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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22 02:01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임진왜란 영향에 따른 조선후기..(지난번 호응 해주셔서 또..ㅋㅋ)
 글쓴이 : 푸헐헐
조회 : 2,494  

안녕하세요ㅋ 지난번 임진왜란의 초반 패배에 대한 원인을 적었던 푸헐헐 입니당.ㅋ 생각외로 호응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해서, 짧은 공부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임진왜란 영향으로 이후 그에따른 조선후기, 개항이 늦어지고 식민지배를 받게된 원인 한가지를 적어보려 합니다. 즐겁게 봐주세요 ㅎ 전에도 적었듯이 일본의 전략은 초고속으로 항전하여 조선의 조정을 끝내버리는 것 이였습니다. 한강, 대동강, 압록강에서 보급을 받는 것이 중요했지요. 한양이 보름만에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로 피신을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순신 장군은 장계를 올리고 출전을 합니다(장계를 올린건 수군은 아직 진관체제므로 전라좌수영 이순신이 경상도까지 출동해선 안돼는 것 때문이겠죠) 앞서 군적의 문란, 즉 조선에 병사가 없는데(군포내고 안가는 상황) 어떻게 이장군은 40여척의 부대를 제대로 거느리고 있었을까요?.. 예.. 반발을 무릎쓰고 재입대,강제입대를 시킨겁니다ㅋㅋ 지방 사족과 양반에게 강제로 징수하여 배를 만들고 아시다시피 화포를 정비 하셨죠. 1년여간 학익진등 전술을 익히고 모든 훈련을 끝낸지 2?3?일 후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선견지명에 놀랄 따름입니다) 암튼 장군은 참전후 초반에 자신감을 높여주기위해 처음4~5차례는 40vs1~2척으로 싸움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 유명한 한산도 대첩이 이루어 집니다. 당시 일본군 함선은 바이킹 배처럼 얇고 빨라서 기동력이 좋고 선회반경이 짧았다고 합니다. 우리 주력의 판옥선은 네모난 대신 예.. 헬기 처럼 제자리에서 회전이 가능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초승달 모양의 만(당연히 만의 입구는 좁습니다)에 정박해있던 백여척의 일본군 함대에 돌격선(거북선)3척을 보냅니다. 종횡무진 배를 쳐부습니다. 거짓 후퇴하며 일본군 함선을 유인합니다. 판옥선이 넓게 산개하여 후퇴하는 척하다가 특유의 기동으로 돌아 섭니다! 예.. 만입구로 쫒아 나오는 일본군 배를 향하여 일점사... 그 유명한 학익진 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순신장군이 개전 직전 배치한 여러 화포들은 일본군 화포보다 사거리가 길었습니다. 또한 당시 포들이 정밀한 타격 유도 장치가 없음에도 좁은 만에 가하는 일점사는 유도미사일처럼 왜군에 박힙니다. 이것이 한산도 대첩. 이로써 일본의 보급로를 끊어 버리십니다. 이로써 권율의 행주대첩때 서해를 통해 무한 화살보급을 하십니다 ㅋ 두번째 백의 종군전 일본의 재침을 예견하시며 모아둔 배,포 등이 한방에 날아간 칠전량해전 이후 ㅂㅅ선조의 요청으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 하십니다 그러나!!!! 예.. 이미 조선의 배는 모두 칠전량해전으로 모두 사라졌습니다(원균이 까이는 주된 이유죠..) 이순순 장군이 과거 장수들과 함선을 찾아 충청도 전라도를 돕니다..왜군이 추격합니다..이틀차이로 쫒고 쫒기는 와중에 칠전량해전 직전 겁먹은 하급장수가 12척을 가지고 도망간 사실을 알아내시고 12척을 확보하십니다. 거기에 1척이 플러스되었는데 때마침 조정에서는 배도 없는데 권률 휘하로가서 육군으로 싸우라고 합니다 이때!!! 그 유명한"신에게 아직 13척의 배가 있사오니.."를 말씀하시며 이를 거부, 333vs13의 기적. 명량 대첩을 이끄십니다 진도 율돌목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그 길목이 좁습니다. 이순신은 물쌀을 거슬러 왜군에게 돌진하였다가 물쌀이 다시 돌아나갈 타이밍에 맞춰 거짓후퇴를하고 이를 쫒아오는 왜군 함선에 철쇄를 걸어버립니다( 이것이 강강수월래 입니다.. 좁은 길목에 강강수월래로 철쇄를 걸었죠) 물쌀이 봐뀌어 추격하던 선두60여척을 제외한 나머지 왜군함선은 전투에 지원이나 참여가 불가능 해집니다. 이순신 장군은 현대의 국지전 개념이라고 할까요.. 선두 60여척과 치열하게 싸워 승리 하십니다.. 이것도 사실 13vs60...ㅎㄷㄷ 합니다.. 이때 유명한 말이.. 돌격명령을 내린 이순신이 치고나갔는데.. 자기만 치고 나간겁니다..ㅋㅋㅋ 다른 배는 쫄았던 것이죠..(333vs13..쫄만 합니다) 전시에 잘 들지 않는 부장호출기 초여기를 걸고 다시 빽.. 부장들을 모아놓고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를 말씀하시며 독려하십니다ㅋㅋㅋㅋㅋ 어찌나 치열했겠습니까? 난중일기에도 "이는 실로 천운 이였다"라고 나옵니다. 좀 재미있는 것이.. 이때 전투 후 장군이 5일간 혼절했는데 이틀째 되는날 도움이 될까 소주를 마셨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뻔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ㅋㅋㅋㅋㅋ암튼 이때가 이순신 장군이 힘든 시기라서 머리가 하얗게 바래집니다..(아들 전사, 어머니 작고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이 철수 하게됩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선봉장이던 곤니칠가와를 죽여야 후일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시어 이를 추격,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에 참전하시고 다들 아시다시피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를 남기시고 전사 하십니다..ㅠㅠ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해 사실 살아 있는데 위장한 것 이다 라는 설도 있었는데요, 이는 선조의 행동과 관련이 깊습니다. 선조는 임진왜란때 한양을 버리고 피신을 갔습니다. 경북궁은 이때 불태워 집니다. 쪽바리가 아닌.. 백성의 손으로..(백성의 분노를 선조가 모를리 없습니다. 훗날 흥선대원군이 재건할때까지 그 잔해가 남아있었습니다..부끄러운 왕가의 산물이나 다름없기에 흥선대원군이 증건 한 것입니다) 암튼, 의병장이나 이순신이나 선조와 달리 조선의 영웅입니다. 선조는 실제 이런 의병장들을 종전후 처형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거론 하는 것은 임진왜란의 영향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선조는 적통(대군출신)이 아니라는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아들 광해군이 있었지만 자신의 후대는 적통(대군='빈'이나 후궁이 아닌 왕비의 아들)으로 삼고자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미루다 임진왜란이 터졌습니다. 피신을 가면서 조정을 둘로 나누기위해(혹시 모를 왕조의 멸망을 막기 위해) 광해군을 왕세자 책봉 합니다 광해군은 적진 깊숙히 들어가 군량미를 전달하기도 하고, 의병장들에게 벼슬을 하사하기도 하며 임진란 극복에 공을 세웁니다. 당시 조정에 있던 사림(동인 서인 북인) 중 북인은 기개와 용기를 가장 중시하기에 의병활동등으로 공이 높았습니다. (예로들면 진주성싸움 기억하시죠? 북인의 조종 조식의 고향이 진주 입니다) 따라서 종전후 광해군과 북인이 집권합니다. 북인은 성리학이 아니더라도 용기를 줄 수 있는 학문이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학파로 이들이 집권한 17c잠깐 동안 서양문물등이 전래되고 급성장한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추구합니다 임진왜란 전 최대 다수이자 집권당인 서인은 일명 율곡학파로써 형이상학적인 이황학파의 동인과 달리 현실개혁에도 높은 참여를 보인 붕당이였습니다. 자- 여기서 이제보니 아쉬운 것 하나가 나옵니다.. 계속 북인이 집권했다면 어땠을까요? 현실 세계에서 용기를 준다면 무엇이든 불교든 뭐든 다 포용하는 학파가 북인입니다.. 학문적 깊이는 동인과 서인에 비해 얕을지언정 가장 유연한 붕당 이였습니다.. 그랬다면 18c후반.. 일본과 청나라보다 개항이 늦어져 결국 식민지배까지 받는 비극이 초래되진 않았겠지요.. 그런데 최대 집권당이자 현실개혁을 중시하던 서인이 임진왜란으로 무너지고 피폐해진 조선사회의 해결책으로 성리학의 절대화를 택합니다.. 성리학의 '리=형이상학적이 이상'을 다시 세우고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본것 입니다.. 컴퓨터 포멧후 다시 윈도우7까는게 아니라 알약깔고 본거죠... 저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의 모습이 이때부터 매우매우 강해집니다..장자우선,남아선호등..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 페모살제(임진왜란 이후 선조에게 적통이 태어나는데 광해군이 죽입니다)등을 이유로 반정을 당하고(인조반정) 북인이 몰락합니다. 인조는 선조에 버금가는 ㅂㅅ왕인데.. 서인과 똑같은 인조는 자신과 달리 똑똑했던 아들 소현세자(병자호란때 끌려가 인삼을 독점하다시피하여 조선인 포로를 구하고 성경을 보고도 거부감 없이 좋은 내용이 많다며 백성에게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던 개방적 사고의 소유자)를 귀국하자마자 독살 해버리죠.. 아들이 광해군,북인과 하는 짓이 똑같거든요.. 암튼 그 뒤로 조선은 사문난적, 위정척사등 대문 걸어잠그고 청=대국의 사대교린 심화, 사상의 경직화 등이 강해지며 일본과 청나라가 차례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때 조병갑이 안정적으로 수탈하며 시대에 뒤쳐졌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배 라는 민족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부분 동인,서인,북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이해가 어려우실지 모르겠습니다만..(기회가 된다면 이부분은 다음에..ㅠ) 큰 줄기만 잡고자 노력하여 적어보았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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땐왜박멸우 11-11-22 02:38
   
선리플 후감상입니다 저번에 올려주신글 유익하게 잘봤습니다. 이번글도 잘읽을께요 감사합니다. ^^
월하낭인 11-11-22 03:46
   
- ..남명 선생 문하에서 의병장만 100인이 나왔다죠..
    쩝.
솔로윙픽시 11-11-22 07:23
   
잘 읽고 있었는데 철쇄 얘기에서 멈추게 되는군요.
강강수월래며 철쇄로 일본 함대를 막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판타지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수십대의 함선을 사람 수십명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고 보며, 또 그걸 견딜 만큼 튼튼하고 긴 쇠사슬을 어떻게 만들었을지도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아시는 바를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푸헐헐 11-11-22 09:21
   
강강수월래, 철쇠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드리지면,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유도한 율돌목이란 곳은 폭이 매우 좁고 물쌀이 강하며 하루에도 몇번씩 물쌀이 봐뀌는 곳 이라고 합니다
( 댓글을 달고자 찾아보았는데 폭이300여 미터, 최고 깊이20미터 정도 라네요..)
그림으로 설명을 드리면 좋겠지만.. 암튼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 배를 공격, 후퇴하는 척 유인을 하는데
쫒아오는 일본군 함대가 율돌목에 들어서는 순간 율돌목의 물쌀이 봐뀌었습니다.

동시에 율돌목 양측에 매달아 놓았던 철쇠를 당겨서(그럼 팽팽해지어 함선에 걸리겠지요)
강강수월래는 이때 철쇠를 걸때 사용한 방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답변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여타 기록에 모두 그렇게 나와있는데 그중 그림자료 찾아보시면 좋을듯합니다..저도 수업때 그림보고 이해가 빨라지더라구요ㅋ
러브사냥꾼 11-11-22 09:27
   
어디선가 본 글이 있긴했는데.. 철쇠는 없었고 순전히 노꾼들이 노를 저으면서 물살을 이용했다고 하는군요...물살이 아군 전선쪽으로 흐를땐 버티면서 왜선이 물살따라 접근할때는 판옥선을 횡으로 돌려서 화력으로 퍼부어 접근하는 왜선들을 박살내었다고 합니다...윗분들글대로 첨엔 오로지 이순신기함만 전투에 참가했었다는게 거의 맞는 이야기 같네요..다른배들은 적의 규모에 놀라 뒤에서 방관만 하다가 이순신장군의 전선이 결국 왜군의 접근과 선내로 기어올라 단병전을 시도하려 하니 독려해서 휘하 군관들을 다그쳐 전투에 참가시키게 한게 맞을겁니다..말이 명량해전이지 우리가 이겼지만 일방적인 전투가 아닌 정말 피말리는 상황이었을 거라 보여지네요 ...일단 왜선들의 돌격시엔 물살의 흐름에 따라 통제하기 어려워서 지들끼리도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면서 제대로 된 전투가 어려웠다고 합니다...결국 물살이 우리 수군쪽으로 흐를땐 최대한 버티면서 물살따라 접근하는 왜선들을 부수면서 시간을벌다가 물흐름이 바뀔땐 이쪽에서 치고 나가 적선을 몰아버린식의 전투를 했다고 합니다...물살이 바뀔땐 이미 박살난 왜선들과 통제가 어려운 배들끼리 뒤엉키며 반대로 아군진영으로 떠내려 가면서 후미의 진영까지 붕괴시킨거라 생각되네요...결국 왜군들이 패할수 밖에 없었던거지요..지형도 좁은데다가 물 흐름 때문에 왜군들은 병력규모가 컸어도 전혀 전력을 발휘할수 없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푸헐헐 11-11-22 09:29
   
즉.. 철쇠의 힘으로만 배가 걸린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봐뀐 물쌀+철쇠로 선두 배들은 후퇴가
안되고, 후방 배들은 진격을 통해 참전이나 지원이 불가능해져 국지전처럼 13vs60여척의 싸움이 되어버린 것 입니다.
이를 승리하신거구요ㅎ
푸헐헐 11-11-22 09:34
   
러브사냥꾼님 댓글이 어느새...ㅋ 너무 이해 쉽게 적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강강수월래는 저도 수업중에 들으면서 헐... 했지만 일단 그 유래가 그렇다고 하니..ㅋ 제가 기타 자료로 찾아본바로는
당시 옆 육지에서 승전을 기원하며 강강수월래를 했다고도 합니다. 승전을 기대하며 돌기만 했는지, 철쇠를 걸어버리며승리를 기원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러브사냥꾼님이 적어주신게 명량대첩의 가장 큰 승리 이유이자 이순신장군의 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셨길;;
다향 11-11-22 10:51
   
푸헐헐님의 글에서 말한것 처럼 이황학문 계열의 명분파가 양대 전란을 방치하고 악화시키고도 그후 더욱 권력이 강해져 현대까지도 우리나라 학문과 정치등에 영향을 미치는건 사실이지만.... 조선을 명망하게 한 가장 큰 원인중 하나는 정조의 급작스런 사후로 인한 세도정치의 부활 때문이라고 어디서 본것 같습니다. 사실 대원군이 집권하여 개혁과 외세에 대해 대비하고자 하지만 수십년 세도 정치로 국고는 텅비고 관리는 부정부패로 엉망이 되어 있었죠... 군함이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국고가 아닌 왕가의 재산을 털어야할 정도였으니..
확정신고 11-11-22 13:16
   
저기 북인은 이황계열의 동인에서 분가한 사람들입니다... 유연함보다는 당시로는 급진 개혁파에 가까운 사람들이죠...
다른 학문에 유연함을 보였다는 들어본적 없구요... 학문은 학문... 외교는 외교... 실리는 실리라고 전후 정치인답게 파고든 사람들입니다...
임란은 이황계열의 동인이 주도한 평화론이 만들어냈다면... 병자호란의 경우는 이이계열의 서인정권이 저지를 일입니다...
하여간 북인은 동인 서인... 그중에 독자적인 세력이 아니라... 서인에 대한 처분을 두고 나누어진것입니다
푸헐헐 11-11-22 16:39
   
확정신고 님, 다향님.. 붕당에 대해서 약간 저와 다르게 알고 계시군요. 북인이 이황계열의 동인에서 분가한 사람들이 맞긴 합니다. 서인 정철에 대한 처벌문제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림이 처음 중앙에 진출했을때 삼사에 3가지 학파가 진출했습니다
그것이 조식,서인(후에 율곡학파로 변신),이황의 계열 되겠습니다. 이들 세 학파의 학문적 태도가 전혀 달랐기에 북인,서인,동인 이렇게 아예 나누어 언급을 하였습니다.
밀게 게시판의 성격과 붕당정치의 내용이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지금 그에대한 게시글을 올릴까 고민중입니다...;;( 이따가 라도 괜찮으시면 올리던지 할께요ㅠㅠ)
 단 확실한 것은 북인은 다른학문에 유연함을 보인 것이 맞습니다. 임진왜란 전에는 서인 역시 개방적인 학파였지만 양란을 거치며 피폐해진 사회의 처방으로 성리학의 절대화, 교조화를 택하며 경직되게 됩니다.
또한 병자호란은 서인정권이 저질렀다기 보단 여진족의 급성장이 더 주된 이유일 것 입니다.

다향님의 댓글의 내용 또한 맞는 말씀이십니다. 단 그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와 동떨어지게 된 이유가 성리학의 절대화가 큰 역활을 합니다. 또한 세도정치의 부활의 결과가 님 말씀 처럼 처참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영정조시대에 중국,일본에 비해 더딘 발전을 해서 조선이 망했다는 시각도 존재하는 만큼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의 큰 줄기가 성리학의 절대화에서 왔다고 생각하기에 본문에 저렇게 기술 하여보았습니다.
조만간 컴퓨터 앞에서 시간이 된다면 장문에 글을 다시 적어 보겠습니다( 이전 본문은 모두 핸드폰이라 힘들었거든요 ㅠㅠ)
암튼 건전한 의견 내어주신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Assa 11-11-22 17:43
   
임진왜란이  이후에  절대적  성리학을  추구할수바께없엇죠  왜냐면  임난이후 백성들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졋기때문에 이전쟁을  제대로  대처하지못한  정부에대한  반감이  생기죠  게다가  의병장까지  처형을시키고 이것을막기위해 효라든지  나라에대한  충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성리학을  사용할수바께 없죠  임난이후  열녀에  대한이야기가  대폭쏟아진것도  이러한  이유죠 그와동시에  오군영을  만들고  수도방위에  힘을쓰죠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북벌이  바로청나라를  겨냥한게아닌  반란을일으킬수잇는  백성들을겨냥한것입니다
     
사나운새벽 11-11-22 20:15
   
정답........
bonobono 11-11-22 20:55
   
임진왜란 상황에 대해서 잘 보고 배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