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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08 05:48
[밀리역사] 일본의로켓개발사
 글쓴이 : leojinpark
조회 : 4,666  

非군사에서 군사로, 전범국가의 놀라운 집념

일본의 우주개발사

 

 

 

일본의 우주 개발은 이토카와 히데오라는 천재의 고집으로 시작되었다. 
이토카와는 전범(戰犯)국가 일본이 받을 수밖에 없는 제한을 애국심과 지혜로 뚫고 나간 사람이었다.

이토카와가 우주로 가는 길을 열자 과학기술청이 나서서 강력한 액체로켓 개발에 도전함으로써 일본은

미국 유럽과 더불어 액체 수소로켓을 발사하는 최고의 우주 선진국이 되었다. 
지금 일본은 안보를 위해 우주 기술을 활용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일본의 우주 개발은 단 한 명의 천재로 인해 시작되었다.

바로 도쿄(東京)대학 교수였던 이토카와 히데오(系川英夫·1912~1999). 1935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항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의 3대 항공기 제작사였던 나카지마 비행기(現 후지중공업)에서 육군의 97식 전투기, ‘하야부사’로 불린 1식

전투기 등의 설계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즈음에는 독일로부터 건네받은 도면 몇 장을 들고 제트 전투기 ‘기카’ 제트엔진을 담당해

 Ne-20 엔진을 만들었다.

1941년 도쿄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임용된 이토카와는 1948년부터 정교수로 활동했다.

전후 일본이 항공 개발에 제한을 받자 그는 바이올린을 연구하며 유유자적했다. 1953년 약 6개월간 미국을 둘러보고 돌아와서는 도쿄대에 5명의 회원으로 로켓연구클럽을 만들고 일본 정부에 로켓 개발 허용을 요구했다.

1958~59년이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으로 지정된 점에 착안해, 연구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명분으로 로켓 개발을 추진한 것.

클럽 활동이 본격화되자 이토카와는 1954년 2월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이하 생기연)에 AVSA(Avionics and Supersonic Aerodynamics·항공전자 및 초음속 공기역학) 연구반을 만들었다. 이 연구반은 1975년까지 태평양을 20분에 주파하는 ‘하이퍼소닉 수송기’개발을 목표로 했다. 이토카와는 로켓 개발에 관심조차 없던 정부와 기업을 설득해 연구에 투자하도록 만들었다.

 

이토카와의 펜슬로켓

1954년 부족한 예산으로 다양한 소형 로켓을 개발해 연소시험을 했다.

그때 탄생한 것이 직경 1.8cm, 길이 23cm, 무게 200g의 펜슬로켓이다. 펜슬로켓에는 더블베이스 추진제, 즉 무연화약이

사용되었다.

무연화약은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오스를 주성분으로 하고 안정제와 경화제를 혼합 압축시켜 만든

것이었다. 펜슬로켓의 첫 수평발사는 1955년 3월 11일, 고쿠분지역 근처의 총기공장 권총사격장에서 있었다.

4월 12일에는 정부 관계자와 언론이 참가한 가운데 공개 시험발사를 실시했다.

1.5m의 발사대에서 수평으로 발사된 펜슬로켓은, 연구진이 세워놓은 종이스크린을 뚫고 나가 그 뒤에 있던 모래더미에 박혔다. 이후 연구진은 1개월 이상 시험을 계속하며 실제 비행을 위한 사전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리고 지바에 있는 생기연에서 50m 길이의 선박실험용 수조 안에서 300mm의 2단형 펜슬로켓 수평발사시험을 실시했다.

그 후의 시험은 아키타현의 미치카와(道川) 해안에서 했다. 미치카와는 1955년 8월부터 1962년 사이 일본 로켓 기술 발전의 근거지로 자리매김했다. 1955년 8월 6일 미치카와에서 처음으로 펜슬-300 로켓의 경사 발사가 있었다.

이 로켓은 고도 600m, 거리 700m를 16.8초간 비행했다. 펜슬로켓 다음은 베이비로켓이었다.

이 로켓도 직경 8cm, 길이 120cm, 무게 약 10kg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베이비로켓은 2단식의 무연화약 고체로켓으로 S형, T형, R형의 세 모델이 만들어졌다.

이 로켓들은 1955년 8월부터 12월 사이 발사되었는데, 고도는 6km 정도에 달했다.

베이비로켓-S형에는 스모크 파우더를 섞은 추진제를 넣어 연기가 나게 함으로써, 궤적을 추적해 비행 성능을 확인했다.

T형에는 일본 최초로 원격측정장비를 탑재했다. R형을 통해서는 탑재기기의 회수에 성공했다.

베이비로켓의 시험발사가 모두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2단 추진장치가 점화되지 못했고, 진공관에 문제가 발생했다.

로켓 앞쪽에 장착한 관측카메라가 제일 중요한 영상을 찍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실패를 극복해나가면서 로켓 기술의 걸음마를 착실히 배워나갔다.

 

 펜슬 아닌 진짜 로켓으로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다가오면서 로켓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 프로젝트에는 지구상 9개소에 관측지점을 세운다는 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일본이

맡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토카와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빨리 관측용 로켓을 완성시켜야 했다.

베이비로켓의 성공을 확인한 이토카와 팀은 실물 로켓인 ‘카파(Kappa)’개발에 돌입했다.

이토카와 팀은 순차적으로 로켓을 대형화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펜슬, 베이비로켓 이후에는 알파, 베타, 카파로켓을 개발하며 노하우를 쌓은 후, 오메가로켓으로 고도 100km를 정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제지구물리관측년까지 시간이 촉박해, 바로 카파로켓으로 고도 100km에 도달하기로 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고도 100km에 도달한 로켓을 만들었는데 이 로켓은 모두 액체추진제 로켓이었다.

일본은 액체추진제 기술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에 이토카와 팀은 고체엔진을 만들어 고도 100km에 도달해보기로 했다. 고체엔진으로는 추력이 부족하니 몇 개 엔진을 모아 부스터처럼 카파로켓에 붙여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소 화력이 너무 강력해 분사노즐이 녹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문제는 노즐의 재질을 강화하면 해결되지만, 그러면 중량이 늘어나 상승고도가 낮아진다. 이 때문에 이토카와 팀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강화플라스틱제 노즐을 채택하기로 했다.

로켓 본체도 재설계해 공기저항을 줄였다. 본체는 강도 높은 허니콤 구조의 알루미늄 재질을 선택했다.

컴퓨터 설계기술이 없어 수동식 계산기에 의존해 설계해야 했다. 연구자들은 수치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 고된 정신노동을 반복한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카파로켓은 고도 100km에 다다를 수 없었다.

이토카와 팀은 로켓을 기구에 매달아 하늘 높이 띄운 후 창공에서 점화하는 ‘라쿤’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창공에는 돌풍 등 통제할 수 없는 숱한 변수가 있어 포기했다.

결국 추진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더 이상 고도를 높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카파-4형까지에는 더블베이스 추진제를 사용했는데 이것 대신 새로운 복합추진제를 개발해 사용해보기로 했다. 복합추진제는 고분자화합물에 과염소산 암모니아를 혼합해 로켓연료실에 수납하는 것으로 무연화약보다 더 큰 추력을 얻을 수 있다.

복합추진제는 우주 개발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막 개발한 것이었기에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연구진은 폭발을 불러오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끈질기게 연구해 복합추진제를 사용하는 카파-6형을 만들었다. 카파-6형은 고도 60km 정도까지만 올라갔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승으로도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요구한 상층 대기 관측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기에 일본은 한숨을 돌렸다.

그때 고도 60km까지 로켓을 올린 나라는 미국과 소련 영국 그리고 일본뿐이었다.

카파-6형은 21기가 발사되었다. 1960년 7월, 카파-8형이 처음으로 고도 200km를 넘어 전리층의 F층에 도달했다. 본격적인 우주 관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자, 세계가 일본의 우주 개발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일본은 카파로켓 19기를 유고슬라비아와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게 되었다.

 

  

일본 우주 개발의 아버지 이토카와 교수

 

카파로켓, 대기권 넘어서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을 맞아 관측을 완료한 일본은 다음 목표를 인공위성 발사로 정했다.

이를 위해서는 도달고도와 발사장소라는 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500~1000km의 고도에 올라가는 로켓이 필요하다. 이렇게 센 로켓을 발사하려면 안전성이 보장된 발사장이 있어야 한다.

 

빈약한 발사장에서 도달고도를 높인 로켓을 시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사고가 입증해주었다.

1962년 5월 24일 카파로켓-8형 10호가 발사 직후 추락해 2단이 폭발하면서 파편이 흩어지고 화재가 발생했다.

부상자는 없었지만, 이 사고로 미치카와에서의 실험은 중지되고 말았다.

이토카와 팀은 펜슬로켓 발사 성공 후부터 태평양을 향해 로켓을 안전하게 발사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새로운 로켓의 메카로 가고시마(鹿兒島)현 오스미(大隅)반도의 우치노우라(內之浦)가 선정돼, 카파로켓-8형 10호가 사고를 내기 전인 2월 2일 기공식을 했다.

미치카와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발사장으로 선정된 우치노우라는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폭적인 지원을 해 발사장 이전 작업이 빨라졌다.

우주 개발의 가능성이 엿보이자 다양한 기관이 탄생했다.

1963년 과학기술청이 항공우주기술연구소(NAL·National Aerospace Laboratory)를 설치해 기초연구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청은 1964년 우주와 관련된 항공기술만 연구하는 우주 개발추진본부도 만들었다.

로켓 개발을 주도하던 도쿄대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1964년 생기연의 이토카와 팀과 항공연구소가 합병해 우주항공연구소(ISAS·Institute of Space and Aeronautical Science)를 출범시킨 것이다.

 

정부의 우주 개발 참여 이끌어내

로켓의 시대도 바뀌고 있었다. 29개종이 개발된 카파로켓 시대는 종료하고 람다(Lambda)로켓 시대가 열렸다.

람다로켓은 2000km 고도 도달을 목표로 했기에 위성을 올리는 초보적인 플랫폼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4단으로 구성된다는 점이었다. 단이 너무 많다 보니 단 분리에 문제가 있어, 람다는 4차례나 발사에 실패했다.

단 분리를 한 다음에는 궤도를 수정해야 하는데, 궤도를 수정하는 유도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도장치는 로켓 개발 시 필수 요소다. 그러나 일본은 정치적인 이유로 유도장치 개발에 제한을 받았다.

탄도미사일 유도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유도장치를 개발하지 못해 실패를 거듭할 때 미국과 소련은 인공위성은 물론이고, 유인 우주비행까지 성공했다. 프랑스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이로써 유도장치 없이 다단계 발사체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일본은 줄기차게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 1970년 2월 11일 비유도방식의 고체로켓인 람다(L)-4S 5호가 올라가 인공위성 ‘오스미(おおすみ)’를 지구 궤도에 띄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24kg에 불과한 초소형 인공위성 발사였지만, 일본은 소련과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자력으로 위성을 띄운 국가가 되었다.

람다-4형은 9번 발사돼 5번 실패했다. L-4S는 1966년 9월 26일 최초로 발사되고 1974년 9월 1일 마지막으로 발사됐다. 그리고 일본은 뮤(Mu) 로켓 개발에 들어갔다. L-4S의 기술을 바탕으로 뮤 로켓의 초기형인 M-4S를 개발했으나 1호기는 발사에 실패했다. 뮤 로켓에도 유도제어장치를 탑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도제어장치 없이 계산만 정확해도 발사에 성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기상과 풍향 변화가 극심하므로 정확한 계산은 소용없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엔진 성능 개량에 집중했다. 그리고 유도제어장치 사용이 허가돼 ‘추력편향제어장치(TVC·Thrust Vector Control)’를 장착하게 됨으로써 뮤 로켓의 정밀도는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이 연구도 이토카와 박사가 이끄는 도쿄대학의 우주항공연구소(ISAS)가 주도했다.

고체연료를 향한 우주항공연구소의 고집 덕에 1985년 새로운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전장 27m의 M-3S-2 로켓으로 핼리혜성 탐사기인 ‘스이세이’를 중력권 밖으로 발사시킨 것이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고체추진 로켓으로 지구 중력권을 넘어서는 데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M-3S-2의 성공으로 안전성이 증명된 뮤 로켓으로 일본은 20기 이상의 위성을 발사했다.

‘하큐초’‘히노토리’‘아케보노’‘히덴’ 등 주요 과학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돼, 중요한 데이터를 갖고 지구로 귀환했다. 1990년대에 뮤 로켓은 M-5라는 세계 최대의 고체로켓으로 발전했다.

도쿄대 ISAS가 고체로켓을 발전시키는 사이 과학기술청의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연구를 했다.

20여 명의 연구진으로 시작한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도쿄대에서 제공받은 고체로켓을 바탕으로 LS-A 로켓(고체로켓과 액체로켓을 연결한 2단식 로켓)을 개발해 시험발사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노하우를 축적해 LS-A의 발사를 성공시키고 이어 LS-C로켓을 개발했다. 또 NAL-6, NAL-16과 SA, SB 등 ‘S 시리즈’ 로켓을 발사하기도 했다.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1969년 10월 1일 우주 개발사업단(NASDA)이라는 과학기술청 산하의 특수법인으로 바뀌었다.

개발사업에 힘이 실린 것이다. 추진본부 시절에는 방위청의 니이지마 시험장을 사용했지만, 1968년부터는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우주센터를 건설해 조직적으로 우주 개발을 하게 되었다. NASDA의 목표는 단순하고 명백했다.

문부성 소관의 도쿄대 ISAS와는 달리 상용(商用) 로켓 실용화를 목표로 잡았다.

양 조직의 관할도 정해졌다. 직경 1.4m 이하의 과학로켓은 ISAS가 맡고, 1.4m 이상의 대형 로켓은 NASDA가 담당하는 것. 1981년 도쿄대학의 ISAS는 문부성 산하 우주과학연구소(역시 준말은 ISAS)로 바뀌었다.

그렇게 된 이후에도 ISAS와 NASDA 간의 경쟁은 계속되었다.

우주 개발을 놓고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은 계속 경쟁하게 된 것이다.

 

상용 로켓 개발에 나선 NASDA

새로 발족한 NASDA는 5년 이내에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실용 로켓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2년까지 150kg의 위성을 고도 1000km에 올리겠다’는 Q계획과 ‘1974년까지 100kg의 정지위성을 발사한다’는 N계획을 입안한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액체로켓을 개발한다는 엄청난 목표도 세웠다. 경험이 일천한 NASDA로서는 이루기 힘든 목표였지만 개발계획은 의외의 도움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일우주협정에 따라 미국의 액체로켓 기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로켓 기술을 보유하면 탄도미사일을 손쉽게 개발할 수 있다.

일본은 ISAS를 통해 고체로켓을 자력으로 개발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일본을 관리감독하에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이전해주고 일본의 로켓 개발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미국은 일본과 우주협정을 맺고 미국 우주 개발의 견인차 역할을 한 액체연료 로켓인 ‘델타’기술을 전수해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NASDA는 Q-N 계획을 정지위성을 올리는‘신N계획’으로 수정했다. 신N계획에 따른 제1세대 로켓이 N-I인데, 이 로켓 제작은 미쓰비시가 맡게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기술을 도입하되 일본 기술을 결합해 1970년부터 3단의 N-1 로켓을 개발하기로 했다.

 N-1 로켓에서 1단과 3단은 미국 델타로켓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2단만큼은 우주 개발사업단 시절의

NASDA가 Q계획으로 개발한 LE-3 엔진을 개발해 만들기로 했다.

 

N-1 로켓으로 정지위성 띄워

2단으로 쓸 액체로켓을 자체 개발하기로 함으로써 일본은 뒤떨어져 있던 액체로켓 기술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것이 직경 2.4m, 전장 34m의 N-1 로켓인데, 이 로켓이 1975년 9월 9일 1호 발사됐다.

N-1 1호는 100kg급의 기술시험위성인 ‘기쿠(きく)-1호’를 정지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N-1은 거듭해서 시험용 정지위성을 쏘아 올리다,

1977년 본격적인 정지위성인 ‘기쿠-2호’를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정지위성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N-1 로켓은 1982년까지 7번 더 발사돼 6개의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렸다.

 

일본 기술이 포함됐다고 하지만 N-I은 엄밀히 말하면 미국제 델타로켓을 면허생산한 것이었다.

당시 선진국에서는 300kg 이상의 대형 정지위성을 띄우고 있었으니 최대 발사중량 130kg인 N-1 로켓으로는 선진국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에 따라 N-2 로켓 개발이 시작됐는데, 짧은 시간 내에 국산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은 역시 미국 기술에 의존해

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별도로 자국산 액체로켓인 H-1 개발에 착수했다. N-1 발사로 NASDA는 발사 기술, 개발 플로와 기술 실증방법, 프로젝트 관리기법 등 로켓 개발의 전반을 학습할 수 있었으므로 H-1 개발에 도전해볼 만했다.

1976년부터 개발에 들어간 N-2로켓의 직경은 2.4m로 N-1과 같지만 길이는 36m로 길어졌다.

 N-2는 350kg짜리 위성을 정지궤도에 쏘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81년 2월 11일 N-2로켓1호가 ‘기쿠3호’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N-2로켓은 1987년까지 모두

8기가 발사되었다.

델타로켓은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술을 채용하고 있어, 미국은 완성부품을 제공했다.

완성부품을 받아 N-1과 N-2를 조립했으니 일본이 액체로켓 기술을 이전받는 효과는 미미했다.

따라서 자력으로 만들기로 한 액체로켓 H-1 개발에 집중해야 했다.

N로켓 제작으로 확보한 기술자와 예산을 H-1 개발에 집중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1981년부터 시작된 H-1 사업은 1차로 2단과 3단 로켓, 그리고 관성유도장치의 국산화를 목표로 했다.

2단 로켓은 재점화 능력을 갖춘 자국산 LE-5 엔진을 채용하고, 3단은 닛산의 UM-129A 모터를 채택했다.

그러나 1단은 여전히 미국산이었다. 따라서 H-1은 여전히 델타로켓의 기술을 도입한 기종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국산화율은 높아져, N-2에서 54~61%이던 것이, H-1에서는 78~98%에 달했다.

500kg급 위성을 정지궤도에 투입할 수 있는 H-1 발사체는 1986년부터 1992년까지 9기가 발사되었다.

‘사쿠라-3호’ 통신위성, ‘히마와리-4호’ 기상위성, ‘푸요-1호’ 자원위성 등이 정지궤도에 올라갔다. NTT로 약칭되는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는 1980년대 초반부터 2t 이상의 통신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으로 보다 큰 발사체 개발 필요성이 제기돼 1986년부터 H-2 개발이 시작되었다.

국산화의 최대 목표로 1단용인 LE-7 엔진의 개발이 추진됐는데, 시험 도중 이 엔진이 폭발해 1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자중(自重)의 60배에 달하는 추력을 낼 수 있는 LE-7을 개발해냈다.

1단에 붙이는 고체 보조로켓인 부스터까지 국산화했다. 일본은 H-2라는 명실상부 자국산 발사체를 갖게 된 것이다.

직경 4.0m, 길이 49.9m에 달하는 H-2 발사체는 3.8t의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H-2 는 1994년 2월 4일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시킨 후 1997년까지 총 5기를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다.

 H-2 발사체는 ‘히마와리-5호’ 기상위성, SFU 우주실험관찰위성, ‘미도리’ ADEOS 지구관측위성, COMETS 방송통신 실험위성, TRMM 열대강우 측정위성 등을 정지궤도에 진입시켜 일본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비용 극복하고 주문식 발사

그러나 5호와 8호가 발사에 실패하고 7호가 취소되는 등 난관에 봉착했다.

더 큰 문제는 발사비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이 개발한 ‘아리안’이 100억 엔 미만의 비용으로 발사되는데, H-2는 190억 엔을 사용했다. H-2는 상용 위성을 표방했지만 국제경쟁력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급격한 엔고(高)가 보태져 H-2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H-2A 개발이 추진되었다.

H-2A 발사체는 비용통제를 위해 H-2를 재설계해 구조를 단순화했다.

국산화에 집착하지 않고 해외의 저가부품을 채용하기로 했다.

1996년 시작된 H-2A의 개발비는 약 1532억 엔을 기록해, 델타-4 발사체 개발에 들어간 2750억 엔이나 아틀라스-5의 2420억 엔보다 훨씬 저렴했다.

구성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발사비용도 85억~120억 엔이 됐다. 최대 190억 엔이던 H-2에 비하면 대단한 경제성을

갖춘 것이다.

H-2A의 최대 장점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발사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발사 능력은 고체로켓 부스터(SRB)와 고체 보조로켓(SSB)·액체로켓 부스터(LRB)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H-2A는 최대 5.8t을 정지궤도로 올릴 수 있었다.

 최대 발사중량이 H-2의 약 1.5배가 된 것이다.

2001년 여름, 시험1호기가 발사에 성공하면서 H-2A는 일본의 중심 발사체로 자리 잡았다.

 

H-2A의 개발로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2000년대 초까지 일본의 우주 개발은 많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야심 차게 계획한 화성탐사선 ‘노조미’는 궤도 투입에 실패했다. 2003년 11월 29일에는 H-2A 6호가 정보수집위성(정찰위성)을 올리기 위해 발사됐으나 문제가 발생해 통제실의 지령으로 공중 폭파되었다.

이러한 실패에 즈음해 행정개혁의 물결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우주 관련기관의 통폐합을 검토했다.

우주 개발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이 통합돼 문부과학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ISAS와 NASDA, NAL 등이 통합돼 2003년 10월 1일 독립행정법인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Japan Aerospace eXplo-ration Agency)가 발족했다.

JAXA의 발족에 앞서 또 다른 움직임이 일어났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하자, 일본 정부는 정찰위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1969년 중의원이 ‘우주의 개발 및 이용의 기본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우주 개발은 군사 목적 이외로 한정한다’고 해놓았기에 군사용 위성은 만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JAXA 관련법의 목적을 ‘모든 분야에서 평화 목적에 한정한다’로 바꾸고 업무 범위도 우주 개발과 연구, 인공위성의 개발과 발사로 수정했다.

 

군사위성 보유 합법화한 일본

법률적 제한을 바꿈에 따라 일본은 정찰위성을 ‘정보수집위성’으로 바꿔 부르며 2003년부터 발사 준비에 들어갔다.

 H-2A로 발사될 정보수집위성은 광학(光學)위성과 레이더영상(SAR)위성을 한 조로 편성했다.

광학위성은 초망원 디지털카메라를 장착해 주간 촬영을 담당한다.

광학-1호와 2호까지는 해상도가 1m 수준이었고, 광학-3호에서는 60cm급으로 높아졌다.

조만간 발사할 예정인 광학-5호는 40cm급 해상도를 갖는다.

이는 상업위성 가운데 세계 최고의 해상도를 자랑하는 지오아이(GeoEye)-1의 해상도를 능가한다.

레이더영상위성은 1호에서 3호의 해상도는 1~3m 정도였지만, 2011년 발사된 4호부터는 1m 급으로 향상되었다.

 

첫 번째 조인 광학-1호(IGS-1A)와 레이더-1호(IGA-1B)는 H-2A 5호에 실려 2003년 3월 28일 발사됐다.

광학-2호와 레이더-2호를 실은 H-2A 6호는 같은 해 11월 9일 발사됐으나 단 분리 실패로 지령을 내려 공중 폭파시켰다. 2011년 말까지 일본은 광학-4호(IGS-6A), 레이더-3호(IGS-7A)를 발사해 총 7대의 정보수집(정찰)위성을 갖게 되었다.

2016년에는 광학-6호, 2017년에는 레이더-6호를 발사할 예정이다.

일본은 2008년 5월 ‘방위목적의 군사이용을 허용하고 자위대가 최첨단 전용 위성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우주기본법’을 제정했다.

일본 중의원은 올해 6월 15일 JAXA법 개정안을 가결하면서, JAXA의 활동을 평화 목적으로 한정한다는 규정을 삭제하고 ‘국가의 안전 보장에 도움이 되도록 진행되어야 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국제우주정거장과 도킹 성공

H-2A 발사체는 2001년 이후 21회 발사해 20번 성공(95.2%)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아틀라스-5(미국)의 96.4%, 아리안-5(유럽)의 94.9%에 필적하는 성공률이다.

H-2A 21호는 올해 5월 18일 한국의 아리랑 3호를 저궤도에 올림으로써 처음으로 해외 상업위성을 발사해주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8t을 올려 보낼 수 있는 H-2B 발사체도 만들었다.

2009년 9월 10일 H-2B로 국제우주정거장으로 보급품을 보내줄 무인 우주화물선 HTV(H-2 Transfer Vehicle)-1 ‘고우노토리(こうのとり)-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2011년 1월 22일 H-2B로 발사한 HTV-2도 우주정거장과 도킹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HTV보다 한발 나아간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왕복수송기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위성 분야에서도 노하우를 축적했다.

2010년에는 2003년 발사한 소행성 탐사선 ‘하야부사’가 소행성의 샘플을 채취해 귀환함으로써 달 이외의 천체 샘플을 가져온 최초의 탐사선이 되었다.

 2008년에는 국제우주정거장에 일본의 시험모듈인 ‘기보(希望)’를 완성하고 교대로 우주인을 보내 각종 실험을 하고 있다. 고집스럽게 우주 개발을 추진해온 덕에 일본은 미국과 러시아, EU, 중국과 함께 우주 개발 선진국이 된 것이다.

 

일본은 전범국가이기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든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비군사적인 발사체 개발에 노력했다.

그 결과 상당한 기술을 축적해, 우주를 군사적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우주를 통해 안보를 지키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주를 향한 일본의 도전은 계속된다

 

유인 우주선 도전하는 일본

 

일본 로켓으로 '아리랑 3호' 발사(자료사진) 지난 5월18일 오전 1시39분 일본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한국의 다목적 인공위성인 '아리랑 3호'를 실은 일본의 H-2A 로켓 21호기가 발사되고 있다. 로켓 몸체에 제조사인 미쓰비시중공업의 마크가 선명하다.

 

 

37년 전 N - !로켓 1호기 발사 성공

해외 위성 대리 발사 --- '우주 군사 대국' 우려도 

일본이 미국 기술로 만든 1단 로켓에 일본산 2단 로켓을 얹은 'N-1로켓 1호기'를 다네가시마(種子島) 우주센터에서

쏘아 올린 것은 1975년 9월이었다.

한국이 오는 26일 나로호 발사에 성공하더라도 일본보다 37년이나 뒤진 셈이다. 
일본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로켓 실험에 착수했다.

한국이 나로 우주센터를 만들기 40년 전인 1969년 10월에 다네가시마 우주센터를 설치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1994년 100% 자국 기술로 만든 H-2 로켓 발사에 성공했고, 이를 개량해 2001년에는 H-2A 로켓, 2009년에는 H-2B 로켓을 각각 쏘아 올렸다. 
60년 가까운 우주개발 역사를 가진 일본은 최근에는 다른 나라의 위성을 대신 발사해주고 돈을 받는 상업화 단계에

들어섰다. 
지난 5월18일 첫 고객인 한국의 다목적 실용위성 아리랑 3호를 H-2A 로켓에 실어 발사했고, 7월21일에는 베트남

위성 F-1을 대리 발사했다. 

유럽의 아리안 로켓, 미국의 스페이스 X, 러시아, 중국 등과 연간 20기 안팎의 국제 위성 발사 수요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단계다. 
일본은 유인우주선 발사에도 역점을 기울이고 있다.

우주선을 대기권 안으로 귀환시키는 연구와 발사 실패에 대비해 우주비행사가 탄 부분을 로켓에서 분리한 뒤

나머지를 파괴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후루카와 모토히사(古川元久) 우주개발담당상은 지난 1월 '일본인에 의한 화성탐사'라는 중장기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유인우주선 발사는 비용이나 기술적 장애가 만만치 않은 만큼 실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다. 
일본의 '우주 군사대국화'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로켓 기술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4년 2월에는 오렉스(OREX), 1996년에는 하이플렉스(HYFLEX)라는 대기권 재돌입 실험 장치를 쏘아올려

대륙간탄도탄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를 축적했다.

일본 우주개발 전문가들은 "적용하자고 들면 (ICBM에) 간단히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1969년 국회에서 '우주의 평화 이용 원칙'을 결의, 우주 개발을 정당화했지만 2008년 8월부터 시행한

우주기본법에선 자위대가 정찰위성을 방위 목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길을 터놓았다.

지난 6월20일에는 JAXA 설치법을 개정해 JAXA의 활동 목적을 '평화 목적'으로 한정한 규정을 삭제했다. 
위성 7기를 쏘아 올려 일본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구축한다는 목표 아래 2010년 9월11일 미치비키 위성을

발사했다. 
우주 개발에 유독 관심이 많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지난해 9월 정부 회의에서 '일본판 GPS'가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 뿐만 아니라 안전보장에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주기본법에 근거해 내각에 우주개발전략본부를 설치한 데 이어 이를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비슷한 '우주청'으로 발전시킨다는 복안도 내비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일단 각 부처에 분산된 우주정책을 일원화, 내각부에 우주전략실을 설치했고, 국가전략상에게 우주정책상을 겸임하게 했다. 
일본은 한결같이 `우주의 평화적인 개발'을 강조하고 있지만 핵무기 제조 능력과 ICBM 기술을 동시에 갖춘 우주 강국 일본에 대한 주변국의 경계심은 점점 더 강해질 전망이다.

  7년간 60억㎞ 항해, 채취 자료 지구 투하하고 대기권서 산화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일본의 자존심, 소행성 탐사선 ‘하야부사’

 

 

 

2010년 6월 13일 일본의 우주탐사선 ‘하야부사(사진)’가 발사 7년 만에 지구로 돌아왔다. 일본 언론들은 ‘불사신(不死身) 하야부사’라며 연일 톱뉴스로 보도하고, 일본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어떤 사람들은 감동적인 드라마라며 눈물까지 흘렸다. 일본국립과학박물관은 100일 동안 ‘하늘과 우주전-날아라! 백년의 꿈’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왜 하야부사에 열광했을까. 하야부사는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가 개발한 중량 510㎏의 소행성 탐사선이다. 사람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하야부사는 우주 탐험사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최초로 지구에서 3억㎞ 떨어진 소행성 ‘이토카와’에 착륙해 표면 샘플 1500개를 캐서 지구로 돌아왔다. 기간도 7년이나 걸렸다. 비행 거리가 60억㎞나 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40배나 된다.

그렇더라도 그렇게까지 감동적인가. 그렇다. 하야부사가 겪은 극적인 탐사과정 때문이다. 하야부사는 지구를 떠난 지 2년4개월 만에 소행성 이토카와에 도착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여러 트러블이 발생했다. 자세제어장치가 고장 났고, 안테나가 지구로 향하지 못해 통신이 두절되고 연료 누출, 배터리 방전, 행방불명, 궤도 이탈, 엔진 고장 등 많은 시련을 겪으며 사람들 마음을 졸이게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내와 끈기,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술로 위기를 극복하며 한 편의 드라마가 연출됐다.

그리고 마침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불사조처럼 살아서 지구로 돌아왔다.

복싱 영화 ‘록키’나 액션 영화 ‘다이하드’처럼.

마지막으로 샘플이 담긴 캡슐을 호주 사막에 떨어뜨리고, 하야부사는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산화했다.

그 모습은 비록 기계이지만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야부사의 원래 이름은 ‘MUSES-C(Mu Space Engineering Spacecraft C)’였다. 그러나 발사 305초 만에 행성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자

 JAXA는 이름을 하야부사로 바꿨다. 왜 그랬을까?

하야부사는 일본어로 송골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 번역만으로는 재미가 없다. 송골매는 매 중에서도 속도가 가장 빠른 놈이다. 시속 300㎞까지 속도를 낸다.

일본인에게 송골매는 속도의 상징이다. 한국 공군의 상징이 보라매인 것처럼, 하야부사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일본 전투기 이름도 하야부사였다.

만약 처음부터 하야부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첫 단계인 발사에서 실패라도 하면 일본 우주기술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우주산업 브랜드의 신뢰도도 나빠진다. 그래서 발사 성공을 확인한 후 바로 이름을 하야부사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소행성 이토카와의 정식 이름은 ‘25143 이토카와’이다.

지구와 화성 사이에 있는 이 소행성은 길쭉한 감자처럼 생겼는데, 크기는 약 500m. 98년 미국 관측 팀이 처음 발견했다.

천체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혜성엔 발견자의 이름을 붙인다.

소행성에 발견자가 이름을 붙일 수는 있으나 통상 자기 이름은 안 쓴다. 궤도가 확정되면 고유번호와 함께 통상 사람이나 장소 이름을 붙인다.

소행성에 이름이 들어간 로켓과학자는 ‘로켓의 아버지’인 러시아의 치올콥스키와 소련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와 ‘보스토크’ 개발을 주도했던 코롤료프, 그리고 이토카와 세 사람뿐이다.

일본 로켓 개발의 선구자 이토카와 히데오(系川英夫)는 1935년 도쿄제대 항공학과를 졸업하고, ‘나카지마 비행기’에서 전투기 하야부사의 개발에도 참여했다. 53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일본 최초의 로켓 ‘펜슬’을 개발했다.

55년 처음 발사실험을 한 펜슬은 직경 1.8㎝, 무게 230g의 말 그대로 연필 크기만 한 소형 로켓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사람들이 진정 놀라는 것은 하야부사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일본의 첨단과학기술이다. 특히 ‘이온 엔진’은 경이적이다.

이온엔진은 플라스마 분출로 추력을 얻는다. 연비가 매우 높아 화학엔진의 10배가 넘는다. 하야부사의 경우 크세논가스 60㎏으로 60억㎞를 항해하고도 20㎏이 남았다. 앞으로 심(深)우주개발의 총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카메라로 촬영한 화상과 레이저고도계로 얻은 거리 데이터를 바탕으로 탐사선이 자율적으로 접근, 착륙하는 기술이다.

소행성 이토카와는 지구로부터 3억㎞ 떨어져 있다. 광속으로 17분 거리다. 전파로 지시를 보내면 17분이 걸린다.

이래서는 상황변화에 적절한 대응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하야부사는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기능을 갖도록 했다.

그 밖에도 ‘미소중력’ 아래 있는 천체 표면의 표본을 채취하는 기술 등 여러 신기술이 채용되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우주개발 수준이 일본에 50년, 중국에 40년 정도 뒤졌다.

경제가 어렵다면서도 일본은 우주개발에 우리나라보다 10배가 넘는 예산을 매년 투입한다. 

 

日, 최첨단 액체로켓 성공 비결은

40년전 美와 기술도입 협정으로 자체개발 토대 마련
24일 한양대서 우주정책포럼, 하야시 JAXA부이사장 발표

 

지난 8월 25일 한국의 첫 우주로켓 `나로호`는 발사에 완전히 성공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우주개발과 로켓 개발에 대한 의지와 뜻은 전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나로호는 가장 중요한 1단 액체로켓 기술을 러시아에 의존할 수밖에 었었던 만큼 기술 자립에 대한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다.

내년 5월 나로호는 재발사에 도전한다. 

이웃나라 일본은 지난 9월 초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식량, 실험장비 등 보급품을 전달할 무인화물선(HTV)을 실은 신형 초대형 로켓 `H-ⅡB` 발사에 성공했다. 이 최신형 로켓은 일본이 자체 개발했다는 데도 의의가 있다. 

24일 한양대 서울캠퍼스에서 국가우주개발전략센터, 한양대국가전략연구소가 주최하고 매일경제신문이 후원하는 제11회 우주정책포럼이 열린다. 주제는 `일본 로켓개발의 자립화 과정`이다. 일본 우주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하야시 유키히데 부이사장이 `일본의 액체연료로켓 개발 자립사`를 주제로 발표에 나선다. 하야시 부이사장이 발표하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로켓 기술은 고체로켓 개발에서부터 시작됐다. 1955년 `펜슬로켓` 개발을 시작으로 1956년에는 과학위성 발사용 전단 고체로켓 `카파`를 자주 기술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고체로켓을 베이스로 한 Q로켓, N로켓을 개발해 실험용 정지위성 발사를 계획했다.

이를 위해 1964년 우주개발 중핵기관으로 과학기술청(현 문부과학성)에 우주개발추진본부를 설치했다. 특히 1969년에는 `우주개발에 관한 일본, 미국 간 협력에 관한 교환공문` 체결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은 미국의 선진 우주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됐다. 

1970년 일본은 기존 고체로켓 개발 계획을 멈추고 액체로켓 개발에 주력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세계 우주개발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유도장치가 부착됐으며 운반 가능한 중량과 발사 능력이 크게 향상된 액체로켓 개발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델타로켓 기술을 도입해 이를 기초로 1975년 N-Ⅰ로켓 개발ㆍ발사에 성공했다.

이로써 일본은 당시 미국, 구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정지위성 발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일본은 다시 한 번 미ㆍ일 교환공문의 적용 대상 범위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뒀고 이를 이용해 N-Ⅰ과 같이 델타로켓을 기본으로 하되 운반가능 중량이 130㎏에서 350㎏으로 크게 향상된 N-Ⅱ로켓 개발을 결정하고 1981년 1호기 발사에 성공했다.

 

1981년 일본은 미래 로켓 개발에 필요한 주요 장비들을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H-Ⅰ로켓 개발에 착수했다. 제2단 엔진, 관성유도장치, 제3단 고체모터를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1986년 1호기 발사에 성공했다. 

H-Ⅰ로켓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984년 H-Ⅱ로켓 개발에 착수하고 마침내 1단 액체로켓 LE-7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994년 H-Ⅱ로켓 1호기 발사에 성공하며 일본은 자주기술에 의한 준국산로켓 개발국이 됐다. 

1996년 일본은 미래 대형위성 발사에 활용할 만한 성능을 갖추는 한편 발사 비용을 대폭 절감하고 신뢰성을 높일 수 있는 로켓 개발에 착수했다. 이후 2001년 전장 53m, 외경 약 4m, 중량 285t의 H-ⅡA의 개발ㆍ발사에 성공했다.

 

2002년 민간에 기술이 이전된 H-ⅡA는 지금까지 일본의 주력 로켓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2009년 H-ⅡB를 개발한 일본은 현재 세계적인 로켓 개발 강국으로 자리를 확고히 했다. 세계 로켓 개발 흐름을 파악해 액체로켓 개발을 체계적으로 성공시켰으며 우주 선진국인 미국의 기술을 적절하게 활용한 것을 일본 로켓 개발의 성공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김경민 한양대 정치학과 교수는 "우주 선진국 일본도 처음에는 한국처럼 독자적인 우주기술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로켓 개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다"며 "한국이 일본의 로켓 기술 개발사를 참고하면 더 효율적으로 로켓 기술 자립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우주 로켓

 

 

국제우주정거장(ISS)과 거대한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까지 쏘아 보낼 수 있는 미국이나 러시아의 초기 우주 개발은 지금처럼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인류가 상상으로만 그릴 수 있었던 우주 영역을 탐험하기 위해 미국과 러시아 역시 수많은 도전과 좌절을 맛봐야 했다. 

러시아의 첫번째 로켓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푸트니크 1호’를 싣고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R-7’으로 초창기 미국과의 우주 경쟁에서 몇 차례 옛 소련에 영광을 부여한 로켓이다. 그리고 미국의 인공위성을 탑재한 첫번째 로켓은 ‘주피터C’로 미 육군의 ‘레드스톤’을 개량한 것이었다. 미국과 옛 소련의 로켓 개발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지만 그 기술적인 바탕은 모두 독일의 ‘V-2’로켓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그 밑바탕에는 독일의 로켓 기술이 있었다. 

미국과 옛 소련에 이어 세번째로 자국 위성과 자국 로켓을 발사한 나라는 프랑스로 1965년 11월 26일 ‘디아망’로켓을 이용해 프랑스 최초의 인공위성인 ‘A-1’ 발사에 성공하게 된다. 프랑스의 로켓 연구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가 전 로베르 에소놀 펠트리를 통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아가테’ ‘디아망’ ‘에메로드’ ‘루비’ ‘토파즈’ 등과 같은 많은 로켓을 개발, 이를 바탕으로 1965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이후 프랑스는 지속적인 개발을 통해 상업용으로는 가장 성공적이라는 ‘아리안’로켓 시리즈를 개발했다.

네번째로 우주 발사체 발사에 성공한 나라는 바로 일본이다. 일본의 로켓 개발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개발한 고체로켓 추진 비행기였던 ‘바카’를 제작한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일본은 1955년 8월 최초의 실험 로켓인 ‘펜슬’로켓을 개발, 발사에 성공했으며 이후 많은 연구와 좌절 끝에 1970년 2월 11일 인공위성인 ‘오수미’를 탑재한 ‘람다-4S-5’로켓을 쏘아 올렸다. 일본은 람다 로켓 발사 성공까지 네번의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연구진이 교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다섯번째 발사 성공국은 중국이다. 중국은 같은 공산국가인 러시아와 미국을 통해 로켓 개발을 시작했다. 중국은 1960년 11월 5일에 독일 ‘V-2’로켓과 비슷한 형태인 ‘동풍 1호’로켓 발사를 성공시켜 우주 발사체에 대한 기본적인 기술을 습득했다. 그 뒤 1970년 4월 ‘동풍’로켓을 개량한 ‘장정 1호’를 통해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동방홍 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 영국이 1971년 10월 28일 ‘블랙 에로’ 우주로켓에 66㎏짜리 ‘프로스페로’ 위성을 실어 발사해 세계 여섯번째로 자국 땅에서 인공위성을 발사한 나라가 됐다. 

그리고 인도가 1980년 몇 번의 실패 끝에 인도우주연구기구(ISRO)가 개발한 ‘SLV-3’로켓을 통해 과학위성 ‘히니’를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도의 성공 이후 이후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1988년 9월 19일 이스라엘에서도 ‘사비트’ 발사체를 개발해 ‘오페크-1’ 위성을 타원궤도에 안착시켜 자국에서의 로켓 발사 성공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글=유상연 과학칼럼니스트 자료제공=한국항공우주연구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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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jinpark 14-01-08 06:16
   
일본ICBM고체로켓 엡실론
http://extra1.egloos.com/3897707
ㅣㅏㅏ 14-01-08 12:08
   
발사체도 있고 핵물질도 있고 ... 탑제만 하면 핵보유... 오래전부터 일본은 차근차근 준비해왔었네요...
굿잡스 14-01-08 13:43
   
ㅋㅋ 뭔 잽은 60년대 후반에 4번이나 발사 실패하고 이후 미국 델타로켓(액체) 1단 3단 엔진 완제품

들고와서 이후 계속해서 기술 운용소프트웨어 지원까지 받아서 수많은 경험을 쌓아

1994년에 와서야 잽의 순수 자국산 액체로켓 H-II 발사체가 완성되었음.

그와는 달리 우리는 87년 미사일 기술통제체제(MTCR)로 인해 여러 열악한 상황과 지원속에서

진짜 연구진의 피와 땀으로 2019년 자국산 로켓 완성을 목표로 매진중임.

(잽은 미국으로부터 설계도면부터 운용소프트 웨어고 유례없는 기술 이전을 받고도

자국산 로켓을 만들기까지 25년,울나라 KSLV 시작이 2002년 그리고  2019년에 국산형발사

체가 완성된다면 고작 17년임. )
정크푸드 14-01-08 18:38
   
한국은 공돌이를 갈아서 만든다는게 사실이었네
술담배여자 14-01-08 20:38
   
아직 우리나라도 갈길이멀긴하지만.......언젠가는.......
Horn 14-01-08 22:23
   
세운상가에 돈만 주면 인공위성 만들어준다는 썰이 있듯이..공돌이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때문에 이모양이꼴이 되었죠,,
푸우님 14-01-08 23:53
   
어쩌구 저쩌구하지만 결국 미국 델타 로켓 그 자체나 마찮가지인
1단 로켓의 엔진, 로켓, 연료, SW등 모든 기술을 100% 이전 받기 전에는
실험용 초소형 로켓만 겨우 올리는 수준이었죠..
일본은 델타 로켓 1단 기술을 통채로 이전 받은 후 기술력이 순식간에 늘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에게는 다 퍼주면서 우리나라는 뭐 하려면 막고 보는게 나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