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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19 01:15
[기타] 국군 기병대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3,806  

국군기병연대의 창설

 

조선 국방경비대는 1948년 1월 1일 경기도 수색 제1여단내에 수색대를 창설하고 장갑 제1, 기병 제2 중대를 편성하였다. 1948년 7월 4일에는 수색에서 용산 서빙고로 이동하여 1948년 7월 10일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잠정 특별부대 사령부 예하 수색대로 개편을 보았다. 1948년 9월엔 서빙고에서 김포로 이동하였으며, 1948년 11월 25일에는 김포에서 서빙고로 다시 이동하여 이 날자로 수색단으로 승격함과 동시에 초대단장에 이용문 소령(일본 육사 제50기·소좌)이 보임되었다. 1948년 12월 5일에는 수색단이 기갑단으로 승격되었다. 1948년 12월 10일에는 기갑단 기갑연대로 승격, 연대장에 이용문 소령이 유임되었다. 1949년 4월에는 기병부대를 창설(2개중대 편성·말 3백50두)하였다.

1949년 7월 30일에는 이용문 대령이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전출되고 부연대장 유흥수 중령이 연대장으로 보임되었다. 1949년 12월에는 도보대대(제3대대) 및 군견중대를 추가로 창설하였다.

 

그때 기병장교로 이용문 밑에 있었던, 이종찬의 동생 이종승(李鍾勝)은 이렇게 증언했다.

"8기 2차로 1949년 1월 14일에 임관하여 기갑연대에 배속된 이후 기병중대를 창설하였다. 군마 1백두를 우선 확보하고 학생 마술연맹원 중에서 유능자를 선발, 소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연대는 장갑 1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밖에 없었고 이어서 각각 1개 중대가 증편되었다. 그 후 나는 부대대장이 되었는데 대대장 김진항(金鎭恒) 소령은 기병경력이 없어서 주로 학생 마술연맹원들을 중심으로 운영해 나갔다. 임관 전에는 이들을 대위로 특채하겠다고 했으나 소위로 임관시켰다.

그 대신 진급은 빨라서 6개월 만에 대위로 진급하였다. 그 당시 기병대대는 행사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급히 모병을 하여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대원들이 감내하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좋아하였으나 막상 훈련을 해보니 견디기 어려워 도망가는 자가 생겼다. 군마는 6·25때 모두 손실되었고 기갑연대는 보병연대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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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중인 국군 기병대

 

박용실(朴容實·예비역 대령)의 증언.
"육사 8기 3차로 1949년 3월 2일 임관하여 기갑연대에 배속되었다. 여순반란사건이 진압되고 기갑연대로 승격하였지만 2개 중대밖에 없었다. 장갑 제1중대장은 박길룡(朴吉龍·경비사관 제4기)중위, 제2중대장은 박도경(朴道璟·경비사관 제4기)중위였고 기병은 없었다. 연안 개성지구에 가서 모병하여 제2대대인 기병대대를 창설하게 되었는데 대대장은 2기생 김진항 대위였고 그 후에 장철부(張哲夫) 소령이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49년 말에 도보대대가 창설되었는데 대대 안에 군견중대가 있었다. 6·25 이전에는 제3중대가 창설되었는데 내가 중위로서 중대장을 하였다.

6·25 개전 당시는 유흥수 대령이 연대장이고 제1대대장은 박무열(경비사관 제3기)소령, 제2대대장은 장철부(경비사관 제5기·본명 김병원)중령, 제3대대장 전영은(경비사관 제3기)소령인데 제3대대장은 김포지역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유흥수 연대장은 노란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장갑차와 연대장 차에는 노란기를 달고 다녔다. 해군에 있던 강태민(만군 출신·일본 육사 58기 편입)소령이 육군으로 전과하여 제1대대장을 하였다.

 

기병 요원들을 대학에서 모집

 

기병대대 요원들은 말을 탈 줄 알아야 하므로 통상적인 모집으로는 조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용문 중령은 고대·연대의 승마부 학생들을 설득, 입대시켰다. 고대에서는 김촌성, 성기태, 성기향, 연대에서는 길전식, 조홍원, 최문호가 들어왔다.

 

길전식(吉典植·공화당 사무총장 역임)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이용문 중령이 승마부원들을 초대, 중국식 요리를 대접하면서 '군에 들어와 말을 타라'고 권유했다. 당시 대학의 승마부원들은 올림픽 출전에 대비하여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 중령은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 영화 <민족의 제전>을 보지 않았느냐. 승마 부문의 출전자들은 대부분이 장교들이더라'고 설득했다. 이용문 중령은 고대·연대 승마단원들에게 '올림픽에 나가려거든 군에 들어오라. 내가 밀어주겠다. 배론 니시를 보라'고 꾀기도 했다."

사진

국군기갑연대 지휘부

 

민병선이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이용문이었다. 민씨는 일제시대에도 일본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한 적이 있었다. 길씨 등 대학교 승마부원들은 육사 8기생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다. 정규 8기생들은 여섯달 동안 훈련을 받았지만 승마부원들은 두달만 교육을 받았다. 첫 한달에는 제식훈련을 받고 나머지 한달 동안은 기갑연대에 파견되어 사관후보생으로 일했다. 이들 승마부원들은 1949년 1월에 육사 제8기 특별반과 함께 소위로 임관했다. 그때 기갑연대는 장갑차 1개 대대, 기병 1개 대대, 보병 1개 대대 등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대 출신 최문호는 기갑연대 6중대의 중화기 소대장이 되었다. 연대 동기생인 조홍원 소위와 함께 말에 화기 등 장비를 싣는 방법을 연구, 개발했다. 경기관총과 60mm 박격포를 말에 싣는 방법의 개발이었다. 당시의 기병전술 개념은 전투지역까지 말을 타고 가서는 내려서 소화기를 갖고 싸우는 것이었다. 기병의 돌격 같은 그런 전술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본군에서 기병부대의 치중대(輜重隊)에서 근무한 하사관들을 모집, 기병대대의 치중대를 조직했다. 그때 기병대대 소속2개 중대에는 5백80마리의 말이 있었다. 일본산 개량마였다. 기병에서는 말이 주인이다. 기병들은 말을 뒷바라지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보면 말과 한 몸이 되듯 혈육 이상으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기병대 치중대는 주로 마구간과 사료를 관리하는, 즉 말들을 뒷바라지하는 일을 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우리나라 농가에 전마(戰馬)들을 입식시켜 위탁사육을 시켰다. 입식마라고 불렀다. 기병연대가 창설되고 맨 먼저 한 일은 이들 입식마를 사들이는 일이었다. 길전식 소위도 수의사와 함께 전북지역으로 출장 가서 입식마들을 건강진단하고 사들이는 일을 했다.

 

국군기병대의 활약

 

장철부 소령이 기갑연대 기병대대장으로 6·25전쟁을 맞을 당시 유흥수(柳興洙) 대령의 기갑연대 보병 1개 대대는 김포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고, 장갑대대는 전방 사단에 나뉘어 배속된 상태였으며, 기병대대는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중 장갑대대는 초전에 그나마 몇 대 보유하고 있던 장갑차를 모두 잃고 와해되었으며, 보병대대 역시 재편성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흩어져버려 결국은 장철부 소령의 기병대대만이 기갑연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50년 6월 26일 10시경 축석령에서 적의 전차가 의정부 방향으로 돌진해오는 것을 정찰한 장 소령은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태릉으로 철수한 후 6월 27일 15시경에 한남동에서 훈련용 단정으로 한강을 건넜다. 소대장 최문호중위는 중화기소대와 함께 맨 먼저 도강했다.

한남동에서 전용 도선으로 한강을 건너던 기병대대는 북괴 야크기의 공습을 받게되었는데 이때 다행히 미군의 F80기가 나타나 야크기를 격추시켰고 장철부 소령은 신속히 제5중대 3소대장 김정식 소위를 추락지점으로 보내 확인시킨 결과 적 조종사는 즉사하였고 중상을 입은 통신사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심문하니 '한강의 교량 차단임무를 띠고 함경남도 연포비행장에서 출격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적 통신사를 현지 경찰에 인계하고 따발총과 권총 각 1정 및 낙하산 1착을 노획하여 대방동으로 집결하였다.

 

6월 29일 장정부소령은  날이 밝자 종일 적정수집을 위해 강안을 순찰하였는데, 해가 질 무렵에 제3중대의 3소대가 청담리 부근에서 거룻배로 도하하는 1개 소대규모의 적을 발견했다는 급박한 보고를 해왔다. 장 소령은 적들이 접안하여 하선하는 틈을 노려 소대장 조돈철 소위를 선두로 기마돌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적들은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과감한 기마돌격에 혼비백산했으며, 한 명도 남김없이 강물에 쓸어 넣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한수 남안에 대한 적의 도하기도가 노골화되는 가운데 강 건너의 한남동에 있는 기병대대의 막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 기지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장 소령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궁리 끝에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야음을 틈타 60㎜ 박격포 6문을 강변 백사장으로 추진했다. 22시, 고요가 흐르는 적막한 밤에 적이 점거한 대대본부 진지를 목표로 60여 발의 포탄이 집중되었다. 한동안 화광이 강 건너 밤하늘을 훤히 밝히더니 흑연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며 수면 위로 꺼져 가는 것을 장 소령과 대대원들은 바라보았다.

 

한강을 도하한 후 기병대대는 원 소속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와 기갑연대의 와해로 혼성 제2사단에 소속되어 전투를 하게 되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북괴군의 주공이 지향될 노량진-여의도 방어에 역점을 두면서도 한남동-신사동의 방어에도 부심하고 있었다. 만약 적들이 신사동-매곡리(반포동)-사당동-과천-군포장(안양)이나 신사동-말죽거리-우면동-과천-군포장으로 진출하면 한강 방어선의 국군 주력이 포위되는 것이고 신사동-말죽거리-원지동-판교-수지 풍덕천으로 진출해도 국군의 병참선과 투입된 전투부대의 퇴로가 차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혼성 2사단장에게 이 일대의 방어임무를 맡겼고 장철부 소령이 이끄는 기갑연대 제2대대(기병수색대대,이하 기병대대)에는 신사동 일대를 지키게 하였다. 김 장군이 기병대대에 신사동을 맡긴 것은 한남동에 본부를 둔 기갑연대가 한남동의 전용 도선을 이용하여 말죽거리와 과천일대에서 승마훈련을 하여왔기에 지형에 익숙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진

행군중인 국군 기병대


6월 30일 08:00부터 적 3사단 8연대가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남산 기슭에 방열된 포병으로 기병대대를 강타하는 동시에 10:00부터 20-30명씩 분승한 거룻배로 도하하여 강변에서부터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은 본도하에 앞서 이날 새벽 선견대로 하여금 강을 건너게 하여 반포1동 부근의 야산(지하철 7호선 반포역 인근 신반포주공 아파트)에 엄호거점을 확보하여 75고지(논현1동 학동공원)에 방어선을 편 기병대대의 측배를 위협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기병대대 6중대장 박익균 대위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언제 적들이 숨어들었는지 기관총으로 우리의 좌측방을 위협하는 가운데 적들의 포격에 말들이 먼저 놀라-이때까지 병사들의 승마훈련만 마쳤을 뿐 말들에게는 전투소음에 대한 적응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고삐를 풀고 달아나고 말았다. 말을 붙잡으랴 적들을 막아내랴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가 그모양으로 엉키자 김포지구에 출동했다 돌아온 최영화 소위는 분기가 치솟아 홀로 적진에 기마돌격을 감행하여 장렬히 전사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 때 달아난 말들이 귀소본능에 따라 한강을 헤엄쳐 한남동으로 가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고 차마 쏘아 죽이지 못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내 말이 한남동 연대본부 인근에 있던 내 집으로 찾아가 미처 피난 못한 집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결과 기병대대는 우면동 과천을 거쳐 군포장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6일 동안 버틴 한강방어선을 적에 넘기고 7월 4일에 수원선 마저 무너지게 되자 지연전에 돌입하였다. 기병대 병력은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철수하다가 아군을 적으로 오인한 호주기의 기총소사를 받기도 했다. 성환 부근에서는 말 다섯 마리와 기병5명이 기총소사에 맞아 죽었다. 기병들은 국도를 버리고 산길을 타고 남하했다.

 

7월 8일 공주까지 후퇴한 기병대대는 홍성과 온양 방면에서 침공하는 적에 대해 정찰 및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군 제6사단의 1개 대대가 유구리로 침입해오자 이를 협공하여 400여 명의 적을 섬멸시키고 북한군 대대장의 지프차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려 기병대대원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7월12일 아침 예산을 떠나 유구를 거쳐 오후에 다시 공주로 복귀하게 되었는데 22.00에 금강 북안에 이르자 이미 교량이 파괴된 다음이므로 마필의 도강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중대는 강의 서안을 따라 밤새 말을 달려 이튿날인 13일 새벽에 부여의 대안에 이르러, 그곳에서 배를 구하여 강을 건넜다.

 

7월 14일 장철부 대대장은 금강 방어작전중 미 제 63 포병대대 B중대가 북괴군에 포위되어 사경을 헤매는 것을 대대장의 직접지휘로 적 400명의 배후를 격파하는 기습작전으로 구출하였으며 이 전공은 미군전사(*페렌바크의 this kind of war 한국전쟁 p119 - 적 보병 400명이 중대진지를 포위하자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이어 어디선가 돌연 나타난 한국군 기병들이 서쪽에서 적의 대열 속에 뛰어든 틈을 타서 중대는 질서있게 후퇴했다.)에 기록되어 있다.

 

7월 15일에는 미 제24사단 34연대 3대대가 적에게 포위되자 심야의 폭우를 무릅쓰고 후방을 기습하여 이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7월16일 이때까지 중화기소대원들은 말을 끌고 다녔다. 최문호의 소대병력은 이때 아주 위험한 수색을 지시 받았다. 금강을 넘어가서 적과 접촉할 때까지 북진하라는 명령이었다. 최문호의 부대는 북진을 계속하여 예산의 어느 마을에까지 들어갔다. 이날 밤 사령부에서 무전이 왔다. "내일 새벽 5시까지 부여 부근의 금강 북안(北岸)까지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전략이 바뀐 것 같았다. 꼬박 하루를 달려야 할 거리를 밤을 세워 말로 달려 남하했다. 말이 혹사당하여 편자가 닳아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말을 버려야 했다. 편자가 없는 말은 전장에서는 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40∼50마리가 남아 있었다. 최문호는 12세짜리 애마 킹을 산으로 쫓아 보냈다. 사선을 함께 넘으면서 정이 들 대로 든 킹은 계속 최 중위를 따라왔다. 최 중위는 말목을 껴안고 흐느꼈다.
"여기서 풀을 뜯어먹고 있어라. 내가 다시 찾으러 올께."
포연과 피비린내로 뒤덮인 산하에서 킹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일단 그렇게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7월 23일, 거듭되는 격전을 치르는 동안 수세에 밀린 기병대대가 대전에서 철수하여 옥천, 영동, 김천을 거쳐 대구에 도착하자 연대장으로부터 '청송지구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장 소령은 7월 25일 대대를 이끌고 청송에 도착하였다. 기병대대는 약 500명의 강원도 경찰 제5대대를 배속 받아 이날 저녁 북방의 진보동을 탈환하고 비봉산(671고지) 일대에 기병대대를, 605고지에는 경찰대대를 배치하였다.

 

8월 3일 사태가 급박해지자 장 소령은 현진지 사수의 결전의지를 대대원들에게 하달하였다. 대대장의 결의를 파악한 기병대대는 전선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며 적진을 기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는 한편 적의 사단사령부를 야습(夜襲)하여 수많은 전공을 올렸다.

 

8월 4일  605고지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대대가 집요한 적의 공격으로 후퇴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기병대대 정면으로도 적의 공격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경찰대대의 진지를 돌파한 적의 일부 병력이 기병대대 정면으로 재차 공격을 감행해오자 장 소령은 '각자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과 함께 고군분투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적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포위망을 압축해왔다.

 

국군기병대의 종말과 전설의 기병지휘관 장철부

 

당시의 상황을 방자명의 증언을 통해 들어본다.

"우리 기병대대는 탁월한 지인용(智仁勇)을 겸비한 항일투사 장철부 소령의 지휘하에 소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정찰, 수색, 연락의 기본기능과 증강된 기동화력을 구사하여 공격과 방어에 전과를 올렸다.특히 공주군 유구리에서는 최문호 중위가 지휘하여 적 200여명을 섬멸한 빛나는 매복기습작전이 있었고 금강연안에서 적의 포위 속에 전멸 직전이던 미 24사단 63포병대대의 구출도 용맹한 대대장이 마상질구(馬上疾驅)하여 직접 지휘한 특이한 전과로 미군의 대(對)한국군 신뢰감 구축에 결정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그 수훈은 최고훈장감이다." 

 

7월 20일 경 대구에 집결하여 교외의 경마장 자리에 주둔하게 된다. 여기서 거의 모든 말(馬)이 안상(鞍傷)을 입고 폐마(廢馬)가 되어 우리는 보병이 되었다. 적이 동해안과 영덕 청송 의성을 연결한 후 영천 포항으로 진출하여 대구를 동남쪽에서 공격, 낙동강 전면에 집결한 주력과 대구를 협공하려는 기도가 역력해지자 육군본부는 급히 우리 연대에 출동을 하명, 25일 경 우리는 기차를 타고 안동을 거쳐 청송에 배치되었다. 이 광활한 지역은 1개 사단이 방어해도 부족한 방어정면인데 기병대대를 주력으로 한 기갑연대 800여명이 담당하는 상식 이하의 육본 작전국 문외한들의 무모한 방어계획에 의해 기병대대는 보병이 되어 배치되었다.

 

전방의 북괴군은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편성된 12사단과 766유격여단의 정예라는 것을 후일 알게 되었고 그들 북괴군은 능선에 구름떼 같이 뭉쳐서 움직이는 것을 쌍안경으로 보았다. 여기서 1주일 남짓 방어에 성공한 것도 북괴군이 우리 대대장(장철부 중령)의 신출귀몰하는 방어전술에 현혹되어 공격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대대가 청송군 진보면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1주일 동안 방어할 때 장철부 대대장은 매일 밤 나를 대동하고 직접 야간정찰을 나가 새벽이 되면 진지로 돌아왔다. 그 당시 어느 부대 대대장이 적진에 침투하여 정찰을 했던가? 용맹한 장철부 대대장 아니고는 상상 밖의 일이다.

 

장 대대장은 항일 유격대에서 공훈을 세운 뒤 임시정부 추천으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풍부한 군사경력은 6.25 개전 당시의 어느 지휘관도 그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며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강철 같은 체력은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우리 국군 장병들이 영원히 기억하고 추앙해야할 군신임을 확신하며 마음 속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전투중 나는 직속상관인 그로부터 탁월한 전술적 지도와 교훈을 얻었고 인생관, 사생관에 대해서도 많은 계시를 받았다.

 

적의 대공세가 시작되던 8월 1일 전야는 몹시 더웠다. 전면 산봉우리와 골짜기 사이에 매복한 적을 의식하며 이제는 틀림없이 죽는구나하는 체념 같은 것을 느끼면서 나는 대대장에게 물었다.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는 저승에서 다시 전우들과 만날 수 있을까요?" 대대장은 눈을 감은채 한참 있더니 대답한다. "나는 특별한 종교도 없고 철학적 해석도 잘 모르나 저 질서정연한 천체의 운행과 인간 정신의 오묘함과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특성으로 봐서 절대자의 존재와 무한한 생명력과 영혼의 불멸을 믿는다."고 하였다. 이 말에 나는 "우리는 죽어서 다시 만나게 되겠군요. 저승에서 대대장님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저는 안심하고 죽겠습니다."라고 답했다.

 

8월 2일 오후 1시가 넘자 구름 같은 대군(약 3000명으로 보였음)은 쉴새 없이 집중포화를 우리 진지에 퍼부어 대면서 접근해 왔다.그 놀라운 연결동작의 기민성, 화력의 집중과 보병의 전진을 교차로 하여 유기적으로 수행하는 그들은 백전연마의 정예부대였다. 일제히 응사한 우리 박격포, 중기. 경기의 화력 또한 충천하는 것으로 피아의 교전은 백뢰(百雷)가 진동했고 산야는 자욱히 불타 나갔다. 2시가 넘었을까. 일단 주춤했던 적의 박격포 탄막이 다시 우리 진지를 덮치면서 적 보병의 급격한 접근이 시작되었다. 내가 엎드려 있던 자리에서 약간 몸을 일으켜 기관총대로 가는 순간 나는 좌흉부에 강한 타격을 받으며 화약냄새가 나의 코를 찔렀다. 나의 정신은 깨었다 잃었다 하면서 간간이 나의 당번병 최하사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와 대대장의 "빨리 빨리"라는 음성을 들었다.

 

8월 5일 아침 부상한 기갑연대의 많은 병사들이 병원으로 후송되어 뜻 밖에도 장철부 대대장이 전사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몇번이고 되묻고 나서야 대대장의 전사를 확인한 나는 한없이 울었다. 진정한 애국자는 빛을 보지 못하고 비운으로 끝을 맺는 것일까?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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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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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찍 17-03-19 01:26
   
한 10년 있으면 부활할 듯 로봇말 기병대로 ㅋㅋㅋ
     
식쿤 17-03-19 11:30
   
그냥 말+인간해서 기계화 켄타우로스 부대를 창설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