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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21 01:55
[밀리역사] 중일전쟁과 독일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074  

중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 시작되었고, 그해 8월부터 11월초까지 어떠한 진지한 종전 협상 시도는 없었다. 하지만, 남경 함락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일본은 분쟁을 종결짓기 위한 또다른 노력에 나서게 된다. 이를 위해, 일본은 독일에게 도움을 요청, 중국 주재 독일 대사인 오스카 트라우트만과 일본 주재 독일대사인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이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독일이 중재에 나선 것은, 독일에게 중국은 자신의 주요 무역동반자였고 (특히 군사물자), 그리고 일본이 중국에서 혼란에 빠지기 보다는, 일본이 소련에 위협을 가해주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10월 중순,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은 장개석에게 협상 가능성을 물은 후, 주일대사인 디르크센에게 화해주선을 의뢰했다. 트라우트만 대사는 일본이 중국본토에 병력을 집중하면, 만주의 수비가 허술해지게 되고, 이것이 소련의 준동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소만국경에서 일소간의 분쟁이 발생하게 되면, 일본은 양면작전으로 인해 불리해지게 되고, 반대로 소만국경에서 일본의 힘이 약해지면, 소련이 극동군을 유럽쪽으로 돌리게 되어, 독일이 위협받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우려했던 것이다.


같은 해 10월, 일본정부의 유력인사들은 다음과 같은 협상안을 토론했다. 즉 일본이 중국의 본래의 영토적 행정적 상태를 다소간 인정해 주는 대신, 중국은 법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하고, 내몽고의 친일본 체제를 인정하고, 중국정부와 인민의 모든 반일활동을 종식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중일관계가 일본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조정되는 것이지만, 일중 합동 반공산당 작전은 중국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같은 안이 11월초에 트라우트만에게 비밀리에 전달되었고, 그는 이를 장개석 정권에 전했다. 장은 그의 답변을 한달간 끌었고, 그동안 일본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행사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같은 압력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자, 장은 이 제안을 협상의 원칙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동안, 이같은 협상진행을 몰랐던 일본군은 남경에 대한 공세를 계속해나갔다. 그리고 일본군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즉각 보다 완강한 조건을 주장했고, 이것이 중국의 협상안 수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트라우트만과 일본의 신뢰성을 약화시켰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12월 13일 남경이 일본에게 함락되자, 일본은 이른바 <남경 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측의 보다 가혹한 요구조건과 함께, 일본의 야만적 행동이 협상의 실패를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1938년 1월 15일까지 진행되었다.


결국 트라우트만 중재안의 실패는 일본정책의 변화로 귀결되었다. 강경파 지도자들이 이제 사태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장개석에 대해 분노했다. 1938년 1월 16일, 일본총리 고노에는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즉 국민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장개석과 더이상의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은 중국에서의 군사행동과 함께, 대안적 괴뢰정권 수립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대해, <쇼와사>의 한도 가즈토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중국에 새로운 정권을 세워서 그 정권과 국교를 조정하자는 말입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장개석과 반목하고 있는 왕조명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국민정부를 대신하는 괴뢰정권을 만들고 그 정권과 대화를 나누자는 것이었는데 정말이지 너무나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일본은 결국 전쟁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점점 더 수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다른 경로로 화평을 모색했다고 하나 중국이 더 이상 상대를 해주지 않아 전쟁을 계속해서 벌이게 됩니다."


http://egloos.zum.com/kk1234ang/v/2794336


1911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과 중국간의 협력은 중일전쟁 이전의 중화민국의 산업과 군대 현대화에 도움이 되었다. 1912년에 청을 계승한 중화민국은 군벌과 외세의 침략과 맞서 싸웠다. 1928년 북벌은 명목상으로 중국을 국민당 휘하로 통일시켰지만, 일본제국이 심각한 외세의 위협으로 크게 대두되었다. 중국의 군과 국방산업의 현대화를 원했고, 독일은 안정적인 자원의 공급을 원했기 때문에, 양국은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말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1933년 나치의 집권과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사이의 협력관계가 긴밀했고, 국방산업의 구체적인 개혁은 1936년에 가서야 시작되었지만, 양국의 협력은 중국의 현대화와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국의 저항능력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http://kk1234ang.egloos.com/2794295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의 관계

http://cafe.naver.com/nazzis/12808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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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99 17-05-21 12:24
   
결론은.. 독일은 동부지역의 공격을 유리하게하기 위해 극동지방의 소련군이 독소전에 참전하지 못하도록 일본과 대치하기를 바랬는데.. 배신자 일본은 소련과 불가침 맺고 중국과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집중.

그걸로 소련군은 극동지방의 군대를 독일과의 독소전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 독일은 그로인해 힘든 서부전선 동부전선 양면으로 공격받고 패망. 독일의 패망 후 소련과 미국은 또 일본을 남쪽과 북쪽에서 양면공격으로 패망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