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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23 00:51
[질문]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잘 싸운 이유가 뭔가요?
 글쓴이 : 하시바
조회 : 2,025  

혐오 및 살상,테러,IS등의 관련된 모든 영상이나(단순 전투영상 포함) 이미지는 절대 금합니다.<br>
통보없이 삭제하며, 재발시 강제조치합니다.

듣기로 석주 이상룡선생이나 우당 이회영선생이 가산을 탕진하다시피하여
군을 양성하긴 했지만 총알이 없어 실탄훈련을 나무총 모형가지고 폼만 잡고 상상하는 식으로 했다는데,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봉오동, 청산리에서 승리한 원인이 뭐라보십니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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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메냐 17-09-23 00:55
   
배고파서 헝그리정신 악에 받쳐서 지형지물을 잘 알아서 일본애들이 얕봐서
     
하시바 17-09-23 15:21
   
지형지물을 좀 더 잘 알았다는건 확실히 도움이되었겠군요.

지속적 반복적으로 칼춤을 추지 못한건 일본인들이 재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독립군 잡는 대신 만주의 조선인들에게 분풀이나 하면서...
유수8 17-09-23 01:44
   
구국을 위한 신념과 의지.... 직업이 아닌 삶 그 자체로 모든것을 건 사람들이니...
돌무더기 17-09-23 02:15
   
절실함의 차이?
없습니다 17-09-23 03:57
   
이론교육만이라도 받은거와 안받은건 매우 큰 차이죠.
     
하시바 17-09-23 15:11
   
그럴까요? 키스나 수영을 글로 배우는 격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단 더 효과가 있을거라 보시는군요.
archwave 17-09-23 06:13
   
옛날엔 한국군도 일년동안 총알 몇 발 못 쐈죠.

지금이야 사고 방지를 위해서란 의미이지만, 그 옛날엔 정말로 탄피, 총알 줏어다 재활용해야 했었고요.

실총, 실탄훈련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모형만으로라도 훈련한 것은 큰 차이.

지금도 그런 훈련 안 받은 게릴라 애들도 정규군과 맞서서 잘(?) 싸우잖아요.
     
하시바 17-09-23 15:14
   
음.. 그렇네요.  생각해보니.

병사들은 사격이 훌륭하면 되고 장교들이 함정을 팔테니, 열악한 환경에서도 좋은 지휘관은 몇 있었다 생각하면 될까요?
영어탈피 17-09-23 07:59
   
봉오동, 청산리 전투 너무 크게 과장된듯
해방후 광복군으로 인정되고 등록된 사람이 300명인가 밖에 안되는걸로 알음...
     
원형 17-09-23 08:54
   
친일매국노가 그만큼 많은거죠
          
워웍 17-09-23 12:16
   
친일매국노보다 국민들 대부분이 조선왕조보다 일본의 지배가 더 살기 편했다고 생각안해보셧나요?  조그만한. 전투를 과장해서 알릴만큼 조선이 썩어있었고 국민의 의식이 어땟는지 어떻게 해야 되풀이 안하는지 가르쳐야죠 머리크면 다 아는 비참한 독립운동사 아닌가요?
               
Silli 17-09-23 13:09
   
와....식민지 옹호주의자가 진짜로 존재하는거였구나;;
               
도나201 17-09-23 14:38
   
당시 사회상을 따지고 보면 일제강점기때.. 좋은 한가지.. 라고 하면 왕조의 멸망이겠죠.
그게 광복이후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햇으니까요...

계급의 말살..............

근데 실제적으로 봤을때..
목적있는 지도계층의 의식수준이 너무도 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끔 회자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3자적인 관점으로 봤을때
그러한 역사관은 역사관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이유가 역사란 것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당시 상황을 보자면..
윤요오호사건이후 조선의 개항을 시작합니다.

당시 지도층의 암울한 시각이 너무도 편협한 사고를 가졌다라는 것이죠.

즉, 문명과 문명의 충돌시.. 전쟁은 역사관계가 상당히 명확하게 돌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서구의 아프리카 점령은 문명충돌이라고 하지 않읍니다.
고립적인 토착세력으로 인식하지. 문명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보통 국가간의 전쟁으로 인식하지 않읍니다.
그부분은 역사의 편주에 영입되는 경우가 상당히 드뭅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과 일본은 분명한 문명으로서 충돌이 확연한 상황이기에
아프리카의 점령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에 따른 국제적인 조약에 준수해야할 의무를 지니게 되는 상황이였읍니다.

후에 고종이 이러한 부분을 상당히 노력한 외교적흔적이 많고..
대표적으로 이준열사의 헤이그회담의 자결은.....
대표적인 사례로 나와 있읍니다.

즉, 당시 우리에게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른 모든 사회전반적인 민족적인 국가성립이라는 상황에서..

약소국에 대한 침략이지..

아프리카의 토착민 섬멸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본은 항상 일제강점기상황을 바로 이 토착민의 섬멸이라는 관점의 역사관을 피력해온것입니다.

즉 국제적인 조약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을려는 책임회피적인 역사관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당시 조선을 국가로 보는 시각이 아닌 그저 토착세력..
중국의 일부 토착민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하는 역사관입니다.
               
붉은깃발 17-09-23 14:59
   
ㅇㅇ 님 조상님이 한글 좀 썻다고 일제한테 고문 당해봐야 그런 소리 못하지
               
아타몬 17-09-23 16:24
   
폐륜벌레 베충이식 시민사관 쩐다!ㅋㅋㄱㅅ
도나201 17-09-23 14:22
   
신흥무관학교이전에는
사실상 근대화적 군대가 없었다고 보는것이 옳음.
일본의 군대의 진입으로 인해서 무장을 시킨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군대의 해산 및 와해를 목적으로 진행시켜왔음.

그후 신흥무관학교에서 지휘자의 교육과 근대화무장 및 전술을 토착시키는데 일조했읍니다.

봉오동전투는 일본이 근대화되지 못한 임오군란의 상태의 무장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사실상 1차대전의 양상인 참호전을 목적으로 전술을 피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우선은 포로 점령지 폭격후 소총부대의 전진을 하는 일종의 로마식군단개념의 전술을 피고 있었읍니다.

근데 봉오동전투에서 점령지의 산악골짜기 형세를 상당히 이용하여 이러한 당시 무장개념을 상당히 탈피하고
유인책과 치고 빠지기를 번목하면서 유인책에 걸려든 적을 포위섬멸하는 소수 집결식의 형태로 전술을 하고 있었죠.. 이부분은 손자병법을 응용한 전략으로 유명합니다.

소수의 병력으로 사단급규모의 적을 막았다라는데서 상당한 효과가 있었고...

특히 일제강점기후 첫번째 승리라는데 사실상 의미를 찾을 수 있읍니다.

그후 몇개 사단으로 구성된 일본군이 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공세에 나오게 됩니다.
이때 다시 유인책으로서 맞서게 됩니다.

군세는 분명 일본이 10배나 되는 병력이지만,
나폴레옹이 패전한 워털루전쟁의 복사판.

얕으막한 능선고지 점령을 위해서 무조건 돌격한 일본의 위세는 한마디로
정신병자같은 무조건적인 돌격으로 인해서

고지만 올라가만 승리한다라는 이상한 신념으로 무조건 낮고 좁아지는 능선에서
화력을 집중해서 상당부분 병력을 손실...

우선은 포격을 시작했으나 방사형으로 퍼지며 대기하던 독립군은
포격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고..

빠른 이동과 포격에 대비한 비트구축으로 인해서 주력화망을 구성하는 물자를 보존할수 있었읍니다.

계속된 유인책 치고 빠지는 소규모게릴라전에서 계속된 전진에 의한 피로누적과 자만심등으로 인해서 ..
특히 추운겨울날씨로 인해서

일본측으로 빠른 결과를 보려한것이 패배의 원인입니다.

당시 일본으로서 봉오동전투에 대한 상당한 자존심을 입은 상황에서
지도부에서 상당한 압박을 진행했던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당시 지도부는 임오군란당시의 무장력으로 생각해서 실제적으로 학살에 가까운 전투라고 생각한 상황이였읍니다.


실제로 독립군은 러시아에서 들여온 상당한 근대적인 물자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였고.

청산리전투를 일본의 처참하리만큼의 패배로 돌아갔읍니다.

실제적으로 당시 전력으로 다시 침공했다고 한다면 또다시 패배할 위험이 상당히 높았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지형지물, 기온 보급로에 대한 연장선등... 실제로 참호전을 펼치기에는 정말로 최악의 상황의 지형이였기 때문입니다.

낮지만 험한 지형. 가는 골짜기 마다 있는 좁아지는 골짜기형 도로
거기에 추운기온, 전략적 식량보급의 문제점등.
이후 일본 침공하지 않고.............................만주사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현재 자꾸 중국의 난징학살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더 처참한것은 보로 이 만주사변입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닌 처사로 전쟁 말살책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후 민족열사들의 대거.. 전향이 이뤄집니다.
특히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전향하는 사항이 이뤄지게 됩니다.

그당시 청산리전투로인한 일본군의 위압감은 실제로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되었다라는 게 만주사변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죠...

그후 이야기는 김좌진장군예하는 만주사변을 보고서 거주지 이전을 한것이 아니라...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서 소비에트연방으로 바뀌는 와중에

이미 러일전쟁에서 패전하고 다시 일본과의 협상에서 독립군을 고립시키는 외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상황.....

물자보급을 해준다라는 이유로 물자보급하러간 곳에서 김좌진장군 예하 많은 독립군들이 여기서 참살당하고
나머지는 이주정책에 희생자가 됩니다.

근데 문제는 여기서 만주사변에 피난간 수많은 이주민의 수가 장난아니게 많았다라는 것이죠.

위의 분 말처럼 과장된 전과아니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아닙니다.
당시 군세로 볼때 만주사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일본의 근대화된 무장의 포획으로 인해서 사실상 감당하지 못할 무장세력으로 성장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이였읍니다.

마치 임진왜란당시 한산대첩후의 일본의 정세를 만들수도 있던 상황이였읍니다.
러시아왕조가 10년만 더 버터줬으면.. 아마도 러시아왕조는 독립군을 통해서 일본을 제압하려 하고
러시아가 동북아에서 상당부분의 영향력을 가질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동북아공영이라는 침략전쟁의 서막은 내려갔겠죠.....

한마디로 역사가 바뀌었던 상황에서 소비에트연방의 배신으로 인해서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던
세계역사의 희생물로 남겨진 아주 뼈아픈 역사입니다.

근데 광복군 등록의 숫자가 없던것은 당시 모두 러시아에서 학살당하고 이주 당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당시 우리에게 너무도 아픈 시련을 남겨준 시간이였읍니다.
마지막희망을 꺼버리는 아주 뼈아픈 사건이였죠...

지금도 만주사변은 난징대학살에 묻혀서 회자되는 수가 적습니다.
역사를 자세히 알려면 우선은 만주사변에 대한 일제의 잔악함과 교활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하시바 17-09-23 15:09
   
도나 201님 상세하고 긴 답변 감사드립니다.

동아게에도 석주 이상룡선생이나 김구주석의 실패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기도 했습니다만, 소련의 배신과 무지로 독립군들이 피해를 입었다는건 생각을 못했습니다.

정말 그들이 보급을 빙자해 유인책을 핀후 우리를 공격했었는지는 확인해 보겠습니다만,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독립군이 또 와해됐다는 견해는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독립군의 실패이유를 군자금 조달의 지연 및 완벽한 계획을 위한 행동의 지연이라고 결론 내렸는데, 소련의 방해가 또 있었군요.
          
archwave 17-09-23 16:07
   
625 의 서막은 그 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좌진 장군은 당시 민족주의자 계열의 거두인 셈인데, 공산주의자에게 암살 당했죠.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말살.

소련이 독립군 와해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맞습니다. 도대체 소련이 왜 그렇게 했을까 ?
좀 더 파고들어보면..

더 이상 얘기하면 정치적 문제가 되니 그만하겠습니다. 굉장히 불편해할 사람들이 널려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