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밀리터리 게시판
 
작성일 : 11-11-19 05:47
대영제국에 가장큰 타격을 준 나라가 남아공이었음..
 글쓴이 : 피타고라스
조회 : 4,677  

세계의 변방인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라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있지만..19세기에 대영제국에 가장큰 타격을 입한 나라가 남아공이었음..인도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었음..


 보어전쟁이라고..본래 남아공에 이주해 살던 백인들(네덜란드계)가 있었는데 남아공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대영제국이 먹어치우려고 들었지..그런데 당시 남아공인들은 인구는 적었지만 금광으로 인해서 엄청난 부유층들이었음...구식총으로 싸우던 대영제국 군대들에 비해서 남아공인들은 죄다 독일제 최신형 자동소총으로 무장...


초기 시작하자 마자 아프리카의 대영제국 군대 모두 전멸...결국은 대영제국이 100만가까운 군대를 전부 투입한끝에 겨우 이기는데 당시 남아공 보어인들 인구가 50여만명 수준..이고 군대가 최대치로 잡아도 8만정도(평상시에는 2~3만 수준)니 거의 10배의 군대를 동원해서 힘겹게 이겼다는 거지....작은 소국에 수십만의 당시 최강국의 군대가 번번히 전멸하니 국방장관등 영국군 수뇌부 상당수가 잘리기도 함..



남아공이 미국과 달리 대영제국에 결국 지고야 말았던건..미국같은 동맹국이 없었다는것과(미국의 경우 프랑스가 도와줌) 당시 세계최대의 금과 다이아몬드산지라서 대영제국이 끝까지 포기하지않았다는점..(요즘 미국이 석유가진 나라들 상대로 전쟁하는거랑 비슷)그리고 보어인들 인구가 너무 적어서 불가항력인 부분이 컷지....


하지만 보어전쟁에서 인구 50만의 보어인들이 당시 세계최강국이던 대영제국을 상대로 5년이나 버텨내고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한건 실로 대단한일..요즘 시대로 따지자면 쿠웨이트정도 되는 작지만 부유한 나라가 미국 항공모함 전단 전멸시키고 미국이랑 5년이랑 맞짱뜨며 싸운격..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월하낭인 11-11-19 07:32
   
- ..줄루족 생각이 왜 갑자기 나지..
Assa 11-11-19 09:10
   
독일제  자동소총  ㄷㄷ
스펜타 11-11-19 09:55
   
너무 과장되었네요..

세계최강대국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으나 영국은 해군력이 주력인 국가였죠.

당시 육군력은 러시아와 동급 아니면 그 이하로 취급받았었죠.

당시 최강의 육군력은 명불허전 프랑스와 독일입니다.

전세계에서 100만 이상의 육군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유일하였죠.

그리고 자동소총=_ = 당시 자동소총이라니요 ㅋㄷ

아마 독일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을 도입했을 겁니다.
     
스펜타 11-11-19 10:03
   
당시 대영제국이 100만의 병력이라 -_ -

당시 영국 인구는 끾해야 2000만 에서 2500만에 불과했죠

반면

당시프랑스는 인구 5000만 독일 5200만

러시아 4500만 등

100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수 있는 인구가 성립되었어요 ~


자국의 식량자급률을 충족할 수 있었던 이유가 가장 크지요

유럽 제1의 농업국가 프랑스 제2의 농업국가 독일

그냥 땅만 딥따 큰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가지는 러시아제국

반면

냉동 냉장 선박기술이 없던 영국은 1900년 대에 들어서야

자국의 식민지에서 조달되는 육류와 식료품 등으로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하죠
피타고라스 11-11-19 10:21
   
19세기라고 하니 1800년대 초반을 생각하는듯...보어 전쟁은 1900년 전후로 이루어졌음..또한 세계최초로 자동소총이  등장한 전쟁이고.. 보어인들은 이미 맥심 기관총까지 보유한 상태였음..기관총을 무시한 구식 영국군대들이 궤멸된건 당연한 일이고...그리고 영국군대라는게 순수하게 영국인들만 포함되는게 아님...인도 호주 캐나다등 대영제국 전체를 봐야지..
     
스펜타 11-11-19 11:54
   
그거 어떤 자동소총이에요? 이름이 무어에요? 궁금궁금   

저도 보어전쟁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지요

참호전이 도입된 전쟁이고 아무리 대영제국이 넓은 식민지를 가졌어도

물적자원을 식민지를 통해 조달하는건 수월해도 인적자원까지

영국이 마음대로 물쓰듯 쓰지는 못했어요~

식민지? 라는 이름 속에 캐나다 호주 등은 이미 자치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인도인 병력은 워낙 통솔할 수 있는 인력이 딸리기 떄문에

경비나 경계 등의 임무에 주로 투입되었지요
          
스펜타 11-11-19 12:02
   
결정적으로 영국이 100만이라는 인력이 투입가능하다는게 의문 ...

100만이란 인력이 투입될 정도라면 영국은 식민지 방위를 포기해야합니다.

실례로 1차대전을 기점으로 영국은 식민지 방위를 식민지 자치 정부에 이양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1차대전에 투입한 인력 때문에 식민지 방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식민지 자체 정부에 이양한 것이지요

~  보어전쟁에서 영국이 패배한건 사실이지만 총력전을 한건 아니라는 거죠. ㅋㄷ
     
카이저소제 11-11-19 15:24
   
동학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에게 가장 크게 타격을 입힌 일본군의 무기가 기관총입니다
그걸 막으려고 장태들을 개발했었고.

당시 이미 전장에서 폭넓게 보급된 주요 무기인 기관총을 영국군이 무시했다니..
당시 최상급의 전쟁경험과 전력을 보유한 영국군은 바보입니까?

보어전쟁 당시 영국군도 최신자동기관총인 맥심 기관총 사용했음..
이미 1890년 부터 맥심기관총 영국군이 운용했음

당시 식민지 독립전쟁에선 영국은 자국과 대등한 병력,무장,보급등 대등한 세력과 싸운적 없음
미국만은 형편없는 상태에서 지형지물, 날씨등 전략으로 이긴 경우

하지만 식민지 쟁탈전은 다름.
비슷한 무장상황이라면 자기보다 적은 병력이라도 경우에 따라 못이기고 포기를 함.
희생보다 얻는 댓가가 적을 땐 당연한 경우
그러니 여러 식민지 국가가 난립할 수 있었고

하지만 보어전쟁은 다름..
대가를 치르면 얻을 수 있는 파이가 큰 영국과 뺏기면 갈데없는 보어인
특히나 보어인 입장에선 배수진 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방어하는 입장

헌데 당시 새로운 전쟁개념, 즉 방어전에 유리한 참호전 양상이 나온 상황
무장과 보급만 되면 몇배의 적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고
전투시마다 방어측보다 공격측의 피해가 몇 배 커지는게  상황임.
보급부대, 소수병력간의 게릴라 양상이 잦아지고 

결국 공격자보다 방어자가 몇 배의 절대적 우위를 얻는게 참호전임
영국이 50만 투입하고도 7만의 보어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본 이유임

구식 재래식 무기로는 한계가 생긴 상황.
얻게 되는거 보다 피해가 극심하니
기 선점된 식민지를 두고 식민지 국가간의 쟁탈전도 잦아지게 됐음


이게 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건 다 아는 사실
그걸 돌파하기 위해 그 유명한 탱크, 생화학무기, 포병의 발달, 곡사포등의 등장한거고
술먹고니킥 11-11-19 12:43
   
미쿡하고 비유는 좀....ㅎㅎㅎ
schutz 11-11-19 12:45
   
...자동소총은 1차대전 전후로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고, 아마 독일 마우저제 볼트액션식 소총을 말하는것 같네요.

그리고 영국은 삼국지가 아닙니다. 100만대군이라니..
현시창 11-11-19 15:37
   
첫번째, 당시 기관총은 1개 연대에 2~3정이 있을 정도의 물건으로 사실상 야전포와 비슷한 대우 역할, 그리고 가격을 자랑했음. 기관총이 있다해서 그 기관총이 현대의 기관총과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굉장한 오판을 한 것임.

두번째, 당시 영국군의 주력 제식 소총은 흑연화약을 사용하는 마르티니-헨리 라이플로, 전형적인 볼트액션식 소총이되, 2차세계대전 당시 주로 사용되던 메거진 결합식 연발 볼트액션과는 달리 단발식 후장 소총이었음. 사용화약 역시 무연화약이 아닌 블랙 파우더를 사용했기 때문에 탄약의 크기가 크고, 약실의 규격 역시 컸으며 반동역시 대단한 무기였음.

세번째, 당시 영국의 주력 18파운드 야전포는 영어식 분류로 캐논에 해당하는 직사포로 평지에 전개한 적을 제거하기 위한 물건. 따라서 고산지에 참호를 파고 웅거하던 보어족 게릴라에겐 영국의 압도적 화력의 뼈대라 할 야포는 별다른 효옹가치가 없었음. 이 때문에 보어전쟁 이후 영국은 24파운드 곡사포를 채용하였고, 이는 1차세계대전까지 곡사포 장비비율 1위를 영국이 차지하는 가중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
현시창 11-11-19 15:48
   
네번째, 보어전쟁에 100만이란 대군이 투입될 수 없음. 영국은 전형적인 해군국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란 위명을 휘날릴 당시에도 영국육군의 총수는 25만을 넘긴 일이 없음. 이 때문에 인도제곡에서 세포이라 하는 식민지 현지군을 폭넓게 이용해 식민지의 치안 및 안보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이러한 실정은 다른 식민지도 마찬가지였음.

보어전쟁 당시에도 현지 혼혈인이나 친영파 보어인들을 고용한 국경경찰 혹은 기마경찰대라 하는 일종의 드래군을 이용한 자치 식민군이 굉장한 역할을 하였음. 실제 보어전쟁이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때조차도 영국군은 연인원 45만명을 동원한 상태로, 연인원 45만이란 실제 상시 전개한 병력의 수는 최대 6~8만명 수준을 넘을 수 없음.(실제로도 남아프리카에서 작전한 영국군의 숫자는 최초 불러장군의 3개 사단 8만여명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수준이었음.)

물론 이 정도의 숫자만으로도 본토의 향토연대의 예비병력(영국군은 연대가 보유한 4개 대대중 1~2개 대대를 항시 해당지방의 모병 및 훈련부대로 남겨두고 나머지 1~3개 대대를 해외파견하는 구조)을 제외한 가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뽑아낸 수준이었음. 보어 전쟁 이후로 가장 많은 병력을 해외파견 보낸게 1차세계대전때, 7개사단 25만 수준으로 당시 보어전쟁의 규모는 영국으로서도 나름 최대한의 출혈을 한 결과물이었음.

이를 상대하는 보어군의 숫자는 7만 수준으로 이들은 생업등으로 인해 한 시즌 켐페인당 최대 3~4만을 동원하는 수준이었으므로 영국군이 숫자적 우위를 점할 수 있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영국측이 압도적 병력 우위를 점한 적은 없었음.(실제론 4~5만의 보어군과 7~9만의 영국군이 여기저기서 투닥거리는 수준이 보어전쟁.)
가생의 11-11-19 18:28
   
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