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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18 18:10
[기타] 사창리 패전(1)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974  

‘킬러’ 작전으로 서울 탈환

횡성에서의 참패로 국군 8사단은 곧 대구로 이동했다. 부대가 무너진 뒤에는 손실이 있었던 병력과 화력, 물자 등을 모두 다시 갖춰야 한다. 흔히들 이를 ‘재정비’라고 한다. 그러나 8사단은 단순한 재정비로서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손실을 본 상태였다.

따라서 8사단 잔여 인원들은 모두 대구로 내려갔다. 깊숙한 후방에 자리를 잡은 뒤 신규 병력, 물자, 화력을 다시 공급받아 예전과는 전혀 다른 부대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그나마 8사단이라는 부대 명칭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은 다행이었다. 이 부대는 결국 대구에서 힘겨운 재편성 과정을 거쳐 거듭 태어났다.

그럼에도 8사단은 전선에 바로 설 수 없었다. 워낙 참담한 패배였던지라, 이후 8사단은 후방의 몇 곳을 전전하며 경계 작전 등에 나섰다. 나중의 일이지만, 1951년 말에 벌어진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이르러서야 8사단은 작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나는 당시 동해안 1군단장으로 있다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수도사단과 8사단을 이끌고 지리산 토벌 작전을 이끌었다.

8사단이 횡성에서 무참하게 꺾였으나 이틀 뒤 벌어진 지평리 전투에서는 중공군이 역시 참담한 패배에 직면했다. 그로써 전선의 형국은 아군에게 유리해져 있었다. 중공군은 지평리에서의 참패를 만회할 여유가 없었다. 바로 등을 보이면서 쫓기는 상황에 놓였다.

그 이후로 벌어지는 작전은 38선을 향한 아군의 북진이 대세를 이뤘다. 횡성에서 국군이 대패하는 바람에 중공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던 전선의 형세가 지평리에서 유엔군이 올린 대첩(大捷)으로 곧 역전(逆轉)되고 말았던 것이다. 리지웨이 당시 미 8군 사령관은 그런 호기(好機)를 놓치지 않는 지휘관이었다.
리지웨이 신임 미 8군 사령관 부임 뒤 전선을 따라 북상하던 무렵의 사진이다. 미 1기병사단 소속 전차가 경기도 양지를 지나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교량이 무너지는 바람에 멈춰서 있다.
리지웨이 신임 미 8군 사령관 부임 뒤 전선을 따라 북상하던 무렵의 사진이다. 미 1기병사단 소속 전차가 경기도 양지를 지나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교량이 무너지는 바람에 멈춰서 있다.

그는 전 유엔군 전선에 중공군을 섬멸(殲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른바 ‘킬러 작전(Operation Killer)’이었다. 지평리에서 크게 예기가 꺾인 중공군에게 새로운 공격을 허용치 않겠다는 판단에서 나온 작전이었다. 곧바로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중공군에게 다가가 가혹한 공격을 펼치라는 내용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의 미 1군단 예하에 있던 우리 국군 1사단은 김포반도와 영등포 일대로 진격을 개시했다. 미 3사단은 한강을 따라 경안리 일대로 나아갔고, 미 25사단은 광지원리 남서쪽의 무갑산 일대에 진출했다. 중서부 전선의 미 9군단은 예하 미 24사단이 중공군 한강 교두보 남쪽을 맡고, 미 1기병사단이 남한강 동쪽의 하진 일대, 국군 6사단이 판대리 부근에 진출해 있었다.

서울에 바짝 다가서다

나는 사실 그 무렵에 어느 정도의 침체(沈滯)를 맞이하고 있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평양 첫 입성 작전, 운산 일대에서 벌어진 중공군과의 조우전, 1.4 후퇴 때 임진강에서 낙오 병력을 수습했던 일 등을 거치면서 격렬한 전투를 수행했던 것과는 달리 리지웨이 부임 뒤의 우리 1사단의 작전은 비교적 평온하게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적이 끊임없이 출몰하며 격렬한 교전에 이어 피비린내가 잔뜩 풍기고 말았던 전선을 오가다가 갑자기 그런 장면이 사라진 뒤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아 찾아든 일종의 무력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늘 긴장은 늦출 수 없었다. 리지웨이의 ‘킬러 작전’이 벌어지면서 우리 1사단도 미 1군단의 지휘를 받으면서 서서히 북상했다.

이번에는 서울 탈환이 목표였다. 중공군의 공세에 쉽게 내줬던 수도 서울을 찾는 일이었다. 서울을 지향하면서 미 1군단 예하의 각 사단은 모두 세 곳을 노렸다. 우선 미 25사단은 남한산성 방향으로 접근했고, 미 3사단은 의정부를 지향하면서 지금의 광진교가 있는 한강 남안(南岸)으로 다가섰다.

우리 1사단의 담당 전면은 매우 넓었다. 미 3사단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광나루로부터 김포의 애기봉에 이르는 구역이어서 범위가 매우 넓었다. 리지웨이가 내린 ‘킬러 작전’은 1951년 2월 21일이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당초 이 작전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이 미 국방성에서 나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울프하운드’ ‘썬더볼트’ ‘라운드업’ 등 강력한 작전 명칭을 내세우면서 적을 모질게 몰아붙이려고 했던 리지웨이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새 작전 명칭에 ‘킬러’를 달고 나왔다. 이름이 모든 것을 다 대변하지는 않겠지만, 우선 작전 명칭에서 강력한 공격 의지를 담아 분위기를 일신하겠다는 리지웨이의 의지가 반영됐던 셈이다.

우리 1사단은 한강 쪽으로 접근하면서 사단 지휘소를 시흥에 차렸다. 그곳에는 마침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택상 씨의 별장이 있었고, 지휘소로서는 마땅했다고 여겼는지 사단 참모들이 그곳에 지휘소를 꾸렸다.

중서부와 중동부 전선을 맡고 있던 미 9군단과 미 10군단도 순항 중이었다. 리지웨이의 거듭 이어진 당부로 아군끼리의 연계는 매우 튼튼했다. 그에 쫓겨 올라가는 중공군은 제대로 반격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전체 전선이 북상하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군 사이의 연계가 튼튼해 중공군은 특유의 기습적인 반격을 펼칠 수 없었다.

등을 보이고 쫓겨 가는 중공군이었으나 아군은 무작정 그들의 뒤를 옥죌 수는 없었다. 적의 후방 병력이 어느 정도 규모로 대기 중인지를 가늠하기 힘들어서였다. 당시 중공군은 만주 일대에서 대기 중이었던 신규 병력을 새로 끌어들인 상태였다. 따라서 새로 들어온 중공군 병력의 전투태세에 관한 정확한 정보 없이는 아군의 공세를 과감하게 확대할 수 없었다.
중공군 공세를 뒤집고 역전에 성공한 신임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오른쪽에서 셋째)이 경기도 여주에서 국군과 미군의 주요 지휘관 회의를 마친 뒤 촬영했다. 오른쪽에서 다섯째가 백선엽 1사단장.
중공군 공세를 뒤집고 역전에 성공한 신임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오른쪽에서 셋째)이 경기도 여주에서 국군과 미군의 주요 지휘관 회의를 마친 뒤 촬영했다. 오른쪽에서 다섯째가 백선엽 1사단장.
용감했던 화교 부대

서울 탈환 작전의 과정에서도 중공군이 아직 서울 일원에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자세히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당시 서울을 일찍 포기했다. 그들은 2월에 접어들어 펼친 4차 공세를 준비하면서 일찌감치 서울의 방어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서울 방어선을 얼른 포기하는 대신 횡성과 원주 방면으로 주공(主攻)을 펼쳐 전세를 만회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중공군이 언제 서울에서 완전히 철수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찰을 위해 한강 남안에 갔을 때 가끔 중공군의 총구가 강 북안에서 번쩍였고, 이어 총탄도 날아들었던 적이 있다. 중공군 대규모 병력은 아니더라도 일부 잔여 병력이 남아 있음을 짐작게 했던 대목이었다.

우리 1사단의 한강 도하(渡河)에 이은 서울 탈환의 명령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흑석동과 마포 일대에서 도하를 준비 중이었다. 미군이 먼저 강을 건넜다. 미 25사단은 남한산성 쪽에서 강을 넘기 전 한 차례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그 뒤 무사히 한강을 건너 곧바로 포천 쪽을 향해 진격했다.

그 서쪽에서 대기 중이었던 미 3사단도 광나루를 건넜다. 이어 그들은 의정부 방면을 향해 진격했다. 미 25사단과 3사단이 강을 건너 서울 북방으로 진출했음에도 흑석동과 마포 일대에서 대기 중이던 우리 1사단에는 달리 도하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도하 연습을 반복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우리는 지시대로 도하 연습만을 반복했다. 상륙 주정(舟艇)에 올라타 한강 북안으로 접근해 상륙하는 모습만 연출하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연습이었다. 안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편성한 ‘화교(華僑) 부대’를 활용하자는 참모의 의견이 나왔다. 중공군이 당시 전선의 상대였던 터라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우리 땅의 중국인인 화교를 모집해 부대를 편성했던 터였다.

그들은 은밀하게 한강을 넘어 서울로 진입했다. 이들 중 일부는 한강을 넘어 서울에 잠입하는 과정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혈통은 서로 달라도 대한민국을 함께 지키려고 나섰던 우리의 동료였다. 서울 침투 과정에서 안타깝게 전사한 화교 부대원의 시신은 지금도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이들의 활동 덕분에 서울의 사정이 자세히 들어오고 있었다.

1951년 3월 14일 밤이었다. 서울에 남아있던 중공군이 모두 철수를 시작했다는 내용의 보고가 전면의 수색대로부터 들어왔다. 횡성에 이어 홍천 등에 유엔군이 진출하면서 중공군 잔여 병력이 마침내 서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미 1군단장인 밀번 장군에게 보고했다. 그는 전화로 내 보고를 듣자마자 짧고 굵은 명령을 내렸다. “진격하라(Go ahead)!”

드디어 서울 수복

상륙 주정의 육중한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지금 서울 동작구 흑석동 인근에서 나는 지프에 탄 채 몸을 배에 실었다. 곧 강 북안의 마포 쪽에 배가 도착하면 우리는 중공군에게 내줬던 서울을 되찾는다. 사실 감격에 겨운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상징인 서울을 적의 수중으로부터 다시 찾아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강을 넘은 날은 1951년 3월 15일 오전이었다. 이날 아침부터 요인들이 한강 도하 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1사단에 찾아왔다. 신성모 국방장관,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이었다. 이들 모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되찾는 현장에 있고자 했다. 걸핏하면 눈물을 흘려 ‘낙루(落淚)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신성모 국방장관은 급기야 또 눈물을 흘렸다.

흑석동의 높은 지대에서 우리 1사단의 선발 공격대로 나선 15연대가 상륙 주정에 올라타 강을 건너기 시작하는 장면을 보면서였다. 그는 또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감격에 겨워했다. 그를 지켜보던 우리 또한 눈시울이 붉어졌다. 속으로는 ‘신 장관만 나타나면 분위기가 눈물로 번진다’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조그만 원망도 들었다. 담담하게 수행해야 할 작전의 현장에서 괜한 감정만 키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진강 일대 중공군과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추진한 공정부대 투하 작전이 문산에서 펼쳐지고 있다.
임진강 일대 중공군과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추진한 공정부대 투하 작전이 문산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와 함께 수도 서울을 되찾는 감격에 젖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만큼은 달리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묘한 분위기도 보였다. 리지웨이는 우리 1사단 15연대가 오랜 도하 훈련 끝에 무사히 강을 건너 서울에 진입하자 “아주 멋진 작전이었다”면서 뜨거운 축하인사를 내게 건넸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나중에 잘 알려진 대로 작전의 중점을 서울 수복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전체적인 형국, 즉 38선을 확보해 중공군의 발길을 그곳에서 묶고 공세를 조절하는 게 우선적인 목표였다. 따라서 서울을 수복하느냐 여부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이 점은 우리의 정서와 퍽 달랐다. 특히 서울을 대한민국의 얼굴처럼 여기는 이승만 대통령 이하 여러 정부 요인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그런 리지웨이는 따라서 아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등을 보이고 물러나고 있던 중공군이 체력을 회복해 다시 공세를 벌이리라고 봤다. 리지웨이는 그런 상황이 닥칠 경우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작전의 전개 과정에 따라 물러나면 물러날 수 있는 곳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서울에 대한 시각 차이

그런 점이 이승만 대통령은 커다란 불만이었다. 리지웨이는 지금의 공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를 사려 깊게 보고 있었다. 중공군은 밀리다가도 언젠가는 반격을 펼치리라 봤다. 냉정했던 그는 중공군의 반격이 거세질 경우에 대비해 축차적인 후퇴선을 고려했는데, 역시 서울 남쪽의 한강 방어선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당시 수도 서울의 인구는 약 15만~20만 정도였다. 중공군 치하의 서울에서 근근이 버티던 인구였다.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리지웨이의 생각이 옳았다. 전쟁이 한창 벌어지는 마당에서 수도 서울 또한 수많은 다른 전투지역과 다를 게 없는 한 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서와는 아무래도 맞지 않았다.

그런 묘한 분위기도 있었으나 상륙 주정에 올라탄 내게는 우선 서울 탈환이 급선무였다. 마포 강안에 도착해 시내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본 서울은 참담했다. 중공군이 버티던 서울에 미군의 공습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건물은 모두 주저앉아 있었다. 가옥도 성한 게 별로 보이지 않았다. 사단 지휘소는 지금의 서울 만리동 고개의 한 초등학교에 차렸다. 15연대의 선발 대대는 우선 서울 도심을 거쳐 북한산을 향해 진군했다. 우리와는 동쪽으로 인접했던 미 3사단이 의정부를 향해 진출하면서 군단의 전체적인 목표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의 선점에 맞춰져 있었다.
중공군 치하의 서울을 수복한 국군 1사단 15연대 장병들이 1951년 3월15일 흑석동에서 상륙 주정으로 마포에 내린 뒤 서울로 들어서고 있다.
중공군 치하의 서울을 수복한 국군 1사단 15연대 장병들이 1951년 3월15일 흑석동에서 상륙 주정으로 마포에 내린 뒤 서울로 들어서고 있다.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기민(機敏)함이 돋보이는 장수였다. 그는 적의 섬멸을 적극적으로 고려했다. 그를 위해 리지웨이는 대규모 공정(空挺) 작전을 구상했다. 미 1군단 예하 3개 사단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면서 북상하는 것과 함께 임진강 일대의 적군을 격멸하기 위해 그 후방으로 대규모 공정대를 투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리지웨이는 그를 위해 187공정연대전투단을 구성했다. 겨냥했던 곳은 문산 일대였다. 우선 전투단의 주력을 문산 북동쪽, 그 남쪽에는 다른 1개 대대를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은 1951년 3월 23일 오전 7시였다. 따라서 나는 서울을 되찾은 감회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 1사단은 부지런히 정해진 지역을 향해 북상하면서 문산 일대에 공중으로 강하하는 187공정연대전투단과 연계작전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다시 밟았던 서울의 땅 이곳저곳을 살펴볼 여유도 따라서 거의 없었다. 단지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우리 1사단의 지휘소를 방문했던 일이다. 이전의 어느 대목에서 소개한 내용이지만 조금 덧붙일 내용이 있다. 그는 어느덧 노쇠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의 우리 국군에게 뜻밖의 선물을 줬다.

3월 18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VIP가 사단을 방문한다”는 미 군사고문단의 전갈이 왔다. 시간에 맞춰 나는 사령부 요원, 미 군사고문 등과 함께 사령부 지휘소 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곧 지프 대열이 초등학교 정문으로부터 먼지를 휘날리며 들어섰다.

1사단 방문한 맥아더

선두 지프의 앞좌석에 맥아더가 앉아 있었다. 우리가 올리는 경례에 답을 하면서 맥아더는 그냥 지프에 앉은 채 내리지 않았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전황보고를 하는 내게 그는 불쑥 “한국군에게 지금 부족한 게 뭐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내가 대답한 내용은 누가 보기에도 좀 엉뚱했다. 나는 “감미품(甘味品)이 없어 고생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단맛이 나는 음식이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우리 땅에서 치르는 전쟁이라 기본적인 식품 마련에는 커다란 문제가 없었던 게 국군의 사정이었다.

쌀과 된장, 고추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구했고, 콩나물 등 간단한 채소를 구해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그러나 단맛이 나는 식품이 없어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맥아더는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돌아봤다. 뒷좌석에 리지웨이 8군 사령관과 함께 타고 있던 도쿄 유엔사령부의 참모가 바짝 긴장했다. 맥아더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면서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제스처만 취했다.
1951년 3월18일 만리동의 국군 1사단 지휘소를 찾은 맥아더(지프 앞 앉은 이) 유엔군 총사령관이 1사단장 백선엽 장군과 악수하고 있다.
1951년 3월18일 만리동의 국군 1사단 지휘소를 찾은 맥아더(지프 앞 앉은 이) 유엔군 총사령관이 1사단장 백선엽 장군과 악수하고 있다.
그는 곧 우리 1사단 지휘소를 떠났다. 얼마 안 있어 산더미와 같은 단맛 나는 음식이 우리 국군에게 보내졌다. 김과 사탕을 비롯한 음식들은 전쟁을 수행 중인 우리가 좀체 접할 수 없던 귀한 물건들이었다. 맥아더는 그렇게 황제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지프에서 끝내 내리지 않았다. 허약해진 체력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1880년 출생한 그는 벌써 당시 나이 71세였다. 수많은 전쟁터를 오간 영웅적인 장군이었으나 그 역시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보다 더 지쳐보았다. 중공군의 1950년 말 중공군의 참전과 전선 후퇴, 트루먼 행정부와의 불화가 깊어진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38선을 회복하려는 리지웨이의 공세적 작전이 한창 벌어지던 무렵에 군문을 떠난다. 트루먼 행정부와의 불화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로부터 약 20여 일 뒤 맥아더는 트루먼에 의해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 직위에서 해임된다. 아울러 오래 머물렀던 군대에서 은퇴한다. 맥아더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프에서 끝내 내리지 않던 맥아더의 모습에서 황혼 무렵의 석양이 내뿜는 마지막 광휘(光輝)를 봤다. 찬란했지만 숙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의 막대한 힘을 직접 체감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비장감(悲壯感)이 찾아들기도 했다. 전선은 그러나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 중공군이 비록 서울을 내주고 말았지만 언제든지 반격을 취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전선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점차 북상했지만, 어느 한구석에서 무엇인가가 비집고 나올 듯했다. 문산 일대에 낙하하는 공정부대와의 연계작전 때문에 마음은 바빴으나 나는 그런 불안감을 떨치지는 못했다.


“임진강의 적을 섬멸하라”

리지웨이 신임 8군 사령관이 부임한 후로는 모든 작전에 특정한 이름이 붙었다. 앞에서 예시한 ‘울프하운드’ ‘썬더볼트’ ‘라운드업’ 등에 이어 우리 1사단이 서울을 재탈환하는 과정이 들어 있던 1951년 3월 말까지의 작전 명칭은 ‘리퍼 작전(Operation Ripper)’이었다.

세로로 켜는 강력한 톱을 일컫는 영어가 리퍼(ripper)였다. 그러니까 그 작전은 ‘쇠톱 작전’이라고 옮겨 불러도 무방했다. 이 작전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서울 탈환에 성공했고 아군은 문산과 춘천, 양양을 잇는 선으로 진출했다. 187공정연대전투단을 문산 일대에 투하하는 작전은 ‘리퍼 작전’의 전과(戰果)를 확대하기 위해 벌였던 것이다.

당시 미군의 정보 판단으로는 중공군 26군과 북한군 1군단이 의정부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주둔 중이었다. 따라서 리지웨이는 문산 일대에 대규모 공정부대를 투하한다면 이들이 퇴각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임진강의 퇴로를 끊을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 작전의 명칭도 따로 있었다. ‘용기 작전(Operation Courageous)’이었다.

이후로도 아주 많은 작전 이름이 등장한다. 아무튼 공정부대 투하 작전은 그런 미 8군 사령부의 의도하에 치밀하게 짜였다. 우선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 미 1군단이 재빠르게 북상하는 일이 중요했다. 행주와 함께 의정부 북쪽으로 거세게 공세를 밀고 나가야 했다. 그런 압박으로 중공군 26군과 북한군 1군단을 밀어붙이려는 의도였다.
1951년 4월 7일 신임 국군 1군단장으로 발령을 받은 백선엽 당시 1사단장이 이임 전 사단 장병들을 사열하고 있다. 그 왼쪽 뒤가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
1951년 4월 7일 신임 국군 1군단장으로 발령을 받은 백선엽 당시 1사단장이 이임 전 사단 장병들을 사열하고 있다. 그 왼쪽 뒤가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
그와 함께 대구로부터 발진한 대규모 공정부대가 문산 일대에 떨어져 도로를 봉쇄하면서 중공군과 북한군을 남북에서 압박하는 개념이었다. 그런 작전 구상에 따라 우리 1사단과 같은 미 1군단 예하의 미 3사단, 우측 전방의 미 25사단은 서울을 거친 뒤 발 빠르게 북상했다.

새로 설정한 작전 통제선에는 우리 1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미군 공정부대와의 연계 작전은 우리 1사단에는 생소하지 않았다. 평양에 처음 입성한 뒤 평양 북쪽 숙천과 순천에 공중 강하하는 미군 공정부대와의 연계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천 일대에서 공정부대와 연계하는 작전을 담당했던 12연대가 이번에도 선두에 나섰다. 김점곤 연대장은 매우 기민하고 과감한 지휘관이었다. 경험도 있었던 터라 나는 안심하고 그 작전을 맡겼다. 그러나 미군의 우려가 만만치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피날레였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공정부대를 적의 후방으로 투하했다. 그러나 당시 노르망디 작전에서 후방에 투입한 공정부대와 해안으로 상륙하는 유엔군 사이의 연계가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아 공정부대의 피해가 혹심했다. 그런 경험이 있던 미군은 이번 작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조바심을 보였다.

신속하고 과감한 공격을 위해 나는 미군으로부터 72전차대대 지원을 요청했다. M-46 신형 전차의 기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작전의 요체는 공정부대의 투하 시점에 정확하게 맞춰 정해진 지점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12연대는 3월 23일 서대문에서 미 72전차대대의 전차에 올라탄 뒤 진군을 시작했다.

미 지휘관의 조바심

그러면서도 미 1군단 부군단장은 끊임없이 우려를 표시했다. 전차에 보병을 태워 진격할 때의 주의사항을 거듭 12연대 대원들에게 말하면서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군이 지닌 나름대로 우려를 해소하려면 작전을 정확하며 빈틈없이 완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늘 미심쩍어했다. 한국군에게 임무를 부여하면서 늘 그랬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마련한 화력과 장비를 쏟아 붓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국군의 능력이었다. 전선에서 쉽게 등을 보이는 군대로서의 이미지는 여전했다. 작전을 전체적으로 이끄는 미군의 고위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1951년 4월 11일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된 맥아더 장군이 미 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1951년 4월 11일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된 맥아더 장군이 미 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우리 1사단의 전과(戰果)는 미군이 인정할 정도였다. 미 1군단의 주력 사단으로 대우를 받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중요한 작전이 벌어질 때면 미군은 여지없이 조바심을 보였다. 전투력에 대한 믿음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은 없었다. 착실하게 작전을 완수하면서 미군의 신뢰를 조금씩 쌓아가는 일 말고는 우리에게 달리 선택할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거대한 공정연대전투단의 공중 강습에도 사실 당시 문산 일대에서 벌인 작전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나도 12연대 후미에 붙어 작전 길에 올랐다. 우리는 3월 23일 서울을 떠나 당일 문산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발진한 135대의 수송기가 곧 하늘을 덮었다.

이어 수많은 공정부대 대원들이 수송기에서 낙하를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수송기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정대원이 낙하산을 펼치고 내려오는 장면은 그야말로 일대 장관이었다. 그럼에도 적은 신속하게 임진강을 건너고 말았다. 일부 육상부대의 공격 전개가 차질을 빚기도 했다.

한발 앞서 강을 건너 북상한 적군, 중간에 그를 정확하게 끊지 못해 공중과 육상의 연계에서 일부 드러낸 실패 때문에 작전은 동원한 물자와 병력, 화력보다 성과가 크게 두드러질 수 없었다. 약 6000명 이상으로 봤던 임진강 남쪽의 적군은 무사히 강을 건너 아군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고 말았다. 약 1개 연대에 달하는 적군을 생포하거나 사살한 정도의 전과로 만족해야 했다.

전쟁터에서의 공명심(功名心)이라는 것은 대단하다. 전투를 이끄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공을 쌓아 이름을 날리는 일이 뿜는 매력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런 공명심 때문에 눈앞의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애꿎은 장병의 목숨을 내주는 일은 비일비재다.

당시 나도 공명심이 지닌 위험성을 깨칠 수 있었다. 공정연대전투단과의 연계작전을 수행한 뒤였다. 나는 그로써 임진강에 다시 진출할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덮친 김일성 군대와 맞서 싸웠던 1사단의 본래 방어지역이었다.

공명심을 벗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나는 당시 침체에 빠졌다. 다부동 전투, 북진, 평양 첫 입성, 중공군과의 조우전 등 격렬한 전투에서 제법 경험을 쌓은 나로서는 중공군에게 밀려 평택까지 쫓긴 상황이 암울하기만 했다. 리지웨이의 지휘 아래 다시 북상하는 작전을 펼쳤지만 침체의 기운을 떨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수훈(殊勳)을 세워야 한다는 공명심의 강박감이 불러왔던 심리상태였을 것이다.
퇴임하는 맥아더 장군(앞 차량 일어선 이)이 미 1군기에 경례를 하자 뉴욕 시민들이 오색 카드를 날리면서 환영하고 있다.
퇴임하는 맥아더 장군(앞 차량 일어선 이)이 미 1군기에 경례를 하자 뉴욕 시민들이 오색 카드를 날리면서 환영하고 있다.
임진강에서 반도(半島) 형태의 지형을 보이는 곳이 있다. 임진강의 파란 물결이 지나가는 파주군 장파리 서쪽이었다. 북쪽으로부터 흘러드는 임진강은 이곳에서 커다란 굴곡을 보인다. 물길이 남쪽으로 한참 내려오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북쪽으로부터 강 남안 쪽으로 반도 형태의 땅이 생겼다.

이곳에 제법 많은 적이 모여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나는 ‘적을 하나라도 더 생포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특공대 2개 중대를 급히 편성했다. 이들을 반도 형태의 지형 양쪽으로 투입했다. 반도 지형의 땅에 남아있던 적군을 위에서 포위한 뒤 잡아들인다는 구상이었다.

특공대는 순식간에 200명에 달하는 적군을 생포해 귀환했다. 그 북쪽에 남아있던 적군까지 생포해 오는 일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다시 작전을 서둘러 펼치려고 했다. 그때 내 곁에서 충고를 해주던 미 작전 고문관 메이 대위가 내게 말을 건넸다.

“사단장, 좋은 일은 꼭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정도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전쟁터에서의 욕심이 부르는 재앙을 여러 번 목격했던 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느덧 공명심에 젖었던 셈이다. 내 그런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당시 나를 감쌌던 침체의 궁극적인 원인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깨달음 속에 4월의 시간이 흘렀다. 사고로 인한 비보가 있었다. 강릉의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3월 말 여주 작전회의를 마치고 귀임하는 길에 비행기 추락으로 실종 뒤 사망한 일이었다. 나는 그 후임으로 임명을 받았다. 4월 7일이었다.

그리고 11일에는 맥아더 장군의 해임 소식이 날아들었다. 커다란 변화였다. 리지웨이는 맥아더 후임으로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했다. 미 8군 사령관 후임으로는 밴 플리트라는 장군이 온다고 했다. 중공군의 낌새가 만만찮은 상황에서 돌연 날아든 여러 변화였다.


밀번 군단장의 만류

1951년 4월 11일 나는 1사단이 있던 파주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새로 임명받은 1군단장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고하기 위해서였다. 개전 뒤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줄곧 나를 이끌었던 프랭크 밀번 1군단장은 친필의 서한과 함께 자신의 전용기였던 쌍발 프로펠러의 L-17을 보내줬다.

프랭크 밀번 군단장은 사실 나의 군사적인 스승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나는 그로부터 군인으로서의 용기와 침착함, 그리고 부하에 대한 포용력을 모두 배웠다. 내가 대관령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실종 사망한 김백일 장군의 후임으로 1군단장을 맡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밀번 군단장은 만류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화력이나 전쟁 준비 조건 등이 미 1군단 예하의 한국군 1사단이 훨씬 낫다. 한국군 1군단장이 비록 좋은 자리인 줄은 알지만, 여기서 더 많이 배우고 전공을 쌓는 게 좋다. 미 1군단에 더 남아 있어라”고 했다. 밀번 군단장의 제의는 한국군 안에서의 내 경력과 승진을 감안한 것이었다. 고맙기 짝이 없는 충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한국군 지휘부가 내린 인사명령을 스스로 거절할 힘이 없었다. 결국은 그래서 1사단장 직위를 떠나 강릉의 1군단장으로 부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밀번 군단장이 보낸 서신을 뜯어 봤다. 나를 칭찬해준 내용이었다. 그는 나를 “가장 능숙한 지휘관(most skillful leadership)”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래도 과분한 찬사였다.

아무튼 그와의 헤어짐이 아주 섭섭했다. 1사단 장병과의 이별도 마찬가지였다. 사단장으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나와 사단 장병은 군인으로서 겪어야 할 상황은 전부 겪었다. 최고의 위기를 함께 헤쳤고, 최고의 승리도 함께 만들었다. 마지막 사단 사열을 하면서 나와 그들이 주고받는 눈길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 붉게 물들었던 장면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부산은 당시의 대한민국 임시 수도였다. 임시 경무대에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내가 군단장 신고식을 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한 바로 그날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해임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가깝게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자리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는 매우 침통한 얼굴빛으로 내게 소장 계급장을 달아줬다. 맥아더라는 아주 든든한 자신의 후원자가 미 행정부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한반도 전쟁의 지휘권을 놓았다는 점이 이 대통령으로서는 매우 불안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김활란 공보장관이 내게 만찬을 베풀어줬다. 지금 그 사진이 남아 있으나 사실 저녁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기억이 없다. 저녁은 일찍 끝났다. 나는 부관이 건네준 종이쪽지를 들고 어둑해진 부산 거리에 나섰다.
1951년 4월 초 1군단장으로 임명된 백선엽 장군(오른쪽)이 김활란 공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왼쪽부터)과 저녁식사를 하기 전 찍은 사진이다.
1951년 4월 초 1군단장으로 임명된 백선엽 장군(오른쪽)이 김활란 공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왼쪽부터)과 저녁식사를 하기 전 찍은 사진이다.
열 달 만에 찾은 가족

전쟁 발발 10개월 만에 가족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젊은 아내와 네 살 난 딸은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 신당동 집을 떠난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다. 전황(戰況)이 너무 급해 나는 그 이후로 줄곧 가족의 안위를 챙길 틈이 없었다. 처음 서울을 수복할 때 동생 인엽으로부터 “형수와 조카가 모두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 안심만 했던 터였다.

다행히 1사단의 참모 일부가 내 가족을 챙기다가 1.4 후퇴 무렵에 이르러서야 아내와 딸을 부산으로 피난시켰다고 했다. 나는 군단장 신고식에 이어 신성모 국방장관 등과 저녁을 마친 뒤 부관이 적어준 주소를 토대로 아내와 딸이 머무는 조그만 골목의 판잣집을 찾을 수 있었다.

딸은 거의 1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처음에는 낯설어하다가 곧 알아봤다. 그리고 금세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러나 아내로부터는 많은 원망을 들어야 했다. 울면서 이어지는 아내의 원망에 나는 한 마디도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적이 점령했던 서울에서 딸과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어서였다.

나는 이튿날 강릉의 군단장으로 부임했다. 전선은 겉으로는 조용했다. 내가 새로 맡은 강릉의 1군단 분위기는 대규모의 적들과 거친 전쟁을 벌이던 서부전선과는 판이했다. 전면의 적은 중공군이 아니라 북한군이 주를 이뤘다. 따라서 나는 1사단장 시절의 싸움과는 다른 전투에 임해야 했다.

중공군으로서도 새로운 싸움에 나서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들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의 싸움에서 승부가 쉽게 갈라지지 않을 것으로 봤다. 1950년 10월 말 참전 뒤이어진 1, 2차 공세 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국면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까지 점령하며 기세를 유지했던 중공군에게 새로 나타난 리지웨이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앞서 적은 대로 리지웨이 부임 뒤 북위 37도까지 밀렸던 아군의 전선은 곧 서울 수복 뒤 38선 이북으로까지 올라섰다. 아울러 중공군이 큰 공을 들여 노린 역습과 반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비록 한국군 8사단을 횡성에서 붕괴시키는 등 부분적인 전공은 있었으나 지평리 전투 등 커다란 의미를 지닌 싸움에서는 참패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전시 중 촬영한 이승만 대통령 모습. 불만이 있을 때 엄지 손가락 등을 향해 입김을 불어대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라이프
전시 중 촬영한 이승만 대통령 모습. 불만이 있을 때 엄지 손가락 등을 향해 입김을 불어대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라이프
국면전환 노린 중공군 공세

중공군은 마오쩌둥(毛澤東) 등이 이끄는 전쟁 최고 지도부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신규 중공군 병력을 만주에서 대기시키다가 전황의 전개에 따라 지속적으로 이들을 한반도 전선에 내려 보내고 있었다. 결코 쉽게 밀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지도부의 그런 의지와는 달리 전선 지도부는 걱정해야 할 점이 많았던 듯하다.

전사의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전선 지도부는 다른 무엇보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특히 신규 중공군 병력이 대기 중이던 만주 일대에서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전선 깊숙이 남하했을 때의 상황이 문제였다. 중공군으로서는 가장 치명적 약점이었던 보급이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길어지는 보급선, 그리고 가차없이 달려들어 폭탄을 퍼붓고 사라지는 미군의 공습 능력이 다 무서웠다. 그러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은 미군의 기습적인 상륙이었다. 중공군은 늘 그 점을 걱정했던 듯하다. 특히 1950년 4월에 접어들어 자신들의 신규 병력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깊숙이 남하하는 상황을 걱정했다.

중공군 전선 지휘부는 미군이 재차 상륙을 시도할 경우 유력한 지점을 안주와 원산으로 봤다고 한다. 평양 서북의 안주와 동해안 원산에 동시 기습 상륙한 미군과 유엔군이 자신의 길어진 보급로를 끊고 들어올 경우 어떻게 대비해야 하느냐를 두고 전전긍긍했다는 것이다.

중공군으로서는 그런 피동적인 국면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들은 비교적 자국과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하는 전쟁, 그리고 상대를 크게 압도할 수 있는 병력, 오랜 경험으로 화려한 전술을 펼칠 수 있는 장병 등의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위해 물자를 동원하고 화력을 마련하는 일 등에서 중공군은 미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힘이 달리는 국면에서 더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수세(守勢)를 공세(攻勢)로 전환하는 일이 필요했다. 당시 중공군으로서는 그 점이 확실히 필요했다. 그런 맥락에서 중공군 전선 지휘부가 펼치고 나온 게 중공군 제5차 공세였다.

중공군은 수도 서울을 직접 노릴 생각이었다. 1.4 후퇴의 국면에 이어 5차 공세로 미군과 유엔군을 다시 한 번 서울 이남으로 밀어 내린다면 상징적인 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봤던 것이다. 실제 상대적으로 약한 전투력을 보였던 국군만을 노리고 펼쳤던 이전까지의 공세와는 달리 중공군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의 ‘한 판 승부’도 피하지 않으려 했다.

중공군은 신규로 만주에서 이동한 병력을 포함해 모두 3개 병단 11개 군을 동원했다. 북한군 4개 군단도 그를 뒷받침했다. 주요 작전 지역은 서부전선의 문산에서 중부 전선의 춘천에 이르렀다. 우선은 김화와 가평 사이에 발달한 산악지역을 활용해 후방으로 침투를 시도할 작정이었다.

중공군이 공략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대상은 미 1군단과 9군단이었다. 이들을 상대로 3병단과 9병단, 19병단을 집중할 계획이었다. 3병단이 미 1군단과 9군단을 정면에서 압박하는 동시에 9병단과 19병단이 동서 양측으로 우회하면서 공격을 펼친다는 구상이었다.

다시 한반도 허리 부근의 서부와 중부 전선에 전운(戰雲)이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중공군 지휘부는 4월 18일까지 각 병력에게 공격 위치에 서도록 했고, 20일까지 공격 준비를 완료한 다음에 22일에 전면 공세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다시 움직인 적군

전체적인 전투 흐름으로 이야기하자면, 중공군이 1951년 4월 들어서 펼친 공세는 제 5차에 속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조금 부연할 필요가 있다. 중공군은 한반도 참전 직후에 바로 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평양을 넘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고 있던 유엔군을 향해 평북 일대에 매복했다가 벌인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바로 1차 공세다. 그런 중공군의 참전 및 공세 의도를 오독(誤讀)했다가 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중순까지 전투를 벌이다 유엔군은 다시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때의 중공군 공세가 2차에 해당한다. 유엔군은 이미 등을 보인 상태였다. 한 번 밀리면 둑을 무너뜨린 물에 밀리듯 뒤로 줄곧 밀리는 것이 전투다. 그런 기세에 따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북위 37도선까지 밀렸다. 그 당시의 중공군 공세가 3차다. 이른바 ‘1.4 후퇴’의 상황이다. 4차는 그 직후 벌어진다. 그러나 새로 한반도 전선에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의 창과 방패가 날카롭고 두터웠다. 중공군은 한국군 8사단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1951년 2월 말 경기도 지평리에서 증강한 미 23연대전투단에게 참패하면서 공세가 꺾인다. 이것이 4차다.
전쟁에 참전한 미 공군기가 항공모함 위를 비행하고 있다.
전쟁에 참전한 미 공군기가 항공모함 위를 비행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공군의 다음 공세, 즉 5차 공세는 두 차례에 나눠 펼쳐진다. 1951년 4월 말과 5월 중순이다. 그래서 흔히들 이 두 공세를 5차 1단계, 2단계로 나눠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중공군의 5차 공세를 보는 시각은 여럿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중공군이 제 역량으로 한반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느냐 없느냐를 스스로 물었던 싸움이다.

중공군은 제5차 1, 2단계의 거센 공세를 밀어붙인 끝에 결국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승세를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다. 체력의 거의 밑바닥을 다 소진한 싸움이기도 했다. 전법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해야 했다. 큰 흐름으로 볼 때, 중공군은 이 5차의 두 단계 공세를 마친 뒤에 더 이상의 대규모 공세에 나서지 않는다. 미군이 갑자기 강해졌다거나, 허약했던 국군이 체력을 보강한 게 아니었다. 중공군을 포함해 북한군, 소련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공산주의 군대가 미군과 유엔군 등 서방 진영의 군대를 상대로 더 이상 뚜렷한 승세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의 판단이다.

중공군의 의도

당시 중공군은 마지막 희망을 5차 공세에 걸었던 듯하다. 야무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선의 넓은 구역을 때리고 들어왔다. 만주에서 준비를 마쳤던 군대, 1~2차 공세에 나섰다가 체력이 달려 쉬면서 재정비에 들어갔던 군대를 모두 동원했다. 3개 병단 11개 군, 33개 사단이었다. 북한군은 4개 군단 12개 사단이 나섰다. 내가 당시 섰던 전선은 앞에서도 소개한 대로 강릉의 1군단이었다. 당시 1군단의 예하에는 두 사단이 있었다. 개전 뒤부터 줄곧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거나 남하하며 작전을 벌였던 수도사단과 전투 경험이 거의 없던 11사단이었다. 1101 야전공병단을 그에 추가할 수 있었으나 군단이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초라한 역량이었다.
6.25전쟁 기간 동안 동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한 미 7함대 소속 뉴저지함의 앞 모습.
6.25전쟁 기간 동안 동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한 미 7함대 소속 뉴저지함의 앞 모습.
화력은 매우 부족했다. 그전까지 내가 이끌던 1사단이 미 1군단에 배속해 강력한 야포와 전차의 지원을 받았던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드러냈다. 군단의 화력으로는 겨우 105㎜ 18문을 거느린 포병 1개 대대가 있었다. 나는 전쟁 발발 뒤 줄곧 1사단에만 있었던 까닭에 강릉의 1군단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스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보잘것없는 화력으로 공산주의 군대에 맞서 싸웠던 국군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 정도의 화력으로는 유사시의 커다란 전투를 결코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해안은 한반도에서 펼쳐지는 아군 전선의 동쪽 끝이다. 전쟁의 큰 승패가 갈리는 곳도 아니었다. 따라서 전쟁의 흐름에서는 오지(奧地)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전쟁은 늘 변수에 올라타 벌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머무는 곳이 중심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경우라도 적이 이곳을 노릴 때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순전히 지휘관의 몫이었다.


나는 강릉에 부임한 뒤 우선 군단 참모를 비롯해 각 사단 및 예하부대의 지휘관들을 만났다. 우선 그들의 보고를 귀담아들었다. 10여 일 정도를 그런 일정으로 보냈다. 내가 군단장으로 부임하고 처음 취한 조치는 군단 참모들의 불만부터 샀다. 당시 군단본부는 강릉 시내에 있었다. 시내의 버젓한 법원 건물에 본부를 차려뒀던 것이다.

나는 부임 후 첫 명령으로 이 군단본부를 주문진의 모래사장으로 옮기라고 했다. 강릉에서 보면 전선으로 북상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법원이 있던 훌륭한 건물을 두고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군단본부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니 당장 군단 참모들로부터 불평이 쏟아졌다. 내가 지시를 전하는 자리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없던 참모들이 주문진으로 옮겨진 텐트에서 식사할 때는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는 불평을 쏟아냈다고 한다. 솥에 모래 알갱이가 들어가 입에서 서걱거리는 밥을 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모른 체했다.

전선에 설 때 늘 나를 지배했던 신념 때문이었다. 군은 전선으로부터 멀어지면 싸우려는 뜻이 흐트러진다. 아울러 각종의 유혹이 넘치는 도시는 군의 전의(戰意)를 깎아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군단이 결여한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로 화력의 문제였다. 부족한 화력의 문제. 내 시선은 자연스레 동해안에 떠서 북한 동부 지역을 강타하고 귀환하는 미 해군 제7 함대의 전투기들에 가서 닿았다. 제7 함대는 당시 동해안에 두 대의 항공모함을 띄우고 있었다. 항모에서 이륙한 비행기들은 북한 동부지역을 맹렬하게 때리고 돌아왔다.

미군 비행장을 만들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적의 대공포화로 손상을 입었거나 제대로 폭탄을 투하하지 못해 폭탄을 그대로 싣고 오는 공군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다시 항공모함 갑판으로 착륙하기가 어려웠다. 위험성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미 해군은 새로 부임한 내게 육상 활주로를 하나 닦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들의 요구를 성심성의껏 해결하려 분주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새로 부임한 1군단의 업무에 매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공세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국군 1군단의 전선에는 거의 요동이 없었다. 단지 북한군이 전선 일부에서 공격을 벌여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북한군은 실력이 보잘 게 없었다.

이미 철저하게 무너진 뒤 급속한 재편과정을 거쳐 겨우 전선에 올라선 군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변죽을 울리다가 제풀에 지쳐 퇴각했다. 수도사단과 11사단의 1군단 방어지역 아군의 진지를 뚫지 못하고 물러서는 식이었다. 북한군은 우리의 반격이 벌어지면 아주 무기력하게 내빼고 말았다. 서부전선은 그대로 미 1군단이 맡았다. 방어지역은 임진강에서 한탄강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예하에는 미 3사단, 미 24사단, 미 25사단, 국군 1사단, 영국 29여단, 터키여단이 있었다. 그 오른쪽은 미 9군단이 맡았다. 가평에서 연천을 잇는 선이었다. 예하에는 미 1해병사단, 국군 6사단, 영국 27연대가 있었다.
F-4 코르세어 전투기가 항공모함에서 발진을 준비 중이다. 6.25전쟁 기간 중 동해안에서는 미 7함대가 항모 두 대를 동원해 북폭에 앞장섰다.
F-4 코르세어 전투기가 항공모함에서 발진을 준비 중이다. 6.25전쟁 기간 중 동해안에서는 미 7함대가 항모 두 대를 동원해 북폭에 앞장섰다.
중공군은 가평 일대의 산악지대를 먼저 공략하면서 중부의 아군 전선에 구멍을 뚫고자 했다. 그러나 서부와 중서부 전선의 일대가 곧 격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서부전선에서는 파평산, 설마리, 포천 등 지역이 치열한 싸움터로 변했다. 중공군은 강력한 공세로 나왔다. 아군도 실체를 알 수 없어 두려움을 키웠던 중공군을 이제는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습과 매복, 우회를 거듭하며 다가서는 중공군에게 아군이 더 이상 등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대부분의 전쟁터는 격렬한 싸움이 일었다.

내가 그전까지 이끌던 1사단은 물러서지 않으면서 중공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약 3일 동안 1사단은 파평산 일대에서 때론 중공군에 의해 전투지경선이 4㎞ 뚫렸다가도 미 공군의 원활한 협조를 이끌어내며 적을 곧 물리쳤다. 분전(奮戰)의 연속이었다. 1사단을 꺾고자 했던 중공군 64군은 결국 3일 이상의 공격을 벌였음에도 공세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말았다.

영국군의 여유

두 부대의 싸움이 내 이목을 끌었다.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과 국군 6사단의 와해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공군에게 또 국군이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이제 제 실력의 바닥을 거의 드러냈음에도 말이다. 그에 비해 영국군 1개 대대는 부대 전체의 소멸을 눈앞에 두고서도 끝내 싸웠다.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으로 당시부터 큰 이름을 얻었던 영국군은 내가 보기에 퍽 개성이 있는 군대였다. 그들은 미군에 이어 파견 병력의 숫자로 볼 때 유엔군 중 2위를 차지했다. 2개 여단을 파병해 영국군의 싸움 스타일을 선보였다.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여유로움이었다.

그들은 늘 티타임(tea time)을 즐겼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오후의 일정한 시간이 오면 진지 속에서 차를 끓여 마셨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나는 그런 영국군의 티타임을 종종 목격했다. 여유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도 그들은 다소 한가하다 싶을 정도로 차를 즐겼다.

그러나 책임감은 아주 높았다. 포병의 경우가 좋은 예다. 그들은 관측을 위해 일선 너머의 적진 가까이 침투하는 일을 포병중대의 중대장이 직접 맡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위험하면서 중요한 일에 높은 계급의 장교가 직접 나서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또는 무엇인가가 허전하고 부족해 보였다.
1950년 10월 북진 길에 서로 만난 미군과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 사병이 서로 환담하고 있다. 영국군은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1950년 10월 북진 길에 서로 만난 미군과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 사병이 서로 환담하고 있다. 영국군은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가 벌어졌을 때 영국군 29여단은 글로스터 연대 1대대를 경기도 적성 부근에 배치했다. 이곳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1대대는 달리 ‘글로스터 대대’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다른 2개 영국군 대대 및 벨기에 대대와 함께 임진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정면은 약 11㎞에 달했음에도 모두 4개 대대로 거점을 형성해 방어에 나서고 있었으니 중간의 여러 곳은 중공군 침투에 취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상황이었다. 마침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한 1951년 4월 22일은 영국인들의 종교적 명절 전야(前夜)였다. 여유를 즐기는 영국군답게 방어에 전력을 쏟지 못했던 모양이다.

중공군은 역시 밤에 움직였다. 글로스터 대대의 정면을 향해 임진강을 건넌 중공군이 거센 공격을 퍼부으면서 다가왔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를 활용해 밀고 또 밀며 들어왔다. 곧 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영국군은 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중공군은 역시 수적인 우세를 잘 활용하면서 전선을 압박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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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구리 17-03-18 20:04
   
김활란 ㅆㅂ년이 있네요?...
     
흔적 17-03-19 01:47
   
ㅇㅇ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