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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18 22:15
[잡담] 예전에 어디서 흘려들은건데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잘 싸운 이유가...
 글쓴이 : 어머
조회 : 6,632  

그즈음 한국에서 하던 드라마중 전쟁드라마가 있었는데
드라마다 보니 중소전투씬의 전술이 천편일률적인 우회협공이었답니다.

뭔 매회 새로운 전술을 들고 나올수도 없고 맨날 똑같이
"3분대가 버티는 동안 1분대는 왼쪽으로 2분대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적의 배후를 공격하라"..라는 전술을 매일매일 드라마로 반복하다보니 그런 인기드라마만 보다가 베트남 온 한국군이 전투만 벌어지면 
"1분대는 왼쪽으로 2분대는 오른쪽으로..." 했다더군요.

당시 미군들은 요즘 돌아다니는 유튜브영상 속의 미군과 다를바 없이 쌈만 났다하면 제자리서 붙박이로 있으면서 대치만 하고 항상 포병,항공지원요청을 불러서 적과 전투를 했답니다.
그러다 백어택(?)하는 한국군을 보니 엄지척! 했다고 하더군요.

역시 옛날이 지금이나 한국드라마가 짱인가 봅니다.
ㅎㅎ

뭐... 농담반진담반식으로 썻지만 정말 그랬다더라구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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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땜질 16-01-18 22:46
   
당시 한국에 그런 드라마가 있었나요?
그 시절에?
     
날자꾼 16-01-18 23:11
   
꽤 옛날에 오히려 지금보다 전쟁 드라마가 더 활성화 됐어 있었죠. 배달의 기수라든지, 3840유격대, 전우 등등 있었는데.. 이중 그래도 오래 돼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배달의 기수인데, 이게 배트남전 시절에 있었는진는 잘 모르겠네요. 제가 이런 작품 볼때가 5공때였거든요..^^;;
아님 영화던가..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라든가 빨간마후라던가 등등..^^
정봉이 16-01-18 23:10
   
에이..고착과 우회전술은 아주 오래된 기본전술아닌가요?
모니터회원 16-01-18 23:36
   
저희 아버지가 베트남 참전하셨는데(해병대 180기) 참전후 집에 오실때 라디오 하나 사들고 오셨답니다.
저는 태어나기 전 상황...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160623
당시 TV는 물론 라디오 있는집도 흔하지 않았어요.
(최초 국산TV가 1966년 출시, 월남전 파병이 1964년 9월 ~ 1973년 3월까지라 고가였을것으로 추정)
[1966년 금성사(현 LG전자)에서 최초의 국산 TV를 만들었다. 4개의 다리가 달린 19인치 가정용 제품이었다. 가격은 6만3510원으로 당시 쌀 한 가마가 2500원이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고가였다]

한국드라마는 있을지 몰라도 전투씬 있다고 따라할 만큼 매일볼 상황이나 여건은 아니었을겁니다.
참전용사 대부분이 가난하고 돈없는 젊은세대가 참전한건데 TV드라마 본걸로 전투를 수행했을리가...
     
태강즉절 16-01-18 23:51
   
그전에도 티비는 많았지여..웨스팅하우스 제니스 소니..등등..
최초 흑백19인치...말로만 국산이죠..부속은 전부 일제 진공관 조립이었던걸로.
당시 티비시리즈물로는..센더스중사가 나오는 전투!(컴벳)..최고의 시청률이었을겁니다.
아주 그냥!!!!... 분대 전투의  바이블로..ㅋㅋ
          
날자꾼 16-01-18 23:54
   
컴뱃!! 우천시 일과 취소시 내무반에서 비디옽테잎으로 항상 틀어주고 했던 그 컴뱃~
^^;; 재밌었죠~
          
잡덕만세 16-01-19 02:27
   
월남전 당시면 64~73년 tv는 마을에 한두대 있을까 말까 수준일텐데요
               
태강즉절 16-01-19 13:06
   
일부 농촌 지역은 그랬을진 몰라도 설같은 경우 웬만한집엔  다 있었지여.

그리고 아주 특수한 경우겠지만..월남전시. 월남과 집간에 국제전화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걸어오는거였지만.)
마치 요즘 6`70년대는 다 찢어지고 가난하게 산것이 트렌드인양 어서 홍보하던데..ㅋ
그때도 도농 차이가 너무 커서리 그런거지..살놈은 다 먹고 살았습니다 그려!!
                    
뽐뿌맨 16-01-19 13:19
   
서울 지역도 다 있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60년대말~70년초라면 서울 변두리 지역은  TV가지고 있는 집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월남전 이후에는 돈이 돌았는지 보급률이 갑자기 폭증하기는 했습니다.
솔로윙픽시 16-01-18 23:40
   
양쪽에서 우회 포위하면 팀킬합니다...
고독한늑대 16-01-19 00:21
   
그것보다 솔직히 6.25때 실전경험이 풍부한 지휘관들이 많으니까 그랬다고 봐야죠..
게다가 한반도 지형상 고지전과 게릴라전 위주의 전투이고 베트남전 역시 비슷한 양상을 띄었을것이고요..

또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 민족이 전투는 원래 잘했어요..

고려시대에만해도 발해를 멸망시킨 그 큰 요나라가 고려와 대규모 전쟁을 치루고 대패해서 요나라가 멸망하게 되었고요..

원나라 시절에도 원나라와 40년간 전쟁을 했고요.. 전세계적으로도 유일하죠..
그리고 고려가 원나라에 동맹신청을 요청했을때 쿠빌라이가 당나라 이세민도 정복시키지 못했던 고려가 자기한테 굴복했다고 좋아했고 고려를 제대로 대우했었죠..

그리고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이 반란을 일으켜서 몽골이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했을때 고려군 2천이 홍건적 60만을 휘젖고 다녔고 홍건적으로 고려군이 온다고 하면 도망다니느라 정신없었죠..

그리고 명나라시절에도 조선의 기록을 보면 중국인 10명 100명보다 조선인 한명이 더 싸움을 잘해서 명나라에서 후금과 싸우기 위해서 조선인을 뽑았다고 기록되어있고요..

또 중국인에게 퍼져있는 가오리빵즈는 흉폭한 오랑케라고 인식되어있는 반면에..
한국인들에게 중국군은 당나라군대로 인식되어있죠..
     
납땜질 16-01-19 10:11
   
쿠빌라이가 이런 말도 함...
고구려는 그리 강했는데 너넨 왜그러냐...
민골 40년도 초반에 개털리고 강화도로 튄 다음
방치하는거였지
4leaf 16-01-19 01:11
   
드라마 이야기는 우스겟소리로 하는 내용들이고 한국전쟁 지휘관 이야기도 아니라고 봅니다. 전쟁의 양상이 총력전과 게릴라전은 엄연히 양상이 다르니까요.

그것보다는 50~60년대는 북한에서 내려오는 간첩을 잡거나 북으로 공작원 보내는 작전이 많았던 시기입니다. 이러한 작전이 나중에 자연스럽게 게릴라전에 대한 대응능력으로 발전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파병군인들이 순환배치되고 피드백이 되면서 발전된 것이죠.

그런데 그 와중에 김신조사건 터지고 삼척울진무장공비사건 터지고 푸에블로사건 등등 이런게 빵빵 터진건 안비밀...ㅎㅎㅎ
허스키슛 16-01-19 02:26
   
한국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을 갖춘 지휘관들이 많았고 전술교리또한 많이 연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부대 정신교육시간에 배웠던 내용들..

제가 옛날 큰아버지 카더라통신으로 들은봐론
그리고 수색등 작전시 적과 조우만 하면 화력지원받고 포격후 들어가는 미국스타일과 달리
한국군은 들어가서 같이 치고박아버려서 득을 많이 봣다고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한국군이 피해를 봤다치면 100배로 돌려준다고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었다는데 이게
일제가 우리한테 써먹었떤 방법이라고.. 대민봉사작전과 병행해서 득을 많이 봣다고 하셨음.
TimeMaster 16-01-19 02:56
   
우리가 잘 싸웠던 이유는 딴것없이 6.25전쟁으로 실전에 처절하게 단련된 지휘관들이 많았고 또한 지리산등에서 빨치산 토벌등으로 인해 미군과는 달리 게릴라전술에도 능통했기 때문이었죠.

우리 빨치산 토벌작전의 주내용이 이미 빨치산 토벌때 성공적으로 통했던 모택동이 말한 인민이 물이라면 공비는 물고기라는 공생관계를 끊는 방법으로 상당한 대민지원등이 많았던걸 베트남전에서도 활용한데다 지리산, 태백산등의 산악과 고지전등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는 빨치산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했던 경험이 월남전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이후 군의 대민지원등은 지금까지도 우리군의 전통이 되어 해외파병부대등이 현지 대민지원사업등을 다른 나라 PKO등에 비해 많이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롯시 16-01-19 09:03
   
22사단55연대3대대12중대(화기중대)81mm박격포 출신으로 페바1년 전방1년 다채운 예비군7년차 1인입니다.
교육시간뿐만 아니라 전술 훈련과 영상 및 정신교육등을 할때 항상 느껴왔던 부분이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보병들의 모든 전술 중 하나가 바로 화력지원입니다.
기동성 좋은 소총수사이에는 61mm똥포가 존재하고 대대단위안에 소총소대사이에 81mm박격포가 배속 지원을 나갑니다. 이때 보면 전술자체가 현재로서는 구식일지 모르지만 지형지물 및 극한의 상황(ex.악천후나 지형지물의 험난함)들이 다소 많은 한국의 배경이 저 당시에 비슷했을겁니다.
본인이 군생활 시절에 GOP에서 여러가지 실전상황을 맞닥드렸을때 OP소초(중대장이지내고있는소초)및 TOC(대대장이 지내는 소초) 그리고 소초들사이에 라지트 및 토드를 지닌 군단에서 지원보낸 소초들이 존재합니다.
kctc라는 과학화 실전모의 훈련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각 부대마다 대략 9년에 한번 돌아오는 훈련으로써
엄청 재수가 없어야만 걸리는 훈련이라고 하는데요. 이때 홍천에 위치한 과학화훈련에서 경험했을때 14박15일동안 진짜 내가 전시상황에 있는것처럼 생동감까지 강했습니다.
그 훈련 당시 전술이 소총수들이 기동 및 후퇴등 이동할때 바로 화력지원을 주로 사용을 합니다.
더군다나 베트남전 같은 경우에는 정치적 요소가 엄청 가미된 상황이었구요.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부분중에 하나가 바로 베트남전도 포함이 되어있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한국군들이 활약한 부분중에 하나가 "잔인함""난폭함"도 포함되어있었고
"공포심"유발이라는 부분도 한 몫했습니다.
또한 작전전술로는 현재도 사용하고있는 작전들이 많았다고합니다.(군 시절 교육시간에 배운내용)
유럽국들이 3년이었나 3개월인가를 골치 썩고 피해가 많던 지역을 한국군이 3개월이었나 3주였나만에
탈환까지 했을정도이며 그 부분에 대해서 미국 및 여러나라에서 전술 작전 지휘 교육을 오히려 받아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뭐 기타 많은 부분들이 있지만 이거 알고 있는 내용들을 글로 적어보려고 하니 너무 많네요 ;;;
혹 궁금하신분들 계시면 더 남기겠습니다 ㅎㅎ
나나미츠키 16-01-19 11:30
   
지금도 동일합니다. 소규모인 분대부터 소대 중대 대대 연대 등 기본편제가 똑같습니다. 단지 규모만 다를뿐이죠. 제 기억에 남는 훈련이 연대끼리 훈련때 기본적으로 소모전투가 1대대 선봉으로 2대대 지원으로 3대대 후방방어인데 초전부터 1대대 전체를 우회타격으로 쓰고 2대대를 1대대 선봉으로 위장 , 3대대를 후방방어는 소규모 병력만 남기고 2대대 위장 선봉 지원 . 게임은 2대대 집중화력사 맞고 전멸 , 3대대도 집중화력사 같이 맞아서 반이상 전멸이고 잔여 소총부대와 공용화기 소대들은 생존해서 후방으로 후퇴 , 이때 우회타격 들어간 1대대의 공격에 적 지휘관부대 전멸로 게임이 끝났죠.
푸컴 16-01-19 12:50
   
제가 파병 다녀오신분에게 들었던 내용과는 다르네요.

남의 나라와서 죽기 싫었기 때문에
미군애들에게 지원받은것을 최대한 퍼부었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아군이 희생된 만큼 10배, 100배 보복하였다고 들었는데...
미군애들은 위험지역 무작정 포격이었지만,
우린 수색을 통하여 확실하게 포격하는 방식이었다고...들었구요.
sangun92 16-01-19 16:24
   
1. 베트남 파병은 73년 까지. (73년 3월에 완전 철수)
  당시 TV는 동네에 1-2대 있는 수준. (당시 강릉시)
  72년에 펠레가 소속된 브라질 산토스 팀이 내한 경기를 했는데
  그 경기도 TV가 있는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 관람했을 정도. 
  그러니 드라마 영향 운운하는 것은 무리.

2. 한국군이 미군과 달리 잘 싸운 이유는 전술의 차이 때문임.

베트콩의 공격을 받는 경우
미군은 한군데 짱 박혀서 포병의 야포 사격과 공군의 공중지원을 요청하고
신나게 두들겨댄 후에야 베트콩이 공격했던 위치로 진격.
그 때는 이미 베트콩이 공격을 퍼붓고 나서 이미 철수한 후.
따라서 피해는 입었으나 전과는 미미할 수 밖에 없음.

반면에 한국군은 베트콩의 공격을 받으면
아군의 피해를 무릅쓰고 적진 돌격해서 백병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음.
베트콩은 자신들의 피해 발생을 막기 위해 후퇴.
따라서 한국군은 피해를 입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베트콩 사살 등의 전과를 올림.
이런 일이 누적되자, 베트콩은 더 이상의 피해 누적을 막기 위해 한국군과의 교전을 꺼리게 됨.

그 결과로 한국군은 미군보다 훨씬 전투를 잘한다고 평가를 받게 됨.

(참고) 작고한 내 형님이 해병 1968년도 군번으로 월남 파병 갔다왔고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음.
날자꾼 16-01-19 16:33
   
제가 추측하건데, 정말로 드라마를 보고, 월남전에 적용한 소대나, 분대가 있었다면, 우리가 요즘 알고 있는 TV드라마가 아니라, 군 홍보용이거나, 당시 많이 제작됐던 반공영화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학교나, 마을회관에서 사람들 모아 놓고 단체관람을 많이 했던것 같던데,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죠..^^ 파병됐던 사람들 중에 영화 많이 봤던 소대장이나, 분대장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깐 말이죠.
Centurion 16-01-19 18:38
   
당시 월남파병군 사령관이 채명신 중장이었죠..

채명신 중장은 6.25 때 백골병단을 이끌고 북한 지역에서 유격활동을 해서,
북한군 주요인물을 체포하거나, 암살하는 등 게릴라전의 명수였습니다.

그래서 호주군 사령관이 당시 미군 최고지휘관인 별넷짜리 웨스트모어랜드가 들어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채명신 장군이 오니까 일어나서 경례를 했다고 하죠.

왜그랬냐고 물어보니,
'미군은 호주군보다 게릴라전이 한수 아래다.. 하지만, 한국군은 호주군보다 한수위다' 뭐 그랬다고 합니다..

근데, 이럴 수 밖에 없는게..
일단.. 지리산 남부군을 토벌한 백선엽 같은 장군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던 장교였었고..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의 토끼몰이식 토벌에 1940년대 궤멸되어 지휘관이 전사할만큼 궤멸되죠.
국군 창설멤버에는 백선엽 외에도 신현준 등 만주군관학교 출신, 간도특설대 요원들이 많았구요.

그리고, 여순반란사건과 4.3 제주사건, 6.25 이전 소규모 전투 드 게릴라토벌전이나 소규모 전투는
상당히 많았고, 이런데서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죠.
뭐, 심지어 일본도 휘두르고, 사람 목 쳐대거나, 상당히 지독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던 그런 인물도 있었구요.

채명신 중장은 그런 일본군 장교와는 좀 다르게 교사 출신인걸로 아는데..
어쨌든 국군에 들어와 백골병단 유격활동으로 게릴라전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고..
국군들도 딴건 몰라도, 게릴라 토벌전에는 상당히 이골이 난 간부들이나 노하우가 쌓여있던 군대였죠..

거기에 더불어 채명신 장군의 민사작전도 성공적이어서,
다른 나라 군대와 달리 모내기를 도와주거나, 학교를 지어주고, 도로를 닦고,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등..
요즘도 한국군이 잘하는 대민지원을 아주 잘해서,
게릴라들이 숨을만한 마을 자체를 이주시키거나,
마을주민들을 포섭해서 정보를 얻기도 하고 그래서,
어쩔 경우엔 베트남주민들이 베트콩 기습을 먼저 경고해주고 그럴 정도였다고 합니다.

얼마전 다큐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거기다 한국군이 군기가 상당히 엄하고,
당시 병력들도 국군 내에서 선발된 엘리트랄 수도 있는 자원들이어서..
사기가 낮은 미군보다도 멘탈이 좋은 편이라 잘싸운 편이었죠,
무더운 기후 자체도 우리나라 군인들이 잘 버티는 편이었고,
그 때 당시 군인들이 대부분 농사꾼이라.. 체력도 좋고, 끈기와 생활력이 강하고,
순박해서 명령도 잘따르고 그랬죠..
스마트MS 16-01-19 19:09
   
한국군의 작전개념이.
당시. 먼저 파병되어 작전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미군 전투부대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였기에.
전과를 만든것으로 기억합니다.
윗분이 언급하신것처럼.
채명신 장군은
미군의 수색 및 격멸.search & destroy 개념의 정규방식.
즉 베트공이 매복하고 있을 지점으로 판단되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탐색 후  강력한 화력. 공군/포격전등으로
섬멸하는  정규전 방식이였는데.
채 장군님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유격대인 백골병단.을 지휘하여 북한군 후방지역에서 펼치던 유격전 경험을 바탕으로
분리separation-차단interception-격멸destroy이란 개념을 세워.

베트공 과 베트남 주민을 분리시키고.

베트공과 주민간의 상호관계를 차단해 고립을  유도하며.

주민으로 부터 얻을수 있는 정보. 보급등을 차단함으로써 고립화 혹은 무력화된 베트공을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여. 포위- 포착 섬멸하는것을 실행 함으로써.
전과 와 함께 안정화된 평정지역을 확대해 나간것으로. 결과를 보여준 국군이였다고 하네요.
도나201 16-01-20 01:22
   
한국에 드라마는61년에 처음 시작한것으로 알려져잇었고
당시 영화가 대부분 이였죠..

뭐 625를 겪은 세대이니 전후 10여년 지난후라서

문제는 진지배치와 그에 따른 전투병들의 참호전의 유동성이 상당히 유효했고,
미군의 항공지원또한 협조가 잘된것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베트남전후 미군의 진지구축에 있어서 이당시 진지구축을 좀더 발전시켜서 진지를 구축하는 것으로 알려져잇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확인되기 했읍니다.

뭐 구글검색에 ..월남전 진지구축  한번검색해보시면 상당부분 도움이 되시라고 봅니다.

물론 이진지의 약점이 잇기도 합니다.
언젠가 월남전특집으로 한 소위가..당시 전장을 둘러보는 다큐가 있었는데...

물한잔하시게........하며 동료가 죽은 자리에다........향불올리는 것을 본적이 잇읍니다.

당시 진지구축의 약점이 상당부분드러난 사실적인 묘사를 한 내용이 잇읍니다.

진지구축에.. 전투병의 유동성이 막힐시에는 상당부분 고립된 상태에서 아사할수 잇다라는
뭐 병력의 차이도 잇엇고, 그에 따른 화력의 부족도 잇엇지만,

보통 화력의 4배정도는 감당할수 잇는 수준의 진지구축이기에
현재까지도 이진지구축의 사례는 상당한 교범적인 사례로 남겨져 잇는 상황입니다.]

두번째는 현지인의 지원 및 베트콩의 배척.

현지인은 미군이라고 하면 단순히 적이라는 개념 보다는 민족의 반역자 침략자라는 인식이 강해서
절대로 미군에게는 적대시 하는 상황이엿지만,

한국은 좀 다른 배경을 갖고 잇엇죠.
베트남 월남이죠.. 당시 정권에서 한국의 경향은 그저 동북아의 자기보다 못사는 나라
내전으로 피폐한 나라일뿐 ...


근데.. 이게 상당부분 농사적인 부분에서 그네들을 앞질렀죠..
특히 이양법 및 물데기. 수위조절을 잘해서 .
수확량을 상당부분 증식시켜 주었고,
실제로 시범을 보엿기에 그네들이 오히려 매료가 되었죠.

거기에 피뽑기라든가 실제적인 농사의 근본부터 다른방식으로 인해서
농사에 혁신이라고 할만큼 농경기술은 우리가 앞서서 가르친것이 주효했다고 보는 것이 옳읍니다.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태권도역시.. 강력함을 상당부분 인지 하고 잇었죠.
중국의 소림사권법도 잘알려진것도 사실이고,

거기에.. 학교설립이라던가 사실상 대민지원은 상당부분은 우리가 지식적으로 앞섰다고 보시면 됩니다.

농경적인 앞선 지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낸것이 상당히 주효했다는 것이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세번째로 월맹군의 군사교관.......북한군....
월맹군의 군사교육교관은 대부분은 중국을 통해서 온 북한군교관이 대부분이엿다라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입니다.

실제로 작전참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전쟁말기에는 작전장교고문으로서 전장지휘고문을 맡기도 합니다.

월맹군역시 출신들이 대부분 농사꾼 출신이라서 전쟁하고는 거리가 먼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그들을 교육시킨것은 바로 북한군이엿고,

그들에게는 한국이란 존재는 거의 북한군교관의 실력과 비슷하다라는 선입견을 갖고 잇었고,
실제로 이미 본국에서 베트남 출정하기전에 교육은 상당한 교육을 받고서 떠났기에 전투력은 실상 별반 차이이가 없었던것도 맞는 말이라고 봅니다.

한국군의 공포감은 바로 이부분이 더해져서 오히려 더욱가중되엇을지도 모릅니다.

고지전을 근 3년간을 해오면서 터득한 부분 여기에 경험이 가중되어서
적의 예상로를 잡는것이 상당히 유리한 측면도 잇었읍니다.


미군은 우선병력이 밀리면 철수 폭격 처럼 그들에게 상당부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죠
밀림이라는 후방의 든든한 지원군이있었기에 이동속도와 퇴로만 확보된다면 그들은 전혀 두려울것이 없었죠

근데 한국군진지는 우에 진지배치도를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마치 고구려성의 혜자처럼  진입초구에 자연스레 포위하게끔 진지배치를 하게 되엇죠.

즉 철수보다는 사수에 상당한 작전개념이 다르기에 월맹측도 작전고지점령에 애를 먹을수 밖에 없었읍니다.
퇴로가 확보되엇다 한들 진격이 목적인 작전을구사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월맹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을수 밖에 없었지요.




즉 피해를 목적으로 고지전을 한다음 후퇴로를 톹해서 유유히 철수 병력 보존 및 재집결을 반복하면서
점진적인 참호격파를 하엿는데.....

진지배치가 화력의 집중
공격예상루트의 단순 및 일편화
후퇴로의 장애물설치

등으로 인해서 모든 군사움직임을 진지에 발을 묶어두는 동안 배후 보급로, 퇴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경우를 진행한 작전이 대부분이게 되었읍니다.


이것은 전쟁말기까지 한국군진지를 한번도 ㅌ탈환을 하지 못햇읍니다...


미군의 진지 작전개념을 잘다룬 영화가 햄버거힐이니.. 실제로 영화한편 보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보입니다.


넷째로 한국군의 잔악성, ......
사실상 잔악성이라기 보다는 보복성 행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뭐 이건 전쟁범죄에 해당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제너바협정위반이기도 하고,,
일례로..
한국군 병사를 잡아서
정말로 모든 살집에 칼로 포를 떠놔서 매달아 놧답니다.
후에 그것을 보고 마을로 가서 10명을 똑같이 매달아 놧다고...
그것이 계속반복되자. 월맹측에서 먼저 손을 놓았다고 전해지는 전쟁전설이 나오는데..모르죠...
정확한 사실은 아니고 떠도는 풍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건 확실한듯 합니다.
이상하게 강한 전우애.. 는 진짜로 잇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옆에 전우가 한명죽으면..
미군은 도망을 쳣고,

우리군은.........돌격 앞으로 외쳤으니...
다르긴 달랐죠........사실......................이런 시 불 잡 놈들......하면서 뛰쳐나가는 병사들이 간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병전에서 이상하게 강했다기 보다는 눈돌아갔다라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수도 있읍니다.
당시 사회상이 진짜로 동네 어린동생이 맞고 들어왔다고 하면 동네 패싸움하ㅣ 일쑤였던시절이였으니까요.


마지막을 미군의 신무기...

뭐 밀림에서는 AK소총이고.. M16에 완승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한군국 입장에서 마구 쏠수 잇는 보급의 완승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미군의 화력지원보급은 상당히 좋아서
우리군에게는 그어느때보다도 풍족한 물자로 전쟁을 치룰수 잇었음..

항상 부족한 물자로 유지되지 못했던 진지방어가... 풍족한 물자로 인해서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 옳을듯.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이야기는...
제군생활..당시 인사계님이 참전용사셨읍니다.
사단.. 짬밥3위셨죠..
9사단출신입니다.
월남전참전 하셨다고 하기에 언젠가 작업중 휴식시간에
잠시 담소하다가 제가 물었죠..
인사계님.. 월남전때 어떠셨어요..???

그분이 한마디 하시더군요...


니들이 전쟁을 아냐......


우스게 소리가 아니라 그렇게 진지한 눈빛과 눈물이 고인듯.. 단호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시더군요.

더이상 묻지않아도 그분이 얼마나 힘드셨을지.....순간
실수했구나......싶더군요..

그후 참전군인에겐 절대로 그런 질문하지 않았읍니다.
아마도 위 이야기가 제가 하고싶은 말일듯 싶네요
귀요미지훈 16-01-20 01:23
   
원래 우리민족이 민족성향이 착해서 남의 땅 빼앗고 괴롭히지 않을 뿐...전투민족이에요.

예로부터 숫적열세, 장비열세에도 많이 이겼지요.

비슷한 조건이면 무조건 박살내고 이깁니다.

안 그랬음 지금 한글이 아니라 짱개말이나 쪽바리말로 댓글 달고 있을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