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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23 03:45
[기타] 장사동 상륙 작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141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한창 수도 탈환전이 진행되던 1950년 9월21일, 나는 부산 해군본부로 돌아갔다. 목숨 걸고 첩보작전에 몸을 던졌던 상륙작전에서 수도 탈환의 결과를 보지 못한 것이 서운했다.

그러나 그때 내게 새로 주어진 다음 작전의 수행을 준비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청취한 미군 방송이나 해군 정보계통을 통해 받은 보고를 종합하면 전황이 수세에서 공세로 넘어가는 터닝 포인트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했다.

그때 받은 보고 가운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이 동해안 장사동(長沙洞·경북 영덕군 남정면) 학도병 유격대 기습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130여 명의 꽃봉오리 같은 젊은이들이 전사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비교하면 너무 아쉬운 희생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의 제1차 대공세가 있었던 1950년 8월 중순,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끝인 경북 영덕에서 선전하던 한국 육군3사단은 적에게 후방을 차단당해 바닷가로 내몰린 진퇴유곡의 상황에 처했다.

부득불 독석리 해안을 탈출로로 삼아 포항 남쪽으로 해상 철수를 단행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타격을 면할 수 없게 됐던 것이다. 장사동은 3사단이 해상 철수를 하던 바로 그 한(恨) 서린 독석리와 인접한 자그마한 어촌이다.포항 남쪽에서 형산강을 가운데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던 3사단이 명예 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 장사동 작전이 감행됐다.

육군의 전사 ‘학도의용군’에 따르면 적 후방을 교란해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3사단의 북진을 지원하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적의 관심을 동해안에 묶어 두려는 목적으로 기획된 작전이었다.

작전 기간이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날 시작해 3일 만에 끝나도록 정해진 것을 보면 인천상륙작전을 염두에 두었던 작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함선과 병력이 인천에 집중돼 장사동 작전은 존재조차 모르는 전투가 됐다.

장사동 작전에 투입된 유격부대에 대해서도 꼭 기억해 둬야 할 것이 있다. ‘명(明)부대’로 불렸던 그 유격대는 전원이 학도병으로 조직된 비정규 부대였다. 군번도 계급도 없는 어린 학생 130여 명이 이름 모를 산하에 선혈을 뿌리고 산화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고혼을 위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명부대는 이명흠 대위가 창설한 부대였다. 육사 5기 출신인 그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군·관·민 사기진작과 적군 귀순 공작 임무를 수행하는 대적(對敵)공격대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대구에 있던 시절이었다. 적 후방 교란에는 유격부대 침투가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는 육군본부로 강문봉 작전국장을 찾아가 학도병유격대를 창설하자고 건의했다.

몇 차례 설득 끝에 강국장의 결심을 얻어낸 그는 곧바로 대구역 광장으로 달려갔다. 마이크를 잡고 “애국학도의 힘으로 조국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밤낮없는 3일간의 활동으로 1000여 명의 지원을 받은 그는 체격이 좋은 학생 500여 명을 선발해 밀양으로 갔다.

국회의원 신분으로 밀양지역 학도병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있던 최윤동(崔允東) 부대 200여 명을 합쳐 700여 명이 된 명부대는 부산으로 이동해 문현동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잠시 훈련을 받다가 장사동 작전에 투입됐다.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계급도, 군번도 없는 학도병 772명이 전부였다. 학도병이라 하지만 거의 대다수가 고등학교 2·3학년에 다니다 지원한 열여덟, 열아홉 살 청소년들이었다. 게다가 무기와 탄약도 불충분하고 보급품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밀어붙인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작전이었다.

이 유격부대를 지휘한 이명흠(훗날 이종훈으로 개명) 대위는 처음 육군본부 작전국의 작전명령에 불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육군본부의 전선의 병력 배치 상황을 들어 정규부대를 동원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면서 인천상륙작전에 모든 전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설명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학도병 유격대는 작전의 시작부터 큰 고초를 겪었다. 상륙 직전에 적 해안초소와 포대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탄우(彈雨)와 비바람을 맞으며 맨몸으로 감행한 적전상륙이었다.

유격대가 편승한 수송선 문산호(해군이 징발한 해운공사 소속 LST)는 9월14일 오후 4시 부산항을 떠나 15일 오전 5시쯤 장사동 부근 해상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면이 조용해 기습작전이 순조로울 것 같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비바람 때문에 상황이 급변했다. 태풍 케지아의 영향권에 든 남동해안에 강한 비바람이 몰아친 것이다.

집채 같은 파도에 밀리던 문산호가 표류하다 암초에 바닥이 걸렸다. 해안선에서 100m도 넘는 곳에 좌초돼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는데 적 해안 초소에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지휘관 이명흠 대위는 정공법을 택했다. 문산호를 호위하든 엔디코트함과는 무선통신 수단이 없었다.

다급해진 엔디코트호 함장은 삼척 근해에서 인천 상륙작전 양동작전을 지휘하던 동해 전대사령관 하트먼(Hartman) 제독(미 해군소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하트먼은 급히 현장으로 달려가 헬레나함 적재 헬기를 띄웠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해안의 피아식별이 불가능해 철수하고 말았다.

이대위는 가장 날래고 용감한 대원 7명을 조직해 수영으로 상륙, 소나무에 밧줄을 매는 임무를 부여했다. 밧줄에 의지해 부대원들을 상륙시키려는 것이었다.

때맞추어 헬레나호의 함포사격이 시작돼 본격적인 전투 상황이 전개됐다. 몇 명의 대원이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고 문산호 선장도 전사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악전고투 끝에 수송선과 해안에 네 개의 밧줄이 연결됐다.

“돌격 앞으로!” 이대위의 구령을 신호로 유격대원들은 “와, 와” 함성을 지르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밧줄을 잡고 허우적거리며 파도를 헤쳐 가는 바다 위에 적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아비규환이라는 말은 아마도 그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겨우 백사장에 당도한 대원들도 총탄에 쓰러져 갔다. 모래밭에 선혈을 쏟으며 죽어가는 전우를 목격한 대원들은 울부짖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낮은 포복으로 백사장을 통과한 대원들은 엄폐물을 이용해 적의 토치카에 접근했다. 적진지에 수류탄을 던지면 잠시 후 비명과 함께 총성이 멎었다. 또한 육탄돌격을 감행하는 대원들도 있었다. 그렇게 토치카 셋을 장악한 뒤 콩 볶듯 하던 총소리가 사라졌다. 적이 해안선을 포기하고 서남쪽 후방 고지로 철수한 것이다.

상륙전은 그렇게 끝났다. 전열을 정비하고 인원을 점검해 보니 피해는 전사가 60명, 부상이 90명이나 됐다.

부대를 4개로 재편한 이대위는 3개 방면 추격전을 명하고 본부와 함정에 계속 지원을 요청했다. 첫 전투에 이긴 승리감에 도취한 대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적 고지를 공격했다. 먼저 보낸 전우의 원수를 갚고 말겠다는 의리도 작용했다.

적은 우리 유격대의 불 같은 투지와 병력의 우세에 밀려 고지를 하나씩 포기하고 물러갔다. 한 고지를 빼앗고 보니 앳된 인민군 병사 둘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발에 쇠사슬이 묶여 후퇴를 하지 못한 것이다. 나이를 물으니 각각 열다섯, 열일곱 살이라 했다.

소년 병사들 발에 쇠사슬을 묶어 진지를 지키게 하고 장교·하사관·고참병들은 다 도망친 북괴군의 이 천인공노할 패륜 행동 앞에 유격대원들은 치를 떨었다. 동생 같은 적병의 겁먹은 표정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진 대원도 있었다.

끓는 애국심과 전우애로 뭉친 유격대원들의 돌격 상륙이 마침내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적의 중요 거점인 200 고지를 탈환한 것이다. 9월15일 오후 2시 50분, 목숨을 건 상륙작전으로부터 꼭 10시간 만이었다.

인원 점검에서 드러난 아군 피해는 전사 100명을 넘었다.이대위는 즉시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려고 무전병에게 교신을 명령했다. 그러나 무전 교신이 불가능했다. 상륙할 때 바닷물에 젖은 무전기가 가동될 턱이 없었다.

상륙작전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면 부족한 대로 보급품 조달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적의 공격을 받는 상태에서 비상수단으로 상륙을 감행하느라고 필요한 보급품을 양륙시키지 못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보급품이 달리기 시작했다.그렇다고 먹통이 된 무전기만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산꼭대기와 중턱에 진지를 구축하고 경계에 돌입했다. 비가 내리는 밤에도 새벽은 왔다.다음날은 중요 임무의 하나인 영천~포항 국도를 점령해 적의 보급선 차단을 도모했다. 장사동 지서를 탈환하고 감금돼 있던 우익 청년들을 해방시켰다. 인민군들에게 온갖 고문을 당해 초죽음 상태에 있던 그들은 유격대원들을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보람을 느낀 유격대원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선무공작도 했다.

성공한 작전의 기쁨은 그날 하루뿐이었다. 수에 밀려 후퇴했던 인민군이 대규모 지원병력과 함께 반격해 오고 있다는 보고가 날아든 것이다. 이대위는 다시 지원을 요청하는 무선 통신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통신반장이 전사해 달리 손써 볼 방법도 없었다. 도리 없이 자필로 지원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인편으로 보냈다.

‘(전략)
17일 미명을 기하여 적은 포항방면에서 전차 네 대의 지원 하에 약 2개 연대 병력으로 반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피로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동대산으로 입산코자 하였으나 적의 포위 하에 탈출도 불가능하므로 적의 공격을 최후까지 저지 진멸하고 우리 부대 일동은 이곳에서 옥쇄할 각오입니다. 우리의 작전이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9월17일 09 : 00 영덕지구 독립 제1유격대장’

전원 옥쇄할 각오라는 이 비장한 보고서는 상부에 전달되지 못했다. 보고서를 지니고 조각배를 탔던 문서 수발병이 배 전복사고로 익사한 것이다.그러나 상륙 당시 육안으로 유격대의 곤경을 목격한 미국 순양함 헬레나는 그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정찰기 한 대가 저공으로 날아간 뒤를 이어 헬리콥터가 날아 왔다.

이대위는 헬기에서 내린 밧줄을 타고 올랐다. 헬기가 날아가 내린 곳은 순양함 헬레나호 함상이었다.그는 즉시 사령관실로 안내됐다. 그에게서 자초지종을 알게 된 히긴스 미 해군소장은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군인이오”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즉각 철수 지원 활동을 개시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방법이 없어 이대위는 “땡큐”만 연발했다.
헬기 편으로 다시 작전 현장으로 돌아간 그는 유엔군이 철수 함정을 보내주기로 했다는 약속을 전하면서 헬레나호에서 얻어 온 비상식량 포장을 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신속히 상륙해안으로 전 부대원을 이동시키도록 지시했다.헬기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관측한 적은 유격대의 해상 철수 작전임을 알아채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헬레나호도 약속한 시간에 함포 사격을 시작해 철수 작전을 도왔다.

집채 같은 파도에 밀리던 문산호가 표류하다 암초에 바닥이 걸렸다. 해안선에서 100m도 넘는 곳에 좌초돼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는데 적 해안 초소에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이명흠 대위에게서 철수작전 지원 요청을 받은 히긴스 제독은 화력지원 함정을 8척으로 늘려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함포의 문을 열었다. 함재기들이 날아가 적 진지에 공중 폭격을 가했다
그 틈을 타 상륙해안으로 대원들을 이동시킨 이대위는 좌초한 문산호 선상에 부대 본부를 설치하고 철수작전을 지휘했다. 비행기들이 해안 백사장에 던져준 C 레이션 상자 덕분에 주린 배를 채운 대원들의 동작도 기민해졌다.

한국 해군본부가 보낸 LST 조치원호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19일 오전 6시였다. 철수작전을 돕기 위해 파견된 미 프랭크 파이드 소령은 조치원호에서 문산호 갑판에 올라 이대위와 작전을 협의했다.

문산호와 마찬가지로 조치원호도 해운공사에서 징발한 민간 선박이어서 선장도 민간인이었다. 그들은 우수한 선장였지만 접안 시설이 없는 백사장에 배를 댈 수 없었다. 즉 배의 파손을 각오할 수는 없었다.

결국 상륙 때와 같이 조치원호와 해안 소나무를 밧줄로 연결하고 대원들을 승선시키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작은 보트를 띄워 부상병을 태웠다. 그다음 부대별로 승선을 시작했는데 완전군장이 너무 무거워 파도에 쓸려가는 사람이 속출했다.어렵사리 배 앞에 당도한 대원들이 밧줄을 타고 오르다 힘이 달려 떨어져 내리며 파도에 휩쓸려 가기도 했다. 3일간의 악전고투로 지칠 대로 지친 대원들에게 물먹은 완전군장은 너무 무거운 짐이었던 것이다.

이대위는 급히 전 대원에게 단독군장으로 승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좀 속도가 빨라지고 실종자도 없어졌다. 그렇게 배에 오른 뒤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함포사격과 공중 폭격이 좀 뜸히진 틈새를 이용해 적이 박격포 공격을 계속한 것이다. 조치원호 주변 바다에만 떨어지던 박격포 한 발이 갑판에 떨어져 많은 사상자를 낸 뒤로 프랭크 소령은 출발을 서둘렀다. 갑판 여기저기에 희생자들의 살점과 피가 범벅이 되고, 부상자들의 비명이 그치지 않자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러나 이대위는 승복할 수 없었다.

아직 60여 명의 대원이 승선하지 못한 상황에서 밧줄을 끊으려는 프랭크 소령에게 이대위가 강하게 항변했다.배의 손상을 우려한 선장까지 승선 종료를 고집하고 나섰다. 더 이상 지체시킬 수 없어 이대위도 손을 들고 말았다. 겨우 승선을 끝낸 대원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데 혼자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아직 해안에는 30여 명의 대원이 남아 적과 교전하면서 승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은 대원들의 심정은 배신감뿐이었다. 포로가 돼 북으로 끌려 가다 혼란을 틈타 탈출한 고규혁 대원은 뒷날 ‘버림받은 충혼’이라는 제목으로 수기를 출판했다. 지척에 있던 철수선이 수많은 대원을 남겨두고 떠나버린 데 대한 원망이 책 제목에 잘 반영돼 있다.

우여곡절 끝에 조치원호는 640여 명의 대원을 구출해 부산항에 돌아왔다. 9월20일 06시였다. 부두에서 대기하던 대원들은 사방에 뿌려진 신문 호외를 보고서야 왜 자신들이 그 어려운 작전에 투입됐는지 알 수 있었다. 신문에는 인천 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위해 특공대를 동해안에 상륙시켜 적을 혼란에 빠트린 양공작전이라고 보도됐다. 그러나 대원들은 환영식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또 다른 작전에 투입돼야 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 제1사단과 육군 제7사단으로 구성된 제10군단은 D-데이 5일 전부터 해군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의 작전 통제권 아래 있었다. 작전이 성공리에 끝난 뒤에도 한동안 모든 통제권은 스트러블 제독에게 있다가 9월 20일에야 비로소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에게 이양됐다.

이는 아무리 용감무쌍한 병사라도 바다에서는 해군의 보호가 필요하며, 상륙 후에도 교두보를 확보하고 물자양륙이 끝날 때까지는 해군이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장사동 상륙작전은 그런 정통 상륙작전으로 여겨진 것 같지 않다. 단순히 해군의 수송수단을 이용한 지상작전 개념으로 인식됐던 것 같다. 대대 병력을 적지에 상륙시킨다는 것은 바로 돌격상륙이다. 행정상륙이나 수송작전과는 완전히 구분돼야 한다.

나는 뒷날 함대사령관 시절 육군 대대병력에 대한 상륙작전 교육을 함대에서 실시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상륙작전이란 단순한 수송작전이 아니라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해군작전이며, 장사동 작전의 교훈을 잊지 말도록 강조했다.[235]

미군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극동 해군사령관 조이(Joy) 제독도 장사동 작전 이후 봉쇄 호송부대 사령관 스미스 제독에게 “앞으로 한국군의 상륙작전에서는 비록 소규모 작전이라 해도 반드시 상륙 전문가의 참여 아래 실시하도록 하라”는 전문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장사동의 비극을 의식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인천상륙작전 때 미 해병 5연대 병력 투입을 놓고 육군과 해군이 벌인 신경전은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에 있어서의 전문성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말해주는 일화다. 당시 낙동강 방어전선인 워커 라인에 투입돼 있던 미 해병 5연대 병력을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워커 장군은 낙동강 전선이 무너진다고 반발했다.

휘하 지휘관의 반발을 의식한 맥아더 장군이 그 계획을 철회하자 이번에는 미 해군 지휘관들이 해병 5연대 병력 없이는 작전을 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났다. 미국에서 오는 해병대 병력이 신병과 예비역 중심으로 편성된 것을 의식한 것이었다. 결국 맥아더 장군의 작전참모 라이트 장군의 설득을 받아들인 워커 장군의 양보로 5연대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9&num=31522

http://blog.naver.com/steelgun/40204719988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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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zenia 17-03-23 03:50
   
으음?????
대장장이 17-03-23 08:42
   
장사상륙작전...
이건 인천상륙작전을 눈가림하려고 학도병으로만 구성된 부대 밀어넣고 나몰라라 했던 작전 아닌가?
더군다나 무장도 거의 개인화기만 쥐어주었고, 보급역시 없어서 몇일동안 북한군의 포위공격과 굼주림에 죽어갔는데....
나중에는 장사상륙작전 자체가 없었다고 해서 생존자들역시 푸대접을 받았었고....
누가 이 작전을 기획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작전 기획했던넘은 총살했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이 작전에 같이 투입했던가.....
12척 17-03-23 10:06
   
차릇파릇한 학도병 청소년들을 배에 태워서 사지에 먹이감으로 던져 놓고 나몰라라 했던거.
국민방위군과 함께 육이오 수많은 병크중에 하나. 오죽했으면 미군이 저런말까지 했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