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만해도 수많은전쟁 멀게 볼 필요없이 고려시대만해도 많은 전쟁이 있었지요.이말은 그만큼 많은 무기 체계및 발전이 되었다는거지요 .검도 마찬가지이고 갑옷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이또한 전부 돈이고 외교적인 문제 그리고 정책의 문제등등으로 하나하나 퇴보가되고 자료로만남게되죠.
조선 초반까지만해도 병사들이 고려말갑옷화가 되어있었다고하죠. 고려전 즉 고구려시대를 보면 병사당 쇠뇌(소형석궁)를 가지고있었다고합니다.
하지만 나라가 안정적이거나 아니면 외세의 지배로 인한 제제로 하나하나 퇴보가되죠..현대 북한만 보면 알겠지만 30~40년만 막아두어도 상당히 퇴보되죠..언어조차도 많이 틀려진다고하더라고요
그런데 고려시대 말을 보면 원나로인해.무려 100년이상 지배당했죠.이말은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제한받았다는얘기이고 참고로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지요.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대주의로 많은것을 버리고 사대주의정책으로 나라를 500년간 버틴나라입니다.
우낀건 조선시대 무기들을 보면 전부 고려시대 무기들이 대부분이죠.이순신의 거북선또한 그 한부분입니다.물론 철갑판이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서를 참고로 만들었겠지요.참고로 고려시대 조선술은 상당했습니다.수천마리의 말을 태우고 수천척으로 송나라까지 갈정도의 기술을 가지고있을정도였으니.
참고로 조선이 자랑했던 애깃살 편전..이것도 고려시대 무기입니다.아마 삼국시대때 상당히 모든것들이 발전되어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고구려시대 쇠뇌가 있을정도면 말 다했죠.
조선초기. 조선군의 군사교리라 할수 있는 진법은 고려시대의 진법을 계승 발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이라는 국가가 탄생한 국초. 군사분야의 발전도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어졌기에.
정도전의 <진법陣法> 하경복의<계축진설癸丑陣說>등 발전과정을 통해 등장한 여러진법을 흡수 집대성하여 만들어낸 문종의 <오위진법>이 향후.
임란이후. 조전중기에 변화한 군사교리 진법의 변화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나 이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병학지남 등장이전까지 조선군의 기본이였습니다.
이 오위진법속. 조선군 기병부대의 운용은. 기사騎射가 자그만치 60% 이며 창을 주력으로 하는 기창騎槍이 40%이였습니다.
월도를 운용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예가 능한 소수자에 한정된것일뿐. 조선시대 기병의 주력병기는 활과 창이지 결코 월도는 아닙니다.
<만기요람>속 내용중. 어영청과 금위영에는 250/209 자루의 협도 긴외날의 장병기(세종실록에는 장검이라 표현되고 있으며 무예보통지에는 협도)를 비축하고 있는것으로 사료가 존재하나. 월도는.오군영 전체에서도 적은양으로만 기록되었던 사실이 기억나네요.
기병이란 고급병과의 무장을 날 폭이 좁은 창에서 면적이 몇배. 무게가 몇배 늘어나는 금속소비량이 증가하는 월도로 재무장 시키는것은 당시 정부입장. 조선왕실로서도 기병주력병기로 대체할수 없었을 상황이었을겁니다.
그리고 월도는 결코 짧지 않습니다.
자루길이만 6척이면 130cm이고 날붙이. 칼날길이만 하더라도 2척8촌 근 3척이면 60cm에가까운 장병기입니다.
조선시대. 대체적으로 칼날길이가 짧은 환도중. 특히 더 짧은 마상용 환도. 그중 쌍검용 환도와 착각하신듯 하네요.
뭔 장식품은..
명나라의 경우 일본도 수십만 자루를 수입했는데 그게 다 장식용이겠습니까?
조선시대에 북방으로 발령받은 장수가 부산가서 왜검구입해서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도검에 대해서만은 왜검을 인정해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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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降倭人과 倭劍術 受容
조선은 선초이래 왜검의 우수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대에는 왜의 도검술 수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하였다. 1430년 (세종12년) 6월 일본에 건너가서 제도술을 익히고 돌아와서 일본도와 다름이 없는 칼을 만들어 바친 船軍 沈乙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고 또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三浦에 내왕하는 왜인 가운데 제도술에 밝은 자가 있으면 이들로부터도 기술을 전습하려고 노력하였다.
왜도에 대한 평가는 沈會의 보고에 의해 軍器寺에 소장된 왜도 가운데 下品이라 할지라도 매우 예리하여 군국의 중요 무기가 되었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군기시 소장의 왜환도를 북변 경비의 병사들에게 분급하여 실전에 사용토록 하였다. 당시의 貶下된 對倭觀 가운데 왜도의 효용성만은 인정한 처사로 여겨진다.
왜검에 대한 선호는 임진란시 크게 활약했던 黃進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가 일본에 체류시에 주머니의 돈을 전부 털어 보검 한 자루를 사고는 '오래지 않아 왜적이 침입하면 이 칼이 쓰이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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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 運用=- 姜 性 文
전장에서의 검은 검병이 아닌 이상 보조무기 이지만 거의 모든병과가 휴대하고 있는
무기입니다 그말인즉슨 범용성과 휴대성 근거리살상력이 높다는거죠
전장의 근거리전용 무기라보시면 될거같고 원거리무기보단 뭐 쓸일이 적겠지만
평상시에는 검이 그 범용성과 휴대성 상징적인멋? 때문에 아주중요한 호신용 무기로 동서양 모두필수로
휴대하고 다니는 무기가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