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대만 자체제작 군함 건조 계획이던 PFG-1 충호 계획이 사망한 후, 대만 해군은 광화 1/2호 군함 건조 계획을 1984년에 시작했다. 이 계획은 대만 해군의 중추를 맡을 2세대 군함 확보가 목표였다. 광화 1호는 3천톤급 미사일 구축함이자 하이앤드였고 광화 2호는 1500톤급 순찰선으로 로우급이었다. 이 둘이 하이-로우를 구성한다. 최종적으로 16대 건조가 예상되었다.
광화 1호로 뭘 뽑을지는 1986년 결정났는데 광화 2호는 확실치 않았다. 광화 2호 후보군은 한국, 미국, 아르헨티나, 벨기에, 서독(MEKO 140), 싱가포르 등에서 제출되었다. 1988년 말, 대만 해군은 서독의 MEKO-140, 남한의 HDF-1150과 HDF-2000(나중에 울산급이 되는), 보스퍼 75형 등을 최종 후보군으로 선정했다. 대만은 미국이 이스라엘에게 90년대 중반에 인도한 사르 5급 초계함도 고려했으나 사르 5급은 워낙 비사서 보류하고 대신 사우디의 SAU-5를 백업 플랜으로 정해놨다.
당시 해군 참모총장이었던 유화겸이 모듈식 설계를 채택했던 독일 MEKO-140을 가지고자 했으나 서독이 대만에 대한 무기 수출을 엄격히 금하자 실패했다. 독일의 MEKO 360, MEKO 140 그리고 TR-1700을 라이센스 생산하던 아르헨티나를 포함해서 라이센스 생산한 독일 배를 수출할 수 있었던 나라들조차 서독의 압력으로 대만 수출이 불가능했다. 독일 배 수입이 어렵다고 판단한 대만은 다른 옵션을 탐색했다. 남한의 울산급이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1988년 5월 5일, 새로 해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학백춘이 광화 2호에 울산급을 쓰고자 원했다. 5월 17일에는 학백춘이 165차 군사 회의에서 리덩후이 총통에서 남한이 건조한 울산급이 적절해보인다고 보고했다. 울산급을 제작한 남한은 당시까지만 해도 대만과 외교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울산급 유지를 위한 부품 수입이 쉽다는 이점이 있었다. 게다가 남한에게서 군함을 구입함으로서 한국-대만 간 관계가 돈독해지고 중공과의 관계는 멀어진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리고 대만이 울산급을 선택한다면 거기에 딸려서 올, 미국이 대만에게 수출 금지한 하푼 미사일이나 SLQ-25 어뢰 데코이도 딸려서 올 수도 있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중공군 공군과 잠수함 전력은 강하지 않다고 평가받았으며 대만 공군이 대만 해협의 제공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만 해군이 겪을 해전 시나리오는 1950-60년대에 있었던 해전의 경험에 기초해있었다. 5-60년대 해전에서 대만 해협을 무대로 중공군 소형함과의 교전이 있었다. 울산급은 강한 수상함 화력을 바탕으로 그런 소형 보트를 잡는데 최적화 된 배였다. 거기에다 울산급과 '광화 1호' 올리버 해저드 패리급은 같은 가스 터빈을 사용했다. 유지-보수 측면에서 매우 편리했다.
기술-정치적 측면에서도 울산급은 메리트가 있었다. 1985년 이후로 남한은 대만에게 울산급을 세일즈하기 시작했다. 까놓고 말하면, 당시 대만 해군 관계자들은 울산급을 강하게 지지했다. 1986년. 대만 해군 관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울산급이 제작돤 조선소와 현대 조선소를 방문했었다. 1988년에는 대만 해군 본부 주도로 '기술적 제휴' 측면에서 울산급이 '유일한 옵션'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울산급의 최대 속력이 30노트라는 빠른 속도(속도만큼은 후보군들 중 최고였다)라는 걸 강조했다. 한국을 여러번 방문한 대만 해군 관계자는 한국 정부와 해군, 심지어 조선소까지 울산급을 세일즈하는 것도 있지만 한국과 대만 관계가 돈독함을 이유로 꼽았다.
대만판 울산급
아주 오랫동안, 해외 사람들은 한국이 울산급을 대만에게 판매하려고 했을 때 유럽이나 미국제 장비가 들어간 걸 팔려했다고 믿고 있다. 네덜란드가 만든 SEWACO 전투 시스템, 이탈리가아 만든 썅열 40미리 기관포, 미국 하푼 디함 미사일과 AN / SLQ-25 어뢰 데코이까지. 근데 사실은 다르다.
한국이 대만에게 판매하려고 했던건 그냥 선체만이었다. 빈 깡통 수준이었다. 하지만 대만한테는 그 빈 깡통에 장비를 채워놓을 계획이 있었다. 40미리 보포스, 대만과 미국이 무진 3형 구축함에 장착하려고 합동 개발한 H-930 MCS 모듈 전투 시스템, 87년에 양산 시작한 슝펑-2 대함미사일까지. 그러므로 빈 깡통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장비 또는 선체 설계와 상관없이, 그러한 "대만 버전" 울산급과 한국 버전 울산급은 크게 달랐다. 일단 40미리 보포스가 한국판에는 1개 달리는데 대만판에는 미사일 재머를 빼고 빈자리에 보포스를 1개 더 넣어 2개를 달았다. 원판에는 76미리가 2개 있었는데 1개 빼고 그자리에 슝펑-2 발사관을 설치했다. 울산급 전투 시스템을 대만 중산 과학원이 만든 전자전/사격통제 시스템으로 대체한다. AN / SLQ-25는 장착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가변 심도 소나 장착도 목표 중 하나였다.
정리하자면 대만판 울산급은 원판보다 확장된 초계함으로 한국이 만든 것보다 전투 능력이 더욱 늘어나도록 개조되었다. 만약 다중 심도 소나까지 장착된다면 대만-울산급의 대잠 성능은 일취월장할 것이었다.
88년 6월 1일, 예창통이 해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된다. 예창통은 광화 2호 계획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남자다. 이 사내가 등장한 이후 잘 굴러가던 울산급 도입은 180도 바뀌게된다.
비틀어지다
예창통이 대두되자마자 그는 그는 한국과의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유화겸과 달리 그는 울산급을 공적인 자리에서 디스하고 나섰다. 그는 울산급을 2류, 3류급 카고쉽이라고 비판했다. 6월 27일에 대만 일간지에 한국에서 건조한 울산급이 광화 2호 계획에 채택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이 만든 전함이 대만 전함이 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대만의 민심이 요동쳤다. 여당 야당 가리지 않고 울산급 도입을 비판하고 나섰다. 여론과 학계, 미디어까지 논란에 가세했다. 울산급 구입은 정치적 폭풍으로 떠올랐다.
많은 대만인들이 울산급 구입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한국이 대만의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과 대만은 항상 충돌했다. 건함 사업도 둘이 거의 동시에 시작했다. '왜 한국 배는 되는데 대만 배는 아니되는가?' 이게 대만인들이 가진 생각이었다. 한국 제품을 사는 것은 국민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만인들의 마음 속에서 한국은 가난한 나라라고 인식되어왔다. 한국 제품은 '저급'하다는 인상이 짙었다. 한국의 건함 사업은 오래되지 않았으며 대만하고 별반 다를게 없었다. 울산급 설계도 뒤떨어진 면이 많았다. 오리지널 울산급은 오직 수상함 전투에만 올인한 것으로 대공/대잠 능력은 전무했다. 헬리콥터 뎈이 없다는 것도 비판받았다. 88년 10월 28일, '2세대 군함 건조를 위한 제안' 세미나에서 100명이 넘는 전문가, 대만 국립대학 건함 학부 교수, 업계인 등이 울산급을 비판했다.
'대만은 건함 사업이라는 측면에서 한국보다 발전한 나라다. 배 설계라는 인력적 측면에서도 대만은 남한보다 열등하지 않다. 여러 사항을 고려해 봤을 때 대만 조선소에게 맡기지 않고 남한 손에 맡기는 건 온당치 못하다' 는게 저들의 주장이었다. 11월 15일, 대만 국방장관이 고위급 인사들을 불러 울산급 구매 여부를 가지고 논의했다. 여론이 저런데 입법부가 울산급 구매 예산을 안 통과시켜 줄 것 같다는 판단이 우세했다.
아직도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았고 국민당의 엄정한 통치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을 때 언론, 한계, 국민들까지 단체로 발광하여 국방부와 해군의 체면을 손상시킨 건 이례적이었다.
1988년 10월, 대만 해군본부는 광화 2호에 울산급을 쓴다는 걸 공식 결정했다. 최초 6척은 한국에서 건조하고 남은 10척은 대만 CSSC 조선소가 1척당 2천억 원을 받고 만들기로 합의를 봤다. 그러나 여론이 반대했던데다 2천억 원이라는 가격이 뭘 기준으로 측정되었는지 논란이 발생하면서 지연된다. 당시 대만과 한국은 세부 사항에 합의하지 못했는데 마침 한국 정부가 레짐이 교체되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했던데다 한국 조선소들이 파업 중이었기 때문이다.
계약이 지연된 틈을 타서 88년 12월 대만은 프랑스의 라파예트급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때 한국 조선소들은 파업 중이었다가 한국 경찰에게 힘으로 강제 진압당하고 있었다.
폭파되다
울산급이 혼란한 틈을 타서 프랑스가 갑자기 등장하여 라파예트급을 들이댔다. 라파예트급은 극히 모던한 디자인에 울산급보다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군함이었다. 학백춘은 석연치 않게 울산급에서 라파예트급 구매로 마음을 바꾼다. 89년 6월 말에 프랑스가 라파예트급 견적서를 대만 해군 본부에 제출했고 10월 19일에 대만 해군본부는 공식적으로 광화 2호를 울산급에서 라파예트급으로 바꾸는 결정을 내린다. 현대 중공업은 대만 해군본부에 이게 어찌된 일이냐며 2차례 서신을 보냈지만 대만 해군본부는 지금까지의 계약에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과 대만은 12회가 넘도록 울산급 구매 협상을 벌였지만 증거로 삼을만한 서류에는 그 누구도 사인하지 않았었다. 대만 해군본부가 고용한 대만 변호사는 서면 서류가 없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고 조언했다. 현대중공업은 최초 2척만 한국에서 만들고 남은 14척은 대만에서 만들어도 된다고 최종 제안했지만 이미 대세는 정해진 뒤였다.
어쨌거나 울산급 구매 계약은 완벽히 파토나고 빈 자리를 오늘날의 캉딩급이 채웠다. 1990년 1월, 프랑스는 중공의 압력을 받아 라파예트급 수출을 연기했다. 현대 중공업은 다시 희망을 가지고 울산급을 데리고 와 대만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91년 6월 말 프랑스가 중공의 압력을 이겨내고 대만과의 수출을 재개하자 울산급과 대만과의 인연은 영구적으로 끊어지게 되었다.
대만이 한국에서 제조된 울산급을 사려한다는 사실은 대만의 건함 사업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를 무디게 만들었다. 대만과 한국 양국은 1970년대에 건함 사업을 동시에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건함 서업 초창기 때 한국 정부에서 조선소에 1억 달러를 투입했다. 이자율은 제로였다. 대만의 경우, 한국의 2배인 2억 달러를 조선소에 투입했으나 한국이 무이자로 준 것에 비해서 대만은 산업 대출 금리에 12%의 이자율을 매겼다. 한국이 돈을 때려박아 배 값을 떨어트리려 했다면 대만은 맹목적으로 배 가격을 인하하기 보다 배 품질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갔다.
대만이 남한에게서 울산급을 사려고 결정했을 때, 국제 사회는 대만의 건함 사업은 너무 후진 나머지 한국으로부터 군함을 구입해야 할 상황이다' 라는 생각을 떠올렸으며 대만 조선 산업의 경쟁력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말았다.
번역 내용은 반의 반만 믿어라.
그놈의 국민적 감정, 한국은 대만보다 열등하며 대만이 한국보다 못할 게 뭐라는 반발심이 울산급을 취소시키고 말았다. 울산급 대신 구입한 라파예트급이 대만 해군을 미래가 안 보이는 XX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흡족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