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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12 17:50
[밀리역사] 3사단의 포항 독석동 해상 철수작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044  

북한군은 강구를 점령한 후 유엔군 해공군의 강력한 화력이 집중되는 동해안 도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2~8Km 떨어진 야산지대를 따라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군 제 3사단은 8월 13일 아침 하송동에서 부대정비를 끝마친 제 22연대의 2개 대대를 제 23연대 방어지역 좌측방에 있는 462고지 일대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사단 예비로서 하송동에 대기시켰다.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모든 보급을 선박 수송에 의존하고 있는 어려움과 북한군이 사단 방어지역을 남북 양편에서 협공하려는 징후가 포착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해상철수의 시기가 임박해졌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비하여 그는 사단 참모진을 동원하여 해안선을 답사한 결과 독석동 조사동 간의 1Km 해안이 선박 접안에 적합하고 승선을 위한 해두보를 확보하는데 유리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아울러 지역 내의 이용 가능한 어선을 은밀하게 파악하면서 우발사태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462고지, 봉황산, 구계동 방어선상에서는 쉴 새 없는 교전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15일 새벽에는 홍해 북쪽에서도 북한군이 출현함으로써 국군 제 3사단은 그들의 협공이 머지않아 가해질 것이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한편 육군본부에서는 포항 기계지구의 전황이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계동 월포동에 고립된 국군 제 3사단이 점점 곤경에 빠져들게 되자 미 제 8군과 협조한 후 제 3사단에 해상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리하여 제 3사단은 15일 저녁 제 23연대를 지경동 화진동에 재배치하고 그 엄호 하에 제 22연대를 철수시켜 화진동 독석동에 배치하였다.

16일 제 3사단은 21:00에 LST 4척이 독석동 해안에 접안할 것이라는 육본의 전문을 받았다.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북한군과 접촉중인 상황 하에서 해상철수를 해야 하는 이 어려운 작전의 성패는 오직 기도비닉에 달려있다고 판단하고 해상철수를 극비에 부치는 한편 특히 피난민의 동태를 살피도록 강조하였다. 당시 피난민 속에는 북한군의 편의대와 첩자들이 끼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제 3사단의 작전이 그들에게 누설된다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므로 그 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일련의 대책이 강구된 후 사단장은 각 연대장과 참모들을 소집하여 해상철수작전에 대한 그의 구상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해안지대까지의 철수계획을 하달하였다.

각 연대는 각 대대별로 1개 중대 규모의 잔류접촉분견대를 편성한 후 8월 16일 21:00에 일제히 공격을 가하여 대치중인 북한군을 격퇴한 직후 지정된 해안지대로 철수한다.

잔류접촉분견대는 17일 04:00 약정된 신호탄이 발사되면 지체 없이 철수한다.

기타 병력과 장비는 일선 연대가 승선하기 이전에 병력 승선과 장비 탑재를 마친다.

기만대책으로는 트럭 6대를 동원하여 17일 자정부터 1시간 30분 동안 독석동 방화동 간 2 Km 구간을 왕복운행하면서 국군 증원병력이 상륙한 것처럼 가장한다.

제 11야전포병부대의 1개 중대는 잔류접촉분견대가 철수할 때까지 독석동 해안에서 요란사격을 계속한다.

제 3사단은 이 계획이 주효하여 북한군에게 기도가 노출됨이 없이 순조로운 병력 승선과 장비 탑재가 진행되었다.

17일 06:00 부상자 125명을 포함한 제 3사단 병력 9000명과 경찰 1200명 그리고 지방공무원 및 노무자와 반공투사 피난민 등 10000 여명이 승선을 완료하고 모든 장비와 송아지까지도 싣게 하는 여유를 보였다.

병력 승선계획을 수립할 때 사단장은 경찰과 지방공무원 및 반공인사들을 필히 탑승시켜야 한다고 역설하고 이를 실행했다. 사단장이 사단병력을 철수시키기에도 힘든 상황에서 민간인까지 승선시킨 이유는 국군이 작전을 할 때마다 의례 그들에게 많은 협조를 요청하고 도움을 받으면서도 위급할 때 군인들만 철수한다면 그들의 신뢰감을 저버리게 되어 결국에는 군관민의 화합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북한군은 날이 밝은 뒤에야 비로소 국군 제3사단의 철수를 알아차리고 06:00 조금 지났을 때부터 독석동 뒷산에서 박격포와 기관총을 사격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제 3사단장과 참모들은 철수하는 잔류접촉분견대의 승선을 확인하려고 해안에 있었으며 출항준비를 끝낸 3척의 LST는 해안을 떠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사단장 일행이 승선하기를 기다리던 마지막 한척도 북한군의 포격이 가해지자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승선하고 있던 사단 헌병 몇 사람이 선장을 설득하여 다시 접안하게 하였으며 곧 이어 마지막 철수병력과 함께 사단장과 참모진이 탑승하자 항해가 개시되었다. 그 시간은 17일 07:00이었다.

그 직후 독석동 상공으로 출격한 미 공군 전투기 편대는 적진을 강타하여 북한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제 3사단 철수병력을 실은 LST 4척은 미군 순양함 헤레나호와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며 항해하여 이 날 10:30 쯤 구룡포에 도착함으로써 제 3사단의 해상철수작전은 종결되었다.

<한국전쟁 전투사 안강 포항 전투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p110-117


김석원 사단장은 적에게 해상철수를 기만하기 위하여 각 연대장에게 “전투를 잘 하는 것보다 기도비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번 철수작전의 성패가 달렸다.”고 지시하고 작전명령은 대대장급 이상에게만 알렸다. 그런 후 차량 10여대로 헤드라이트를 켠 채 장사동 쪽으로 올려 보냈다가 끄고 내려오게 하기를 몇 번씩 반복하여 마치 공격을 준비한 것처럼 기만에 노력하였다.

동시에 피난민과 주민들이 군의 철수를 알게 되면 민심이 동요할 뿐만 아니라 주민 속에 끼어있는 첩자로 인해 정보가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마을에 헌병을 보내 “해변에서 사단장이 연설을 할 테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라.”고 연락하여 주민들이 모이자마자 그대로 배에 태워버렸다.

이렇게 신중을 기하였음에도 주민 중에는 철수를 눈치 챈 자도 있었는지 송아지까지 몰고 나와 배에 오르려 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미군이 송아지의 승선을 막으려하자 사단장은 “우리는 송아지가 있어야 농사가 되오.”라고 하면서 승선시켜 미군이 혀를 내두르는 모습도 있었다.

전투병력의 철수 요령은 적을 끝까지 기만하기 위해 포 4문으로 일제히 사격하면서 동시에 1개 대대에서 1개 중대씩 국부적인 야습을 감행케 하고 주력을 철수시켰는데 최후까지 엄호한 중대는 철수 신호에 따라 일제히 철수하여 다음 날 04:00에 승선하였다.

마지막 대대와 사단장 및 참모들이 승선하려 할 때는 날이 밝기 시작하여 적의 포탄이 선박 주변에서 작열하여 승무원들은 황급히 배를 바다로 빼려 하였다. 이번 수송의 하청을 맡은 일본인 선장과 선원들은 “우리는 인원과 물품의 수송울 계약했지 포탄에 배가 파괴되는 날에는 보험에 들지 않았기에 보상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육지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헌병대장 김홍걸 소령은 부하 20여명과 함께 헤엄쳐 들어가 “배를 대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위협 겸 설득하여 나머지 병력을 승선시킬 수 있었다.

<한국전쟁비사 2권> 안용현 p175-176


우리 인민군 5사단은 영덕 장사동에서 결정적 승기를 놓쳤습니다. 우리가 국방군 3사단을 3방에서 포위 공격하여 바다에 밀어 넣고 섬멸하려는데 함포사격과 지상포격으로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탄, 그 작렬하는 굉음과 파괴력은 정말 생지옥이었어요. 일선에서 독전하던 마상철 사단장이 “야! 이 존간나 새끼들, 살겠으면 앞으로 나가고 죽겠으면 뒤로 돌아라!” 실성한 맹수처럼 포효하는데 국방군은 야음을 이용하여 군함을 타고 유유히 빠져나갔지요. 포위당하여 일주일간이나 악전고투하면서도 우리가 확성기로 집요하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국방군은 투항하지 않았어요. 피난민과 송아지까지 몽땅 싣고 떠나버린 텅 빈 해변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약이 오르고 허탈했으나 다시 남진을 계속하였습니다.......

포항부근의 산과 마을을 다 점령하고 시가에 돌입했으나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에 지상포화만 작렬할 뿐 사람도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실락원의 비극> 박남식 p207-208


제 3사단은 영덕 강구에서 포항으로 철수하는 중에 북괴군 2개 사단(제5, 제12)에게 포위되어 독석동 해변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김석원 장군은 그 독특한 작전지휘로 병력 9000, 경찰 1200, 피난민 10000 합계 2만 명을 단 한사람의 희생도 없이 구룡포까지 철수해냈던 것이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진두지휘였다. 피난민까지 다 LST에 태우고 나서야 사단장 자신이 맨 나중에 배에 올라탔다.

이 독석동 해상철수작전의 성공은 동해안 전선을 수놓은 낭보였다. 미 8군의 참모진은 믿기지 않는다면서 “이건 기적이다.”하고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무뚝뚝한 워커 장군마저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정말 훌륭합니다. 한국군이 처음 겪은 적전 해상 철수를 이처럼 해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감명 깊은 대성공입니다.”하고 격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정일권 회고록> p203-204


전사상 유례없는 적전 무혈이탈의 성공은 김석원 사단장의 정확한 판단과 탁월한 지도능력이 큰 몫을 했다. 김석원 사단장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드물게 대대급 이상의 실전 지휘 경험을 가진 분으로서 진퇴 공방의 전기(轉機)를 보는 감각이 뛰어났으며 철수 지점의 선정, 철수 엄호진지의 선정, 엄호부대의 편성, 적을 기만하기 위한 의편행동(위장공격) 등에서 탁월한 지휘 솜씨를 보였다.

장군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물러설 줄 모르는 불석신명(不惜身命)의 불퇴전의 결의로 일관하는 신념의 정신주의를 지휘철학으로 하는 분이었다. 이로 인해 미 고문관들과 많은 마찰을 빚곤 했다. 미군들은 일본군의 망령이라고 했고 장군은 이들을 애송이 취급했다. 미군의 물량중시의 합리주의와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의 정신주의와의 충돌이었고 신구간의 마찰이었고 동서간의 갈등이었고 전술사상의 차이였다.

그러나 고립무원의 3사단을 정확한 판단력과 결단력 그리고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세계 전사상 유례없는 무혈 적전 해상철수작전을 성공시킨 것은 청사에 빛나는 일대 승전보임이 틀림없었다.

2차대전시 영국군의 던커크 철수나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의 철수에서 많은 손실을 본 전사에 비하면 획기적인 쾌거임에도 풍요와 태평세월 속에 묻혀 매몰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 노병의 애환> 공국진 p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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