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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18 18:28
[기타] 사창리 패전(3)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398  

밴 플리트의 서울 사수

그러나 이에 제동을 걸고 나온 사람이 새로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는 늘 한국인의 정서를 중시했던 사람이다. 작전상 수도 서울을 내주는 일은 서울을 나라의 얼굴로 여기는 한국인의 정서에 어긋난다고 봤던 것이다. 나중에 드러나는 여러 면모도 그렇지만 그는 늘 한국인의 감정을 배려한 인물이다.

그 점에서 그는 미 8군을 이끌었다가 맥아더 장군의 해임으로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옮겨 간 리지웨이와 달랐다. 당초 수도 서울까지 내줄 수도 있다고 본 사람이 바로 리지웨이였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자신의 웨스트포인트 후배이기는 하지만 어엿한 현지 상관이었던 리지웨이의 구상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결국 최후의 철수선인 네바다 선을 상정하지 않았다. 대신 네바다 선보다 30~40㎞ 북방의 용문산~홍천~한계령~속초를 잇는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했다. 그 이름은 노네임(Noname) 선이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중공군에게 다시 내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의 표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한국인의 감정을 중시했던 밴 플리트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도 매우 좋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한국인의 감정을 중시했던 밴 플리트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도 매우 좋았다.
밴 플리트는 이어 서부전선, 즉 서울을 방어하는 미 1군단의 전투 지역을 협소하게 그었다. 방어력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미 1기병사단을 미 1군단의 예비로 확정했다. 충분한 방어력을 미 1군단에게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중공군의 공세는 매우 강했다.

사창리 일대의 중공군 공세를 마지막으로 돌려세웠던 4월 25일, 중공군은 막대한 병력으로 밀고 내려와 미 1군단으로 하여금 성동리와 포천을 잇는 델타선으로의 철수를 강요했다. 임시적인 방어선이었던 까닭에 이 델타선에서의 저항은 계속 펼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서울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중공군은 새카맣게 많은 병력을 동원해 수도 서울을 거듭 위협하고 있었다. 밴 플리트는 그러나 강력한 화력을 동원했다. 그는 중앙청에서 마포까지 야포 400여 문을 정렬시켰다. 이어 중공군이 접근하는 송추 지역을 향해 아낌없이 포탄을 퍼부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미 모두 델타와 골든 선 지역 안으로 철수했거나 일부 병력이 철수 중이었다. 특히 낮 동안 철수를 하게 함으로써 중공군의 추격을 자극했고, 이동 중인 중공군이 보일 경우 포병 화력이 그곳을 향해 세차게 불을 뿜었다. 미 공군의 폭격도 그 점을 활용했다.

중공군은 그로써 서울에 다가설 수 없었다. 강력한 화망(火網)을 뚫으려 했으나 병력 손실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공군의 5차 1단계 공세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강력한 화력을 구사하는 신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의 개성이 유난히 돋보였다.

미 8군의 새 작전 의도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에 관해서는 앞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적었다. 그는 6ㆍ25전쟁 중에 이 땅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미군 최고 지휘관이었다. 아울러 그의 집요한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 군대는 현대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군에 대한 그의 공헌은 충분히 적을 필요가 있다.
한국 전선에 부임한 직후 방한한 콜린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왼쪽부터)과 함께 촬영한 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오른쪽 끝이 백선엽 장군이다.
한국 전선에 부임한 직후 방한한 콜린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왼쪽부터)과 함께 촬영한 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오른쪽 끝이 백선엽 장군이다.
그럼에도 그는 1951년 4월 이후 벌어진 중공군 제5차 공세의 와중 속에서는 갓 부임한 지휘관에 불과했다. 여러모로 전쟁의 전반적인 국면을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얘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그리스에 부임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밴 플리트는 그리스 왕실과 정부를 도와 당시의 현지에 급속하게 세를 키우면서 도발을 벌이고 있던 공산주의 빨치산 토벌에 앞장을 선다. 외국 군대의 지휘관이 다른 한 나라에 머물면서 군사적인 지원을 벌이거나 직접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작전의 의도가 제대로 펼쳐지게 하려면 현지에서 힘을 행사하고 있는 권력자나 그 주변과의 관계가 우선은 원만해야 한다. 현지의 실력자 그룹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경우 외국 군대의 지휘관은 자신의 작전을 수월하게 펼칠 수가 없다. 현지 군대 관계자들로부터도 상당한 협조와 지원을 얻어내야 그 일이 가능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밴 플리트는 그리스 현지 주둔 미군 지휘관으로서 매우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던 사람이다. 그리스 왕실의 전폭적인 협조를 이끌어냈고, 군기가 형편없었던 그리스 군대의 재건 작업에 있어서도 현지 지휘관들의 원만한 조화를 이끌어내며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했다.

그런 그리스 주둔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밴 플리트는 한국의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에도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 정부 요인, 우리 군대의 주요 지휘관들과의 관계가 매우 원만하고 순조로웠다. 그는 현지 사람들의 정서와 사고를 철저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집착했다.

1951년 4월 급작스럽게 한국 전선에 부임한 직후의 밴 플리트는 중공군이 막 벌이고 있던 5차 공세의 긴박한 분위기에 당면해서도 역시 그리스의 경험을 내세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방어에 커다란 역점을 두고 작전을 벌였다. 이 점은 우리에게 매우 고마웠다.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긴다면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매우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동부전선의 국군

그런 점에서 밴 플리트가 야포 400문을 동원해 서울의 중앙청 한복판에서 마포까지 정렬한 뒤 장엄하다 해도 좋을 포격을 가했던 사실은 우리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에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한 곳에 집중하면 적은 다른 곳을 노리는 것이 전쟁의 철칙이다.

주의력이 과도하게 집중하는 곳을 피해 적은 상대적으로 아군의 화력과 노력이 적게 뭉치는 지점을 찾아 공격을 벌여 오는 법이다. 당시의 상황이 그랬다. 밴 플리트의 노력은 곧장 커다란 성과로 나타났다. 서울을 중공군의 마수(魔手)로부터 지켰고, 그로써 중공군 공세는 한풀 크게 꺾이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중공군은 5차 공세의 2단계 공격을 일찌감치 계획하고 있었다. 1951년 4월과 5월에 펼쳐진 저들의 공세는 대규모 기동전으로서는 막바지에 해당했지만 결전(決戰)의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반도에 참전한 마당에 이기느냐 지느냐를 가르는 승부수(勝負手)의 성격이 있었던 셈이다.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가 펼쳐지기 직전 무렵 주문진 1군단 본부에서 미군 장성과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백선엽 군단장(왼쪽에서 둘째).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가 펼쳐지기 직전 무렵 주문진 1군단 본부에서 미군 장성과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백선엽 군단장(왼쪽에서 둘째).
결과를 보면, 중공군은 5차 공세 2단계 공격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미군을 중심으로 이뤄진 유엔군 진영의 두터운 방어막을 더 이상 뚫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중공군 대규모 공세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저들은 5차 2단계 공세 이후에는 고지전을 중심으로 하되 때로는 휴전회담까지 벌이는 화전(和戰) 양면의 작전으로 나선다.


아무튼 그런 중요한 갈림길에 섰던 시점이 바로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가 펼쳐지던 무렵이다. 밴 플리트는 한국 전선에 부임한 지 한 달도 채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공군은 5차 1단계 공세를 1951년 4월 말에 마무리한다. 그러나 5월 들어서면서 국면의 전환을 위한 2단계 공세 준비 작업을 벌이고 나온다.

중공군은 마치 부빙(浮氷)처럼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어느 한 곳에 집중하는 모양새가 사라지고 이곳저곳을 노리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다. 그들의 이동 상황을 면밀하게 체크하려는 미군의 노력이 집중적으로 펼쳐졌지만 중공군 다음 공세가 어떤 의도를 담고 벌어질지는 아무도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밴 플리트는 그럼에도 수도 서울의 방어를 계속 작전의 핵심 사안으로 잡아두고 있었다. 서울을 방어하는 서부 축선의 중심인 미 1군단의 역량을 크게 강화하면서 예하 각 부대의 전투력을 함께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모두 서울을 적의 어떠한 공격으로부터도 단호하게 막겠다는 의도였다.

중공군은 그런 미 8군의 동향을 점검하면서 신중하지만 대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밴 플리트의 의도에 따라 전선의 아군 배치는 일정한 패턴을 드러냈다. 서울을 방어하는 서부축선을 향해 미군 주력 사단이 움직여 방어선을 보완하는 흐름이 생겨났던 점이 우선이다. 아울러 아군의 전선배치가 동쪽으로 가면서 한국군 사단 중심으로 짜인다는 점이 그다음의 특징이었다.

6ㆍ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은 늘 묘수(妙手)에 강했다. 아군이 드러내는 전체적인 흐름을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약점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곳을 잡아내 그곳으로 자신의 화력과 병력을 집중했다. 매우 영리한 사람들이었다. 아울러 노련한 전술과 책략이 돋보였다.

“또 한국군을 노려라”

거듭 부연하지만, 그런 중공군은 당시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던 미군이 상대하기에도 사실은 쉽지 않았다. 미군은 그럼에도 두터운 힘으로 그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도발적이면서 기습적으로 전선에 나타나 미군에게 적지 않은 손해를 끼쳤지만 중공군은 강력하면서도 두터운 미군의 힘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문제는 항상 한국군에게서 먼저 나왔다. 군대의 실력을 근본적으로 받쳐 줄 국력의 수준이 우선 보잘 것 없었던 대한민국의 상황 때문이었다. 아울러 건국 뒤 체계적인 훈련을 거치지 않은 당시 국군의 전투 실력도 문제였다. 지휘관을 비롯해 일반 사병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짜인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할 시간적이면서 물리적인 여유가 모두 없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늘 그런 국군을 향해 선공(先攻)을 펼쳤다. 중공군 5차 공세가 펼쳐지던 무렵까지 그런 양상은 늘 이어졌다. 약한 구석을 먼저 치고 나서는 중공군이 밴 플리트 신임 미 8군 사령관이 드러내는 아군 전선 배치의 희미한 틈을 그냥 놓칠 리가 없었다.

1951년 4월 말에 마무리 지어진 중공군의 5차 공세 1단계 공격은 중공군 지휘부의 당초 의도와는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수도 서울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중서부 전선의 한국군 방어지역을 먼저 공격해 전선의 구멍을 뚫은 뒤 서부의 19병단과 협격을 벌여 유엔군의 역량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구상도 이루지 못했다.
참전 뒤 집요하게 한국군을 노리고 공격을 펼친 중공군 수뇌부 모습이다. 오른쪽에서 셋째가 펑더화이 총사령관, 첫째가 덩화 부사령관이다.
참전 뒤 집요하게 한국군을 노리고 공격을 펼친 중공군 수뇌부 모습이다. 오른쪽에서 셋째가 펑더화이 총사령관, 첫째가 덩화 부사령관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베이징(北京)에서 만들어냈던 당시 중공군의 책략은 5단계 공세가 펼쳐지던 무렵에 질적인 변화를 꾀한다. 가능한 한 유엔군의 실제적인 전투 수행 능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겠다는 구상이었다. 참전 뒤 줄곧 전선의 국면을 먼저 생각해 지역 점령에 중점을 두던 방식과는 달랐다. 전선에서는 펑더화이(彭德懷)가 그를 받들어 5단계 공세 때부터는 실질적으로 아군 병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겠다는 작전을 펼쳤다.

그럼에도 1단계 공세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그 다음 펼쳐지는 2단계 공세에서 중공군은 다시 그런 구상의 실현에 나섰다. 역시 길게 동서로 늘어진 아군 전선의 한쪽을 응시하면서였다. 서부전선에 강력하게 늘어선 미군 중심의 유엔군 전투력보다 동쪽으로 늘어선 곳은 약해 보였다. 한국군 중심으로 전선을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 전사(戰史)를 보면 저들은 1단계 공세가 끝난 뒤인 1951년 4월 28일 작전회의를 마쳤다. 주력을 동쪽으로 집중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2단계 공세의 초점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작전의 핵심은 전투력이 약한 한국군 사단을 먼저 붕괴시킨 뒤 그로써 고립되는 미군을 섬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공군 대부대가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늘어서 있는 중동부 산악지대를 향해서였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premium.chosun.com/svc/news/nlist.html?opt=none&catid=247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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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둥년탄핵 17-03-18 20:30
   
조선일보 따위를 올리다니요... 실망이군요?

소설일보 따위를 믿느니 그냥 가짜뉴스를 보세요!
시발가생 17-03-18 21:40
   
그래도 유일하게 6사단만 전멸안당했음ㅠ
     
관심병자 17-03-18 2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