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5년(1592) 4월 14일 오전에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군은 15일에는 동래부를 공략하였다. 동래는 부산진과 가까운 거리였고 부산지역을 관할할 곳이었다. 이 전투에서 당시 동래부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 군민(軍民)이 모두 순절하였다.
당시 경상좌도 군사책임관이었던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울산에서 동래성을 지원하러 왔다가 왜군의 군세가 막강함을 보고는 도망하였고, 부산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의 경상좌수사(水使) 박홍(朴泓)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양산군수 조영규 역시 성 남쪽 4km까지 진출했으나 결국 후퇴했다.
이에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
결국 전투가 시작되어 송상현은 부산진 전투 상황을 보고 받았는지 두꺼운 통나무로 방어책을 만들었으나, 방패가 얇아 조총을 막아주지 못하였다. 조선군이 통나무를 이용한 방어물을 준비했듯이 일본군 역시 성의 공략을 위해 허수아비를 장수처럼 변장시켜 장대 끝에 꽂아 수비군을 유인하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주무기인 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동래성 안에서는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하여 한동안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의 인생문(人生門)을 집중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송상현의 부하 조방장 홍윤관과 김희수, 대송백도 전사하고 그리고 왜군을 보고 도망갔던 양산군수 조영규와 울산군수 이언성이 응원차에 달려와 싸웠으나 조영규는 전사하고 이언성은 포로가 되어 훗날 이덕형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일본의 지휘관은 송상현의 용감함에 감탄하고, 그의 사체를 정성스럽게 메워, 그 무덤에는 "충신(忠臣)" 이라고 쓴 목제의 비석을 세웠다.
왜군은 이미 부산진성 전투에서 강한 저항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여 일시에 동래성을 포위, 공략했으므로 격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동래성은 함락되었으며 부산진처럼 군민은 학살되었다.
그림 하단에는 '명(明)으로 가는 길을 빌리라'는 패목(牌木)을 든 왜군을 향해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팻말을 성밖으로 내던지고 죽음의 결전을 벌이고 있는 동래부 병사들의 모습과
그림 상단 오른쪽에 성안으로 진격하고 있는 한 무리의 왜군들이 그려져 있어 동래성의 함락이 임박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작품의 중앙에는 붉은 조복을 입은 송상현이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앉아 필사로 싸울 것을 맹약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작품의 상단부 왼편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성 뒤쪽으로는 달아나고 있는 이각 등의 무리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중앙에는 동래부의 성곽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아랫부분에는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방어하고 있는 동래부 병사들과 이를 공략하기 위해 반달형으로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왜병들을 그려 넣었다. 성을 공략하고 있는 왜병들의 모습이 보다 크게 그려져 있어 전력의 심한 격차를 말해 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