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밀리터리 게시판
 
작성일 : 11-11-14 01:50
밑에 일본도 글 댓글보다가 임진왜란에 대해..
 글쓴이 : 푸헐헐
조회 : 1,885  

아래 일본도 글 흥미롭게 잘읽었습니다. 리플도 잘봤는데요.. 임진왜란의 초기 패배및 후반 승리 요인을 너무 미시적으로만 보시는 것 같아서..(물론 일본도란 무기가 주제였긴하지만요..) 요즘 국사공부 하며 알게된 인과 관계 설명을 적어 볼께요. 임진왜란 초기 부산진성에서 박홍(?)이 판옥선 다수를 자침하며 시작된 일본군의 초기 승전의 요인은 고려말 공민왕때부터 원인이 있습니다. 공민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군사제도를 재편하며 부족한 군인을 보충하기 위해 그전까지 역(나라에서 일하는 신역, 혹은 군역)이 없는 백정(소잡는 백정아님, 역이 없는자임)들 중에서 군역 비용(무기, 갑옷등)을 부담 가능한 백정을 상층호/하층호(군역비용 없는 자)로 나누어 상층호에게 군역을 지게 합니다. 자 이제 하층호만 백정이죠. 조선이 건국되고 이방원은 하층호에게 상층호에게 군역비용을 부담시키면서 백정이란 계급 자체가 없어집니다. 이를 원활하게 파악하기 위해 호패법을 실시 하였으며 세조는 호패법과 연계하여 5집이 1가가 되고 5가가 1통이 되는 오가작통법을 시행하며 일명 조선의 호구조사를 마칩니다. 당연히 군역의 대상을 모조리 파악하여 국방력이 튼튼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세조는 조선전기의 방어체제 진관체제를 만듭니다 진관체제는 진과 관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체제로 쉽게 말씀드리면 연대별,중대별 지역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개의 진이나 관이 무너져도 또다른 진과 관으로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대군에 약한 단점이 있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층호는 국가에 역을 지는 사람이 아니였기에 천시된 요역에 동원되던 최하층민들입니다 그런 계급이 사라지니 요역(공사 노가다)는 누가 할까요? 그렇습니다! 전투력과 삽질능력은 비례합니다! 명예롭던 군인들이 요역에 동원 됩니다. 국사책에 나오는 대로 군역의 요역화, 군역의 천시화가 진행 된 것 입니다. 당연히 군대에 가기 싫겠죠? 군역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습니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한 훌륭한 임금이지만 오르고 오르는 군역비용에 가정이 파산이 날 지경에 이르자 공식적으로 군포내고 군대에 인가는 군적수포제를 실시 합니다. 나중에 불법으로 담당 장수에게 군포를 바치고 군역에서 빠지기도 합니다. 그결과, 조선에 직업군인이 없어집니다. 번성하여 지키다 지방에서 방어를 하던 유방정병도 당근 사라집니다 당시 수근은 판옥선의 구조상 노를 저어야 하고 군역기간도 6개월로 그 두배에 이르기에 수군은 더더욱 없습니다. 왜구가 침략은 예전부터 있어왔으나 임진왜란직전 그 규모와 수가 많아 집니다. (을묘왜변등 설명은 생략 합니다 화산지대 섬이 쌀이 부족해 쳐들어 올때마다 조선은 징벌 뜻으로 쌀수출을 반으로 계속 줄입니다) 이이께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돈으로 외교노력을 기울입니다만 아시다시피 일본은 왜변때마다 조선에 군이 없음을 확인 합니다. 판옥선에 거미줄만 쳐져 있는걸 확인하죠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후 부산포에 18만 대군을 상륙 시킵니다. 조선, 군인 없습니다. 박홍이 판옥선을 자침합니다(왜구들에게 쓰일수 있으니까요). 6시간만에 부산진성 함락 곧이어 반나절만에 남해안 최대 동래부성이 함락됩니다. 진관체제vs18만.. 예, 조선은 진과관을 모아 싸우는 제승방략체제를 처음 가동합니다. 북쪽에 있던 신립징군을 불러 충주로 급파 합니다. 기병 단8기(80기?)만 주었답니다.. 잊지마세여 군적의 문란으로 직업군 없습니다. 제승방략 가동했더니 농민이 낫,곡괭이 들고 나옵니다. 그것도 2만이 전부 입니다. 당연 패배가 아니라 학살을 당합니다ㅠ (여기서 두분들이 말씀하시던 조총의 공포심이 위력을 발합니다) 이때 일본군의 전술은 고속 항전책으로 한강,대동강,압록강에서 보급을 받고 일단 고속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 입니다. 하지만!!! 예.. 이순신 장군이 나타나셨죠. 당시 수군은 진관체제라 전라좌수영 이순신은 참전이 불가능했으나 한양함락 소식을 듣고 장계를 올리고 참전 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보급로 끊으시고 서남해 다 장악하셨죠. (이순신 장군님 전술과 과정은 다들 아시고 길어지니 생략..) 남한산성에 화살 무한리필 하신 것도 이순신장군 이시고 이순신 잡으러 전라도를 침공할때 조선 의병이 가장 많이 전사하고 치열했던 1,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집니다. 1차는 10배의 쪽수를 극복하고 이겼만 열받은 도요토미가 18만 몰빵해서 2차는 엄청난 사상자를 남기고 패배합니다ㅠ 이때 논개가 몸던져 적장을 골로 보내셨죠. 암튼 이순신 장군이 보급로를 끊어 명나라 참전의 시간을 벌었고 잠시 휴전에 들어가 쪽국이 하삼도(전라,경상,충청 곡창지대)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하고 선조 ㅂㅅ이 이순신 귀향보내자마자 다시 쳐들어오고 이순신장군 백의종군하셔서 왜구들을 무찌르죠. 임진왜란의 개고생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전국시대로 단련된 사무라이의 능력보단 직업군인 없이 예비군 2만vs18만의 절대적 쪽수차가 큰 요인이였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들 너무 미시적으로만 보시는 듯해서 눈팅족이 장문 올려습니다. 긴글 봐주셔서 감사하구요ㅠ 이순신장군 전략은 지쳐서 생략하겠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서울뺀질이 11-11-14 02:26
   
잘 읽어 보았습니다.
벽괴수 11-11-14 03:51
   
와우...알기 쉽게 잘 설명해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도영이 11-11-14 05:04
   
장문 잘 읽었습니다.^^
이눔아 11-11-14 05:53
   
고생많으셨습니다. 잘 봤습니다.
쿠르르 11-11-14 07:31
   
수십년내전이후 막통일된 일본의

경험치 만땅 왜구들과 농사짓다 끌려나온 조선인들은 게임이 안되겠죠...


십만양병설(실제론 이런 상소가 없었다고 하지만)만 봐도 ... 조선이 정규군 10만은 커녕 5만이 있었으면 많았다는 생각이 드니...
헤이얀 11-11-14 07:53
   
잘 봤습니다.
시라프넬 11-11-14 09:46
   
역모가 두려워서 길도 넓게 안 뚫었다는 나라에 튼튼한 국방을 바라다니...ㅎㅎ
(역적들이 그 넓은 길로 도성을 향해 후다닥~달려올까봐 그랬대나 뭐래나...ㅋㅋ)
바랄 걸 바라세염...ㅋㅋ
조선은 제도나 철학적 기반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지만 그게 완전한 '내수용'이라는 데서 한계가 드러났다고 알고 있어요. 세상 모든 게 우리들끼리 집안에서 지지고 볶는다면야 경쟁력이고 뭐고 뭐가 필요할까요. ^^
bonobono 11-11-14 10:26
   
깊은 역사 사료 잘 보고 배워 갑니다!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다더니 국방력 강화에 게을리 했네요.
가장 중요한 군인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 했었다니...
우리나라에 이순신 장군님이 그 시절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고 복이 었던 것 같습니다.
땐왜박멸우 11-11-14 12:16
   
잘읽었습니다...제승방략 체제 답없었음...농민들 모였어도 이를 이끌 장군이 중앙에서 늦게 도착 하고
이에 동요하던 농민들 지레 겁먹고 뿔뿔히 흩어지고...
겔겔겔 11-11-14 13:55
   
사실상 오랜 평화가 화를 불렀죠.
막말로 우리도 휴전국이라서 막대한 군인이랑 무기를 보유 유지하는거잖아요.
월하낭인 11-11-14 15:10
   
- ..왠 18만이..
Assa 11-11-14 16:53
   
조선  건국후  이백년  가까이  큰  전쟁이없으니  중앙관료나  왕이  그냥  멍해잇다가  털렷죠  솔직히 일본이  조선을  칠 움직임잇는데도  불구하고  당파 때문에 동인  서인이  서로  딴말하니  그거가지고  헛세월  보내다갘ㅋㅋ  대마도주가일본쳐들어올거라는  징후를  조선조정에 흘렷는데도  신경안쓰고 ㅋ  진짜  다스리는자들이  갑론을박하다가 ...
ㅡㅂㅡ 11-11-14 23:28
   
역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차이겠죠.
산술적으로 당시 일본의 총 병력은 30만이었습니다.
물론 전부 도요토미의 부하가 아니었기에 전부 투입할 수도 없었고 일본에도 병력은 남겨둬야 하니까 반 조금 넘게만 투입된겁니다만...

그에 비해 조선군은 15만, 거기다가 신립의 부대를 제외하면 활이나 한번 쏴봤는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었죠.
요세 한국군 개념으로 치면 '장정'... 막 훈련소에 입소한 사람들이죠.
이런 병사들은 오히려 전력에 마이너스가 되기도 합니다.

5만명이 1,500명에게 당한 용인전투의 예도 있지 않습니까?
훈련은 물론이고 장비도 거지수준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