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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14 12:25
[밀리역사] 과달카날 전투-가와구치 지대의 상륙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155  

라바울에 기지를 둔 일본 제17군은 혹시라도 귀찮은 과달카날의 해병대들을 처리할 줄 알았던 이치기 지대의 제1진이 전멸해버리자 해군에게 약속한대로 가와구치 지대를 파견했다.
제35 보병여단장인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이 지휘하는 가와구치 지대는 오카 아키노스케 대좌의 제124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1940년 12월에 중국에서 제18사단의 일부로서 창설된 제35보병여단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 12월 16일에 보르네오 섬에 상륙하여 점령했고, 42년 3월에 세부 섬으로 옮겼다가 4월에 민다나오 섬, 그리고 6월부터는 팔라우 섬에 주둔했다.
팔라우 섬에서 1,000 여명의 보충병을 받은 제35보병여단은 1942년 8월에 라바울 방면으로 투입되기 위하여 트럭에 도착했다.
트럭에서 제35보병여단은 제124연대에 더하여 이치기 지대의 제2진인 제28연대 제2대대, 그리고 제4연대 제2대대와 포병, 공병, 신호, 대전차 부대들을 증원받았다.
따라서, 과달카날에 투입될 당시 가와구치 지대는 약 6,000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42년 8월 24일에 가와구치 지대의 제1진은 수송선 2척(사도마루, 이사카야마루)에 타고 제20구축대 소속 구축함 4척(아사기리, 시라구모, 유기리, 아마기리)의 호위를 받으면서 트럭을 떠났다.
과달카날 도착 예정일은 8월 28일이었다.
도중에 8월 26일, 라바울의 제17군사령부로부터 속력이 느린 수송선은 위험하니 쇼틀랜드로 향하고 1개 대대만 구축함에 실어서 과달카날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에 따라 1개 대대만 4척의 구축함에 옮겨탄 후 수송선 2척은 쇼틀랜드로 향했다.
1개 대대를 실은 구축함 4척은 28일에 라모스 섬에 도착하여 과달카날로의 마지막 항정을 준비했다.



이날 오후에 정찰 중이던 돈틀레스 2대가 일본구축함들을 발견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적함 발견 보고를 받은 헨더슨 비행장에서 11대의 돈틀레스가 즉시 출격하여 오후 6시에 과달카날 북방 110km 지점에서 일본 구축함들을 발견하고 폭격을 시작했다.
함체 중앙에 225kg 폭탄 1발을 얻어맞은 아사기리는 탄약고가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침몰했고, 시라구모도 명중탄 1발을 맞고 해상에 멈추어 버렸다.
유기리도 1발을 맞아서 화재가 발생했으나, 자력으로 트럭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아마기리가 아사기리의 생존자를 구조한 다음, 시라구모를 예인하여 유기리와 함께 트럭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가와구치 지대는 과달카날에 발도 들여놓기 전에 62명을 상실했다.
칵터스 항공대에서는 돈틀레스 1대가 일본구축함의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되었다.



가와구치 지대의 수송을 책임진 다나카 라이조 소장은 쇼틀랜드에서 가와구치 소장과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가와구치 소장은 안전을 위하여 가와구치 지대의 전 병력을 구축함으로 수송하겠다는 다나카 제독의 계획을 거부하고, 대발동기정을 사용하여 과달카날에 상륙하겠다고 말하여 다나카 제독을 놀라게 만들었다.
보르네오 상륙작전에서 대형발동정을 사용하여 재미를 톡톡히 본 가와구치 소장과 그 휘하 참모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대발동기정을 고집했다.
육군병력의 안전한 수송을 위하여 모자라는 구축함들을 쥐어짜서 가와구치 지대를 모두 수송할만한 구축함들을 겨우 확보했던 다나카 제독은 과달카날의 실정을 전혀 모르면서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가와구치 소장의 태도에 화가 잔뜩 났다.
그는 제8함대 사령부에 회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불평을 늘어 놓았고, 제8함대 사령부는 제17군 사령부에 항의했다.
제17군 사령관 하루요시 중장이 가와구치 소장에게 수송문제는 전적으로 해군의 의견을 따르라고 명령했으나, 가와구치 소장은 병력의 일부만이라도 대발동기정으로 상륙시켜 자신과 참모들의 의견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하여 결국 수송문제는 제124연대 제2대대를 대발동기정으로 수송하고, 주력은 모두 구축함을 이용하여 상륙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42년 8월 29일, 제124연대 제1대대 병력 450명을 실은 제11구축대와 이치기지대 제2진 550명을 실은 제24구축대 소속 구축함 5척이 제24구축대장 마라카미 요노스케 대좌의 지휘 하에 자정 무렵에 해병대의 교두보로부터 동쪽으로 35km 떨어진 타이부 곶에 도달하여 1,000 명 전원을 무사히 상륙시켰다.



8월 30일에는 구축함 유다치가 단독으로 가와구치 지대 병력을 싣고 과달카날에 접근했다.
30일 오후에 일본군은 유다치를 지원하기 위하여 헨더슨 비행장으로 1식 육상공격기 18대를 보냈는데 뜻밖의 수확을 거두었다.



30일 아침에 미해군의 고속수송함 콜호운과 리틀, 그리고 소형 수송선인 코파라가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항공보급품을 하역했다.
오후 2시 15분에 공습경보가 울리자 3척의 함정은 양륙을 중단하고 툴라기 항 쪽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12분에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한 일본기들은 목표를 헨더슨 비행장에서 3척의 미군함정으로 바꾸었다.
1식 육상폭격기들은 9대씩 2개의 커다란 V 자를 형성하면서 1대당 2발씩 총 36발의 폭탄을 일제히 투하했다.
구조가 허약한 제1차 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한 고속수송함에게 이정도 피해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콜호운은 순식간에 함체가 비틀어지고, 연료가 유폭하면서 폭탄에 맞은지 2분 만에 함미부터 침몰했다.
51명의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날밤 유다치는 무사히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키고 빠져나갔다.



다음날인 8월 31일에는 일본잠수함 I-26호가 과달카날 420km 해상에서 항공모함 새러토가에 어뢰를 명중시켜 3달 이상 전열에서 탈락시켜 버렸다.



9월 1일에는 정찰을 하던 B-17 1대가 초이셀 섬 북방해상에서 가와구치 지대의 중화기류를 싣고 남하하던 일본해군의 수상기모함 아키츠시마를 발견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지근탄 1발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9월 2일에는 일본군의 1식 육상공격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에 떨어뜨린 폭탄 중 1발이 탄약더미 부근의 돈틀레스를 명중시켜 귀중한 탄약과 항공유를 불태우고 큰 화재를 일으켰다.
칵터스 항공대의 와일드캣이 즉시 반격에 나서 일본기 7대를 격추했고, 대공포가 1대를 추가로 격추했다.
와일드캣의 피해는 전무했다.



9월 5일 새벽에는 아이언바텀사운드에서 미해군과 일본해군 사이에 소규모 해전이 발발하여 야간에는 과달카날 근해의 주인이 일본해군임을 다시한번 증명했다.
9월 4일 낮에 미해군의 고속수송함 리틀과 그레고리는 제1기습대대의 2개 중대를 사보 섬에 상륙시켰다.
사보 섬에서 일본군을 보았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는데, 한나절 동안 사보 섬을 수색했으나 일본군은 없었다.
오후에 리틀과 그레고리는 사보 섬에서 2개 중대를 다시 실어다가 과달카날 섬의 해병대 교두보에 상륙시켰는데 상륙이 끝나자 저녁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리틀과 그레고리는 툴라기 항으로 피신했어야 하나, 이 2척을 지휘하던 리틀의 함장 휴이 하들리 중령은 일단 해가 지면 과달카날 근해의 주인은 일본해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리틀과 그레고리는 툴라기 항으로 향하지 않고, 룽가 곶 북쪽에서 초계활동에 들어갔다.



9월 4일 자정이 가까워지자 일본군의 구축함들로 이루어진 도쿄특급이 도착했다.
병력과 장비를 싣고 온 구축함들이 해병대 교두보의 동쪽에서 양륙하는 호위를 맡았던 구축함 3척(유다치, 하츠유키, 무라구모) 는 해병대 교두보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9월 5일 새벽 1시, 침로를 130도에서 310도로 막 바꾸어 항진하던 리틀의 견시들이 함미 쪽에서 번쩍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일본구축함 3척이 교두보를 포격하는 불빛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잠수함이 부상하여 포격하는 줄 알았으나 잠시 후 리틀의 레이더가 뚜렷한 광점을 포착했다.
리틀의 함장 해들리 중령은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 잠수함이 아니라 구축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일본구축함들이 눈치채기 전에 함의 방향을 바꾸어 기습적인 선제사격을 가하기로 결심하고, 뒤따르던 그레고리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1분 후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과달카날 근해를 초계하던 블랙캣 카탈리나 비행정 1척이 리틀과 거의 동시에 일본구축함의 발사화염을 발견했다.
미군 수상함정이 부근 해상에 있을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블랙캣의 조종사는 표적을 비추기 위하여 조명탄 5발을 투하했다.
이 조명탄들은 리틀과 그레고리에서 불과 800m 떨어진 지점에 투하되어 어둠 속에 숨어서 기습을 가하려던 리틀과 그레고리의 모습을 환하게 비추었다.
일본구축함들은 갑작스런 조명탄 투하에 깜짝 놀랐지만 평소 야전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훈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일본구축함의 승무원들은 놀랄 정도로 빠르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일본구축함은 조명탄 아래에서 리틀과 그레고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단종진을 형성하여 서북쪽으로 진행하면서 서치라이트로 해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리틀과 그레고리의 모습을 확인한 일본구축함들은 즉시 5인치 포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조명탄 투하에 놀라기는 리틀과 그레고리도 마찬가지였고, 불행하게도 미해군은 일본해군보다 반응이 늦었다.
자신들의 주변에 일본구축함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한 이후에야 정신을 차린 리틀과 그레고리도 즉각 반격했지만 안 그래도 화력이 떨어지는 4인치 포인데다가 리틀은 후방포인 4인치 포 1문 밖에 발사할 수 없었다.



리틀을 노린 일본구축함의 첫번째와 두번째 일제사격은 너무 멀었고, 3번째는 너무 가까웠다.
그러나 4번째 일제사격은 함의 후방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1발은 조타기계실을 관통했고, 1발은 4인치 포탑을 명중시켰으며, 1발은 후방 연료탱크를 직격하여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리틀은 곧 화염에 휩싸이며 모든 기능을 잃었으며 함장 해들리 중령은 퇴함명령을 내린 직후 사망했다.



그레고리 또한 탐조등에 붙잡혀 5인치 포탄을 얻어맞았다.
5인치 포탄 1발이 함교에 명중하여 함장 해리 바우어 소령은 중상을 입었다.
즉시 퇴함명령이 내려졌고 수병 2명이 중상을 입은 바우어 함장을 불타는 함교에서 끌어내었으나 부상을 입고 통로에 매달린 수병 1명의 구조요청을 들은 바우어 함장은 자신을 구조하던 2명의 수병에게 자신을 내려놓고 통로에 매달린 저 수병을 먼저 구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통로에 매달린 그 수병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이미 바우어 함장을 구할 시간은 없었다.



순식간에 승리를 거둔 일본구축함들은 이미 모든 기능을 상실한 채 불타고 있는 리틀과 그레고리에게 접근하여 다시 한 번 집중사격을 가한 다음 오전 1시 35분에 신속하게 사라졌다.
잠시 후 리틀과 그레고리는 침몰했다.



날이 밝자 곧 미군 주정들이 몰려들어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리틀에서는 함장 해들리 중령을 포함하여 2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44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레고리에서도 역시 함장 바우어 소령을 포함한 11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26명이 부상을 입었다.
리틀과 그레고리의 침몰은 아직까지 야간에는 과달카날 근해의 지배자가 일본해군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반면 대발동기정을 이용하여 과달카날에 상륙하려던 제124연대장 오카 아키노스케 대좌의 제124연대 제2대대는 반대로 낮에는 과달카날 근해의 지배자가 미군임을 절감해야 했다.
제124연대 제2대대는 수송선 사도마루와 이사카야마마루를 타고 9월 1일에 산타이사벨 섬에 도착하여 30척의 대발동기정에 옮겨타고 과달카날을 향하여 남하했다.
오카 대좌의 선단은 9월 4일 오전에 과달카날 북방 80km 해상에서 미군정찰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곧 헨더슨 비행장에서 P-400전투기와 돈틀레스 11대가 날아와서 폭격을 가하고,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일본군들도 기관총으로 대항했으나 화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결국 견디다 못한 대발동기정들은 공습을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그날 밤에 다시 집결하여 과달카날을 향했다.



다음날인 9월 5일 아침에 대발동기정들이 교두보에서 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과달카날 북해안의 카밈보 해안에 상륙하는 순간 또다시 헨더슨 비행장에서 P-400 전투기들과 돈틀레스들이 날아와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틀간의 공습에서 칵터스항공대는 대발동기정 중 절반인 15척 이상을 격침했다.
이후 오카 대좌는 9월 7일까지 카밈보 해안에서 부하들을 규합했는데 최종적으로 상륙에 성공하여 오카 대좌 휘하에 집결한 병력은 650명에 지나지 않았다.
350여명이 항해나 상륙 도중에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이었다.
게다가 집결한 650명 중에서도 200 명은 부상이 심하여 전투에 참가할 수가 없었으므로 실제로 전투가능 병력은 450명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오카 대좌는 상륙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상실한 셈이었다.



구축함을 사용한 가와구치 지대 주력의 상륙은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9월 7일까지 육군 5,400명, 해군 200명, 대공포 2문, 75mm 야포4문, 연대포 6문, 속사포 14문, 전투식량 2주일 치를 양륙하는데 성공했다.
가와구치 소장은 해병대의 교두보를 3면에서 동시에 공격할 예정이었다.
동쪽에서는 이치기 지대 제2진과 제1진의 잔존병력들이 일루 강 방어선을 공격하고, 서쪽에서는 오카 대좌가 지휘하는 제124연대 제2대대가 공격할 예정이었다.
일본군의 주공은 방어가 허술한 남쪽에서 공격할 3개 대대였다.



미해병대의 병력을 최대 5,000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던 가와구치 소장은 승리를 의심치 않아서 항복조인식에서 입을 예복까지 미리 준비해왔다.
공격예정일은 원래 9월 13일이었으나, 제7해병연대를 실은 미군 수송선단이 과달카날에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증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9월 12일로 하루 앞당겼다.
그러나, 이는 정글행군의 어려움을 간과한 조치로서 결과적으로 일본군에게 큰 무리가 되었다.



9월 6일 교두보 동쪽의 타심보코에 주둔하고 있던 가와구치 지대의 주력 4개 대대는 기지 방어를 위한 300 명의 병력만을 남긴 채 남쪽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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