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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29 21:39
[기타] 해방후 소련군정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869  

1945년 8월,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며 청진 등의 북한 지역에 진입한 소련군은 8월 말경에는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1945년 8월 26일, 소련 연해주군관구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조선인민들이여, 그대들은 독립과 자유를 회복했다. 이제 그대들의 행복은 바로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고 언명했다. 또한 소련군정은 미군정처럼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표방하며 각지에 세워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였다. 이 점을 들어 '소군정이 미군정보다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장 국내파 민족지도자였던 조만식을 잡아 가둔 것만 봐도 그들은 달콤한 말만 앞세웠음을 알 수 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시절부터 조선계 소련인(고려인)들이 요직에 들어와, 소련의 의도대로 차츰 조직을 장악해나갔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명단을 살피면, 각 부처의 은 조선인이나, 부상은 거의 예외없이 조선계 소련인으로 채워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 인물로 소련군 사단 참모였던 남일,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려인 출신인 허가이와 휴전회담 당시 북한측 대표였던 이상조[2] 등이 있다.

소군정 내내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강 간, 폭행,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는 소련군이 1945년 8월부터 이후 5개월간 북한지역에서 벌인 행태를 기록했는데, 12월 29일 작성된 해당 문서에는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3]

치스차코프는 이에 대항하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조선인의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 사단장인 드리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인은 이미 35년간 노예생활을 했다. 느낌 아니까좀 더 노예생활을 지속해도 괜찮지 않은가?"라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노획한 문서 가운데는 이른바 '체포인 명부'도 존재한다. 소련군에 대항하다 체포된 이들의 명단인데, '쏘군 감옥 이송'으로 표기된 이들의 행방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쏘군 감옥 이송'으로 표기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

소련군의 만행은 조선인 뿐 아니라, 식민지 일본인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일본인에게 가해진 폭력의 수위는 식민지 조선인조차 경악할 지경이라, 일부 북한 지역에서는 조선인 치안대가 소련군을 말리다 되레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이 조선북부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1945년 9월경, 김일성이 귀국하였다. 김일성은 평남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였고, 1945년 10월 북조선 5도 인민 위원회가 세워졌다. 이를 즈음하여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지부를 세워 정치 활동에 나섰다. 한편 1945년 10월 소련은 포고령을 발표하여 여러 조선인 무장단체를 해산하였고, 군대격인 조선보안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신탁통치 오보사건) 조만식 등이 반탁 운동에 나서자, 소련측은 조선민주당을 탄압하고 조만식을 가택연금해 사실상 정치 생명을 끊었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등 반공 활동 또한 탄압하였으며, 조선의용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해 들어오자 소련 포고령을 들어 이들을 무장 해제하는 사건도 있었다. 연안파가 일부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을 세웠으나, 이들은 국공내전에 참전하느라 일부 간부만이 참여했으므로 큰 세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후 김일성 등은 공산주의적 개혁을 진행해 나갔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4]가 세워진 1946년 2월부터 토지 개혁법, 8시간 노동제, 주요 산업의 국유화령 등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반발하여 월남한 사람들은 남한 내 반공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이 세워졌는데 이는 남한조선공산당의 정통성을 축소시킨 것이며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의도도 보인다. 이후 김두봉 등의 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으로 세력을 재편하였다[5].

이후 1947년 2월 북조선 인민 위원회가 세워지고, 단독 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되어 1948월 2월경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4월경에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으나 형식상의 합의만이 이루어졌고, 김구김규식 등이 돌아간 이후로는 북한에 남은 인사들을 끌어모아 6 ~ 7월에는 북한이 남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선전용으로 2차 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이후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한에서도 최고 인민 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 때 북한의 헌법에서는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정하였는데, 이는 당시 남한 지역을 북한 정권의 미수복지로 보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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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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