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밀리터리 게시판
 
작성일 : 17-03-18 18:24
[기타] 사창리 패전(2)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413  

중공군의 포위

하루가 꼬박 지나면서 상황은 다급해졌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아 상대를 감제할 수 있는 감악산(675m)이 중공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벨기에 대대와 다른 영국군 대대는 진지를 빼앗겼다 다시 찾으려고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벨기에 대대가 겨우 중공군 포위를 피해 후퇴하고 다른 영국군 대대 또한 후방으로 물러섰다.

글로스터 대대는 원래의 고지를 내주고 후방으로 내려와 인근 주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던 고지에 사주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235고지로, 일명 ‘설마리 고지’라고도 불렀던 곳이다. 24일 새벽에는 급기야 글로스터 대대 주변을 중공군 63군이 완전히 둘러싸는 상황으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포위당한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영국군 29여단장은 배속해 있던 미 3사단장과 긴밀하게 협의했으나 달리 방도는 없었다. 미 1군단장인 프랭크 밀번 장군까지 나서서 글로스터 대대의 구출작전을 지시했으나 역시 뾰족한 수는 없었다.

당초 유엔군이 진출했던 캔자스선은 일찌감치 무너졌고, 군단 전체는 캔자스선 후방에 새로 설정한 델타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글로스터 대대의 고립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력으로 중공군 포위를 뚫고 후퇴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시간은 점점 영국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글로스터 대대는 후퇴로가 막힌 상황에서도 진지를 향해 다가서는 중공군을 맞아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나 중공군의 막대한 수적 우위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글로스터 대대의 고립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져 부대 전체의 절멸, 아니면 혈로를 뚫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하느냐의 고비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결국 영국군 29여단장은 최후의 지시를 글로스터 대대장에게 내렸다. 여단장은 본대 전체가 델타선으로 철수하기에 앞서 글로스터 대대장에게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철수하거나, 아니면 중공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될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라”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때 설마리 전투를 이끌어 영국군의 강인함을 알렸던 글로스터 대대장 J. P Carne 중령.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때 설마리 전투를 이끌어 영국군의 강인함을 알렸던 글로스터 대대장 J. P Carne 중령.
글로스터 대대장은 각자 혈로를 뚫고 후퇴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따라서 글로스터 대대의 예하 각 중대는 스스로 판단에 따라 철수로를 잡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글로스터 대대장의 발언이었다. 그는 철수를 명령하면서 중대장들을 불러 놓은 뒤 “나는 부상자와 함께 고지에 잔류하니 각자 안전하게 철수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북쪽으로 철수 방향을 잡은 글로스터 대대 D중대만 중공군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적이 버티고 있는 북쪽으로 움직여 상대의 허를 찌른 결과였다. 그들은 중공군 지역을 벗어나 인접한 한국군 1사단 지역으로 무사히 철수했다. 나머지는 모두 중공군에게 최후의 한 발을 날리면서 분전하다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중공군에게 임진강 남쪽의 일대를 내주는 결과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 의도는 이로써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 29여단이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중공군과 맞서 싸운 까닭에 서울을 노리고 남하하는 적의 공세는 22일부터 25일까지 이곳 일대에서 머물고 말아야 했다. 전략적으로는 중공군에게 적지 않은 손실이었다.

사흘 발 묶인 중공군

글로스터 대대원은 모두 850여 명이었다. 그 중 장교 21명과 사병 509명이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희생은 컸으나 이 설마리 고지에서 보여준 글로스터 대대의 분투는 매우 성공적인 고립작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공군의 전체적인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고, 서부전선의 핵심인 미 1군단 주력이 무사히 후퇴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로스터 대대가 약 3만에 달하는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최후의 접전을 벌였던 설마리 고지. /위키피디아
글로스터 대대가 약 3만에 달하는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최후의 접전을 벌였던 설마리 고지. /위키피디아
영국군은 식민지 경영을 위한 군대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주 적은 병력으로 거대한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소수이지만 정예(精銳)로 군대를 키워야 했다. 부대의 기율과 장교의 책임감, 그로써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 등을 갖췄지만 현대전을 수행하는 데는 부족한 면모도 없지 않았다.

대단위의 기동전, 대량의 물자와 장비를 일거에 동원하는 동원 능력 등을 고루 갖추지는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영국인 특유의 여유와 격식을 따지는 문화적 배경도 갖췄다. 그럼에도 설마리에서 보인 글로스터 대대원의 감투정신은 고귀했다. 마지막까지 적에게 총구를 겨누고 싸우다가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던, 군인으로서의 면모가 깊은 인상을 남겼던 군대였다.

부족한 대대 병력으로 중공군의 거대 병력에 맞서 분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하다. 미군과의 원활한 협조가 그 한 원인으로 꼽힌다.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을 적절한 시기에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크다. 미군과의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던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영국군의 오랜 전통과 명예심, 자긍심 등이 적의 공격 앞에서 바로 등을 보이고 무기력하게 물러서는 일을 막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공군은 여러 면에서 허점을 드러냈다. 따라서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해 고립됐다고 하더라도 아군의 공중 보급력을 믿고 끝까지 싸우려는 전의를 잃지 않음으로써 영국군은 중공군의 공세의도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서부전선에서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이 이어져가고 있던 무렵 중부 전선을 맡고 있던 미 9군단 지역에도 중공군이 몰려들었다. 전선의 구석구석을 때려 틈을 뚫으며 진격해 수도 서울까지 노리겠다는 게 중공군의 의도였다. 그에 맞서 미 9군단 예하의 미 1해병사단은 화천 저수지 북쪽, 한국군 6사단은 김화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격은 역시 서부전선 미 1군단이 맞았던 상황처럼 4월 22일 벌어지고 있었다. 중공군은 이번에도 역시 미군을 우회하는 대신 한국군을 선택했다. 화력이 막강한 미군을 가능한 한 최대로 피하면서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크게 전력이 부족한 한국군을 제물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압록강 선착 사단

국군 6사단은 전쟁 준비가 비교적 충실했던 한국군 부대에 속했다. 6사단은 김일성 군대가 기습적으로 남침을 벌였던 1950년 6월 25일 아침에는 가장 인상적인 전투를 벌였던 부대이기도 했다. 그들은 강렬하면서도 조직적인 저항으로 김일성 군대의 침공을 3일 동안 막았다. 그 점은 전쟁 초반의 국면(局面)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 군대가 수도 서울을 점령한 데 이어 춘천을 조기에 공략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한강 이남의 한국군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일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6사단은 그런 김일성의 전쟁 의도를 좌절시킨 큰 공로가 있었다. 따라서 전쟁 초반 6사단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앞에서도 몇 차례 거론했지만 이들에게는 다른 국군 사단이 부러워하는 점 하나가 있었다. 바로 기동력이었다. 영월 탄광 지대에 있던 광산업체들의 트럭을 징발할 수 있어 탁월한 기동력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초반에도 6사단은 늘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기동이 쉬워 장병의 전투력도 높았던 편이었다. 따라서 낙동강 전선이 만들어지기 전의 6사단은 국군 사단 중에서 전과(戰果)와 함께 사기가 높아 형편이 가장 좋았던 부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점이 어쩌면 화(禍)를 부른 측면이 있다. 북진이 벌어지자 이들의 기동은 매우 신속했다. 트럭에 올라타 압록강을 향해 가장 먼저 달려갔다. 다른 사단이 흉내 내기 어려운 속도였다.

6사단 예하 7연대가 가장 먼저 북상해 압록강의 바로 앞인 초산진에 도착함으로써 6사단은 또 명성을 올렸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로서의 이름이었다. 통일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도 그로부터 나왔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던 장면은 어느 누군가가 사진으로 찍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다음의 결과는 그러나 아주 참혹했다. 7연대 장병은 자신들이 트럭에 올라타 아주 경쾌한 몸가짐으로 압록강을 향할 무렵 그 주변의 빽빽한 밀림 속에 몸을 도사리고 앉아 있던 중공군의 그림자를 전혀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목표, 압록강 선착(先着)의 사명감을 위해 전진했으나 전쟁의 원칙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이다.
6사단 장병으로 보이는 국군이 압록강에 도착해 물을 뜨고 있는 장면이다.
6사단 장병으로 보이는 국군이 압록강에 도착해 물을 뜨고 있는 장면이다.
나아가는 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헤아리는 일은 전쟁터에 선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는 표현도 어쩌면 부족하다. 본인은 물론이고, 저가 이끄는 모든 장병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대의 가장 기본은 나아갈 때 앞을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물러설 때 또한 어떻게 물러설 수 있는지를 반드시 살펴야 옳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여담이지만, 당시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나와도 인연이 매우 깊은 사람이다. 김일성 군대의 초기 공세에 밀려 낙동강 전선을 향해 밀려 내려갈 때 나는 그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이끌던 1사단은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한강 인도교가 일찍 끊기는 바람에 임진강 일대를 방어하던 우리 1사단은 모든 장비와 중화기를 갖고 내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력도 뿔뿔이 흩어졌다가 겨우 다시 모이는 중이었다.

1950년 7월 8일로 기억한다. 우리는 당시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방어 임무를 교대해야 했다. 마침 7연대는 동락리라는 곳에서 북한군을 대거 몰살하는 커다란 전공을 세웠던 터라 사기가 매우 높았다. 나는 임부택 중령(당시 계급)에게 “당장은 우리가 임무 교대를 할 수 없을 만큼 전투력이 보잘 것 없으니 준비가 될 때까지 우리를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흔쾌히 내 궁색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7연대의 포병 화력을 얻어 우리는 겨우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김종오 사단장에게 혼쭐이 났다고 했다. 이동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고마운 임부택 중령은 나중에 북진 대열의 가장 선두에 섰다.

그는 초산진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했다가 겨우 살아났다. 임부택 중령은 겨우 사선(死線)을 돌파해 좌측으로 인접했던 우리 1사단의 12연대로 넘어왔던 모양이다. 그는 12연대장이었던 김점곤 중령과 친구 사이였다. 임부택 중령은 개인화기조차도 잃어버렸던 상태였다고 했다. 김점곤 중령이 임부택 중령에게 “압록강에서 떠 온 물은 어디에 뒀느냐”고 농담조로 놀렸다고 한다. 어쨌든 임부택 중령과 그의 예하 장병 일부는 결국 1사단 12연대의 도움으로 커다란 탈 없이 남하할 수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서로 돕는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던 셈이다. 그 뒤 6사단은 재정비를 거쳐야 했다. 사단 전체가 너무 일찍 압록강을 향해 치달은 탓에 중공군의 포위에 걸려 커다란 전력손실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1951년 4월에 벌어지는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대규모 공세 때 사단을 이끌고 있던 이는 장도영 준장이었다. 그는 1961년 벌어지는 5.16으로 인해 매우 유명해졌던 인물이다. 나와 같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어서 창군 멤버에 속했다. 그는 내 후임으로 정보국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국군 사단장 등 주요 지휘관 모두가 그렇듯, 장도영 준장 역시 젊은데다가 전투 경험은 별로 없었다. 중공군이 5차 1단계 공세를 벌이던 무렵에 6사단은 김화 지구를 향해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1951년 4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때 국군 6사단을 이끌었던 이는 장도영 준장이다. 5.16 때 박정희 당시 소장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1951년 4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때 국군 6사단을 이끌었던 이는 장도영 준장이다. 5.16 때 박정희 당시 소장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유엔군 전체에게 내려진 공세 명령으로 38선 이북을 향해 부지런히 전진하는 중이었다. 내가 있던 강릉과 주문진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전면에 버티고 있던 적이 전투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북한군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중공군이 다가서고 있던 서부와 중부 전선의 상황은 달랐다. 중공군은 신규로 한반도에 도착한 새 병력, 재정비를 거쳐 전투력을 회복한 기존의 참전부대를 대규모로 동원해 서부와 중부 전선 모두에서 강력한 공세를 벌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중부전선을 맡아 가평과 춘천 북방으로 진출하려던 미 9군단과 10군단의 앞에는 중공군 39, 40군이 전투를 준비 중이었다.

불리했던 환경

이곳의 산세(山勢)는 험했다. 광주산맥이 서남쪽을 향해 흘러내리면서 많은 산지(山地)가 발달한 지형이었다. 보통은 해발 1000m를 웃돌거나, 그에 다소 미치지 못하더라도 험준한 산들이 많았다. 아군의 진격로는 따라서 이동이 편치 않았다. 높은 산지가 발달해 우선 관측과 기동 자체가 어려웠다. 아울러 인접부대와의 통신 연결도 수월치 않았다. 통신에 제한이 따르면서 부대 사이의 공백은 커질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중공군에 비해 우세에 있던 유엔군의 장비와 물자는 따라서 6사단에게 효율적으로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도 주목해야 했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나선 국군 3사단 장병들을 주민들이 환송하는 모습이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나선 국군 3사단 장병들을 주민들이 환송하는 모습이다.
그런 여러 요소를 따질 때 6사단의 진격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아가는 길이 험하다면 물러서는 길도 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도보로 이동하는 병사들의 진격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를 후속(後續)하는 장비와 물자 등이 늘 제한을 받을 수 있었다. 중공군에게는 유리한 싸움터였다. 그들은 늘 산악 이동을 근간으로 하면서 기습과 우회, 매복을 번갈아 선보이던 군대였다. 물자와 장비를 그런 목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거느렸던 군마(軍馬)도 매우 풍부했다. 산지가 펼쳐지며 발달한 계곡이 중첩해 있다는 점도 역시 중공군에게는 유리함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전쟁의 상처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6사단은 압록강에 선착한 부대로 용맹을 과시했지만, 그 직후 산맥 속에 도사린 중공군의 포위에 걸려 잔혹한 패배에 직면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 부대는 생명줄을 놓을 깊은 위기에 빠졌던 당시의 두려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전쟁이 불붙고 있던 당시의 환경에서 그를 다 감안할 수는 없더라도, 그런 두려움은 적잖게 6사단 장병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공세가 펼쳐 지려던 무렵의 일기(日氣)는 좋지 않았다. 구름이 잔뜩 끼었으며 눈을 가리는 안개가 광주산맥 주변의 여러 산지를 덮었다고 했다. 산불도 잦았다고 했다. 높은 산지라 건조한 기운이 번져 일어나는 산불이었다고 했다. 운무(雲霧)에 화재로 인한 연기도 겹쳐 아군의 시야(視野)는 흐릿했다는 얘기다. 몸을 감추고 은밀하게 산악과 계곡을 넘어 드는 중공군에게는 유리한 날씨였다. 구름과 안개, 연기로 인해 아군의 공중 정찰로는 중공군의 이동을 볼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럴 경우 중공군이 갖추지 못한 미군의 공군력도 제한적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중공군에게는 유리한 작전 환경이었다.


젊었던 국군 지휘관
거듭 말하지만 당시의 국군 지휘관 능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전선 지휘관은 대개 30대 초반 또는 20대 후반의 ‘젊은이’였다. 항일 독립 전선에 섰지만 체계적인 군사교육이나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광복군 출신,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일본군 장교나 만주군 장교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역시 대규모 전투를 이끌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을 따르는 장병들 또한 차분하게 군사교육을 이수한 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짧은 시간에 속성(速成)으로 소총 다루기 등을 배운 뒤 전선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전선의 상황은 지휘관에 의해 좋고 나쁨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전투에 나서서 자신의 장병들을 잘 보호하면서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일은 지휘관의 자질과 판단에 거의 전부가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전쟁에 나선 한국군 젊은 지휘관들은 싸우면서 바로 배우는 일에 익숙해야 했다. 그 표현도 어쩌면 부족하다. 적을 맞아 싸우면서 미군이나 유엔군 등 우리보다 훨씬 나은 군대 지휘관으로부터 싸움의 요령을 반드시 체득해야 했다. 그래야 지휘관도 살고 부대도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이 걸린 절실한 과제라고 해도 좋았다. 6사단장은 사창리 전투에서 역시 지휘 상의 커다란 결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김일성 군대의 기습 남침 뒤 늘 반복적으로 벌이던 국군의 패배를 다시 그대로 재연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역시 중공군이었고, 한 번 그들에게 등을 보인 뒤 무기력하게 물러서면서 아군의 전체 전선에 커다란 공백을 내고 말았다.

6사단은 김화 지역을 향해 진군하던 4월 22일 오후 중공군이 전면 어딘가에 대규모로 모여든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군의 항공 관측에 의한 정보였다. 이때부터 사단은 고도의 경계상태에 들어갔다. 진군을 멈추고 현재 도착한 지역에서 방어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6사단의 오른쪽에는 미 1해병사단, 왼쪽에는 미 24사단이 있었다. 사단장은 우선 이들 아군 부대와의 연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중공군 공격에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 전투지경선의 방어를 보강하려는 의도였다. 사단장이 지시를 내린 시점은 오후 4시 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바로 1시간 뒤 공격을 벌여왔다.

사단 좌전방에는 19연대, 우전방에는 2연대가 있었다. 사단장은 중공군이 많이 출현하던 2연대 뒤에 사단의 예비였던 7연대를 배치했다. 사단에 배속한 국군 제27 포병대대와 뉴질랜드 포병대대, 미 제2 박격포대대 C중대는 사창리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작전을 위한 부대 배치는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이해 못할 것은 없다. 단지 중공군의 파상적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병력 수가 우선 부족했다. 아울러 중요 거점에 진지를 구축해 방어를 강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부대 사이의 공백이 커질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아울러 사단의 예비로 있던 7연대를 전방의 2연대 후방으로 배치하는 바람에 사단의 전투 종심(縱深)이 약해질 수 있었다.
중공군의 출정식 장면이다. 한반도에 참전한 중공군은 신규 병력을 만주에 대기시킨 뒤 필요에 따라 대규모 장병을 동원했다.
중공군의 출정식 장면이다. 한반도에 참전한 중공군은 신규 병력을 만주에 대기시킨 뒤 필요에 따라 대규모 장병을 동원했다.
중공군이 노린 먹잇감
그러나 나아갈 때 못지않게 중요한 순간이 물러설 때다. 부대가 만약의 상황에 빠져 후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6사단의 퇴로는 문제로 떠오를 수 있었다. 산이 중첩해 계곡이 많은 지형이었다. 춘천에서 사창리에 이르는 도로는 더구나 하나에 불과했다. 조금 여유가 있는 길이기도 했으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일부 구간은 매우 좁아지면서 굴곡이 심했다. 따라서 그런 후퇴로를 두고 그나마 질서정연한 철수작전을 수행한다면 피해는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문제는 적의 공세 앞에서 체계적으로 후퇴를 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그런 여러 요소를 모두 따질 수는 없었던 듯하다. 6사단은 결국 미 8군의 전체 작전 명령에 따라 부지런히 북상했다가 “대규모의 중공군이 모여들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신속하게 방어태세를 취했던 것이다. 나중의 기록에 의해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정확하게 한국군 6사단을 먼저 노리고 다가선 상태였다. 중공군의 의도는 분명했다. 가장 허약한 곳을 노려 구멍을 낸 뒤 유엔군을 동서로 갈라놓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중공군의 주공(主攻)을 담당했던 부대는 19병단이었다. 조공(助攻)을 맡은 부대는 9병단이었다. 19병단이 서부전선의 공세를 이끄는 사이 9병단은 화천과 가평을 잇는 곳으로 급히 이동시켰다. 이곳에서 돌파구를 마련해 아군의 전선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9병단의 공격은 여러 곳을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 1해병사단과 미 24사단이 버티고 있던 곳은 아무래도 힘에 겨웠다. 우선 미 1해병사단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북한강을 도하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아울러 미군이 지닌 화력과 전투력을 생각하지 않았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중간에 있던 한국군 6사단이 가장 뚫기 쉽다고 봤던 것이다. 참전 이래 줄곧 국군을 먼저 노리고 덤벼들던 중공군의 공격 방식 그대로였다. 이 무렵의 중공군은 나름대로 포병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격은 22일 오후 5시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강력한 포격을 먼저 실시했다. 9병단 예하 제20군 소속 3개 사단이 국군 6사단에 몰려들고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을 막아내기에는 6사단의 힘이 크게 달렸다.

중공군은 6사단의 틈을 찾아 뚫는 데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사단의 퇴로가 막혔다. 횡성의 전투에서 국군 8사단이 당한 경우와 같았다. 바로 통신선이 먼저 끊기고 말았다. 사단의 각급 부대에 대한 통제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대 사이의 소통이 멈추고, 사단본부의 일관된 지휘마저 불가능해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좌전방의 19연대는 일찌감치 중공군의 포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앞과 뒤에 모두 중공군만이 보이는 상황이었다. 우전방의 2연대와 그 뒤를 받치기 위해 진출해 있던 예비 7연대의 상황도 절망적이었다. 2연대와 7연대는 적중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차량과 장비 등을 모두 버리고 후퇴에 나섰다.
6.25전쟁에 참전 중인 중공군이 수심 깊지 않은 강을 건너 공격에 나서고 있다.
6.25전쟁에 참전 중인 중공군이 수심 깊지 않은 강을 건너 공격에 나서고 있다.
두려움 속 급격한 패퇴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문제였다. 6사단이 급격히 무너졌던 배경에 관한 얘기다. 아무래도 6사단은 1950년 10월 말 북진 당시 압록강 앞 초산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참담한 패배를 맛봤던 두려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듯하다. 6사단으로서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서전(緖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초산 일대에서 벌인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아주 커다란 패배를 당한 6사단으로서는 좀체 당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창리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흘렀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졸지에 중공군의 대병력을 만나 앞과 뒤로 포위를 당한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좌전방의 19연대는 중공군이라는 바다에 갇힌 섬이었다. 고립은 점점 더 깊어졌다. 중공군의 막대한 병력이 뚫린 구멍을 타고 계속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2연대와 7연대는 두려움에 젖어 모든 장비와 화력을 버린 채 방향을 잡지도 못하고서 마구 도망쳤다. 두 연대의 장병은 무질서하게 살길을 찾아 나섰다. 좌우로 인접한 아군 부대로 도망치거나 일부는 중공군 포위를 뚫고 후방으로 달아났다. 6사단의 종심이 깊지 않은 점이 문제였다. 중공군은 옆으로 길게 거점을 형성한 뒤 늘어섰던 국군의 저지선을 뚫고 금세 후방으로 내달렸다. 이들은 곧장 7연대의 후방에 있던 국군 제27 포병대대, 미 제2 박격포대대 C중대를 공격했다. 먼 곳으로 쏘는 화포(火砲)를 지닌 포병부대는 적의 보병 공격에는 지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들 또한 성난 물길에 밀린 모래처럼 마구 무너졌다.

문제는 역시 퇴로(退路)였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6사단이 적에 밀려 후퇴할 때 갈 수 있던 길은 하나였다. 사창리로부터 춘천을 잇는 국도였다. 포병 병력과 후방의 인원들은 곧장 이 도로로 몰려들었다. 길을 따라 먼저 신포리로 철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방어선 자체가 모두 무너진 상태였다. 사단 전체가 무너지는 낌새를 보이자 후방에서 이를 지원하던 미군 포병 병력도 동쪽의 북한강 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갈팡질팡 하면서 이리저리 깨지고 뜯어져 없어지기도 하는 상황이 바로 지리멸렬(支離滅裂)이다. 당시의 상황이 꼭 그랬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도로는 곧 철수하는 병력으로 가득 메워졌다. 장비를 지니고 갈 수 없던 포병대대가 일부 장비를 유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겼다.


다시 무너진 6사단

도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아군이 유기하는 장비들이 길에 남아 전방의 차량과 장비의 이동을 막는 경우도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가 펴낸 <1129일 간의 전쟁 6.25>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6사단 2연대 1대대 소대장이었던 예비역 전제현 장군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 내용을 여기에 옮긴다.

“좁은 계곡 사이로 춘천으로 가는 도로가 이어지는데 차량 두 대가 교행할 수 없을 만큼 좁았습니다. 그 좁은 길에 자주포가 멈춰서 길을 막았죠. 미군들이 도와달라고 해서 자주포를 옮기려 했지만 그 큰 전차가 그걸로 움직입니까. 결국 그 뒤에 대기하고 있는 아군 차량은 모조리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 공군기들이 와서 차량을 폭파시켰죠. 참담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아주 참담한 패배였을 것이다. 눈앞에 뻔히 아군의 장비와 물자를 남겨둔 채 남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등을 보이며 물러서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길에 남겨둔 장비와 물자 등은 미 공군기가 처리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물자와 장비 등을 적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평양과 흥남 등에서 아군이 물러날 때도 반드시 남겨둔 물자와 장비를 파괴해야 했다. 적에게 그를 넘겨줄 수 없다는 같은 이유에서다. 따라서 아군이 적에게 밀려 후퇴하는 길에는 미군의 공습이 이어진다. 아군의 물자와 장비를 파괴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곳에는 시커먼 연기가 줄곧 피어 오른다. 거센 불길도 볼 수 있다. 그런 불길과 연기가 뒤범벅을 이루면서 참담함은 깊어진다.
전선에 나선 중공군이 공격에 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전선에 나선 중공군이 공격에 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중공군은 늘 밤에 강했다. 모습을 뻔히 드러내는 주간(晝間)에는 공격의 빈도와 강도가 모두 약해지게 마련이었다. 아군의 공습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공군은 이튿날에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새벽이 밝으면서 다소 주춤했지만 오후 들어 다시 공세를 지속했다.

날이 밝으면서 아군은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소 둔화하는 중공군 공세에 따라 여유를 찾았던 것이다. 윌리엄 호그(William M. Hoge) 중장은 당시 6사단이 배속해 있던 미 9군단의 군단장이었다. 이 사람의 이름을 희미하게나마 들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졌던 영화 ‘레마겐의 철교(The Bridge At Remagen)’의 실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9기갑사단 B전투단의 단장(준장)으로 미군으로서 처음 라인강을 넘어 독일을 무너뜨리는 레마겐 철교 작전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과감한 공격력과 치밀한 작전 능력을 모두 갖췄던 인물이다. 그는 전임자였던 브라이언트 무어(Bryant E. Moore) 소장이 1951년 2월 말 리지웨이가 주도했던 ‘킬러 작전’을 수행하다가 탑승했던 헬기가 고압선에 걸려 추락하면서 순직한 뒤 부임했던 새 군단장이었다.

미 군단장의 질책

그는 참담했던 6사단의 패배를 직접 지켜본 뒤 현장을 직접 방문했던 모양이다. 당시 내가 듣기로는 호그 장군이 6사단을 방문한 뒤 직접 장도영 사단장을 앞에 두고 “당신들을 어떻게 군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주 모욕적인 질책이었다. 장도영 사단장은 아무런 대꾸를 못했던 듯하다. 입이 있어도 아무런 변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호그 소장은 장도영 6사단장에게 신속한 부대 재편을 요구했다. 아울러 캔자스 선 방어진지를 점령해 더 이상의 중공군 공세를 허용치 않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6사단은 후퇴한 잔여 병력을 수습해 19연대와 2연대를 전선에 다시 배치했다. 그러나 한 번 등을 보이고 무작정 내뺐던 군대가 다시 적을 맞아 싸우는 일은 아주 어려운 법이다.
1951년 4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를 막기 위해 작전 회의 중인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윌리엄 호그 미 9군단장(왼쪽부터).
1951년 4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를 막기 위해 작전 회의 중인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윌리엄 호그 미 9군단장(왼쪽부터).
6사단은 초산에서의 참패를 마음에 아직 담아두고 있던 터였다. 그 때문에 중공군에게 한 번 뚫리자 바로 분산(分散)의 어지러운 상황에 빠져 장비와 화력 등을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온 상태였다. 따라서 이들이 중공군과 맞서 싸우는 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중공군은 오후 늦게 다시 공세에 나섰고, 6사단은 힘겹게 저항했으나 곧 물러나고 말았다. 6사단이 최종적으로 철수한 곳은 가평이었다고 했다.

6사단은 초산에서의 뼈아픈 패배 뒤 다시 중공군에게 참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미 9군단장으로부터 “당신들이 군인이냐”는 힐난을 들을 정도의 패배였다. 실제 드러난 결과가 그를 잘 말해준다. 4월 25일 가평에 집결한 6사단 병력은 모두 6320명이었다고 한다. 1만 3000명에 달했던 당초의 병력 중 절반 가까운 장병이 실종하거나 사망했으며, 또 포로로 잡혔다는 얘기다.

육군본부의 자료에 따르면 분실한 소총은 모두 2263정이다. 자동화기는 168정, 2.36인치 로켓포는 66문을 잃어 버렸다. 6사단을 화력으로 지원했던 미군 포병대대도 105㎜ 곡사포 15문, 4.2인치 박격포 13문, 242대의 무전기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더 아픈 손실은 다름 아닌 전의(戰意)의 상실일지도 모른다. 1950년 10월 말 초산에서의 서전에서 무너졌던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실의(失意)에 빠져 거듭 적 앞에서 물러남으로써 6사단은 중공군에게는 더 이상 싸우려 들지 못하는 군대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6사단 대신 나선 영국군

다음에 이어지는 게 가평 전투다. 미군 지휘부의 결정에 따라 벌어진 싸움이었다. 미 8군은 6사단을 가평으로 뺀 뒤 그 북방에 영연방 제 27여단을 진출시켰다. 한국군 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중공군의 진출을 막으라는 게 27여단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영국군은 당시 전쟁에서 2개 여단을 한국에 파병했다. 앞서 소개한 ‘글로스터 대대’가 속했던 29여단과 중서부 전선에 섰던 27여단이었다. 29여단은 영국 본토에서 직접 한국으로 왔고, 27여단은 영국이 당시 경영하고 있던 식민지 홍콩에 주둔하다가 한국에 도착했던 부대였다.

영국군은 여단 규모로 군대를 편성하는 관행이 있었다. 군대를 광대한 식민지 경영에 맞춰 짰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 온 영국군은 화력과 장비 면에서 미군의 사단을 따를 수준이 아니었다. 병력 숫자에서는 한국군 1개 사단에 미치지 못했고, 화력과 장비 면에서도 미군의 지원을 받았던 한국군 사단에 비해 탁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군인으로서 적을 맞아 싸우려는 전의(戰意)는 충만했다. 아울러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 영연방 군대의 일원으로서 지닌 자긍심과 명예심이 대단했다. 앞서 적은 ‘설마리 전투’에서 보인 29여단 글로스터 대대의 전투에서도 그 점은 분명히 드러났다.

아무튼 그런 영연방의 27여단이 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물밀듯이 내려오고 있던 중공군을 맞아 대회전(大會戰)을 치를 상황이었다. 영국군 27여단이 치른 이 전투의 의미는 매우 컸다. 중공군이 한국군 6사단에 이어 영국군 27여단을 다시 무너뜨린다면 한반도 전선은 다시 한 차례 크게 출렁일 상황이었다.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이동 중인 유엔군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이동 중인 유엔군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중공군은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아군의 전선을 동서로 양분하는 데 성공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아군 전선의 연계는 중간이 끊기면서 상당히 불리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다. 중공군은 그런 간격(間隔)을 확보한 뒤 공세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다시 한 차례 점령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의도대로 상황이 이어진다면 이는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 27여단의 상황은 바로 전투에 투입할 형편이 아니었다. 당초 이들은 국군 6사단 방어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창리 서쪽 방어지역을 6사단 19연대에게 인계한 뒤 오히려 가평에 집결해 휴식 중인 부대였다. 아울러 여단의 1대대는 원래 주둔지였던 홍콩으로의 복귀가 정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전투에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사람이 미 9군단장 윌리엄 호그 장군이었다. 호그 군단장은 사창리에서 물러난 6사단이 캔사스 선에 다시 서는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6사단은 그런 기대에 끝내 부응하지 못했다. 절반 정도의 병력을 상실한 사단이 재빨리 다음 방어 작전에는 나서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결국 영국군을 내보내기로 했다. 이들은 가평천 계곡에 방어선을 형성한 뒤 춘천과 가평을 잇는 도로를 따라 전진하는 중공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영연방 27여단

경춘가도(京春街道)는 당시 서울과 춘천을 직접 잇는 거의 유일한 도로였다. 대한민국의 동서를 잇는 중요한 혈맥이라고 봐도 좋은 국도(國道)에 해당했다. 1951년 4월 5차 1단계 공세에 나섰던 중공군이 노렸던 것은 바로 이런 경춘가도를 끊는 일이었다.

우선 사창리에서 국군 6사단을 무너뜨린 뒤 가평천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서울과 춘천을 잇는 이 경춘가도를 점령함으로써 동서로 길게 이어진 유엔군의 전선 가운데를 끊겠다는 생각이었다. 우선 이들의 공세 의도는 매우 성공적으로 여겨졌다. 예상한 대로 국군 6사단이 쉽게 등을 보이면서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아군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대로 중공군의 공세를 방치할 경우 동서로 잇는 아군의 연계가 끊어져 국면이 크게 불리해질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곳을 뚫은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분명히 수도 서울을 향해 압박을 벌이고 나설 터였다. 그로써 서부전선에서 밀고 들어오는 다른 중공군 병단과 협격(挾擊)을 펼쳐 서울을 점령한다는 구상이었다.
가평천 계곡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꺾은 영연방 27여단 소속 캐나다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가평천 계곡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꺾은 영연방 27여단 소속 캐나다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 닥치면서 한국군 6사단을 대신해 전선에 나선 부대가 영연방 27여단이었다. 이들에게는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남하하는 중공군의 공세를 어떻게 해서든지 차단하는 일이었다. 영연방의 일원으로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부대가 이번 전투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아울러 후방에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뉴질랜드의 포병대대도 뛰어들었다.

전투에서는 늘 방심(放心)이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마음줄을 한 순간이라도 놓는 경우는 늘 생기고 만다. 전투를 수행하는 주체가 사람인 이상 그런 마음 상태는 늘 다가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심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의 실패, 나아가 전략적인 차원의 불리(不利)를 부르기도 한다. 당시의 중공군이 그랬다.

그들은 미 9군단 차원의 신속한 전투 배치를 간과한 측면이 있다. 호그 군단장은 그런 점에서 과감하고 신속했다. 그는 앞서 소개한 대로 일선에서 등을 보이고 무너진 한국군 6사단이 캔자스 선에 다시 설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지켜봤다.

사단 절반의 병력을 잃고 중공군에게 심리적으로 커다란 두려움까지 안고 있던 한국군 6사단이 군단 차원의 작전에 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드러나자 호그 9군단장은 가평 일대에 있던 영연방 27여단을 신속하게 전선으로 옮겼다. 이들은 군단장 명령에 의해 재빠르게 이동한 뒤 가평천을 중심으로 계곡 양쪽에 포진했다. 우선 가평천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대, 좌측에는 캐나다 대대가 자리를 잡았다.

27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여단에 배속해 있던 미 72전차대대 1개 소대는 계곡의 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죽둔리, 미 2박격포대대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대 후방, 미 74공병대대는 가평 북방에 각각 자리를 잡도록 했다. 뉴질랜드 포병 연대와 경계부대로 남아있던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도 가평 북쪽에 있었다.

방심했던 중공군

국군 6사단의 철수는 4월 23일 밤 10시 경에 마무리됐다. 전날인 22일 오후 5시 경에 시작한 중공군의 공세에 급속히 밀려난 상태였다. 중공군은 그런 승세(勝勢)에 올라타 있었다. 전선에 섰던 한국군이 너무 쉽게 밀려나면서 중공군은 어느 정도의 자신감 속에 싸여져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전사(戰史) 기록에 드러난 정황을 보면 중공군은 이미 등을 보이고 물러서는 한국군의 추격에 열중하느라 추가적으로 발생할 여러 가능성에 둔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가평천 계곡과 도로를 따라 무작정 추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당시 가평천은 깊지 않았다. 북한강 지류인 가평천은 하천의 폭이 50m를 웃돌면서 수심은 상류가 1~2m 정도로 도보로 강을 건너는 데 다소 지장을 주는 정도였다.

하류의 경우는 장마기가 아닌 때에는 물이 발목에 차오르는 정도에 불과해 중공군이 이동하는 데 큰 장애로 작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중공군은 계곡 사이에 난 길과 하천의 물 흐름 속을 직접 걸어 전진할 수 있었다.
1951년 4월 공세에 나선 중공군을 막기 위해 가평 일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이동하고 있다.
1951년 4월 공세에 나선 중공군을 막기 위해 가평 일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이동하고 있다.
선두에 섰던 중공군은 118사단 병력이었다. 이들은 한국군 6사단을 아주 짧은 시간에 격파했다는 자신감에 힘입어 망설임 없이 가평천 계곡을 따라 진격하면서 곧장 공세를 가평 중심지로 집중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윌리엄 호그 미 9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대가 포진했던 곳은 504고지였다.

캐나다 대대는 좌측의 677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한 뒤 중공군이 다가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싸움이 붙었던 곳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대가 있던 504고지였다. 중공군은 이곳에 별다른 경계감을 품지 않은 채 접근했다. 계곡 양쪽으로 아군이 이미 배치를 끝냈다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대는 먼저 계곡 전면에 배치했던 전차 소대와 후방의 포병대대를 이용해 중공군에게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선두에 나서서 멋모르고 진격하고 있던 중공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바로 반격을 펼치면서 나왔다. 아군의 전차 소대가 보급을 위해 일시적으로 물러나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중공군은 포위 공격으로 나왔다.

24일 새벽 1시 경의 상황이었다. 중공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공격을 벌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대는 곧 중공군의 포위에 갇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대대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고지를 뺏기면 바로 역습으로 대응해 다시 그 고지를 뺏었다. 결국 오스트레일리아 대대는 동이 트는 무렵까지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끝내 504고지를 잃지 않았다.

이 또한 작은 ‘서전(緖戰)’이었다. 중공군 118사단과 그 배후 병력에 대항하는 영연방 27여단의 서전이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밀리지 않음으로써 향후의 전투가 중공군에게는 결코 제 의도대로만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분위기를 미리 알려주고 있었다. 504고지를 지켜낸 아군은 이어 미군의 공습을 강력하게 펼치면서 중공군을 격퇴했다.

백병전으로 중공군 꺾다

중공군은 또 달려들 수 있었다. 전선 전체의 국면을 감안할 때 중공군은 반드시 경춘가도의 중간을 끊으려는 의도를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연방 27여단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중공군 공격은 다시 이어졌다. 역시 미군의 공습이 두려워 날이 저물기를 기다린 뒤였다.

중공군은 이번에는 좌측의 677고지를 향해 공격을 펼치고 들어왔다. 캐나다 대대가 지키고 있던 곳이었다. 24일 밤 10시가 넘어선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전에서 이미 기가 꺾이고 말았던 중공군이었다. 캐나다 대대의 방어는 강력했다.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으면서 화력을 집중하는 캐나다 군대는 고지를 잘 지켜냈다. 뉴질랜드 16포병연대는 그들을 도와 가평천을 넘어서는 중공군에게 화력을 쏟았다.

2시간여 시간 동안 펼쳐진 중공군의 공격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벌써 중공군의 공세가 크게 꺾였다고 했다. 캐나다 대대도 매우 용감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필사적으로 677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덤벼들었고, 한 때 일부 고지를 빼앗기도 했다.
중공군과 맞붙어 백병전까지 펼쳤던 영연방 27여단 소속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고지 밑을 내려다 보는 모습이다.
중공군과 맞붙어 백병전까지 펼쳤던 영연방 27여단 소속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고지 밑을 내려다 보는 모습이다.
그러나 앞서 벌어진 오스트레일리아 대대의 경우처럼 캐나다 대대 또한 고지를 빼앗기는 경우 백병전(白兵戰)을 감행하면서 중공군에게 넘겨준 고지를 되찾았다고 했다. 중공군은 이 677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박격포를 비롯한 중화기 공격을 감행키도 했다. 따라서 매우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싸움은 그로써 단락을 맺었다. 중공군의 피해는 꽤 컸던 듯하다. 24일 전투를 끝으로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시점은 공교롭게도 중공군이 참전 이래 줄곧 보이던 공격 패턴의 끝에 닿아있기도 했다. 중공군은 일반적인 싸움에서 초반에는 강렬한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그런 공세는 줄곧 이어지지 못했다. 보급의 문제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뒤떨어진 보급력으로 인해 중공군 각 장병은 4~5일 분량의 식량과 탄약을 지니고 움직였다.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 그들은 공격력이 급격히 둔화했다. 당시 가평천 계곡으로 진입하고 있던 중공군도 그런 패턴의 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전투에서 가장 높이 꼽을 수 있는 것은 적 앞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는 투혼(鬪魂)을 보여준 영연방 산하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뉴질랜드 군대의 정신이었다. 그들의 감투전신으로 위기의 한 고비는 그렇게 벗어날 수 있었다.


계속 물러서는 군대

당시에 벌어진 중공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국군은 쉽게 패퇴했다. 전투의 경험이 적었던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낯선 적의 아주 기이한 전법에 쉽게 당황함으로써 스스로 일어나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눌 심리적 준비가 불충분했던 것이다. 전투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요소를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초반의 싸움에서 한국군처럼 낯선 중공군에게 밀리기만 했던 미군을 비롯한 참전 유엔군은 1951년 1.4 후퇴 뒤 반격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중공군의 낯선 전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점, 게다가 막대한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에게 틈을 허용해 고립된 뒤에도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닌 점이 크게 작용한다.

사실 중공군의 전법은 낯설지만 단순하기도 했다. 틈을 찾아 밀고 들어왔다가도 종내는 초반의 공세를 거듭 이어갈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이는 1950년 말 아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뒤 서울을 다시 내줘야 했던 무렵에 한국 전선에 부임한 리지웨이 당시 8군 사령관이 정확하게 파악해 낸 중공군의 특징이다.
1951년 4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막바지에 송추 지역을 향해 서울 점령하려 몰려드는 중공군을 향해 미군의 포병이 화력을 뿜고 있다.
1951년 4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막바지에 송추 지역을 향해 서울 점령하려 몰려드는 중공군을 향해 미군의 포병이 화력을 뿜고 있다.
당시까지 이어진 중공군의 공세가 보통은 4~5일을 지속하지 못했다는 점을 그는 우선 파악했다. 보급의 문제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에게 초반 전투에서 밀려 적진에 고립된다 하더라도 아군은 적군보다 매우 탁월한 아군의 공중 보급력을 믿고 싸워야 하는 게 마땅했다. 미군을 비롯한 참전 유엔군은 그 점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듯하다.

문제는 한국군이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진군하다가 낯선 군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군단이 해체될 정도의 막심한 타격을 입었던 상처가 좀체 잊히지 않았다. 그런 두려움만이 크게 지배하는 상황에서 중공군이 지닌 약점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런 현상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미군과의 소통이라는 문제였다. 비록 미군은 각급의 한국군 전투 부대에 고문관을 파견하고 있었으나 소통은 쉽지 않았다. 당시의 전쟁 중에도 그런 장면은 여럿 있었다. 특히 나름대로 전투경험이 있다고 자부했던 한국군 지휘관은 미 고문관을 깔보기도 했다.

미군이 제시하는 방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때로는 아예 무시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실제 전투 경험이 있는 한국군 일부 지휘관에게는 미 고문관의 여러 면모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은 미군이 주도했다. 미군은 우리가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현대 개념의 전쟁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존재였다.

굳어지는 부정적 평가

아울러 언어에도 문제가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미군이 이끄는 전쟁의 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소통이 힘들어 그들의 세밀한 작전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부대에서 벌어진 국군과 미군의 소통 상황은 나로서는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한국군의 패배가 이어지고, 그 뒤를 받치며 전선에 올라서 중공군을 꺾는 참전 유엔군의 승전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8사단이 횡성 전투에서 급격히 무너졌음에도 곧 벌어진 지평리 전투에서 미 23연대의 대승이 이어지면서 국군의 참패는 가려졌다. 사창리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국군 6사단이 하룻밤 사이에 중공군에게 급격히 밀려 전력의 절반 가까이 잃으면서 물러났으나, 역시 그 뒤를 강력하게 받치면서 분전한 영연방 27여단 덕분에 중공군의 공세는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국군의 전투력에 관해서는 벌써 ‘정평(定評)’이 생겨나는 조짐이 있었다.

중공군에게 쉽게 등을 보이는 군대, 적에게 맞서 끝까지 싸우지 못하는 군대, 한 번 뚫리면 정신없이 내빼는 군대,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인내력과 희생정신을 보이지 못하는 군대 등의 평이었다. 그로써 최종적으로 얻는 평이 마음을 찌를 수 있었다. 함께 어깨를 걸고 싸울 수 없는 군대라는 점 말이다.


늘 강조하지만, 함께 전선에 서는 군대는 신뢰를 가장 큰 덕목으로 삼는다. 어깨를 걸고 나아가는 전선에서 옆의 전우가 쉽게 물러서면 전선이 곧 무너지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런 싸움의 흐름에서 한국군만이 ‘함께 어깨를 걸고 싸우기 어려운 존재’라는 평을 듣는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그러나 1950년 말의 2군단 와해, 횡성전투, 사창리 전투 등으로 인해 그런 한국군의 정평은 날로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였다.
한국 전선에 부임한 뒤 강력한 공격력을 선보였던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작전 지휘에 열중하고 있다.
한국 전선에 부임한 뒤 강력한 공격력을 선보였던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작전 지휘에 열중하고 있다.

아군의 전선을 동서로 끊으려고 했던 중공군의 기도(企圖)는 좌절했다. 새로 한반도에 진입한 중공군 9병단의 공세 의도는 일단 그로써 주춤했다. 그러나 서부전선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국군 1사단, 영연방 29여단의 저항에 상당한 피해를 당하였음에도 서부전선 공세를 주도하는 중공군 19병단의 공세는 집요했다. 수도 서울을 다시 점령해 전쟁 국면을 전환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낮에도 공격을 펼치는 강수(强手)를 선보이면서 공세를 벌이고 나왔다. 아군의 작전 개념은 방어선에서 우선 드러난다. 중공군 공격으로 밀릴 경우에 대비해 세 방어선을 설정했다. 포천~가평을 잇는 델타(Delta), 서울 외곽의 수색~북한산~덕소의 골든(Golden), 한강~횡성~양양의 네바다(Nevada) 선이었다.

그 세 방어선을 설정한 뒤 아군은 축차적으로 전투를 벌일 계획이었다. 단, 전제는 중공군에게 최대의 출혈(出血)을 강요한다는 점이었다. 그로써 다시 반격을 펼치면서 당초의 캔자스 선을 회복한다는 구상이기도 했다. 이 작전 개념에 따르면 중공군 공세가 강해질 경우 수도 서울을 다시 내줄 수도 있었다. 네바다 선은 그런 경우를 대비해 설정한 방어선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