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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1-30 12:58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모든것 (시작과 끝) 이걸로 이만 정리 하시죠.
 글쓴이 : 뽀뽀뽀
조회 : 2,248  

개요

1979년 10.26 사태로 인해 박정희가 사망한 뒤, 같은 해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실권자로 떠올랐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조종·통제했다. 같은 해 4월 14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국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관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를 포함한 정치인, 재야 인사 수 천명을 감금하고 군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아침부터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신군부부마민주항쟁 때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3월에서 5.18 직전까지 전 군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쳤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광역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여전히 높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미국대사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의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왜곡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3][4] 1996년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이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5]

대한민국신군부 및 일부 반공주의 우익 세력 등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혹은 김대중의 사주로 일어난 폭동 내지는 소요사태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6], 일부 조선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발생한 대부분의 유혈사태가 단순한 계엄군-시민간의 충돌이 아니라 북조선조선인민군 특수부대의 공작으로 발생한 계획적인 테러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매우 낮다.[7]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등의 다른 칭호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편집]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김재규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11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했다. 하지만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 2월 전두환은 보안사령부에 지시를 내려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10]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를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 기획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내린 상황이였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과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같은 날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11]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12]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 접수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13]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14]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지상 서울역 주변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집회가 있었으나 5월 15일 경찰의 진압 소식이 전달되면서 스스로 해산했다.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부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같은 날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2600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이날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부대인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편집] 과격진압의 배경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보안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15]

1980년 3월 4일 ~ 3월 6일 수경사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높게 실시됐다. 5월 10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했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 18시 23:00부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다.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다. 이같은 지침은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더욱 더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5. 21.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고 규정했다. 이렇듯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과격진압을 하는 배경이 됐다. [16]

[편집] 전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전남도청 별관

[편집] 전체 개요

[편집] 사건 초기

[편집] 5.17 조치 이전 계엄반대시위

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은 집권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다. 이에 따라 5월 17일 오후 9시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오후 10시경 보안사령부는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날 자정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10] 새벽 2시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전남대학교을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검속했다.[17]

[편집]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18일 오전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항의했다. 항의 중 대학생과 공수부대원 간 충돌 발생했다. 학생들은 구타당했고 공수부대의 구타에 자극받은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광주천 주변 돌을 들어 교문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투석했다.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가톨릭 회관 집결해 시위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 발사하며 해산했다.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이 시내에 투입됐다.[18]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19]

이날 희생된 청각장애인 김경철은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그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20]

[편집] 전개 과정

[편집]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20]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를 방화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17]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21]

[편집]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20]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편집]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화순, 나주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세아자동차으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이 발표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편집]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22]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했다.

[편집]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23]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24][25]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편집]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 구호는 광주 시민들에 의해 많이 불렀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26]

[편집]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발을 사격해 가면서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어졌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편집] 미국 측의 반응

대한민국 측은 5월 18일 0시에 시작된 비상계엄 확대 선포 2시간 전에 갑작스럽게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5월 18일 오전 미국은 서울과 워싱턴에서 계엄령 실시에 대하여 강력하고 맹렬하게 항의했다.[27]

계엄사령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던 적이 없다. 20사단의 경우, 10·26 사건에 뒤따를 혼란을 대비한다는 대한민국 측 요청에 따라, 10월 27일 20사단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넘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27]

미국 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에 방관적이었다. 5월 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주미 대사관으로 부터 미국 국무부로 타전된 전문에서는 광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5월 20일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미국 측의 인식은 막연한 소문에 불과했고, 공수부대의 광주 과잉진압 문제는 서울에서 일어났던 신군부에 의한 정치탄압 사건에 비해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미국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 21일 부터 였다. 이 때는 이미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뤄진 후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었다. 미국은 이후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진압보다는 5월 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있다.[28]

5월 21일 이후 미국은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았는데,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성명서에 포함시킬 항목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 우리는 광주에서의 시민 분쟁(civil strife)에 경악하고 있음(alarmed)
  •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추진할 것을 촉구함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 22일 오전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 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오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군부 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위컴은 이 일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된다.[29]

5월 22일 오후 미국에서 열린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는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이라는 광주 상황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30]

5월 23일 글라이스틴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첫 회동을 가졌다. 글라이스틴은 대한민국 측에 5월 17일 계엄령 확대 정책이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보였다.[31]

[편집] 날짜별 상세 일지

5월 16일 금요일 이전
5월 17일 토요일
  •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 22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 24시 00분: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주요 도시의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32]
5월 18일 일요일
  • 01~0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재야 인사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
  •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함.
  •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 10시 15분: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첫 번째 부상자 발생)
  • 10시 20분: 전남대학교 교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과 외부에서 학교로 출입하던 대학생 간 충돌 발생. 공수부대의 대학생 구타에 자극받은 대학생들 800여 명이 교문에 배치된 7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을 투석,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
  •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 시킴
  • 12시 00분: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장애인인 김경철이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
  •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 20시 00분: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 21시 00분: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
5월 19일 월요일
  • 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청각장애인 김경철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의 희생자).
  •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 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침.
5월 20일 화요일
  • 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전라남도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각 각 61대대,62대대가 1000여발 분배)
  •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
  •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 (이날부터 광주해방구, 해방광주)
  • 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
  •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 04시 30분: 광주KBS 건물 방화.
  •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
  • 10시 00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획득.
  •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
  •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
  •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 14시 00분: 시위대가 나주, 화순 등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 시작.
  •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 16시 00분: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 17시 30분: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 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했다.
  •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 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 10시 15분: 수습위 무기회수반을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 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 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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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밈아 12-01-30 13:12
   
탈북자 증언을 무시하면 안된다고 생각함...탈북자들은 분명하게 당시 이북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무장폭동을 일으킬 특급요원들을 투입했다고 주장하고 또 그렇게 했다고 선전한다고 증언했음. 앞으로 통일이 되면 그에 대한 더 자세한 자료들이 공개될 것임. 5.18이 왜 북한에선 경축일이고 5.18정신을 강조하는지 생각해 볼일임. 또한 5.18관련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이라고 공개한 사진들이 대부분 조작이고 특히 대법원까지간 사건중에는 무장공비 사살한 장면을 광주사태사진이라고 공개한 사건까지 있었음. 더우기 80년대 냉전이 극에 달한시절 한국의 대학가는 순수한 민주화의 열망보다는 위수김동으로 상징되는 주사파계열이 주도하고 있었음. 그들에게도 5.18은 광주꼬뮨이요. 일종의 성소였음.
     
스펜타 12-01-30 13:16
   
ㅡ_ ㅡ  탈북자 증언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함
그사람들이 북한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고 그리고 당시 북한내에서 한국 내
극비정보를 다루고 있는 위치에 있었는가에대한 증거도 없고

그런 극비정보를 다룰 정도면,  공안당국에 관계되어 있거나 북한의 해외공작을 담당하는 호위총국
에 있어야 하는데  그 정도 위치면 북한내에서도 엘리트중의 엘리트

탈북자의 대부북이 함경북도 등 압록강 두만강 인근지역 주민들인데,
북한 내에서도 북한 이북지역 주민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당성과 출생뿌리가 인증되지 못하면 고위계층에 올라가지 못함
          
스펜타 12-01-30 13:20
   
그리고 탈북자의 대부분이 현재 사회계층의 하부에 있는데-

언론같지도 않은 언론에게 돈 받고 거짖증거를 내뱉을수도 있음-

탈북자의 그 증거가 신뢰성이 있느냐 없느냐 따져야 할듯.

말그대로  우리 군의 중령 최소한 소령- 5급이상의 고위 공무원의 해당하는 계층의 증언 들
중좌-대좌 또는 노동당 고위 당원 정도는 되야

농부나 일반 노동자들의 탈북자들의 증언은 ...
               
맘마밈아 12-01-30 13:41
   
극비 정보가 아니고 그냥 공공연하게 사람들 모아놓고 비디오 틀어주고 교육하고 그런답니다. 대외비가 아니예요. 그냥 북한에서는 상식...
                    
스펜타 12-01-30 13:45
   
푸핫!!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터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뽀뽀뽀 12-01-30 13:19
   
맘마밈아//제가 위키백과에서 전문을 가져오지를 못했네요...
위키백과가서 읽어보시면 그에대한 반박도 충분히 나옵니다.
머 대충 결론을 내자면, 그당시 전두환과 신군부에서 과격진압과
계엄령의 명분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전혀 근거없는 일본 관계자와
미국의 관계자의 발언까지 거짓으로 인용하여 만든 허구입니다.

위 짧게나마 제가 드린말씀을 믿던지 믿지 않던지 님의 자유지만,
이후 모든 조사에서 관련 사항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것입니다.

이렇게 저에게 묻지마시고, 위키백과에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우익인사나 또는 음모론자분들이 반박하거나 기타 의문가지는 사항도
그에대한 답변이나 반박자료가 많이 있네요...

직접 찾아가셔서 보시길 바랍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좀 충격이네요...

아직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슨 고정간첩이나 또는 불순분자들이 국가의
전복을 목표로 일으킨 폭동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래서 중/고등학교때 역사교육을 더욱 더 강력하고 확실히 할 필요성이 있죠.
스펜타 12-01-30 13:12
   
덧붙여  미국은 당시 지미카터대통령 민주당 행정부 시절이었고, 전세계적인 민주주의 확대와 평화를 위하여 군축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죠. 지미카터 대통령 시절 주한미군이 대대적으로 철수 하였고, 박정희 정부는 이에 심각한
안보위협을 느겼죠. 알다시피 이 과정에서 핵개발이... 중략

지미카터 행정부의 제 1 외교목표는 전세계의 민주주의 확대였고, 지미카터의 시선으로는 박정희는 독재자일 뿐이었죠.당연히 당시 한국과 미국의 외교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구요

 당시 한국에 영향력을 끼치던 미국의 조직은 미국무성 산하의 글라이스틴 주미대사와 한미연합사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 그리고 CIA 동아시아 지부 였구요

 전두환의 졸개들의 쿠데타는 당연히 미국을 빡치게 했죠, 재선을 노리던 지미카터는 불황이던 당시 미경제로인해
지지율이 상당히 낮았는데, 여기서 자신의 제1 외교적 목표인 전세계의 민주주의 확대가 미국의 주요 군사 거점이자 외교적 중요국가인 한국에서 독재 쿠데타가 발생했다?  당근 지미카터 빡치고 국무성과 한미연합사 또한
자기들의 허가 없이 군을 움직인 전두환에게 엄청 빡쳤죠

 이후 레이건 행정부 시절이런 빡치게 한 행동들에 대한 보상으로 전두환은 미사일 협정- 핵개발 포기 등의
카드를 미국에게 줄 수 밖에 없었죠. ㅅ1발
     
맘마밈아 12-01-30 13:17
   
경제와 민주화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국민소득 5000불이 넘어야 민주화가 가능하고 만불이상가야 공고화됩니다. 배고픈 민주화는 불가능하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가 정당화되는 부분이고요.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못이룬 유신과업을 완수하셨다고 봐야합니다. 두분 대통령이 민주화의 토대를 건설한 것입니다. 국민소득 5천불이하의 국가는 대부분 군정이거나 쿠테타가 빈발합니다. 그런데 그 독재자들이 대부분 부패해서 해외자본등과 결탁하여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데 우리나라의 독재자들은 국가경제발전에 공헌한 측면이 큽니다.
          
스펜타 12-01-30 13:25
   
경제성과나 그런부분에서는 공로를 인정할 수 밖에 없음.

하지만 내 생각은 독재정부가 아니였더라도  경제개발은 가능했다고 생각함

일본이 2차대전 후에 경제개발과정에서 독재로 개발했음?

민주적인 투표로 선출된 자민당 정부에 의해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개발됬음

독재가 아니였더라도, 당시 한국사회였다면 전두환 독재정부는 필요없었을 수도

있었음
          
맘마밈아 12-01-30 13:29
   
일본은 사실상 독재국가나 다름없습니다. 군부의 실세들이 정치가나 기업가로 전향하죠. 일본정치는 그만큼 특수성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일본은 이미 선진국이었던 나라죠. 인재가 풍부했습니다. 사회질서도 시민의식도 이미확립된 나라이고..일본과 한국을 수평선에 놓아선 곤란하죠. 일본은 독일과 비교되어야 하고 한국은 신생 독립국이었던 아프라카나 남미 국가들과 비교해야 됩니다.
               
스펜타 12-01-30 13:39
   
그건 당연한 거임- 2차대전에 항모 생산해서 미국하고 한판 뜬 이미 선진국으로 인정받은 일본이란 국가는
이미 체계화된 국가였음.  인정함

하지만 독재를 통해 경제개발을 이룰 수 있다는 공식 또한 없음

아프리카나 남미 독재국가들이 현재 한국과 같이 선진국에 올랐음?


즉 당시 결과는 아무도 몰랐다는 거임- 최소한 나라가 거지로 살 지언정
전 국민적인 염원을 무뽑듯 뽑아버린 전두환 독재정권이였으며,

15년이상 한국의 민주화를 늦춰버린 퇴행적 사건이고

엄밀히 말해 당시 경제발전구도는 이미 제 궤도에 안착해서 독재가 아니였더라도 더
발전했을거임. 당시 삼저호황 때문에 전두환이 경제개발했다고 인정받는 요인임
즉 독재가 경제를 발전시킨것이 아니라 국내외적 외부적 경제환경 덕분에
고성장을 했던거라 생각함
               
맘마밈아 12-01-30 13:43
   
독재나 세계경제호황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 아닙니다. 비슷하게 출발했던 필리핀과 아르헨티나는 몰락했는데 한국은 성공했죠.
                    
스펜타 12-01-30 13:47
   
그러니까 아무도 모른다는 거임  독재->경제개발 ? 이 공식은 없다

즉 전두환이 정권탈환 안하고 얌전히 군 장성으로 남아있었어도

당시의 전국민적인 민주정부의 탄생염원을  그냥 쓰레기로 만든 전두환 개갞끼
     
맘마밈아 12-01-30 13:18
   
미사일이나 핵개발은 전두환이 아니더라도 미국이 못하게 막습니다. 쿠테타가 일어난 적이 없는 일본조차도 공격용 미사일은 보유가 금지되며 핵또한 공식적 보유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핵개발시도로 인해 시해되신 것입니다.
          
스펜타 12-01-30 13:23
   
하지만 당시 미사일 협정에 싸인하거나 핵개발 제한과 같은 오피셜한 협정에 한국은 가입한적 없었음

  인도나 이스라엘이 죽어도 그거에 가입하지 않는거 보면, 실제로 개발도 했고

핵개발 여부가 아니라 이건 싹부터 확 스스로 뽑아버린 경우임
          
맘마밈아 12-01-30 13:28
   
미국에 경제 국방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이 인도나 이스라엘같이 할수 있다고 보세요. 그거 너무 순진한거 아닙니까. 핵개발하려면 북한같이 될거 각오해야 합니다.
               
스펜타 12-01-30 13:33
   
당시 이스라엘 또한 미국의 경제원조가 GDP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인도 물론 핵개발 이후 미국의 경제재제로 괴멸적 타격을 입었지만 지금은?

내 생각은 핵개발이나 미사일협정같은 오피셜한 협정이 없었을 당시에는
자주국방이나 자주외교라는 상징성이라도 내세울 수 있었지만

MTCR- 핵개발 중지 선언 등은 자주라는 상징성도 내다버리는 결과가 됬다고 생각함-

핵개발이나 미사일개발 등의 개발로 미국에게 상대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외교적카드를

제발로 버렸다는 거임- 이후 정확히 29년동안 한국 국방부는 미국에게 미사일 협정이라도
완화해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는거임
말그대로 생색이라도 낼 수 있었던게  생색도 못내는 상황이 된거임
               
맘마밈아 12-01-30 13:44
   
이스라엘은 조금 다른것이 이스라엘은 미국의 유태인들의 정신적 고향입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을 지배하는건 유태인들이고요...
                    
스펜타 12-01-30 13:50
   
솔직히 말해 유태인들이 미 정계와 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지

막 음모론처럼 미국은 암중에서 지배한다????? ㅡ,.ㅡ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열나게 깡패짓할때 미 국무성이 그거 막으려고
이스라엘을 열라 협박한 적이 많앗죠.

미국이 이스라엘 첨단무기에 대한 금수조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국방산업이 발전할 수 밖에 없었구요 ㅡㅡ
                         
스펜타 12-01-30 13:51
   
-----------------------------저는 이제 요기서 너무 확대되네요 ㅠ  맘마미아님 감사요~
뽀뽀뽀 12-01-30 13:12
   
위글이 길지만 한 10~20분 내외면 충분히 정독이 가능하니 읽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지 않다면 위키백과사전으로 검색해보시면 조금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용량의 한계를 느껴서 중간중간 부분만 인용하였습니다.

중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거나 북한이나 고정간첩 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주를 받은
국가 전복을 목표로한 반란이라고 하는분들은 참으로....안타깝네요.

위 사건을 보면 왜 언론이 중요한지 잘 알수가 있습니다.

또한 사담이지만, 이명박정부가 왜 KBS랑 MBC, YTN등의 핵심적인 인물(사장이나 편집부장..등)을
그렇게 애를쓰고 자기사람으로 바꿀려는지, 또 그런 방송사 기자들과 언론인들이 왜그렇게 반발하고
저항하는지, 그런 언론사를 국가의 수장이 장악하게 되면 어떻게 자기 입맛대로 국민을 현혹하게
할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도 함게 느낄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꼭 방송매체만으로 국민들이 현혹되는 시대는 아닙니다.

인터넷을 포함한 수많은 정보처가 있는 새로운 시대지만, 아직도 방송매체는 가장큰 정보의 습득요소이자
중요한 매개체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뽀뽀뽀 12-01-30 13:46
   
에겅....위에분들...
왜 갑자기 미사일 사정거리 협정이나 한반도 비핵화 관련 주제로 이동을 ㅠㅠ
그냥 이글은 아래에서 제가 봐온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주제로만 했으면 합니다.
백발도사 12-01-30 16:15
   
전남매일신문사 사회부차장<74-81>회고록( 글쓴이:논설위원/김동문, 전남 나주출생)

[시사코리아저널/편집국]<편집자> 이 원고는 본지 논설위원이 "광주사태의 진실을 재조명한다"는 제목글의 체험수기를 출간하는 초고 원고로서 출판이후 판매 수익금을 전액 본지를 통해 동작동 현충원 제28묘역에 묻힌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전사한 23명의 공수특전단 장병들의 유족을 위한 성금으로 바침니다

머릿글에 부쳐

옛일을 밝혀서 미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진실 되게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에 옛 선현들도 사관(史觀)의 지조를 가장 높히 숭배하여 왔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집권세력과 위정자들에 의해 불편한 대상이 되어 왔고 이에 따른 왜곡과 조작이 이뤄지고 있다.

필자는 당대의 제반사항을 왜곡 없이 기록 보존 하는 의미로 "광주사태의 진실"을 재조명하는 체험수기를 내놓는다.

흔히 일반인은 광주민주화 운동을 일컬어 5.18사태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나는 현재의 우리들이 이 일의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정확한 평가와 함께 이에 관한 성격을 규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 하면 5.18에 대한 국민각자의 생각이 제각각 이기 때문이며 이일에 희생을 당한 피해 당사자들과 일부 광주시민들은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자발적인 민주항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편으로 "폭동"으로 단정 지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런 상반된 주장이 있을까?

 이는 당시 비상계엄령 하에 대다수 국민들이 언론이나 뉴스미디어가 보도통제를 당하는 사회 현상에서 광주지역 자체가 봉쇄되어 있었기에 흘러 다니는 소문과 떠도는 유언비어들을 접하고 정부가 발표하는 내용밖에 알 수가 없었기에 생긴 오해일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당시에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와 소문을 믿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흔히들 '5.18사태' 또는 '광주사태'라고 하며 '민주화항쟁'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라 본다.

당시 광주현지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기 전, 시작은 순수하게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집회로 시작이 되었다고 하드라도 그 과정에서 불거진 여러 가지 상황이 우리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점이 있다.

무엇 때문에 예비군과 경찰서 그리고 군부대의 무기고와 심지어 방위산업체까지 털어 무장을 하고 군과 대치하여 총격전을 벌였으며,

미전향 장기수들이 수감되어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기도 하였을까? 물론 광주시민들은 이에 대해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가족과 자식들이 희생을 당하는데 이를 보고만 있겠느냐?' ...

그러나 무장항거(이를 봉기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를 하지 않고 끝까지 비무장으로 대처하였다면 지금과 같은 서로 다른 주장과 인식이 있을 수 있을까?

지난 역사에서 나타나듯 일제 식민치하의 "3.1 만세운동"과 "마산의 3.15의거" 그리고 "4.19 혁명"같은 사건은 희생을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일제와 독재에 항거한 일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에 관해 "민족과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한 의거"였다는데 반론을 제기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닐까?

희생만 해도 그렇다. 만약 비무장으로 순수한 집회 이었다면 피해가 사망자만 3.000여명(관련 당사자들의 주장)이라는 얘기와는 규모가 많은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부발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지금도 '희생자를 암매장하였다' 하여 아직도 이를 찾기 위한 시도가 계속 되고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번도 이에 관해 소문만 난무하지 증명이 되지 못했다.

이는 무엇을 시사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사건에 관련해 시행된 보상만 해도 그렇다. 자고이래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운동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순수한 정신적인 보상이었지 본인들이 나서서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한 일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다.

그런데 금전적인 보상은 물론이요 '민주화 유공자'라 하여 '국가유공자'의 예우를 받고 있질 않는가?

이를 두고 대다수 국민들이 '옥상옥'과 같다하여 납득을 못하며, 그들이 순수하다 주장하는 "민주항쟁"이라는 주장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 인하여 과거 우리 민족의 어두운 역사인 "여순 반란사건"과 "4.3 제주폭동"의 관련자와 심지어 "동의대사건" "전교련"까지 '민주화 유공자'로 자처하며 보상을 요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럼 근세에 이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며 싸운 '한국전쟁'과 타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역만리 월남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들은 무언가?

이들은 그야말로 나라를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희생양들 아닌가? 이들도 명실 공히 이 나라의 민주화유공자 아닌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 물음에 참전용사였던 필자는 “내가 겪은 5.18광주사태”의 체험수기를 한권의 책에 담아 후세에 광주사태냐 민주화운동이냐의 정의는 독자의 몴으로 맡긴다.

30년 동안 묻어 두었던 빛바랜 "광주사태 체험수기"를 펴면서

 1980년 5.18일 전라남도 도청 소재지인 광주에서 발생한 이른바 광주사태의 현장을 필자가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던 취재수첩을 모아 "내가 겪은 광주사태의 현장“의 제목글로 내란과 민주화운동으로 뒤엉킨 왜곡 조작 된 광주사태의 전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여기 남김니다.

기자가 본 5.18 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나는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동에 자리잡은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에서 기동취재 팀장으로 일선 시군의 현장 기동 취재를 맡고 있었다

편집국내 2평 남짓한 통신실 담당기자가 “긴급뉴스! 긴급속보!”를 외치며 서울발 합동통신이 전송한 원고를 편집부 데스크에 건네준다.

15일 서울역 대규모 집회에서 대학생들이 탈취한 버스로 전경들을 뒤에서 들이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서울의 대학가 곳곳에서는 박 대통령의 서거로 합동 수사본부장인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담긴 대자보가 대학가 구내에 나붙었다는 소식이다.

붉은 매직팬으로 작성한 이 짤막한 “군부 쿠데타와 학살명령”의 유언비어가 서울역 집회에서 사상 초유의 십만 명이 넘는 학생 시위대를 형성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서울의 대학가에서 시작된 이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광주의 대학가로 옮겨지고 괴 소문은 점점 증폭 되면서 광주시민들에게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광주 시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광주시가지 전역으로 번졌다.

5월 2일 서울대 운동권에서 살포한 대자보는 "유신잔당 타도에 총력을! ‘학우여 유신잔당타도에 우리의 모든 력량을 총집결하라”는 선동구호의 북한말이 새겨진 대자보가 대학가에 붙게 되면서 부터 폭력시위는 시작 되었다.

 1980년 5월18일 일요일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광주 금남로 거리에 오색 찬란한 연등사이로 대학생시위대가 “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신현확은 물러나라!”“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울에서 날라 온 대자보(大字報)내용을 광주시민들에게선동하고 있었다.

하얀 대형종이에 검정색 매직 글씨로 광주시민에게 “결사투쟁을 하자”는 글귀가 적혀 있고 특히 강조 되는 부분에는 붉은 매직 글씨로 “미 7함대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미국의 항공모함의 병력이 광주시민의 민주화운동을 지원 하려고 출동했다는 것이며 전국의 도시에서 무장시민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는 선동을 시작했을까?

이 대자보에는 신현확 국무총리를 '신가“로 최규하 대통령을 '최가'라 부르는 북한말로 쓰여진 흑색선전의 허위사실들이 서울대에 이어 보름만에 광주의 금남로 거리를 요란스럽게 울렸다.

당시 대학가와 야당 정치권에서는 1980년 봄을 가리켜 “민주화의 봄”이라고 불렀다. 

1980년 5월18일 밤 8시 평화로운 횃불시위로 조선대 광장에 집결 한 시위대는“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는 구호를 외치고 해산된 이후 하룻밤 사이(19일)계엄군이 구성되기도 전에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사람 씨를 말리러 몰려온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들이 나돌더니 자칭 시민군들은 19일 새벽부터 군부대와 경찰파출소와 지서를 습격, 0명의 군경을 피살하고 무기를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19일 오전부터 본격적으로 유포된 유언비어는 금남로에 계엄군의 장갑차가 들이닥쳐 시민들을 마구 깔아 뭉게고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 여고생 젖가슴을 잘랐고 여대생을 성폭행했고 임산부의 배를 대검으로 갈랐다는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잔인한 루머성 유언비어들이 시내 전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하에 광주사태가 최악의 사태로 급변하자 18일 9시 긴급 소집된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사태수습을 위한 계엄군이 구성되어 광주에 투입되었고 18일 9시 이후에 구성된 계엄군과 당시 광주 상무지구에 주둔해있던 보병학교 병력간에 서로 상대방을 폭도군으로 오인해서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진압 부대였던 광주향토사단과 32보병사단의 진압 책임자는 31사단장이었던 광주출신 정웅 육군 소장이었다(평민당국회의원역임)

그런데도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사람 씨를 말리러 온다”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유포되어 전국으로 번졌을까? <계속>
 
글쓴이:논설위원/김동문

44년, 전남 나주 출생
목포 호남매일신문사 기자 <68-70>
전남매일신문사 사회부차장<74-81>
(사)월남참전전우회 전라남도회장<89-91>
e조은뉴스 - 주필. <05-09 >
kjb방송(한국장애인신문)-주필
<시사코리아저널, 뉴스타운>-논설위원
5.18 실체 규명위원회-고문. 연구위원
백발도사 12-01-30 16:22
   
김동문 논설위원, kdm0003@never.com 

진실공개를 왜 두려워 하는가?
광주와 광주시민은 5.18 진상조사에 앞장서야 한다
 

1953년 7월 6.25 전쟁을 끝내는 정전협정이 있었다. 이후 북한은 지금까지 무려 43만건이 넘는 정전협정 위반을 했다. 북한은 단 한시도 적화야욕을 버리지 못했고, 인민보다는 선군사상이라는 미명아래 군사력증강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지금의 북한의 모습은 몰락한 사회주의가 아닌 처참한 몰골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3월 26일의 천안함 격침은 그들의 침략야욕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오늘(5월 18일)은 5.18이 일어난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광주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전야제를 비롯해 기념식이 한창 열리고 있다. 5.18에 대해 폭동이냐? 민주화운동이냐?는 아직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되지 못하고 있다. 특정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80% 이상의 국민들이 의혹을 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 이곳의 집회는 희생자나 유족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건의 원인과 실체를 재조명해서 광주의 희생자와 유족의 진정한 명예를 찾고자 하는 것임을 밝혀 둔다.

우리는 1980년 5월 18일에 있었던 광주의 비극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그날을 기념해서 '5.18 광주무장전사와 영웅을 위한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이 남한보다 더 성대한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 - 둘 중에 한곳은 거짓된 기념식을 하고 있고, 거짓이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1995년 5.18특별법으로 '광주폭동'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5.18 관련 당사자들이 함구하고 있는 점들을 들어 정치적인 고려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특정지역을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광주 5.18에 대해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또한 2002년 12월 20일에 있었던 탈북군인들의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의 '북한군 개입'에 대한 양심선언 기자회견으로 그동안의 설로만 알았던 북한군 특수부대의 5.18 배후조종을 확인하는 증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러나, 광주와 광주시민들은 당시 광주 5.18에 북한 특수부대(복면부대)의 개입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남고 싶었는데, 북한군이 배후조종했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이 광주와 희생자들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광주와 광주시민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5.18 재조명은 결코 당시 피해자나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좌익종북세력들이 북한의 유언비어를 내 뱉고 있는 모습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좌익종북 추종자들은 '수천명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사망자는 193명이며, 신원미상자 13명을 포함해서 등뒤에 카빈총상에 의한 사망자 수가 절반이 넘는다는 점이다.(진압군은 M16소총지참)

난무하는 유언비어, 정체불명의 선동자들, 전남도청의 엄청난 양의 TNT(폭발물)설치, 숙련된 장갑차를 운전하는 시민군, 6차례의 광주교도소 습격, 광주해방구 선포, 무등갱생원의 36인조 무장소, 평양의 광주사태 실황중계, 5.18유공자 윤기권의 월북, 간첩 이창룡의 침투사건, 도청광장에 리어카에 실린 시체, 홀연히 사라진 연고대생 600명, 김일성의 비밀교시 등.....이렇게 5.18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의혹을 안고 있는 것이다.

5.18의 진상에 대한 사실관계는 재조명 되어야 한다. 북한 특수부대가 배후조종을 했다고 해서 광주나 광주시민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김대중과 좌익세력들이 김일성, 김정일과 합작으로 일으킨 국가 전복을 위한 폭동이라고 해서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타 지역에서 의구심을 가진 사실이 명예가 훼손된 것이지, 북한 특수부대의 배후조종에 속았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5.18 재조명을 통해 그동안 북한과 좌익종북세력들의 유언비어로 갈갈이 찢어진 대한민국의 지역감정을 치료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이고, 진정한 광주와 광주시민의 명예를 되찾는 길이 될 것이다.

5.18 진상재조사는 광주와 광주시민을 위한 것이다. 그동안 난립된 5.18관련 단체는 피해자나 유가족과는 상관도 없는 자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고, 진상재조사가 광주와 광주시민들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거짓선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광주와 광주시민이 나서서 5.18 진상재조사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광주와 광주시민의 명예를 더 높이는 길이 될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광주와 희생자 유족회는 5.18진상재조사에 앞장서야 한다.

2. 정부는 5.18진상재조사를 통해서 지역간의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

3. 5.18진상재조사에 관련 당사자는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스펜타 12-01-30 16:28
   
전남매일일보사가 공신력을 가진 신문사가 아닐뿐더러

저 5.18실체규명위원회란 곳이  완전  오른쪽으로?  아니지 저런건 오른쪽도 아니지
뉴라이트계열 역사왜곡에 앞장서는 곳이던데

이런 곳을 떡하니 올려놓다니 ....
     
스펜타 12-01-30 16:31
   
5.18 실체 규명 위원회 대표 이화수- 한나라당 국회위원

나라사랑실천위원회 위원 -

서석구 - 극우 변호사 ? 이아이도 극우도 아니고 뉴라이트지

지금 이딴걸 올려놓은 겁니까?
          
스펜타 12-01-30 16:32
   
백발도사님이 역사를 어디서 배워서 왔나 보니

뉴라이트 애들하테 배우셨구만 -_ -;; 

역사왜곡하는 애들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 주장하는 곳 !
     
백발도사 12-01-30 16:56
   
자신의 구미에 맞는 글이면 공신력이 있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글이면 공신력이 없는가?

5.18이 정녕 온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려면 한 점 의혹없이 진상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게 민주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며 독재에 항거하다 숨진 사람의 고귀한
정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이름도 성도 출신도 모르는 시체를 파묻어 두고 열사라 칭하며 매년 꽃다발을 갖다
바치는 것도 우스운 꼴 아니요?
          
스펜타 12-01-30 17:47
   
지나가는 사람하테 물어서  저 전남매일신보가 공신력이 있어보이오? 하고
물으면  예 있습니다~  라고 누가 답하나요?

저기 뉴라이트 회원이자 한나라당 의원인 이화수 대표가
5.18 규명 자료를 내놨오~ 하면

지나가는 사람 누가 믿겠오?


자기 취향에 취사선택한 자료가져와서  자기 구미 타령하는게 웃기지도 않오?
               
스펜타 12-01-30 17:48
   
그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열사가 민주화를 이룬거요-

그럼 대한민국을 지킨 이름도 모르는 6.25참전용사묘에 매년 꽃다발 바치는 일도 우스운 꼴이겠군 -
스펜타 12-01-30 17:53
   
적어도 저 위의 자료는 육하원칙에 의한 사실적 사건들만 나열되 있는 중립적 자료구만 ㅡ_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