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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1-11 10:01
[밀리역사] 94년 전쟁 준비중이던 한미연합사의 생생한 묘사.
 글쓴이 : 없습니다
조회 : 3,669  

1994년 3월에 북한 대표가 판문점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한 이후 6월에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하기로 했다.

이미 주한미군에 1000명 정도의 전쟁기획 장교가 증파되어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김영삼 대통령은 속수무책이었다. 이 때 연합사령관 게리 럭 대장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북한을 폭격하기로 한 결정을 통보받았으나 그 결정 내용에 대해 한국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당시 연합사 작전참모 프랭크스 소장은 클린턴 행정부의 전쟁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게리 럭의 지시를 받아 전쟁을 기획하면서 한국군 장교들에게 "만일 반대하는 장교가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서슬이 퍼런 전쟁 분위기에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장성(육사 18기) 대장도 속수무책이었다.

이 당시 한국군의 걱정은 영변을 포격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을 할 것이며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가장 위협적인 것은 북한의 장사정포인데, 갱도 안에 있는 장사정포를 무력화하려면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북한 장사정포 중 170mm포는 거리가 멀어서 우리 포가 미치지 못하고, 갱도진지나 산의 뒤쪽에 있는 포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그러니 일일이 특수부대가 가서 제압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개전 초 2~3일 이내에 우리 군사력의 37%가 손실되고 서울에서 100만 명 이상 사망한다는 것이 우리 측 결론이었다. 그런데 게리 럭이나 프랭크스는 이런 한국군의 걱정을 무시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랜턴(야간 저고도 항법 장치) 장비를 부착한 미 7공군사령부의 F-16을 동원해서 북한 장사정포를 제압하는 방안이다.

당시 7공군에서는 27대의 F-16이 배치되어 있었다. 장성 부사령관과 당시 3군사령관인 윤용남(육사 19기) 대장이 이 방안을 "관철하라"고 당시 연합사 지상구성군 선임 장교로 가 있던 정경영(육사 33기)에게 지시했다.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것을 미국에 설득하지 못하면 서울 시민은 집단학살 된다.

개전 3일 내 서울시민 100만 명 사망 시나리오... 미군의 반응은?

작전회의에서 정 중령은 미 공군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걸 열다섯 번 주장했다. 그러나 무시당했다. 미국은 오로지 영변 핵 시설만 폭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연합사에서는 7공군사령부와 타격 표적(pre-ITO)을 협의하기 위해 전투협조반(BCE)을 운영했고 그 반장이 커밍스 대령으로 정 중령의 직속상관이었다. 북한의 표적을 결정하기 전에 7공군이 연합사와 협의하는 절차가 연합표적처리위원회(CTB : Combat Targetting Board)다.

당시 미 7공군사령부 부사령관(준장)이 연합표적처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었다. 이 회의에서 또 정 중령이 "연합사령부의 중요 임무는 수도권 방어"라는 점을 환기시키며 "7공군이 그 방어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자 커밍스 대령이 정 중령의 목을 잡고 "조용히 해"라고 소리쳤다. 정 중령이 "한 말씀만 더"라고 사정하며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이 주장을 들은 7공군은 경악했다. 저공비행으로 방공망이 조밀한 북한 장사정포를 타격할 경우 그 생존확률은 50%에 불과하다는 것. 이 때문에 7공군이 "절대로 못한다"며 아우성치기 시작했고 커밍스 대령은 다시 불같이 화를 냈다. 그날 저녁 "7공군사령부가 난리 났다"는 보고를 받은 프랭크스 장군이 자정쯤에 용산 연합사령관 공관(힐탑)으로 들어갔다 새벽 4시경에 나왔다.

그 직후 커밍스 대령이 연합사 벙커로 들어오면서 다짜고짜 의자를 발로 찼다. 그리고 정 중령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정 중령 임마(son of beach)! 너의 명령이 받아들여졌다(your order accepted)"며 그 뒤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놈은 반드시 한국군으로 돌려보내겠다, 연합사에서 꺼지라"고 했다.

서울 인근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이에 대해 우리 의견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통사정하는 한국군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호통 치는 미군 고위 장교. 모두가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점에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일방적인 행동을 제지할 능력과 의지가 상실되고 오직 미군 고위 장성들 간의 합리적 결정을 구하며 사정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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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뉴스
 
이 글은 사상편항의 의혹이 있는 김종대씨의 글이라 좀 논란이 되기도 하는데, 현재까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리얼한 증언은 없었으니 참고해 볼만함.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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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타치 14-11-11 10:36
   
목을 잡고 어쩌고 영화 같네요. your order accepted 암유어파더
mago 14-11-11 12:28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왈가왈부하기는 좀 그렇군요. 먼저 정보의 출처와 당위성에 대해 알아야겠네요.
무라드 14-11-11 12:32
   
당시 한국과 미국의 위상차이가 잘 드러난 일화네요
저런 주제에 영사미가 난리쳐서 북폭철회시켰다는건 정말 희대의 개그임 ㅋㅋ
두화니가 랭군폭파건 보복한다고 전쟁하려드니까 미국대사가 무릎꿇고 사정했다는 설 만큼 웃기는 얘기죠
     
프리워커 14-11-11 13:50
   
예전에 박정희가 말 안듣고 건방떠는 미국대사에게 재털이를 던지고, 호통을 치며...
우리 한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얘기를 하자, 미국대사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책에서 봤는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인가?... 긴가민가 하네요.
그냥 무라드님 댓글 보다보니 생각나서 써보네요. ㅋㅋㅋ
          
Irene 14-11-11 21:06
   
이건 믿기지 않네요.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이야기 했다고 같은 민족도 아닌
타국가의 대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했다?
뭔가 북한스러운 이야기네요..
               
프리워커 14-11-12 02:31
   
ㅋㅋㅋㅋ 진짜 그때 이런 류의 소설이나 카더라가 많았어요.
그 대표적인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같은거고..ㅋㅋㅋ
무말랭이 14-11-11 14:01
   
1994년 3월이라...그시절 군생활할때는 정말 몰랐다는, 97년 제대하고서 그런일이 있었구나...했는데.
94년이면 전차장달고서 화천, 다목리, 사방거리로 훈련나갈때인데,..
     
없습니다 14-11-11 14:31
   
당시 근무했던 사람 이야기 들어보면 유서쓰고 완전군장 대기에 간부들까지 전원 영내대기했었다는데요?
          
무말랭이 14-11-11 14:50
   
글쌔요. 전 기억에 없네요. 그래도 우리부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2군단 직할 제1전차대대로 최초 기갑부대인데..그런기억은 없었네요. 전쟁나면 우린 바로 전방으로 치고 올라가는 부대인데도..
94년에 특별한 기억은 유격다녀온날 대대 일직부관 근무할때 김일성 죽었다고, 상급부대에서 전화가 많이 왔던것, 그리고 일직사령이 유격갔다가 힘들었을텐데, 작전과장(부대장)실에서 잠자라고 했던기억?
자잘한 그런기억은 있어도 1994년전쟁이야기는 제대후에 알았습니다.
아~그리고 영내대기 했던기억도 없고 유서는 당연히 없고요.

뭐. 그런상황을 대비해서 진도개훈련등을 했었을지는 모르겠네요.
          
다른의견 14-11-12 12:19
   
간부들의 징후조차 없었습니다.. 카더라 이야기 입니다.
     
Irene 14-11-11 21:06
   
화천이면 2군단.. 반갑네요..ㅋ
user386 14-11-11 14:45
   
이 드라마같은 기사는 좀 덧붙어지고 과장이 있을지 몰라도... 사실에 근거한다 봅니다. 미국이 94년에 영변 폭격을
감행하려고 했던것도 사실이고, 항공모함이 한반도 이동도 있었고, 여차하면 전쟁불사까지 각오 했다는 정황은
여러군데에서 확인된 바 있으니까.
커런트스탁 14-11-11 17:59
   
와~~ 일개 미군 대령 색히가 서울시민 백만명 목숨을 골로 보낼 수도 있었네...
amiko 14-11-11 19:29
   
미군철수 선동하기에 딱 좋은 소설인요.
Irene 14-11-11 21:08
   
과장이 있을수도 좀 소설일수도 있지만
미국의 한국을 따돌린 영변 핵시설 폭격
시도는 이미 사실로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깡통의전설 14-11-11 21:23
   
영변핵시설 폭격하기 위해 미국이 움직인건 사실이었고 실제 미국 vs 북한 구도 였죠.
당시 시대 정황상 북한의 보복으로 인해 우리가 말려들 요지는 충분했고요...
우리 시각은 일종의 북한의 인질 개념이 강했지요. 미국이 북한 건드리면 북한은 한국에 보복한다는 컨셉. 어찌보면 북한의 또라이 컨셉때문이지요. 미국한테 맞아도 아프다 못하고 우리에게 지랄 한다. 이런거요.
미국의 입장에선 미국 vs 북한이니 우리에게 통보만 해줬죠.
우리군은 뒤늦게 알았습니다. 제대로된 정보 자산이 없었던터라 미 제7함대가 움직이고 있는지도 몰랐지요.
북한은 이미 중국/러시아 정보망을 통해 알고 있었고요...
힘이곧정의 14-11-11 23:30
   
조중동 기사를 볼 때는 같은 내용을 다룬 한경오 기사를 보고, 한경오 기사를 볼 때는 같은 내용을 다룬 조중동 기사를 봐야 중립적으로 사안을 바라볼 수가 있죠.

오마이뉴스만 봐서는 그닥....같은 내용을 다룬 조중동 기사를 보지 않는 이상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조중동 기사 역시 같은 내용을 다룬 한경오 기사를 보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죠.
Har00 14-11-14 07:09
   
영변 북폭 계획은 실제했던 것으로 압니다.
이에 대한 후속책으로 미국은 자국민 철수 계획 작전 실행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당시 미국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측에도 미군의 협조를 얻어 자국민 철수에 동참한다는 단계에까지 갔었던 것으로 압니다.
후에 작전이 취소되고 이는 단지 철수 계획을 보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둘러 댔지만요.
한마디로 최종승인 단계에까지 갔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정황상 김영삼 전대통령의 항의도 추측가능합니다.
아마도 클린턴에 직통으로 연락했겠지요.

당시 김영삼 전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처럼 쿠테타 주동인물도 아니었고 더더욱이나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닌 직선제를 통해 당선 되었죠.
거기에 오랜 기간동안 김대중 전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왔던 민주투사란 이미지도 갖추고 있어서 그 위상이 이전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여기에 오랫동안 국방위를 역임해 왔기 때문에 군 사정에도 밝았고, 군 장악력도 비교적 뛰어 났습니다.
때문에 한미 연합사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었다 하더라도 간접적인 영향력이 충분했고,
클린턴 역시 동맹국 수장인 김영삼 전대통령의 반대를 무시할 수만은 없는 처지였을 겁니다.
꾸물꾸물 14-11-14 11:06
   
김영삼 전 대통령이 칼럼인가 책인가, 인터뷰인가 어느건지 기억이 안나지만 얘기했던 부분이 북핵위기때 미군의 공습이 목전에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