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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25 09:12
[밀리역사] 강력했던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와 '오툼바 전투'.
 글쓴이 : 흑요석
조회 : 5,705  

'콩키스타도르'는 스페인어로 '정복자'라는 뜻입니다. 무슬림을 몰아내고 기독교 왕국을 넓혀갔던 국토회복운동, 즉 '레콘키스타' 과정 중 스페인은 많은 수의 용병이 필요했으며 이슬람과의 끊임없는 충돌과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스페인 병사들의 전투력은 유럽 최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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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세력을 굴복시키고 이베리아 반도를 다시 유럽인들이 차지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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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콩키스타도르의 대략적인 무장 수준-
                                   


레콘키스타로 인해 이슬람 세력을 북아프리카로 완전히 축출시킨 후 싸움과 전투가 삶 그 자체였던 이 병사들은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마침 이 시기 스페인은 신대륙 발견 후 그곳엔 금과 은이 풍부하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활발한 식민/정복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전쟁 기계인 이 병사들은 배를 타고 너도나도 신대륙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아주 놀랍고도 잔인한 여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병사들과 남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술/무장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우선 콩키스타도르는 구대륙에서 끌고 온 '말'을 타고 전장에 임했습니다. 기병의 위력은 아주 강력했는데, 원주민들은 난생처음 보는 말을 보고 위압감에 쉽게 빠졌으며 이는 원주민들의 사기를 꺾어 놓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스페인 병사들은 말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원주민 병사들의 대열이 느슨해진 틈을 타 늘 화려한 복장을 입고 다니는 지휘관에게 달려가 제거하여 대열을 한 순간에 무력화시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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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스페인 병사가 말을 탄 모습-

                                     
스페인 병사들이 쓰던 무기의 질도 아주 좋았습니다. 스페인 병사들이 휘두르던 강철 검과 강철 갑옷은 고품질로 아주 유명했고 그 명성은 로마시대 때부터 이어졌습니다. 톨레도 검이 매우 유명한데 스페인 병사들이 톨레도 검을 휘두를 때마다 원주민들의 사지가 사방으로 날아다녔습니다. 이러한 무섭고 잔인한 장면은 아즈텍인들이 그린 그림에 자주 묘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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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검-


반면 원주민들의 무장 수준은 스페인 병사과 비교해서 매우 빈약하고 그 질이 떨어졌습니다. 스페인 병사들이 우수한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무기를 만들어 무장했으나

원주민들은 나무나 석기 무기를 사용했으며 사실상 석기시대의 무장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나면, 전사 계급에게 지급된 최상의 무기는 흑요석 무기였습니다.

무기뿐만 아니라 갑옷의 차이도 매우 컸는데, 강철 갑옷을 입은 스페인 병사에게 무기를 휘두르면 원주민의 흑요석이 깨질 뿐이었습니다. 반면 원주민 병사들은 갑옷을 입었다 한들 콩키스타도르가 휘두르는 검을 전혀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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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원주민들의 무장 수준- 




유럽에서 배를 타고 와 신식 무기와 뛰어난 전술로 원주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스페인 병사들은 매우 뛰어난 기량으로 원주민들을 수세에 몰아붙였지만
항상 그들을 압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개개인의 스페인 병사들은 원주민들보다 전투능력에 있어 훨씬 뛰어났던 건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원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수만 명의
병사들로 이루어져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콩키스타도르의 숫자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소모적이었습니다.

콩키스타도르의 지휘관이었던 코르테스는 코르테스 원정군을 이끌고 오툼바 평원 위에 대규모 아즈텍 병력을 보고 기겁을 했는데 당시 엄청난 물량의 아즈텍 군대의
규모와 코르테스 군대의 열악한 전력은 코르테스가 카를로스 1세에게 보냈던 서신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들판 전체를 뒤엎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디오들이 우리(코르테스의 원정군) 앞에 운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적의 공격은 너무나 거셌고 우리의 저항은 너무나 힘에 부쳤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지쳐 있었고 우리 일행은 전부가 부상당한 상태였으며 너무나 허기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그날이 우리의 제삿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 병력은 최소 2만에서 4만 명 혹은 그 이상일 거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인 반면 코르테스의 군대는 부상당하고 지친 스페인 병사 400명과 23기의 기병
그리고 1000~2000명 남짓의 틀락스칼라인들을 포함한 원주민 동맹군이 전부였습니다.


전투 결과는?

코르테스의 군대의 사상자는 60~75명. 아즈텍 군대의 사상자는 정확하진 않지만 최소 1만에서 2만 명으로 추정.


고작 400명 남짓한 스페인 병사들과 1000~2000명의 원주민 동맹군으로 약 1만~2만 명의 아즈텍 군대를 고작 40~75명의 사상자만 남기고 이김으로써 사실상 학살에 가까운 결과를 나은 대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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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 최고의 업적으로 남은 오툼바 전투-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나?




코르테스는 부관 디에고 데 오르다스에게 보병대 지휘권을 맡게 하였는데 오르다스가 지휘하는 보병대가 아즈텍 전사들의 공세를 막는 동안, 코르테스를 포함한 23기의 기병은 4만 명의 밀집된 전사들을 향해 맹렬히 돌격했습니다. 아즈텍 전사들은 기병대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대처하지 못했고, 코르테스와 23기의 기병들은 아즈텍 전사들의 대규모 인파 속에서 화려한 장신구와 깃털로 치장된 고위 전사들을 노렸습니다. 코르테스를 포함한 23기의 기병들은 4만 명의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면서 그중 가장 화려한 깃 장식과 가마를 타고 있던 아스텍 사령관 시우아코아틀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종군신부 프란시스코 데 아귈라르는 이후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코르테스는 인디언들과 전투를 치루면서 길을 헤쳐나갈때 황금 방패로 치장한 적의 지휘관을 잡아 죽이는 놀라운 솜씨를 선보였다. 전사들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인디오들의 총 사령관(시우아코아틀)에게 창을 한번 휘둘러 살해했다.그무렵 디에고 데 오르다스가 지휘하는 우리의 보병대는 인디오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그때 코르테스 사령관이 적의 사령관을 죽이자 적들은 퇴각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길을 터주었다. 우리를 추격하는 적도 거의없었다.'


오툼바 전투에서의 코르테스 원정군과 아즈텍 군대의 전력차는 원정군의 절대적 열세였으며 아즈텍 군이 단순히 어택땅을 찍고 물밀듯 밀고 들어가도 손쉽게 이길 수 있을 만큼의 전력차였습니다. 


하지만 아스텍인들은 일명 '꽃의 전쟁'이라는 메소 아메리카식 관습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으며 이들은 코르테스와 그의 기병들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매우 소극적인 공격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설령 그런 방식으로 싸운다 할지라도 오툼바 전투 같은 경우 머릿수에서 워낙에 차이 났으므로 아무 전략 없이 그냥 밀어붙이기만 해도 이겼을 텐데 총사령관이 전사했다고 관습대로 그냥 후퇴해버려서 코르테스를 잡을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이는 아스텍 군대 스스로의 자멸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스페인에 관심이 많아서 스페인 역사를 좀 보던 중 흥미진진한 게 많더라구요 ㅇㅅㅇ 특히 신대륙 개척기 때가! 여러 전쟁과 사건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슬픔의 밤'과 ''오툼바 전투'가 있습니다. 근데 '슬픔의 밤'까지 쓰려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오툼바 전투'까지만 써봤습니다. 근데 어차피 글의 상당수가 나무위키에서 참고하거나 퍼온 거라...ㅋㅋㅋㅋ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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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oadal 16-04-25 11:49
   
흥미롭고 아즈텍입장에선 안타까운 전쟁이군요.
나무와바람 16-04-25 12:54
   
제가 예전에 동맹 원주민을 이용해서 사전에 적진영에 이간질? 작업을 해서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킨 것도 승리에 한몫을 했었다 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맞나 모르겠네요..
그건 다른 전쟁이려나...흠..
암튼 정말 좋은 내용 잘 봤어요 ^^
     
흑요석 16-04-25 21:08
   
맞아요! 이간질 작업을해서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하여 각개격파하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솔직히. 스페인 원정군은 원주민들에 비해 소수였고 무력으로만 받아쳤으면 다 몰살했을 겁니다 ㅋㅋ

이건 많은 정복활동과 전투 중 '오툼바 전투'에 관한 글이라 그냥 오툼바 전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쓴 글이에욥 ㅎㅎ
마그리트 16-04-25 13:09
   
왜구들의 만행에는 치를 떨면서
왜 유럽제국주의 국가들의 잔악한 침략사는 정복으로 미화되는지..
서구인들이 전범기에 감흥이 없는 것과 비슷한 듯.
     
흑요석 16-04-25 21:08
   
왜구들은 만행은 일삼았지만 일제 강점기를 제외하고는 한민족을 정복한적이 없지요.

이건 콩키스타도르를 미화하는 글이 전혀 아닌데요..콩키스타도르도 신대륙에서 엄청난 만행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근데 제가 언제 미화를 했나요;; 정복이라고 해서 미화했다고 생각하시면 저도 뭐 어쩔 수 없네요. 실제로 결국엔 정복을 했고 현재 남미인들은 대부분이 스페인어를 쓰고 카톨릭을 믿습니다;; 글에도 나와있듯이 콩키스타도르라는 뜻 자체가 정복자라는 뜻이예요. 이름대로 콩키스타도르들이 배 타고 원주민들을 정복한 역사입니다. 그 과정에서 잔인한 학살과 만행이 빈번했지요 ㅎ 이건 아무도 부정하지도 않을뿐더러 저도 부정하거나 미화한적 없습니다.

이건 콩키스타도르의 대략적인 설명과 오툼바 전투에 관한 글입니다요 ㅇㅅㅇ
NightEast 16-04-25 13:56
   
언젠가 다큐로본 내용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겻다는 식으로 얼핏 기억나는군요
회담이나 항복을 미끼로 불러내서 왕인가 지휘관인가 도륙내고
원주민들 문화로는 '신? 신의 대리인?'격인 사람이 그런식으로 죽으니까 스페인군이 숫자가 많건 적건 그건 신이 보낸 군대네 어쩌네 이런식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암만 심해도 4~5배 정도 피해나도 숫자로 압도해서 이길수 있는데 그럴 생각 자체를 못했다는 식으로..
촐라롱콘 16-04-25 15:19
   
당시 아메리카에 상륙한 스페인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무력이 아메리카원주민들에 비해

가공스러웠던 부분도 있었지만.....

당시 아즈텍왕국과 그 주변지역의 원주민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전설이었던

[반인반수의 신들이 곧 도래할 것이다]라는 내용과, 말을 탄 스페인군의 모습이 전설상의

신의 모습과 영락없이 닮은지라... 특히 아즈텍의 착취와 폭압에 시달리던 피지배 원주민부족에게

스페인군이 구세주의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에 적극 협력했음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아즈텍왕국과 잉카왕국 모두 왕조의 사이클주기상 절정기를 막 지나서 지배부족과 피지배부족간의

내부모순이 서서히 수면위로 오르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스페인인들이 이러한 원주민왕국의 내부모순을

적절히 이용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흑요석 16-04-25 21:16
   
촐라롱콘님이 말하신 거 다 맞습니다 ㅋㅋ

소수의 원정군으로는 무력으로만 상대할 순 없었죠 ㅋ 한계가 있는데.

아즈텍이 평소에 워낙 잔인했던지라 다른 부족들이 적극적으로 스페인 원정군과 협력한 영향이 매우 크죠!
일경 16-04-25 17:02
   
식민지 가졌던 거의 모든 국가들이 무력으로만, 식민지를 만든게 아니죠.

대부분 무력은 도움역활을하고 실제론 정치적으로 식민지 국가를 무너트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친일파에 의해 전쟁 한번 안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됐잖아요.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 한 것도 인도의 수 많은 민족과 왕국을 서로 이간질하고 자신의 편에 선 이들에게 해택을 주어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수법을 사용했지요. 당시 영국이 무력으로 인도를 점령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사실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가 자국보다 더 큰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대부분의 식민지가 군에 의한 점령이 아닌 정치적 공작에 의한 점령이였기 때문에 가능한거죠.

스페인도 아즈택을 무너트리는데 군을 동원했지만, 그 군대로 아즈텍을 무너트렸다고 보기 힘듭니다.

이유는 스페인에서 아즈텍으로 건너간 군대는 너무 소수였고 이들로는 아즈텍을 통치 할 수 있는 규모가 절대 안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즈텍은 왕위를 둘러싸고 약간의 분쟁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내부적 갈등을 만들어 조력자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함으로서 자신들 군대의 강인함을 인식 시키고 이를 이용해 더욱더 강력한 세력을 조력자로 얻어 점차적으로 아즈텍을 무너트렸죠.

스페인이 아즈텍에 갔고 그 문명을 무너트리는데 이용된 병사는 겨우 배한척인가 두척인가 그정도의 군사로 알고 있습니다.

고작 수백명에게 현 멕시코보다 더 큰 거대 국가가 무너진거죠.

중국의 청의 황실이 무너진것도 아편전쟁으로 군의 힘을 과시하고 이후 일어난 정치적 공작으로 청을 배신하고 외세에 붙은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내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죠.
     
흑요석 16-04-25 21:07
   
무력으로만 식민지를 만든 게 아닌 건 저두 잘 알구요 ㅎ

이건 콩키스타도르와 오툼바 전투에 관한 대략적인 글이지 스페인 제국이 신대륙을 식민지 경영하던 과정을 주구절절 쓴 글이 아니라...ㅎㅎ

무력으로만 했으면 식민지 관리 못 합니다. 당연히 스페인도 머리를 썼죠. 원주민 부족들끼리 이간질을 시켜서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한다던가, 잘 회유해서 동맹으로 만드는 등 정치적으로도 머리를 잘 굴렸습니다. 물론 잔옥하게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경우도 많았구요.
남궁동자 16-04-25 18:45
   
애초에 아즈텍은 적이 많았기에 적절한 이간질과 분열, 그리고 각개격파...

물론 아즈텍은 기본적으로 적을 잘 죽이지 않는다는 것도 크죠.

실제로 스페인 대장도 몇번 사로 잡혔는데 끌려가다가 도중에 구출된적이 많죠.
전쟁망치 16-04-25 21:38
   
리콩키스타 는 당시 종교라는것이 얼마나 크나큰 정치적, 사회적으로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군 기간 동안 스페인인은 한번도 출정을 안했다고들 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죠.
왜냐하면 스페인인들은 바로 자기집 앞마당이 성전 지대였으니까 ㅎㅎ
sunnylee 16-04-26 00:56
   
인용된 6번째 그림중 오류가 있는듯.
코르테스의 아즈택 정복은1521년, 스페인군의 화승총과 창병,방패병의 방진형 군제를 갖춘것은
1534년 스페인의 장군 코르도바 가 고안한 테르시오(tercios)란 진형 입니다.

아래 전투장면처럼 기병,창병,석궁 과 대포 정도가 아즈택정복 당시에쓰여졌고

화승총의 발명도 15c 초반으로 알려졌지만
(초기형 사각막대에 파이프엊은 형태 핸드넥건)
군대최초로 사용된시기도 1525년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이탈리아 지배권싸움인 파비아 전투로 알려졌음
(개머리판 형태의 머스킷)

스페인군의 화승총의 군제 도입과 사용은 1534년 이후  입니다...
(출처 용병 2000년의 역사:키쿠치요시오 )
     
흑요석 16-04-26 03:07
   
맨 좌측의 군인은 '로델레로'라고 불렸구요. 당시 콩키스타도르의 무장이 맞아요.
          
sunnylee 16-04-26 09:24
   
아마! 같은 콩키스타도르 출신인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 원정대를
 묘사한것이 와전 뭉퉁 그려진것 같습니다.
( 같은 에스파냐 출신 기간차이는좀 있지만, 코르테스의 먼친척뻘)

1533년 잉카 쿠스코에 입성 잉카제국의 아타우황제를 납치,
몸값으로 황금을 받고 살해. 망카잉카를 황제를 추대..
(이때까지도 기록에 화승총 무장은 등장 안함,
황제 납치는 코르테스의 조언이라는 설도 있음.)
이후, 피사로는 에스파냐에 보고차 황금을 가지고 귀국..
.
 1537년 망카잉카황제가 탈출 반란을 일으킴  (쿠스코 공성전)
이때 에스파냐왕으로 부터 지원
피사로는 대량의 화승총,대포,군마,병력을 가지고 돌아와
 10개월에 걸친 공선전에서 10만 대군의 잉카군을 무찌르고
잉카제국을 멸망 시켜다고 기록에 나와 있음....
따라서 , 화승총의 신무기의 신대륙에서의 사용도 1534년이후로 보는견해입니다.

*참고로 "로델레로" 칼과 방폐로 무장한  에스파냐 검사 보병을 부른 말 입니다.
  "콜루네이야" 라는 스파이크 장창부대와 함께 편제을 이뤘지만
  기병과 스파이크 공격에 약해 1534년 테르시오 진법에서는 퇴출 됩니다.

콩키스타도르의 잉카 정복시 화승총무장은 맞겠지만,
  아즈택 정복과는 시간적 간극(16년)...
개머리판형태의 화승총이 유럽전장에 처음 등장 하기도 전입니다... .,

(나무위키 글에 고증오류는 많이 있습니다..)
               
흑요석 16-04-27 03:08
   
아! 그럴 수 있겠네요 ㅋㅋㅋㅋㅋ 많이 아시네요. 배워 갑니다.
sunnylee 16-04-26 10:42
   
개인적 의견으론..
에스파냐의 무어인과 전쟁으로 1492년 그란나다를 함락하고 스페인 왕국을 성립후
스페인병사의 전투력이 당시 유럽 최강이라 하셨는데..

11C-13C 십자군전쟁 이후,영불의 100년전쟁, 14C 보르고뉴전쟁, 독일 종교전쟁을 걸치면서
 병사와 수요,화승총 신무기 개발, 전문 군사개편이  발전
전문 용병기사단,용병시대의 시대로 접어든 유럽에서
최고의 전투력 악명은 스위스장창 스파이크 , 란츠크네흐트 용병부대 들이었고.
( 보르고뉴 전쟁:중세 마지막 봉건 기사 무사집단의 몰락..스위스용병의 시대)
당시 스페인의 군제개편은 중세시대 이후 변화 없는
보수적 성향으로  유럽 주요 전장에서 명성만큼의 활약은 없었습니다...
(화승총의 군의 대량도입, 군 편제개편도 다른 유럽국가에 9-10년정도 뒤쳐짐)
1534년 이후 군제개편후 스페인군이  유럽 주요국으로 등장하지만..

당시 유럽전체
십자군 전쟁이후 유럽내 공국, 도시무역 국가간의 왕위후계자 싸움,신구교의 종교전쟁으로
정신없을때 에스파냐는 신대륙발견과 개척에 일확천금과 명예를 노려 진출한
콩키스타도르 출신들의 판단이  잘맞아 떨어진듯.. 
 
*1568년  식민지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패전,
(초기엔 쪽수로 이기지만, 이후 군제개편한 네덜란드  연패....)
 1588년 무적함대의 영국과의 패전 으로 스페인의 필리페2세의 짧은 영광과 몰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