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마제국에서도 연발석궁 원리가 발견되었으니까요.
기술적으로는 중국 한나라시대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거죠.
그렇지만 연발석궁은 동서양 모두 실전용으로는 쓰지 않았습니다.
사거리가 너무 짧고, 파괴력이 약해서 무기로는 별로였다고 하더군요.
(사실 석궁이란 무기 자체도 12세기까지는 그리 잘 쓰이지 않았다 하더군요.
투사병기는 '활'을 쓰다가, 석궁을 쓰다가, 장궁(대궁, 각궁)으로 넘어갔다가, 총포로 바뀌지요...
한국 같은 경우는 장궁이 좀 일찍 도입되어서, 석궁의 과정이 거의 보이지 않죠. 일본은 그냥 활에서 총포로 넘어갔고)
수노궁. 같은. 연사가능한 쇠뇌류는 명중률과 관통력. 사거리에 대한 문제점이 항시 함께하였지만
빠른속도의 연사. 편리한 기능. 힘이 약한 여성이나 아이도 사용가능한 용이함등으로 인하여
조선후기에 이르러 성을 지키는 수성용으로대량 제작 되기도 하였죠
뿐만 아니라 각 지방 군영에서도 비축하고 군사관력 기록물. 만기요람. 의 일부내용중
한국같은 경우. 활과 관련한 이미지가 널리 퍼져잇기에 가려진 부분으로 남아잇어서 그렇지
한국의. 쇠뇌. 오늘날. 석궁같은 투사병기의 역사 역시. 동등할 정도이죠
통일신라 초기만 하더라도. 흑심품은. 당나라의 군세를 격퇴시킨
장창병과 함께. 신라의 쇠뇌. 노. 의 활약도 대단하였으면
훗날.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쇠뇌가 개발등장하였고. 정노반 이라는. 유럽과 흡사한
쇠뇌 전문부대도 등장하기도 하였죠
쇠뇌의 스승. 노사. 라 불리는. 신라인 구진천은. 당나라 황제으로 인해 당나라에 끌려갈 정도였다고
쇠뇌는 오랫동안. 함께왓을거라. 생각되네요
뭐. 고려말. 조선초기. 세종시기까지는. 단절된 시기라. 세종대왕때에 이르러 복원 시작함으로
성종 중종에는 결과물이 나왓으며
임란이후. 조선에. 널리 이용된것으로 알고있네요
숙종41년. 북한산성은. 쇠뇌 수백개가. 영조1년에는. 변방에 쇠뇌1천기 설치 건의안이.
쇠뇌에 관련된 서적. 노해. 가. 출간되는등.
활. 쇠뇌는. 오랜시절을. 함께 햇을거라. 생각되네요 ㅎ
그렇죠. 당장 먹을 식량을 걱정할 정도로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전하는 군인들은 대부분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물론 의병들이나 관아에 속한 포졸들은 입지 않았겠지만, 군인이 갑옷을 입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거죠.
이에 반해 왜군은 지휘관을 제외하면 통일된 군복이 없었습니다.
평상복에 무장만 했을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