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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1-30 13:23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모든것 (시작과 끝) 제 2탄 //마지막입니다.
 글쓴이 : 뽀뽀뽀
조회 : 4,188  

피해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29주년을 맞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광주광역시가 발표한 통계는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33][34] 검찰은 19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5.18의 핵심적인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지난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 당시 공수부대원이 비무장민간인을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35]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됐다.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36]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0년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37]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38]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xx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xx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다.[39]

[편집] 연행자 고문 피해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 연행 또는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박탈, 복종강요, 지각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40]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폭행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된 광주 시민은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계엄군은“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들을 자행했다.[41]

연행자들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미 짜인 각본에 따라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42]

정동년 5.18 30주년 기념행사위원장∙고 홍남순 변호사∙고 조아라 광주 YWCA 회장∙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송기숙 전 전남대교수 등의 민주인사들은 상무대 지하 조사실에서 보안대 조사관들의 조사를 받았다.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43]

[편집]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재고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44]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44]

광주항쟁은 이후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생한 각종 반미시위 및 반미주의 확산에도 일부 기여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에 의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약칭 부미방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45][46]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구호 중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라는 조항이 제1항 서두에 삽입돼 있다.[45][46]

[편집] 의의 및 교훈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므로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가열찬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를 알게 해 주어 통일운동의 계기가 됐다. 미국은 해방 후 줄곧 사실상의 군사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실히 입증됨으로써, 미국이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면서 처음으로 반미 운동이 싹트게 됐고, 자주·통일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되고,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47]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국가의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신문 홍콩 특파원은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퇴진의 배경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다고 평가하였다.[48]

[편집] 사건 당시 언론에 의한 왜곡

신군부는 보안사를 중심으로 ‘언론반’을 구성해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신문·방송·라디오·잡지 등 모든 매체에 대한 보도검열해 100만 건 이상을 조종 감독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으로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함께 보안사에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하면서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조치를 내리면서 보도검열 위반 시 폐간 조치하겠다고 위협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동아일보, 동아방송, 중앙일보 등은 5월 20일에 경향신문, 문화방송, 합동통신 등의 양심적 언론인들은 사실 보도를 요청했다. 5월 21일에 조선일보는 5월 22일에 5.18 사실 보도, 보도 검열 전면 철폐를 요구하면서 제작 거부를 시작했다.[49] 하지만 신군부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에 따라 ‘광주소요사태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회복 유지를 위해 중진언론인을 초청, 현지실태를 취재토록 유도하고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유도’한다는 명분과 목적 아래,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합계 49명을 2처 2과장 중령 이용린이 인솔해 1980년 5월 24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6시 40분까지 광주 일원 소요 현장을 취재하도록 했고,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각 16명 합계 64명을 4일에 걸쳐 호텔에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49]

5.18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을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미국이 5.18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의 지나친 반응이 비극의 직접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관리들은 그와는 반대로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광주의 라디오 방송이 미국 측이 특전사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고 보도하고 있음을 알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역정보 행위를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고, 이를 정식으로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취소하지 않았다. 또한 보안사의 조종을 받는 대한민국 언론은 미국 관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전두환을 승인했다”라는 보도를 쏟아내었다. 이러한 신군부에 의한 왜곡 보도는 대한민국 내 반미 감정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50]

[편집] 정치인들의 평가

김대중은 5.18 민주화 운동의 교훈을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정신, 맨손으로 잔혹한 총칼에 맞섰던 비폭력 정신, 공권력의 공백속에서도 질서의식을 가지고 치안을 지켰던 시민정신, 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화정신”이라고 규정하고 “광주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믿고 숭상하는 전 세계인의 자랑이며 인간승리의 대서사시”라고 평가했다.[51][52]

노무현은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라고 연설하며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높이 평가했다.[53]

김영삼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라고 하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며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했다.[54]

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했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55]

2008년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제28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참가해 기념사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8년 전 오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 영령들 앞에 온 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그 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시는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도 충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 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사회를 이루는 데 큰 초석이 됐습니다.”라고 평가했다.[56]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이정희는 “독재와 불의에 맞서 자신을 희생하고 공동체를 지킨 고귀한 광주정신은 진보의 원천이자 민주노동당의 뿌리”[57]라며 “과감한 변화로 수권정당, 대안정당으로 발돋움해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고[57], “광주의 정치혁명을 전국에서 주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57]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는 “5.18의 민주화 정신은 많은 국가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며[58] 광주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밝혔다.[59]

레이건 정권 당시 리처드 앨런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5.18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 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60]

[편집] 우익 세력의 공작부대 개입설

1990년대 후반부터 일부 극우단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인민군의 침투 의혹을 제기했다.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부르는 한편, 조선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했다.[61]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출신자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도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 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은 올인코리아, 코나스넷 등의 우파단체들을 통해 선전됐다.[62][63][64]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만원, 서정갑 등 올드라이트 인사가 대거 참석했으며, 기자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도 기자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케 한다는 주장도 있다.[64]

2008년 6월에는 뉴라이트 연합의 서양사 전공자인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며, 북한군 개입설을 언급했다.[65] 2008년 10월 서울교회 이종윤 담임목사는‘양심에 꺼리낌없이 힘쓰라’는 주제로 설교 중 4·3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폭력성과 북한 개입설을 설명하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66][67] 이에 대해 기독교계 커뮤니티인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는 광주 민주항쟁을 직접 겪은 광주시민이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시민군이 벌인 항쟁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논거로 해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이종윤 목사의 주장을 반박했다.[68][69][70] 광주의 5.18단체들이 10일 성명서를 내고 “주일예배설교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당사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서울교회 이종윤 담임목사는 공식 사과하라”며 항의했다.[66] 이러한 주장 자체가 상식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반박도 대두했다.[71]

일부 보수단체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시민들 사이에 북한군이 침투해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계엄군을 살해했다고 주장해왔던 것과 반대로, 학살을 자행했던 자들이 북한 특수부대라는 보수 단체들의 주장도 있다.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한·미우호증진협의회는 "(5·18 당시) 살인자들은 한국군이 아니라 북한이 파견한 600명의 특수부대 군인이었다"라고 주장한다.[72] 그러나 후에 이루어진 취재에 의하면 북한 특수부대 진압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당시 광주에 있었던 사람이 없고, "평양에서 좌천된 당 간부의 얘기를 들었다"는 등의 말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북한 특수부대의 진압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에 대해 김황식 국무총리는 국회 질답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역사적으로 심판이 내려졌고 또 우리 국민들도 대다수가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73]

[편집] 극우단체 주장에 대한 비판 및 반론

  • 일부 극우단체 일각에서는 시민군이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는 계엄군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무장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 인민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이 개입했음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어서 신빙성은 낮다. 증언내용이 본인이 경험한 내용이 아니라 북한에서 들은 '전언'인데다 '잃어버린 10년' 등 극우보수단체의 논리와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군 특수부대의 소행이 맞는다면 전두환 정권시절 이를 밝히지 않고 넘어갔겠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73]
  • 일부 극우단체는 계엄사 및 제5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광주 시민 중에 계엄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M16보다 시민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카빈에 의한 희생자가 더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5.18 민주화운동 진압 후 의사·검찰 관계자·보안사 요원이 작성한 사망자 검시 자료 원본에는 M16에 의한 사망자가 카빈에 의한 사망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6월 중순 보안사 주재로 사체 검안위원회가 열려, 피해자 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공식 발표에서 카빈에 의한 사망자로 분류된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당시 군부에서는 M16 총상 사망자는 군에 대항한 것으로 인식돼 폭도로 분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검안위원회에서 최초로 폭도로 분류된 사람은 20여 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해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로 분류된 사망자가 더 많아진 것으로 1995년 국방부의 재조사에서 밝혀졌다. 1995년 국방부는 재조사 후 1980년의 조사는 잘못되었으며, 대다수의 희생자가 M16에 희생되었다고 발표하였다.[74]
  • 5·18 당시 계엄군의 작전보고·전투상보에 광주 시민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국회 광주특위·검찰·국방부는 대한민국 계엄군 기록을 토대로 진상규명을 했다. 진상규명 결과 무차별 연행과 과잉진압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 광주역·전남대·전남도청에서의 집단 발포, 광주외곽봉쇄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통합병원 진로개척 작전, 송암동 학살 사건과 같은 무차별적 발포,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 중 무장시위대에 대한 발포 등이 밝혀졌다.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군인들에게 훈장이 주어졌으며 심지어 상부의 지시 없이 발포를 한 군인들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이후 신군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볼 때 대한민국 계엄군에 의한 광주 시민 살해 행위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계획적인 테러를 행했다는 주장에는 실질적인 증거가 있을 수 없다.[75]
  • 일부 극우단체는 북한이 5·18을 기념한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북한은 5·18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 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 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사건이 발발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5·18 민주화운동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왜곡해서 북한 주민에게 선전한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76] 광주에 취재를 위해 잡입했던 조갑제는 5·18 당시 많이 불리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면서 5·18이 반공민주화운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77]
  •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의 정수만 회장은 2006년 12월 21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중 한 명이 북한군이라고 지목을 했는데, 정수만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지목된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광주국군통합병원 앞에서 20사단 61연대의 작전 도중 사망한 고등학생 임00라고 밝혔다. 당시 사망자 검시 기록을 보면 임00이 끝까지 군을 추격하기에 계엄군이 사살했다고 한다.[78]
  • 5.18 당시 북한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 한미연합사령부와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분석에 따르면, 5월 초부터 5월 18일까지 북한의 특이 동향이 감지되지 않았다.[79] 5월 20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국에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시점까지 북한군의 어떤 동향도 확인되지 않았다. 5.18을 진압했던 계엄군은 부상자와 연행자 수천명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대공 판단서를 첨부했다. 여기에는 대공 용의점을 철저히 조사해서 대공 유무를 기록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이상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80]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루마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5.18 발발을 사전 예측했다고 보기 어렵다.
  •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이와 같은 철통경계 속에서 극우단체 주장대로 북한군 600명이 해안으로 침투해서 육로로 빠져나갈 상황이 아니었다.[81] [82]
  • 자유북한군인연합은 탈북자 사이에서 5·18 북한개입설은 상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 조선로동당 비서 황장엽 등 고위급 탈북자들은 5·18 북한개입설을 언급한 적이 없다. 북한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 탈북군인협회 심신복 회장은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주장은 현실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83]
  • 1980년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한 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과거에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에 무장공비가 출몰했을 때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등에서 훨씬 적은 숫자의 병력도 주민신고에 의해 발각되거나 동선이 노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안가도 아닌 후방 내륙도시에 상당한 수의 병력을 별 노출없이 침투시켰다는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 탈북자 단체의 주장대로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개입해 시민군과 계엄군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는 공작을 자행했다면, 이는 중대한 사안으로서, 당시 신군부가 시민군이 아닌 북한군을 주적으로 삼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신군부는 시민군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허위 선전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탈북자 단체의 주장 역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사살하는 국가폭력을 똑똑히 목격하고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경찰서 등의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저항한 일은 굳이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고도 상식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보수단체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 무엇보다도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북 군산주한 미군 공군 베이스캠프가 있는데다, 시내에서 20~30마일 거리에 위치한 광주광역시 송정동에도 주한 미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북한군이 정말 개입했다면. 주한 미군 사령부나 미국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했을 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 또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조차도 모르게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이 전복될 뻔한 위기를 신군부가 자초했다는 얘기가 되고, 결과적으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우익 단체가 스스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증명하는 결함이 된다.
  • 11공수여단에서 복무하던 이경남은 “5월 18일, 5월 19일 양일간에 걸친 7공수, 11공수 부대원들의 진압 작전은 오히려 극중(영화 화려한 휴가) 장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픽션은 아무리 잘 꾸며놓아도 논픽션만 못하다.”라고 말하며 한 중사가 시민군에게 포위되자 옷을 벗어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하자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M16 소총으로 사격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시민군은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 광주 민주화 운동학살이라고 말했다. 또한, 군부대에서 “좌경용공 빨갱이 새끼들이 공부하기 싫어서 복학생들이 시험 기피하고 그러기 위해서 데모 선동” 등 교육 시켰다고 한다.[84]

[편집] 다른 우파의 주장

2002년 2월 사건의 관련자이기도 한 전두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전두환은 ‘광주는 어 그것은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라고 규정했으며,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 평가했고[85],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조선 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86] 이에 대해 북한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87]

  • 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
  • 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
  • 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
  • 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칠리 없다.
  • 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 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한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2004~2006년에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88]

이명박은 2008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온 국민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숨져간 민주 영령들"이라고 평가했다.[89]

[편집] 언론 보도

[편집] 대한민국의 언론

조선일보 ,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세계일보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0년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병사였던 이경남 목사는 《당대비평》 1999년 겨울호에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란 제목의 수기를 통해 “80년 5월21일 도청앞 집단발포는 법원의 최종기록과는 달리 시위대가 아닌 진압군 장갑차가 급히 퇴각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쳐 죽게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90] 또한 진압 당시 죽은 군인들에 대해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사격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두 번에 걸쳐서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사이에 5월 24일에 교전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31사단과 교전이 있어서 오인사격으로 죽었지 정작 시위대와 충돌해서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어요”라고 증언했다.[91]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만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92]

국제신문 김양우 기자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입이 끝난 직후 도청 안 마당에서 포로로 잡힌 시민군을 계엄군 병사가 때려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92]

심재훈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기자는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광주는 세계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증언을 했다.[93]

중앙일보 광주 주재기자 장재열는 5.18 당시 작성한 수첩에서 “대검으로 찌르고... 여자에게는 속옷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집까지 쫓아가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졌다”라고 당시 상황 회고했다.

5·18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낸 서청원은 9박 10일간 광주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5·18 광주항쟁 특파원 리포트〉를 공동 발간했다. 그는 “5·18 민중항쟁이 정치에 입문(민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당시 신문에 5·18 기사가 나가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당시 취재기자들과 함께 책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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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뽀뽀 12-01-30 13:32
   
위에서 나왔듯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나 또는 반국가적인 폭동사태로 폄하하는 인사들
예로 지만원과  뉴라이트인사들의 주장도 일부 첨부하였습니다.
그런인사들 (지만원과 뉴라이트같은 꼴통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자료도 원하시면 제가 찾아서
올리겠습니다.

다만 저런 꼴통인사들이 주장하는 저런것들의 할일없는 관심끌기에도 친히 관심을 가져주셔서
반박해주는 분들의 노고를 치하할 뿐입니다.

솔직히 제가 이번 광주민주화운동사건을 게시판과 댓글을 통해 보면서 느낀점이... 아 아직도
대한민국은 멀었다..입니다.

솔직히 저도 포함되겟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포털사이트나 정부기록물관련정보 및 관련논문
검색만 해보아도 수두룩하게 정보가 나옵니다.

하다못해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국회에서 청문회 했던 속기록까지 볼수있는 이런 좋은 세상인데
아직도 저런 허구맹랑한 주장을 하면서 의구심을 품고 계시는 소수의 분들과 아직도 예전의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소위 자신은 지식인이라도 자처하는분들을 볼때마다 참으로 개탄스럽네요.
뽀뽀뽀 12-01-30 13:38
   
시간이 없으시거나 또는 큰 관심이 없으신분들은 또는 본인이 관심 있는 부분만 보고 싶으신분들은
글 중간중간에 큰 카테고리에서 선택적으로만 보셔도 무방합니다.

또한 혹시라도 5.18광주민주화 운동 관련한 국회 청문회 속기록이나 기타 더욱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분들은 말씀 해주시면 제가 찾아서 올려드리겠습니다.

국민이 깨어있어야 국가가 발전하는겁니다.

나름 좋은 의도로 시작한일인데, 중간에 조금 개인적인 사견이 들어가면서 저도 조금은 흥분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겟네요.

저의 개인적인 사견이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아직도 50년대 60년대 70년대..의 이데올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분들에겐 차마 머라고 드릴말씀이 없네요.
북괴타도 12-01-30 16:12
   
위키는 아무나 수정이 가능합니다. 공신력은 전혀 없지요. 위키보다 더 정확히 사료를 모아놓은 사이트 링크합니다. 당시 청문회 증언과 청문회에서 나온 광주 사태에서의 북한 연관 관련의혹, 김대중 측근들과 전남대 운동권들의 수상쩍은 행적, 주동자 윤상원의 행적에 대한 미심쩍은 면 등을 보고 판단바랍니다. 적어도 위키에서 글로 풀어놓은 것보다 정확한 기사 및 동영상 자료가 있는 곳입니다.

 http://www.study21.org/518/video/auditing_518lie.htm

같은 사이트에 북괴쪽에서 518과의 연계점을 시사해주는 행보도 따로 정리해뒀습니다.  한국의 종북세력들이 북괴의 518 기념식에 참석한 장면 참 인상 깊군요.

http://www.study21.org/518/video/Ilsung-dj.htm


6070년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당시의 상황 그대로를 보자는 겁니다. 분명히 광주사태 (전 폭동도 아니고 민주화 운동도 아니라 봅니다) 는 유언비어가 유포되면서 격화되었고 그 유언비어를 유포한 세력은 정부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 의혹 제기를 할 때마다 아예 말도 못하게 틀어 막는 것이야 말로 독재 아닐까요?  위 링크로 들어가 증언을 보시면 광주 사태때 북한에서 실시간으로 중계 한 증언도 나옵니다. 아마 대부분은 모르셨을 겁니다.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이자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떠받들여질 수록 이익보는 집단들은 광주사태에 대한 의혹제시를 막으려 하겠지요.

옳고 그름은 양측 주장과 증거를 보는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이지 입도 뻥긋하지 말아라 라고 주장하는 게시판 깡패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뽀로뽀로 12-01-30 16:27
   
의혹은 의혹일뿐이지 사실이아님

나도 의심은할수있음 ㅋㅋ
          
북괴타도 12-01-30 16:34
   
증거를 제시하면서 의혹을 보이는 겁니다. 근거없는 의심과 광주 청문회와 영상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의혹은 다르지요. 

위 사이트의 동영상 자료만 보시더라도 아마 판단이 가능할 겁니다. 인터넷에 그럴 듯한 카더라 통신으로 퍼져있는 광주사태 미화글에서 (아마 일부러 빼놓았을) 내용 많이 나옵니다.

518 때 유언비어가 그리 급속하게 퍼진 이유, 전남대 운동권들의 공작 ( 당시 운동권들은 요즘 말로 종북좌파를 넘어 김일성 김정일 숭앙하는 주사파 들이 주도권 잡았었습니다) 등등. 링크입니다.

http://www.study21.org/518/video/index.htm

당시 시민군 지도부들이 무기 반납을 원하는 시민들을 사살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총으로 위협한 증거도 있지요.  그걸 무기반납과 무장저항의 양파로 갈렸다, 라는 식으로 미화하는 게 요즘 인터넷 518 미화 추세고요.  시민군 지도부들의 행적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무장폭동이라 봐도 될 정도입니다만,  선동세력과 폭동 주도세력들 말고 그들의 카더라 유언비어와 선동에 흥분해 순수한 의도로 참여한 일반 시민도 있으니 저 개인적으로 광주 폭동 혹은 민주화 운동이라기 보다는 그냥 광주사태, 좀 좋게 봐서 광주 항쟁 정도로 성격 규정합니다.

ps. 광주 사태 때 계엄군 총에 죽은 사람보다 시민군 총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도 위 증거로 설명이 됩니다.
     
병풍사 12-01-30 17:24
   
위키는 수정가능하나... 조갑제.황장엽씨의 간첩침투설은 거짓이다! 라고 한발언은 사실이고.  5.18. 뿐만 아니라 4.3  4.19  6.10항쟁 등을 북괴가 기념하는것도 사실이고. 박근혜가 광주의 희생에 보답하겠다.한 발언도 사실이고.  당신 말대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양측 주장을 듣고 대법원에서 내란수괴죄를 적용해서 전두환 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도 사실인데.  왜!  당신주장이 틀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깡패라 하는지?  북괴타도.당신 말대로 라면 조갑제.황장엽.대법원이 개정은 수하의 빨갱이 깡패집단 아닌가??
스펜타 12-01-30 17:52
   
저런사람 누가 만드는거지  도저히 북괴타도 백발도사 디미트리 강채윤 NEPTS

어디서 나타난 사람들일까?  자기들의 생각이 대한민국 국민의 보편타당한 일반론적 역사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단 사실은 알까?
찢긴날개 12-01-30 17:56
   
병풍사님 말씀이 맞죠.

북괴타도님 의견은 그냥 의혹에 불과할 뿐 아니라, 대부분 사실에 기반한 의혹도 아닙니다. 그리고 뭘 자세히 아시는 분도 아니군요. 함부로 인터넷에서 들은 이야기 쓰시는 것 같은데, 대부분 말도 안되는 추정들입니다.

사회학계에서 한국 운동권에 주체사상, marxism, 반미운동 등이 본격적으로 유입된걸 통상 80년대로 봅니다. 소위 한총련으로 대표되는 NL들이 형성된 것도 5.18이후입니다. NL, PD, CA 등으로 이합집산한게 80년대 중후반일인데, 무슨 당시 전남대 운동권들이 주사파어쩌고 하는지. 북한이 북한 영외로 주체사상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도 70년대 후반부터 입니다. 그 전에는 정말 극소수 사람들이 주체사상을 접했을 뿐 운동권 내부에 주류라고 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marxism도 김수행이나 극소수 강단 좌파들 사이에서 거의 일본어 위주로 부분부분 통용되던 시기죠.

5.18이전까지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 대다수는 그냥 자유주의 성향입니다. 주사파가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가되고, 주사파들의 교과서-입문서였던 책이 "강철서신"이라는 책인데 이거 출판이 1986년일입니다.

당시 주체사상이 국내 운동권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퍼진 시기 자체가 아닌데, 무슨 전남대를 주사파가 장악을 했다는건지.  그리고 김일성이가 주체사상 정립한게 "주체사상에 대하여"였나 뭐였나 하는 논문인데 이게 1982년에 발표됩니다. 물론 지들은 김일성이가 10살 때였나 애기 때부터 초능력같이 주체사상 정립해서 독립운동 주도했다고 씨X렁 대는데 이건 그냥 북한 선전일 뿐이죠. 주체 용어가 등장하는건 60년대, 주체사상이 최종 정리된건 70년대 중후반으로 추정됩니다.

북괴타도님. 잘 모르시는 부분은 함부로 추리해서 글을 쓰시는거 아닙니다.
오히려 5.18이 국내 주사파들에게 반미운동을 행할 강한 명분을 주게 돼, 이 이후로 대학가에 본격적인 반미성향이 주도권을 장악하게되죠.

오히려 정치적으로 보면 반란군인 전두환이 주사파에 더 가깝죠.
     
북괴타도 12-01-30 18:21
   
대학 운동권 주사파에 대해선 시기적으로 제가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80년대 중후반이후  들불처럼 퍼진 운동권내 주사파들이 80년 당시에는 없었을 수도 있겠군요. 워낙에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한총련 연대 사태로 정부에게 때려잡히기 전까지 운동권 종북 빨갱이들이 설친 걸 눈으로 봐서 80년 당시도 그랬었거니 하고 착각했다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당시 대학 내 운동권들인 전대협 한총련의 종북행위와 핵 관련 이율배반에 대해선 따로 논해야 할 일이고..

일단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처럼 반미 NL 세력은 80년대 초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NL들이 반미종북의 뿌리긴 하지만 광주사태와 관련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NL이나 주사파나 뿌리는 같다고 보는 입장에서 착각이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80년대 반미운동의 시초가 광주 사태 때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이 광주 시민군을 도와주지 않은 반감에서 대학내 운동권들의 NL기류가 형성됐다고도 하는데, 억측이라 봅니다. 그냥 박정희시대부터 지금까지 필요요소로서 계속되어온 민족주의 교육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식민지론 피해의식의 대두라고 보니까요)


각설하고.. 전남대 운동권들이 주사파로서 북의 지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조갑제나 황장엽 박근혜의 발언만큼 제가 링크한 광주 청문회나 기타 관련 동영상에 나오는 증거처럼 그 운동권들이 유언비어 유포의 초기세력이며 시민군들 지휘부가 알고보면 공수부대나 별 다를 바 없이 총으로 시민들을 위협했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리고 시민군 총에 맞아 죽은 시민들도 있다는 사실도요.

총구를 대면서 자기 말대로 따르라, 안 따르면 죽인다, 라고 협박하고 실제로 죽이기도 한 강압과 독재세력 성격은 무장군인 뿐만 아니라 시민군도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절대 밝히지 않고, 또한 특정세력이 사전에 유언비어 퍼트리기까지 모의하고 추진한 사실도 뭉뜽그리는 그 또한 왜곡이 아닐까요?

그 특정세력이 북괴와 연관되었는가 안 되었는가에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북괴와 관련이 없다라고 인정하더라도, 518이 순수한 시민의식으로 인한 민주화 봉기가 아닌 유언비어와 선동을 통한 특정세력의 사주로 시작되었고 유혈사태가 일어난 와중에 군인 뿐 아니라 시민군들도 별다를 것이 없었단 사실은 다들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가끔 518에 대해 언급하면 지나치게 흥분하여 과민반응 보이시는 분들도 있던데, 만약 관련 지역 출신이라 그런다면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친인척이 그 시민군 지휘부 혹은 선동하는 쪽 세력이었다면 모를까, 만약 일반 시민이었다면 결국 속은 거라는 거요.

선동된 일반시민이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죽이러 온다, 유방 잘랐다, 등등의 유언비어에 흥분한 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고 일어난 것도 문제는 아니지요.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케 한다 라는 공산당식 사고방식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전두환을 성토하고 단죄하듯이,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린 세력들에 대한 명확한 진실규명과 단죄도 필요합니다.
뽀뽀뽀 12-01-30 18:06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속기록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547
5.18 연구소 사이트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sub2/sub2_01.htm

위 사이트에 가시면 당시 참여했던 계엄군과 시위참가자등의 생생한 경험담과
5.18관련된 모든 사항을 기록해 놓았네요...

제가 일일히 페이지 링크 걸어드릴수도 없어서, 위 사이트 주소를 링크 해드렸으니
직접 궁금한 사항은 사이트에 들어가셔서 확인해보세요.
뽀뽀뽀 12-01-30 18:37
   
뉴라이트의 업적과 명단 및 관련 발언...
http://blog.daum.net/rainspace/15866459

뉴라이트 및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이 5.18관련 주장하는 사항이 나와 있군요.

딱 보니 여기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이나 또는 김대중전대통령, 불순분자들이 국가의 전복사태를
이루기 위한 폭동이라고 폄하하거나 비하하는분들 주장과 일맥상통함을 느낍니다.

뉴라이트가 어떤 단체인지는 아마 위 링크 타고 들어가보시면 잘 아시겠네요.
     
스펜타 12-01-30 19:25
   
이런 놈들이 매국노 놈들이지

뉴라이트매국노 놈들하테 역사배우고 와서 어디서!!!!!!!!!!!!!  난리질이야
          
백발도사 12-01-30 21:44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애쓴다.

역사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과거와의 대화야.
5.18이란 한가지 과거사실에 대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대화를 하고 있는거야.
똑같은 대화란 애시당초 있을 수가 없지.

그런 차이을 인정하지 않는한 5.18이란 역사적 사건은 영원히 베일에 싸여
폭동이냐 민주화운동이냐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 수 밖에 없어.

5.18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에 대해 왜 그렇게 죽자사자 덤비지?
부모형제나 친척이 죽은 것도 아니잖아?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거냐? 
애국적 행동을 과시하고픈거냐?
민족적 울분에 몸을 떨었던 거야?

한가지 역사적 사실을 두고 공산독재 치하의 사람들 처럼
마냥 똑 같은 소리를 내기 바랬던거야?

5.18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을 보구 욕하고 비난하고 매국노라 해봤자
자신이 븅신이라는 인정만 할 뿐  결국 입만 아프고 손가락만 고달플 것이다. 

잘 새겨들어라.
현자와 븅신과 개또라이는 종이 한장 차이다.
               
스펜타 12-01-30 23:00
   
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지~ 
일반사람들의  보편타당한  일반적 역사를
너란녀석은
교묘히 속여가는  썩고 추악한  종자들이란거
너같이 편협한 녀석은 모르겟지 너희들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킨것이 광주시민이고
부모형제가 아니라도 나는 알지 그들은 영원히 숭고받아야할
가치를 세웠다는거지

비판적 시각이라~    너의  시각은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쓰레기에  불과하다  뉴라이트 녀석아
                    
백발도사 12-01-30 23:33
   
결국 스스로 븅신 인증을 하고 마는구나.......
                         
고전프라 12-01-31 13:00
   
난데없이 밀리터리란에 5.18 글 올린 니 정신상태가 불량하다.
지금이 5월이여?
머래도 껀수가 있어야지 이해를 하지..
뒤죽박죽으로 뜬금없이 세상 살어?
               
뽀뽀뽀 12-01-30 23:37
   
백발도사// 참... 이쪽 저쪽에 분란글 싸지르고 다니시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

님게서 말씀하신 한가지 역사적 사실을 두고 공산독재 치하의 사람들처럼 마냥 똑같은
소리를 내기를 바랬던 거냐? 라고 쓰신 글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약적인 뉘앙스로 판단하건데,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깐 다수의 의견이 중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소수의 의견도 경청하고, 봐달라는 글인것 같은데 이렇게 해석하고 적겠음.

님이 말한 역사의 사전적이거나 보편적인 의미를 알고 싸지르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음.

우선 역사라 함은 과거의 사실이 바탕이 되어 구성이 된것이고, 역사가 다시 쓰일수는
있지만 그 역사가 새로운 사실이 나오지 않는한은 변하거나 변모할수는 없습니다.
(무슨의미인지는 아시겠음?)

위의 역사라는것에 대입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보면, 88년 청문회,94/96년 검찰의
수사자료에도 나와있듯이 당시 전두환과 신군부의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광주시민들과
대학생들의 저절한 사투라고 정하였고, 서술이 되어 있음.

당시 5.18민주화 운동기간중에 외부의 어떠한 불순세력이나 선동이 있었다는 내용은
청문회와 검찰의 수사결과 찾을수도 없었고, 80년도 당시 전두환과 신군부가유신정권이
막을내린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전국에서 일어나는 반정부적인 시위를
강경진압으로 재빨리 진압하고자 명분이 필요하였음. 그리하여 그당시만하더라도
이데올로기가 잘 먹힌 시기라 빨갱이 또는 불순세력(이하 간첩)등이 광주사태를 진/간접
으로 선동하고 우메한 광주사람들이 거기에 현혹되어 동조한 폭동이라는 중앙정보부의
"북괴남침설"을 베이스로 당시 모든 언론매체에 광주사태는 북괴에 의한 국가전복을 노린
반국가적인 폭동이라고 대대적으로 방송을 하게되었던것임.(당시 모든 언론은 통제된 상태)

같은날 미국국무부대변인은 미국의 정보에 의하면 어떠한 정보에서도 "북괴남침설"에 관련
된 정보도 미국측은 발견할수 없다. 이렇게...바로 발표를 하였지.

훗날 북괴남침 및 불순세력이 선동했다고 전두환과 신군부가 청문회와 검찰조사시 증거로
내세웠던 일본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내용을 말한적도, 또한 일본도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단호히 말했고, 추후에 이것은 신군부가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작했던 사안으로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던 사실이지.

내가 위에 말한 사안은 당시 신문기사와 청문회 속기록, 또 94년간 96년 검찰의 1/2차 5.18
민주화운동 관련 조사내용을 보면 나온 명백한 사실이지...

그리하여 당시 재판부는 전두환에게 12.12 사건과 5.18의 유죄를 들어 내란및 반란과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국민의 지유를 억압한 죄명으로 1심에서 사형을 언도했고. 노태우에겐
무기징역이 언도되었지. 추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등으로 인하여
사면시켜준게 조금 어이는 없지만..머...

여튼 이게 역사임... 사실에 기반한 역사....

당신들이 말한 무슨 북괴조종설이나 불순세력 선동설, 빵갱이설....등은 다 말대로
그냥 설일뿐이고 확인할수도 없을뿐더러 그를 뒷받침할만한 펙트하나 없는 의혹일뿐이야.

이런 의혹을 가지고 위에서는 아주 멋지게도 무슨 공산정권에서나 가능하다는 획일화된
역사의식이라는 궤변을 늘어 놓았네...

전세계 어느나라를 봐도 역사에는 2가지 3가지의 이견이 있을수가 없거든...

무슨말인고 허니 역사라는것은 거짓이 있을수가 없다는 것이지.

역사는 사실만 보고 사실대로 적은것이지, 그 사실대로 서술해놓은 역사가 어떻게 2가지나
3가지의 시각으로 보일수가 잇는지 도리어 나는 묻고 싶을뿐임.

지금 당신들이 주장하는 모든 주장은 그냥 의혹일뿐이지 그게 사실은 아니야...

그 의혹이 역사가 될수도 없고,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의 정통성을 바꿀수도 없는거야.

그 당시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걸고 쟁취하고자 하셨던 우리 선배세대들에
대한 최소한의 지금 우리 젊은세대가 가져야할 고마움과 존경심은 없더라도, 최소한 우리
폄하하거나 비하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아쉬움에....차마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고 이렇게
몇글자 적어 보는군요.
                    
백발도사 12-01-31 10:09
   
지난 군대시절 생각해보니 어느 날 고참에게 열나리 맞은 기억이 났다.
무엇때문에 맞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하여튼 먼지 나도록 맞았다.

규정위반으로 맞았는지 고참에게 개겨서 맞았는지 그때 왜 맞았어야 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이게 역사란다.

기록과 역사는 다르다.  그리고 기록과 역사는 항상 왜곡된다.
실증이란 그래서 필요하지만 실증의 프레임에 갖히면 전체를 못 본다.

보편타당한 일반적 역사란 없다. 그리고 보편타당한 역사적 기록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 누군가 말했던가?
                         
스펜타 12-01-31 11:44
   
헛소리 하지말고 짜져있어

실증과 해석 -과거와 현재가 피드백 하는 가운데

역사가 생겨나는 거지.  왜곡과 피드백은 엄연히 다르다

물론 승자의 역사만이 역사에 남을 뿐이고 승자의 역사가 보편타당한 일반적 역사다.
 

당연히 후진적인 너희의 뉴라이트 역사관은 백날 죽었다 깨어도

헛소리로 치부되는 거고 말했잖아 찌그러지고 일그러진 너네 역사관이라고
               
ALAYLM 12-01-31 11:46
   
이 ㅂㅅ의 논리라면 일제치하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던 조선을
일제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도 역사에 대한 다른 대화라고 주장할 수 있겠음.

중국의 동북공정도 역사에 대한 다른 대화라고 주장할 수 있겠음.

역사라는 것이 지 입맛대로 이렇게 생각해도 되고, 저렇게 생각해도 된다는
ㅂㅅ인데 뭘 바람?

역사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은 뇌내망상으로 GR을 하던 말던 왜곡은 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 기본도 모르고 있음.

현자와 븅신은 종이 한 장차이라니.. ㅋ
어떤 종이 한 장 차이인지 설명이나 가능하고서 저런 개드립을 내뱉는건지.. ㅋㅋ
구경꾼 12-01-30 23:32
   
5.18은 폭동이라며 선전 선동하는 좌경용공세력들이 밀게로 모이는 이유는?
ALAYLM 12-01-31 11:40
   
광주사태라고 폄하하는 무리들에게 그만들 낚이셈.

저들이 주장하는 바의 진실성은 전혀 밝혀진바가 없는데 왜 광주민주화운동이 맞는지 우리가 증명해야함?

저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이 새로운 사실도 아니고, 이미 모두 기존의 자료들이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모든 역사적 사료들을 검증한 결과가 민주화운동으로 명칭 개정되고,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 등재됐는데,

저들은 저것들을 반박하지 못하고 있음.

광주민주화운동을 사태라고 부르고 싶으면, 저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증명해야함.

그러니까 ㅂㅅ은 ㅂㅅ들끼리 놀게 놔두셈.
쟤들은 시간이 흐르면 김근태가 선량한 이근안을 먼저 까서 이근안이 어쩔 수 없이 정당방위로 고문했다고
할 애들임.
백발도사 12-01-31 12:24
   
인터넷에서 너희 좌파 빨갱이과 너희들이 말하는 보수꼴통의 차이가 뭔 줄 아나?
보수꼴통은 대놓고 욕질을 하지 않는데 좌빨들은 욕질부터 하고 본다.
틀린 말 같으면 너희들 댓글들 잘 훓어봐라.

왠 줄 아나?  할 줄 몰라서?

아냐.  글은 자기 인격이거던.....

스펜타를 위시한 몇몇 인간들아 좌,우를 따지기 전에 인간부터 되거라.
여기서 인간되는 거 그리 어렵지 않다.

꼬리말: 스펜타 저 얼치기는 자기가 쓴 글이 뭔 말인지도 모른다.
     
고전프라 12-01-31 12:59
   
오죽 사람같지 않으면 대놓고 욕하것냐~

니나 보수꼴통이나 거기서 거기니, 서로 욕할 필요가 없는거것지.. ㅎㅎ
     
스펜타 12-01-31 13:21
   
난 애초에 좌우도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데올로기적 사상논쟁이 끝난게 언제인데 좌우 논리냐?  20년전에 썩어빠진 논쟁에서
너나 얼렁 탈출해

건강한 보수와 진보는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되는데

뉴라이트 쓰레기들은 보수의 가면을 쓰고 나라를 좀먹는 존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