔직히 조총부대보단 기마병들이 더 상대하기 까다롭죠.
여시 13-12-24 19:14
   
임진왜란 찌지리 지휘관

해전 원균
육전 신립

특히나 신립은 기마병이 기동이 어려운 습지를 전장으로 택해서  기마대의 장점자체를 잃어버리고
당시 유일하다시피하 주력부대를 몰살

이기지 못할거며 전력을 보존해서 후일을 노리거나 적 후방의 보급대를 기습하는식으로 해서
진격속도를 늦춰 수도권에 부대를 모으로 대응할 시간을 만들었어야하는데 개똥고집으로 돌격앞으로만 외치다 적도 못막고 아군을 전멸

군사지휘관의 역량을 개똥도 없으면서 부관들의 조언도 듣지않는 똥고집으로 부대전멸 국가멸망위기 자초
     
칼리 13-12-24 19:33
   
신립이 문경방어선을 선택하지 않은건 잘못이었으나 후일을 도모한답시고 부대를 물렸으면 아마 조정에서 난리났을듯.

어쨌든 그 당시 신립의 부대는 절대 왜군의 서울공략을 막기는 역부족이었죠. 병력도 엄청난 열세에다 당시 선조라는 개똘아이 군주의 시대라 암울한 상황이죠. 이순신 장군이 그나마 순직했으니 다행이지, 살아남았으면 아마 나중에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을테죠. 조선 임금 중에 찌질하기로는 선조와 인조가 쌍벽을 이루죠.
          
여시 13-12-24 19:41
   
선조와 인조는 군왕의 자질자체가 없는 군주
선조는 병크라도 눈감고 봐줄만한데 인조는 노답
적자생존 13-12-24 20:41
   
신립은 당시에 기마병을 믿고 벌판에서 싸우는 전투를 선택했습니다...그것이 큰 패인의 원인이 된 것이죠...
협곡이나 산속에서 개릴라 전술을 펼치면서 적을 타격하고 빠지는 전술을 했어야 하는데..조총의 위력을 미쳐 간파하지 못하고 조총의 조준력을 높일 수 있는 벌판에서 전투를 벌렸기 때문입니다....의병들이 열악한 무기로 승리를 할 수 있었던것은 바로 개릴라 전술을 이용했기 때문이죠...숲속에 숨어서 활을 쏘거나 해서 조총의 조준을 피했고... 대규모 군대를 정렬하기 위해서는 벌판이 좋으나..숲속에서 매복 해서 공격을 하면 조총의 조준을 피할수 있고 나무나 숲을 이용해서 조총의 위력을 분쇄 시킬수 있었죠...
     
원전이 13-12-25 05:03
   
당시 신립이 배수진을 쳐서..평지서 싸운것도 이유는 있더군요.. 당시 싸운병사들이 급히 모은 오합지졸들이라 여차하면 도망가니 배수진으로 도망가지 못하게하고 싸운거라더군요 고육치책인데 결국은 졌지만 신립정도의 장군이 그걸 몰랐을리가 없다고 봅니다..
테슬러미워 13-12-24 23:06
   
조총이 대단한건 일단 농민들에게 별다른 숙련없이도 백보안의 적을 주살할수 있다는거랑 총이란 무기자체가 발전가능성이 크다는데 있죠.  무기의 위력자체로만 본다면 숙련된 궁수와 숙련된 조총수가 있다면 숙련된 궁수를 쓰겠음돠.

 근데 지금 당장 조총과 각궁이 있는데 1년안에 오는 적을 막아야 한다면 조총수를 육성하지 궁수를 육성하진 않을듯 실제로 조총자체도 별달리 대단할것도 없는무기고 신립과 이일도 조총을 보고는 그냥 대단할거 없는 총포라는 평도 내리고 이순신장군이 워낙 공학적인 능력이 뛰어난 장군이긴 하지만(그시대에 염초생산 장탄방식의 체계화 같은거 보면 장군이 아니라 엔지니어같음) 그래도 한번 쓱 보고 조총보다 더 뛰어난 화기를 제작했다는 기록을 보면 무기자체는 그당시 원거리무기였던 각궁이나 조선의 총포보다 더 나을것도 없었던거같아요
Centurion 13-12-24 23:37
   
일본 입장에선 조총이 몹시 쓸만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사망 통계 1위가 칼도 창도 아닌..
돌맹이 투척과 화살에 의한 사망 비율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원거리 공격에 의한 사망 비율이 70%에 달했다고 하는데..

일본 활은 조악하기로 유명하죠.

http://youtu.be/zdZF8FdVPXs

그 엄청난 덩치에 비해 사거리는 오히려 짧지요.
그런 활로도 그렇게 효과를 봤는데,
조총이란 물건이 등장하니..
일본이 뒤집힐만도 했습니다.

뭐 알다시피 근력도 그닥 필요없고,
쏘고 장전하는 훈련만 받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게 조총이죠.

그래도 초기엔 이게 원채 비싼 물건이라
일본 다이묘들 사이에서도 고급유희 수준이었습니다만..
조총의 가치를 꿰뚫어본 오다노부나가가 이걸 대량운용하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4만명 중 조총병이 고작 3천 정도였습니다.

이 조총 하나가 병사 연봉 몇명 분이었다고 하죠.

그래도 임진왜란에선 그 비율이 좀 더 높아져,
최대 한 20% 정도까지 올라갔다는 썰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주력은 창병이었죠.

일본은 창 길이가 엄청 길었습니다.
심할 경우 한 6미터 이상.. 거의 전봇대 길이의 창을 들고 다닌셈이죠.

반면, 조선은 몽골기병을 연상시키는 기마궁술 중심의 부대였죠.
과거 볼 때 과목이 활쏘기 + 말타기라는 걸 보면.. 답이 나오지만...

말타고 활쏘는게 아주 중요하게 다뤄졌고..
즉, 기동성과 원거리타격이 조선군의 주요전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일본군은 조선군의 창이 짧다고 비웃기도 했습니다.
뭐 어쨌든 이리 저리 보면 조선군은 백병전보단 원거리 전술교리가 발달했습니다.

신립의 기병들 역시 그런 계통의 부대였습니다.
말위에서 화약무기를 사용해 여진기병을 격파했다는 말이 있죠.

http://www.ilbe.com/index.php?document_srl=982411742&mid=ilbe&cpage=5&page=592
(탄금대 전투에 대해 검색해보니 일베에 자세하게 다뤄진 글이 있네요. 이거 참고하시길..
 삽화를 보니까 '조선전쟁 생중계'라는 책을 인용한 글이네요.)

어쨌든, 뭐 요약하자면....
신립의 8천 병력 중 본래부터 데리고 있던 병력은 고작 수십명,
그나마 8천명은 탄금대 도착 전 근처에서 긁어모은 부대인데, 그 중 기병은 2천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 병력갖고..
적의 조총 사거리 밖에서 기마궁술을 사용해 야금야금 갉아먹는 방법을 주로썼는데..
적의 미끼부대에 혹해서 돌격하다, 좌우 조총부대의 매복에 걸려 기병이 궤멸되고 만것이죠.

어쨌든 애시당초 조선 기병이나 보병 자체도 백병전보단 원거리타격에 능한 형태였고,
사실 검술이나 창술 같은건 임진왜란 당시에도 상당히 허접하고 명맥도 못이어나간 형태였습니다.
굳이 멀리서 쏘아죽일 수 있는데, 가까이 붙어서 위험하게 싸울 필요 있냐는 발상인거지요.

반면 이런 원거리타격이 안되는 일본은 예전부터 창과 칼로 싸우는 백병전 계열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구요.

그래서, 임진왜란 도중에 명나라를 통해 창, 칼은 물론 백병전에 필요한 무술을 재습득하고,
나중에 무예도보통지 18반 무예, 24반 무예 이런걸로 발달하게 정립되게 되지요.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나오지만, 왜검 같은것도 습득했습니다.

어쨌든, 이 후에도 조선군의 원거리 타격전에 대한 미련은 계속 되었던지...
임진왜란 중에 조총 제조술을 습득하고, 그 후 병자호란 때까지 이 조총을 마구마구 찍어내게 되죠.

그래서 백병전 담당의 살수, 활을 쏘는 사수, 조총을 다루는 포수로 이뤄진 삼수병체계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 중 핵심은 조총을 다루는 포수인데... 이 포수를 보호하고, 사격 간 공백을 메꿔주는게 살수와 사수의 임무죠.

나중에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조총이 특기인 병사수가 70~80%에 육박하고,
조선 말기에 이르르면, 조총 수가 20만 정 이상이 될만큼 많아집니다.

그런데, 뭐 병자호란 때엔.. 이러한 경향 때문인지...
청나라 기병들 상대로 조총수들이 마구 총질하며 탄약소모를 해대다
탄약부족으로 본격적인 돌격에 멘붕해 무너지는 그런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죠.
돌개바람 13-12-25 09:22
   
신립이 문경세재를 포기한건 이미 왜군이 밀려 들어와서 문경세재에
진을 구축할 만한 시간이 없엇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실제기록에도
그런 기록이 존재하구요,,
     
Joker 13-12-25 17:06
   
문경세재가 아니고 문경새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