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설명하면 여몽 연합군 2만명이 쓰시마섬 이카섬을 지나 하카다만 상륙 여기를 거점으로 큐슈의 도성을 공략할 생각이였습니다. 초기 전투에서 연합군의 승리 근데 일본도 여기저기서 지원군이 오고 있어서 연합군은 함대로 돌아가서 전열 재정비할려고 합니다. 근데 그날밤 태풍이 불어서 전력의 1/3이 날라갑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퇴각 이게 1차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입니다. 2차는 음... 약 11만정도 동원 됩니다. 물론 일본도 대비합니다. 2달간의 일전일퇴의 전투를 하다가 하카다만에서 전투 중이던 고려군을 지원하기 위해 오던 연합군이 태풍을 만나서 심각한 피해를 입고 퇴각 . 그리고 여러가지 정치.사회적 요인으로 전투는 더이상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포기합니다.
태풍이죠. 2차에 걸친 여몽연합군이 태풍으로 물러갔을때 일본인들은 신이 도왔다라고 생각합니다. 신풍=神風=가미가제. 그후로 일본인들은 가미가제라고 하며 신이 일본을 돕는다라고 암시를 겁니다. 당시 몽고군은 천하무적입니다. 압도적 전투력으로 유라시아대륙을 휩씁니다. 연합군은 소수의 몽고군과 다수의 중국(송나라) 농민병, 고려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무리 소수라도 일본땅에만 무사히 발을 제대로 디뎠으면 당시 오합지졸 일본군은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그당시 절에서 기원하는게 거의 전부였습니다. 참고로 영국도 퀸엘리자베스시대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태풍의 도움으로 물리칩니다. 이후로 영국도 신이 영국을 돕는다라고 생각하는 면이있습니다.
몽고는 해전에 능하지 못하죠
그리고 우리나라는 당시 세계의 다른 나라처럼 몽고의 지배를받았구요
고려시대전 신라시대 장보고 시절만해도 중국 아랍 일본등 까지 해상무역이 발달할 정도로 바다에 능했습니다.
해서 몽고는 일본을 공격하는 해군과 배를 고려에 지원을 받을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받던 조선인들이 최선을 다해 싸울까요?
아마 고려인들도 당시 원의지배를 받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것입니다.
더군다나 삼별초가 남부지방을장악하던때라 전함을만들던 조선소를 공격했다는기록도나옵니다.
고려는 내전중 이었다고 할수있죠.
그리고 어부만하더라도 상식적으로 여름이면 태풍이 온다는것도 알았을테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중에 여름에 군사를 일으킬수 없다는기록도 있죠
여름과 가을은 곡식을 키우고 추수를 해야하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키는것은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나 겨울이죠
몽고가 7월에 군사를 일으키려하자 고려조정에서 안된다고했으나 원황제 군사를 일으켜 어쩔수없이 갔다고 기록되어있죠 물론 태풍때문에 실패한것은 맞습니다 7월 여름태풍으로 실패했다고는하나
고려 전함은 반절이상 무사히귀환했으나 원의군함은 대부분 침몰했다는 기록도있죠
설마, 전쟁에 승리하려는데 훈련이 안된 병사들을 투입시킬까요? ㅋㅋ
전쟁의 신급은 아니라도, 도가 튼 몽골황제가? ㅋㅋ
사실, 몽골군안에 투입된 대부분은 남송군이였습니다. 평전에서는, 일종의 잉여들 처리란 식으로 서술하던데요. 알다시피, 중원을 점령한 북방민족들 정권 초기는 대량의 살육으로 시작합니다. 어느정도 공포통치기간이 있는데, 청나라도 양주대학살처럼, 칭기즈칸도 중원에 씨를 말리고 말이나 키우자고 했었고... 농민들도 훈련이 안되어있다고 하지만.. 원래 물량빨이라는게.. 농민반란같은거보면, 한나라가 뒤집어지는 힘이 있죠,
특이, 쿠빌라이의 경우엔 손쉽게 황제가 된것이 아니라, 아리크부케랑 정통성에서 싸웠음.
지금보면, 쿠빌라이가 역사의 승리자로 치부되나, 당시엔 아릭부케가 더 정통성이 있엇습니다. 그는 말자였고, 조상땅인 카라코룸을 기반으로 추대되어 동방왕가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 쿠빌라이는 중원의 물량 승리와 고려의 협조로 황제에 올랐고, 결코 지지자만 있는게 아니였거든요.
지지자만큼이나 적들이 많았으며, 소수의 몽골족밑에 다수인 한족들이 있었음.
내 생각에는, 일본땅을 먹으면, 그곳으로 남송인들의 대량 이주가 시작되었을것임.. ㅋㅋㅋ
적을 곁에 두지 않는다 뭐 이런거.. 일종의 영국이 호주를 대한것 처럼요..
1차원정때랑 2차원정때랑은 상황이 좀 달라요.
1차원정때는 고려 원종이였나? 되도록이면, 고려측은 일본원정이 고려의 부담으로 작용했기에
꺼림칙했다면, 2차원정때는 충렬왕때였음 알다시피, 충렬왕은 제국공주랑 결혼후 쿠빌라이의 사위로 아버지 원종때과는 지위면에서 차이가 컸습니다. 충렬왕은 장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있었고, 그만한 발언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원정에 성공한다면, 충렬왕 입지는 더 탄탄해질 것이고, 원에 얻는 이득도 더 많아졌겠죠. 충렬왕으로써는 손해볼게 없는 장사였을겁니다. 잘되면 좋은거고,
못되도 크게 욕먹을게 없는 상황이였음.
쿠빌라이 에게 문서를 보낸것이 아니라 충렬왕이 원조정에 입조 하였을때 여러가지 생색 내는 말을 하던중 "일본이 섬안의 오랑캐 로서 지세가 험한것을 믿고 황제에 조회 하지 않으며,대국의 군사에 항거 하오니, 신이 다시 배를 만들고 양곡을 저축 하여 그 죄를 성토 하고 치게 하옵서서" 하자 그렇지 않아도 남송의 수군과 고려의 수군이 고민 거리였던 쿠빌라이는 이것을 한방에 처리할 단서를 여기서 찾아 "왕은 돌아가서 재상들과 잘 의논 하여 사람을 보내서 아뢰게 하라"고 하니 고려 측에서는 빼지도 박지도 못하고 응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쿠빌라이 평전에 일본원정 이야기가 나오던데, 그 책에선, 일본원정이 되면 좋은거고, 안되어도 쿠빌라이에게 이득이였다고 하더군요. 당시 쿠빌라이에 반기를 들던 세력을 숙청하는데 일본원정이 큰 역활을 했다고 함.
일본원정 핑계로 대거 죽음으로 내몰았음. 내부 쓰레기 청소용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1차는 원의황제가 일본에게 복종하하고했는대 거부하자 원의황실에서 공격간거고
2차는 충렬왕이 일본을 치자고 했던 기록이 있더라도 여름에는 태풍때문에 안된다고 계속 반대했음
몽고는 육상 능력 위주라 해전 능력이 없어서 태풍의 위력을 몰랐던점도 있었겠죠
그리고 사망자를보면 고려가 최선을 다해 싸우지 않는게 티나죠
태풍피해에 원은 전멸에 가까웠지만 고려수군 생존자는 반이넘었으니
천하를 통일한 쿠빌라이의 최대 고민은 남송과 고려의 수군 입니다. 중국은 '남선북마' 라고 해서 남쪽은 배부리는데 능하고 부쪽의 말타는데 능하다고 하였는데 북방의 몽골족은 그정도가 심해서 배는 쳐다보기만 해도 멀미를 할정도여서 양자강을 건너지 못해 헌종 몽케는 과거 진나라의 왕전 초를 치듯이, 서진의 왕준이 서촉에서 양자강의 타고 남하 해서 오를 치던 방식으로 공략키 위해 사천으로 가서 풍토병에 죽은 원인이 되기도 하며, 쿠빌라이 자신도 양자강을 건너지 못해 남송을 벌하지 못했으며, 고려도 강화도로 천도 하자 강화도를 공략 하지 못해 30년정도를 강화도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수군은 형편 없었으며, 이것은 후일의 일이지만 실제 원이 망한 원인도 염상 이였던 방국진의 수상 반란을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토벌군 사령관이 자주 포로가 되어 수괴인 방국진 에게 벼슬을 내려 포섭 해야 했던 이유가 몽골의 약함을 드러내어 장사성,백련교의 계통의 한산동과 유복통,서수휘,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남송의 수군과 고려의 수군이 존재 한다는 것이 쿠빌라이의 고민 이며, 이런한 쿠빌라이의 고민을 한번에 해결 할수 있는 묘안이 일본 정벌 입니다. 쿠빌라이는 멍청이가 아니며 따라서 짧은 시간내에 배를 건조 할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시간을 재촉 하여 출정할 것을 독려 하니, 고려와 과거 남송 지역인 강남 지역 에서는 쉽게 만들수 있는 강을 도하 하던 평저선을 건조 해서 출정 할수 밖에 없었고, 이런 배는 태풍에는 취약 할수 밖에 없으므로 태풍이 불자 전멸한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론은 일본의 사학자 들이 규슈 앞바다 에서 원나라 시대의 배의 잔해물 들을 발굴 함으로서 확인된 사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