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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9 20:25
러시아에 관한 질문
 글쓴이 : 땐왜박멸우
조회 : 1,683  

중세 유럽이나 아시아 같은 경우는 워낙 자주 다방면으로 정보를 얻을수 있어서 대강은 알지만

러시아에 관해선 전혀 모르겠어요...

어떻게 그런 광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조?

몽고는 징기즈칸이 있어서 광대한 영토를 얻을수 있었고

러시아는 어땠나요? 옛날 부터 강대국이었나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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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낭인 11-11-19 22:14
   
- http://ko.wikipedia.org/wiki/시아의_역사
Assa 11-11-19 22:40
   
동쪽으로  계속  가다보니  주인없는땅들을  많이먹엇다고보시면될듯?
뽀로뽀로 11-11-19 23:07
   
1800년때초반 러시아는 부동항(얼지않는항구)를얻기위해서 동쪽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러디가 태평양을건너 알레스카까지진출하고

영국과 프랑스 vs 청나라가 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에게 접근해 중재를 하는 댓가로 연해주를 달라고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전쟁에서 지면 남부영토를 다 잃는줄 알았고
러시아는 무지한 청나라를 감언이설로 속여 자신들이 남부 풍족한 영토를 잃지않게 중재해줄테니
쓸모없는 연해주를 달라는 조건을 걸죠
청나라는 당시 무지해서 영국과 프랑스는 영토가아닌 식민지(물건팔곳)
을 원하는게아닌 영토를 원하는줄 잘못알고 러시아에 중재를 요청하며
연해주를 러시아에게 주게 되죠
     
뽀로뽀로 11-11-19 23:10
   
참고로 1600년 까지 러시아는 약소국이었습니다. 거의 식민 지배국 정도로
1600전까지만해도 몽골 후예들의지배를 받았고 스웨덴과 북유럽 강국의 지배를 받았죠
그러다 1600년 중반 걸출한 알렉세예비치 표도르 대제가 나타나며 강국러시아를건설하게됩니다
          
뽀로뽀로 11-11-19 23:19
   
표트르 1세( 1672년 6월 9일 ~ 1725년 2월 8일)은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재위 1682년 ~ 1725년)였다. 표트르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표트르 1세
 

통치와 개혁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맞서 좀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서유럽의 문화도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했다. 표트르는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하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군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으며 영국에 가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친히 배웠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전통 러시아식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하였고,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겼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편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스웨덴을 모델로 삼아 상설 행정 기구(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관리들의 관등을 정한 관등표를 제정했으며 성문법전을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발달된 학문을 러시아에 소개하고 번잡하던 키릴 문자를 간소하게 개혁하여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게 하는 한편, 학술원을 세워 학문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지주들의 농노 착취, 여성의 낮은 지위 등 러시아 사회의 내부 문제들은 개혁하지 않는 반쪽짜리 개혁이었다.


전쟁
바다로의 교역로를 열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이 필요했던 표트르는 1700년 스웨덴의 칼 12세에 대항하여 덴마크, 폴란드가 맺은 동맹에 참가하여 스웨덴과 대북방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기에는 전사 왕(戰士 王)으로 자칭할 정도로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난 칼 12세의 스웨덴 군에게 크게 패했으나(1700년 나르바 전투), 표트르는 포기하지 않고 군을 재 정비하여 다시 스웨덴에 도전, 1709년 폴타바에서 칼 12세가 친히 지휘하던 스웨덴 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폴타바 전투). 스웨덴으로의 퇴로가 끊긴 칼 12세는 남쪽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따라 1710년 오스만 제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표트르는 1711년 오스만 제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하여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때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몹시 들떠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 세르비아, 몰다비아 등이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그가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 강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지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프루트 강변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항복하는 대가로 아조프와 흑해 함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때 망명 중이던 스웨덴의 칼 12세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칼 12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0여 년이나 계속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트르부르크와 근처의 요새들, 그리고 크론슈타트의 조선소에 강력하고 현대적인 대규모의 해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표트르가 새로이 구축한 해군은 1719년 당시 ‘해상의 왕자’라 불리던 영국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표트르는 이 함대로 한코 해전(1714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하여 핀란드를 강타하였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숙적 칼 12세도 1718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사하였고, 스웨덴 왕위를 물려받은 칼 12세의 처남 프레드리크 1세는 모스크바에 강화를 요청하여 1721년에 대북방전쟁은 모스크바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스웨덴을 정복한 결과 고대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되었다. 표트르에게는 임페라토르(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만년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북방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발트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바닷가의 황량한 불모지에 건설되는 도시라 건설이 어려웠으나,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도 꿀리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을 진행하였다. 이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하였다. 이 중에는 표트르의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세이 황태자는 아버지가 러시아의 정신을 서구 유럽에 팔아넘긴다고 생각해 아버지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자 빈을 거쳐 나폴리로 망명했으나, 표트르가 보낸 사신의 거짓말에 속아 귀국했다가 재판을 받고 황태자 직을 박탈당한 후 1718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제위는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뒷날의 표트르 2세)가 상속받아야 했으나,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표트르는 두번째 황후 예카테리나를 제위 계승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제위 계승권을 부인하는 러시아 전통에도 맞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황후의 혈통(발트해 지방의 독일계 평민)도 문제가 되었으나 표트르는 강권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그러던 중 1724년 12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을 배를 타고 순시하던 표트르는 한 병사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2월 8일 사망하였다. 황후 예카테리나가 제위를 계승하여 예카테리나 1세로 즉위하였다
mymiky 11-11-20 00:18
   
표트르 대제때 대개혁을 통해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야만인이라 불리던 러시아가
프랑스를 모방해 궁정예법도 도입시키고, 수염세 도입으로 털도 다 깍고, 러시아 전통의상이 그때까지만해도, 좀 동양적인 의상이였는데, 유럽 다른나라들처럼 드레스 입히고..
스웨덴한테 이기고, 발트해를 손에넣고, 거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함, 하지만, 이미 서쪽엔 유럽이 빽빽하니 방향을 돌려서 이때부터 노력해서, 그의 손주며느리인 예카테리나여제( 독일인인데, 남편 죽이고, 여황제가 된 러시아 무측천)때 동방진출로 밀고나감 ㅋㅋㅋ 물론, 거기도 소수민족들이 살았는데, 죽이고, 동화시켜가면서 땅을 넓혔죠. 1800중후반엔 드디어 연해주까지 진출~~!! 알래스카도 원래 러시아꺼 ㅋㅋ
땐왜박멸우 11-11-20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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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감사드립니다
er58 11-11-20 08:18
   
러시아 옛날 별명이 원나라의 세금징수원이었죠.
표트르때는 우리나라 역사로 치자면 장수왕 정도, 광개토대왕 시절은 따져보면 원나라 몰락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영토들을 가장빨리 달려들어서 집어삼킨게 더 크죠. 표트르도 대단하긴 했지만, 원나라 몰락기때 하이에나짓 한게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까 싶음.
시간여행 12-02-22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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