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밀리터리 게시판
 
작성일 : 11-09-06 14:07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제3편-브금
 글쓴이 : skeinlove
조회 : 1,127  


BGM 정보 : http://heartbrea.kr/bgmstorage/29389 개드립용

이 박사는 한국 전투 경찰대가 언제부터 미 해병대와 같이 싸우게 되었는지 그 내력부터 설명해주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 해병 1사단은 아직 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5연대가 주축이 된 1개 여단을 한국에 파병했다.

(해병 5연대는 태평양 전쟁 초기 미군의 최초 대반격전이었던 과달카날에 상륙했던 부대였었다.)

5연대 연대장은 앞에서 소개한대로 아직 중령으로서 37세였던 머래이 중령이었다.
------------------------------------------------------------------------------------------

그는 텍사스 A&M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투신한 전형적인 텍사스 사나이로 호걸스런 풍모가 말해주듯

용감무쌍한 지휘관이었다.

------------------------------------------------------------------------------------------

1950년  8월 3일 부산에 도착한 5연대는

그 다음 날로 기차와 트럭을 이용해 북한군에게 고전하고 있던 마산 진동 전선에 급파되었는데

마산 서부 진동 전투에서부터 한국 전투 경찰이 해병 5연대에 배속되었다고 한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창원역에 도착한 미 해병 1 사단 1전차 대대 M-26 전차
미 본토에서 급히 출발한 전차대는 전차포의 영점도 제대로 잡지 못해서 역 구내에서 인근 산의 표식에
포사격을 해서 역 주변을 포성으로 뒤 흔들었다.

6.25 침략이 감행되자 각지의 경찰들은 단위 경찰서 별로 후퇴했었는데 가족들까지도 그냥 적 치하에 두고 낙동강까지 몰린 아군의 마지막 영토로 피신했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을 빼앗긴 뒤 한강을 도하해서 후퇴하는 전투 경찰대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남행길을 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기차도 타고 트럭도 이용했지만 도보로 걸어 부산까지 온 경찰들도 많았었다.

공비 토벌의 경험을 담은‘지리산 호랑이’의 저자
김 두운 총경은 이렇게 쓰고 있다.
6.25가 발발하자 전라북도의 모든 경찰들은 몰려오는 북한군을 피해서

남원 초등학교로 급히 피난해 일단 집합했다.

히룻밤 자고 나자 전북 도경의 이 기영 경무 과장은

그 곳까지 따라와 있던 전북 도경 400 여명의 인원들에게

전북 도경이 더이상 지탱할 능력이 없어 해산한다는 것과

각 경찰들은 재주껏 살아남아 다시 만나자는 비통하면서도 어이없는 지시를 했다.

지금의 거대 국립 경찰 조직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힘든 국란의 초창기 때의 이야기다.

김 두운 총경은 자서전에서 자신과 부하 경찰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생존 노력을 했는가를 회고하고 있다.

김 두운 씨와 그의 일본군 시절 학병 동기생 김 원룡 경감이 인솔하는 60명의‘순경’부대원들은

자연히 전투 경찰대가 되어 뜨거운 여름철에 일제 99식 총 한자루만 매고

남원에서부터 부산을 목표로 걷기 시작했다.

일주일간 주민들에게 구걸해서 얻은 밥을 빈 지서 마당에서 먹

미군기의 오폭과 공비들의 기습으로 사상자를 내며 정부가 피난을 간 부산으로 걷고 또 걸었다.

기약 없는 길을 가던 전북 도경 경찰대는 경남 함안군 법수면에서

미 25연대를 만나 자연적으로 이 연대에 배속되었다.

전북 도경 본부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판에

미군에 붙어 있으면 밥은 구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김 두운 씨는 미군에 예속되어 있는 동안 있었던 사건을
자세히 쓰지는 않았지만

북한군 4사단을 상대로 싸우느라 3 명의 전북 도경 소속 경찰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무렵 미군 각 전투 사단에 배속된 전투 경찰들은 

대부분 아군 영역으로 수도 없이 넘어오는 피난민 관리와 적성 분자 색출 등의 후방 임무를 맡았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전쟁 중 공비들의 국내 교통망, 특히 철도에 대한 공격은 집요했다.
미군이 운영하던 네 편의 병원 열차까지 습격을 당해 미군들은

열차에 호위 헌병들을 태우고 전방과 측방을 경계하며 운행했었다.

한국 전투 경찰들은 공비들을 격퇴하고 철도 교통망의 안전을 확보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전쟁 수행과 국내 경제를 원활하게 한 또 다른 숨은 공로였다.

 

미군에 배속된 전북의 전투 경찰대는 전북 도경 본부가 부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지만 도와 줄 길이 없는 도경에서는 직원들이 미군에게 배속되어서 밥은 굶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 안도하고 있어야 했다.

북진이 개시되면서 전북 도경은 미군을 따라 전주로 돌아와
재편성을 하고 아직도 적치하인 전북 지역 탈환에 나섰는데 무기가 부족하여 지역 유지들이 헌납한 쌀을 팔아 미군이나 암시장에서 총과 실탄을 사들여 무장하였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물자가 풍부한 미군들에게 배속된 전투 경찰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산속의 전투 경찰
원문에는 공비 소굴을 발견한 전투 경찰대라고 써있으나 잘 살펴보니

경찰 매복대가 산속에 은밀히 구축한 거점으로 보인다.

취사하는 연기와 우측의 식수 캔, 그리고 잘 구축한 총가와 정렬한 총기들이 이를 말해준다.

한편, 한국군에게 배속된 경찰들은 치열한 전투를 겪어야 했다. 전황은 낙동강 전선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국가 존망의 위기 순간에 있었다.

부산으로 피난 온 경찰들 중 상당수가 전투 부대로
급히 편성 되어 국군에 배속 되었다.

-------------------------------------------------------------------------------------------

한 예를 소개한다.

강원도경의 경찰들은 춘천에 집결하여 남쪽으로 철수했다.

전북 도경과 달리 이들은 끝까지 해산하지 않고 남으로 내려왔다.

먹을 식량이 없었던 강원도경 손 계천 경무 과장은

국군 1 군단에 가서 식량 도움의 요청을 했지만

1군단에 배속되지 않으면 쌀을 못주겠다는 무정한 응답에 할 수 없이 배속되어 전선으로 나섰다.

경찰관들의 나이는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도 있었는데

이들은 1군단에 배속되어 각 사단으로 흩어져 싸웠다.

그리고 국군으로부터 서러운 푸대접도 받았다.

강원 도경 소속의 일개 대대는 수도 사단에 배속되어 싸웠는데

이 전투 경찰 부대는 배속 초기 미군기의 오폭으로 20 여명의 피해를 보기도 했고

비봉산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대패하기도 하였다.

전사를 보면 패배한 강원 도경 전투 경찰 대대장 김 인호 총경이

유 흥수 기갑 연대장에게 크게 질책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경찰이 당한 수모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동해안 3사단에 배속된 강원 도경 경찰들은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다.

경찰이 맡은 구역으로 적이 박격포를 쏘면서 포위망을
압축해 올 때

도경 유도 사범인 김 모 경위가 지휘하는 경찰 중대의 뒤에 헌병들이

M-2 카빈을 들이대고 전진하라고 무섭게 독전했었다.

그러자 김 경위는

"포탄이 비오듯 쏟아 지는데 헌병 각하,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하면서 주저 앉아 울었었다고 한다.
------------------------------------------------------------------------------------------

공산 도배의 공격을 피해 가까스로 대구나 부산까지 피난을 왔는데

다시 전선으로 보내지니 겁을 먹고 도망친 경찰들도 많았었다.

 

전투가 한창이던 1951년 2월 3일 부산에서 발간된 신문을 보면

 

지난 반 달 간 체포 된 임무 이탈, 즉 탈영 경찰관이
무려 300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전투 경찰들이 이런 모습만 보인 것이 아니었다.

 

유 원식 소령은 포항 전투에서 목격했었던 한 용감한 전투 경찰을 회고한다.

“8월 중순, 해가 막 넘어가고 양쪽이 다 진지를 지키고 있을 때
인데

 

어느 경찰관이 단독으로 꼿꼿이 서서 능선 위를 걸어가며
서서 쏴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몇 번 쏘다가 적탄에 맞아 푹 쓰러집디다.

 

한참 있다가 또 일어나서는 비틀거리면서 능선 위로 올라가며 쏘다가는 또 쓰러지구요.

아마 그렇게 세 번은 되풀이 하다가 끝내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더군요.

석양 빛을 받아 피아가 다 이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 경찰관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혼자서 뚜벅뚜벅 걸으며

 

적 진지에 입사를 하던 그 무명용사의 모습은
언제나 내 머리에 박혀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라이프 지의 보도 사진 - 유명한 마가렛 히긴스 여기자가 촬영하였다.
공비의 전사체를 운반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잘 보니 아직
생명이 붙어 있다.

중상을 입은 공비 포로를 운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남 곡성 경찰서장 한 정일 경감은 서원 200명을 데리고 후퇴 하고자 했으나

길이 막히자 산으로 올라가서 유격대가 되어 공산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대구로 보냈다.

서울에서 철수한 경찰대는 그런대로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런대로 숙식을 해결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시경 경찰대는 정부와 같이 부산으로 가지 않고

대구에 남은 내무부의 치안국 소속 경북 도경, 강원 도경 일부 병력과 함께 대구시 주변에 배치되었다.

7,000 여명의 병력이었다.

대구 사수를 외쳤던 내무부 장관 조 병옥 박사의 호언은
빈 말이 아니라

이들 서울 경찰 병력이 대구 방어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전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져 후퇴했던 전투 경찰들이 어떻게 마산 진동 전투에 파견된 미 해병에
배속되었는지 그 연유는 확실치가 않다.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전투 경찰들이 직접 찾아 가서 자발적으로 배속되었거나,
또는 군경의 상층부가 미 해병이 곧 파병 될 것을 알고 정예 전경 중대를 대기 시켜 놓고 있다가 이들이 상륙하자 바로 파견했을 가능성 두 가지 중 하나로 생각된다.

 

(4편으로 계속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