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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15 01:06
조선 후기 고지도를 통해 살펴보는 조선의 국경선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7,161  





19세기말 제작된

여지도(輿地圖)〈古 4709-78〉 1책에 포함되어 있는 <의주북경사행로>


<1> 명나라는 조선과 요동(=요양) 동쪽 180리 '연산파절'을 국경 경계로 하기로 합니다.
(이 부분은 명의 공식 사서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젤 아래쪽 참고자료를 보세요.)


고려멸망(위화도회군)의 계기가 된 
'요동정벌'에 등장하는 문제의 철령위와 철령 위치비정.

(명나라 주원장이 고려 영토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개원 관할에 넣어버리자 고려가 빡쳐서 요동을 공격하러 감)


분수령은 훗날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이 정계비에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서위압록 동위토문고어분수령상 늑석위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토문강'이 두만강을 지칭하는지
현재 중국 영토안의 `토문강'을 지칭하는지는 당시에도 논란거리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but 본인이 위 지도를 확인 도중 연산관 바로 코 앞에 있는 '분수령'에 주목했습니다.


여기서 청석잠, 석문잠 등이 나오는데, 이는 봉우리 잠岑 을 의미합니다.
(그 말은 즉슨, 청석령, 석문령의 다른 말이라는 뜻이죠)

*석문령, 청석령은 중국 가는 조선사신단들이 여기 넘기가 빡셌던지 꽤 많은 기록을 남겨뒀습니다. 



고구려 시기에도 중요해서 

청석령, 석문령 일대는 요동의 바로 동쪽이자, 
고려의 국경선으로 훗날 고려가 거란에게 뺏긴 곳으로 

훗날 조선후기 정조 때 문신 홍경모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이 일대를 고려의 용병술이 떨어져 거란에 뺏겼다고 한탄을 합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때 굴욕을 겪은 조선만 하겠냐만 ㅋㅋ) 


한마디로.... 청나라 시기 때까지도.. 

이 연산관.. 바로 요동의 바로 동쪽이 국경선이었던 셈..

이 분수령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고 합니다.. 
찾으래도 찾을 수 없는게 당연하죠 ㅋㅋ 엉뚱한 곳에 있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이제껏 낚여왔던 거였습니다..


조선 후기엔 현재의 압록강을 압록강이라 불렀지만..
역시 예전 조상들은 요하를 압록강이라 부르기도 했다는데..
위 지도에도 보이듯 이 요하는 지류가 상당히 많습니다. 


하나는 요하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으로 상당히 서쪽에 북쪽으로 향하는 지류죠.
하나는 요양, 석문령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태자하'라 불리우는 강이 있습니다. 
그 뒷편이 혼하이고, 그 다음이 요하죠. 


아마도 여진족들은 고구려, 발해+신라의 피가 섞인 민족이다 보니, 
요동 남쪽에 있는 요하의 한 지류를 가르켜 
고구려 때처럼 아리수니 압록강이니 하며 불렀을 수도 있겠죠..
아니면 압록강의 북쪽으로 향해 있는 지류를 언급한 것이려나? 

어쨌든, 모든 의문의 키를 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분수령'이 고지도를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 점을 발견햇나 모르겠네요. 

** 어쩌다 옆동네에서 어떤 화교놈과 논쟁하느라, 
자료 찾는 중에 여기저기서 글을 읽고,
동팔참 지도 찾는중에 명나라가 인준한 조선의 경계인 철령의 위치와
공식 국경 '연산파절'을 찾는 도중 이 지도를 통해 모든 의문이 풀려나갔게 됐습니다.


참고로, 청나라 사행을 두번이나 갔다온
조선 후기 정조 때 문신 홍경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무슨 책에 나오는지는 모르겠네요.)


1830년, 1834년 두 차례나 연행을 다녀온 홍경모洪敬模(1774~1851)는 
동팔참 3백리를 지켜주는 석문령石門嶺을 거란에게 빼앗기고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은 것을 예로 들어 고려의 용병用兵이 고구려만 못함을 꾸짖었다. 

그런 옛 땅은 다 잊고 압록강만을 천참天塹(천혜의 요충지)으로 삼는 조선의 옹졸함은 말해 무엇하랴? 
홍경모는 우리는 “고려를 닮은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를 닮은 것인가?”라며 준열하게 물었다. 

참고로 요양 강건너 맞은편이 바로 "석문령"입니다. 동팔참의 최종 코스인 셈입니다.
이 석문령을 잃고, 연산관까지 밀려나 분수령이 조-명 국경선이 된것이고,
다시 조-청 국경선으로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게 된 것지요..


뭐, 이건 중국 교과서인가 한국 교과서에 나오는 청나라가 설치한 
'유조변책'=버드나무를 심어서 설치한 일종의 국경 목책 지도라고 하는군요.

명나라는 '요동정벌, 위화도회군'의 계기가 된 철령위..
즉, 고려 강계지역 철령에 설치하려한 철령위를 서북 500리로 뒤로 물렸고, 
요동 동쪽 180리 연산파절을 경계로 삼고, 동팔참 수백리를 비워두었고, 
원나라 때 개원이 관할한 철령 북쪽, 서쪽, 동쪽 관할만 확인하고, 
철령 이남과 공험진 이남, 
그리고 여진족이 들어와 뒤섞여버린 고려시절의 10여개 지역등을 조선에게 돌려줬습니다. 
(아래 참고자료의 고려사, 태종, 세종, 성종실록에 구구절절 나오죠)


우리나라 역사책은 계속 위 지도처럼 철령을 강원도 쪽에서 찾고 있는데.. 
문헌 기록에 의거하여 구글지도를 통해 축척을 통해 확인해 본 바 아래와 같습니다.


철령은 애시당초... 현재의 압록강 유역 근처 혹은 간도지방에 있었을거라 추정됩니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봤듯이..
명나라가 포기한 동팔참의 관할은 연산관 남쪽을 관할하는 조선의 관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선지 이 지역은 완충지대 비스무리하게 공백지가 되었는데, 여진족과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고, 
명나라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조선 백성이 부역을 피해 도망가 야인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지역입니다)


어쨌든.. 이 걸 청나라와 다시 조선 후기에 백두산정계비를 분수령에 세움으로써 인정받은 건데.. 
일본 애들이 역사왜곡과 더불어, 간도협약으로 청나라한테 넘겨준거죠. 

실질적으로 연산관을 경계로 해서 보면, 요양시-심양-개원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동쪽의 길림성-흑룍강성이 대부분 조선 영역이 됩니다. 





















<근거 - 참고자료>

**부록. 여지도 <의주북경사행로>의 지명색인 

※주(※州)    ※하(※河)
(가나다 순)

가년섬문(加年蟾門)  각항도(覺巷島)  갈석(碣石)  개원(開元)  개평(盖平)  거류하사(巨流河司)  거용관(居庸關)  
게수점(憩水店)  고교(高橋)  광영(廣寧)  광영일(廣寧馹)  구궁대문(九宮臺門)  구연성(九連城)  금주(錦州)

낙정(樂亭)  낭자산점(浪子山店)  냉수점(冷水店)  노구하(蘆溝河)  노변점(路邊店)  

대제하(大堤河)  대통하(大通河)  대횡산(大橫山)  대흑수(大黑水)  동경(東京)  동관(東關)  

마시하(馬市河)  마천령(磨天岺)  만상성(灣上城)  명수당문(鳴水塘門)  무령(撫寧)  밀운(密雲)

반령(盤岺) 반산(盤山)  백기보(白旂堡) 백애(白厓)  백탑포(白塔鋪)  백하(白河)  백하(白河)  법고문(法庫門)  
보거(寶拒)  복주(福州)  봉황산(鳳凰山)  봉황성(鳳凰城)  부락령(部落岺)  분수령(分水岺)  

사하(沙河)  사하일(沙河馹)  산해관(山海關)  살목선산(薩穆禪山)  삼하(三河)  서산(西山)  석문잠(石門岑)  석하(石河)  설리점(雪裏店)  
성경(盛京)  소릉하(小凌河)  소운하(蘇運河)  소주(蘇州)  소흑산(小黑山)  수합문(受哈門)  숭잠문(崇岑門)  시황도(始皇島)  신대문(新臺門)
신점자장(新店子庄)  심하보(深河堡)  십리하일(十里河馹)  십삼산점(十三山店)  쌍봉하(雙峯河)

압록강(鴨綠江)  양수점(兩水店)  양하(洋河)  여순(旅順)  여양일(閭陽馹)  영액문(英額門)  영원주(寧遠州)  영평(永平)  예방문(霓邦門)  옥전(玉田)
왕청문(汪淸門)  요양(遼陽)  요점(要店)  요하(遼河)  운산관(運山關)  웅악(熊岳)  위원문(威遠門)  응운산(應運山)  의무여산(醫巫閭山)  이도정(二道井)  임강진(臨江鎭)

장산(長山)  조하(潮河)  주아호주일(朱兒呼朱馹)  중우소(中右所)  중전소(中前所)  중후소(中後所) 

창려(昌黎)  창반문(廠盤門)  창평주(昌平州)  천산(千山)  천주산(天柱山)  천진교(天津橋)  철령(鐵岺) 

청룡교(靑龍橋)  청룡하(靑龍河)  청석령(靑石岺)  

탕점(湯店)  통원보(通遠堡)  통주(通州)  통하(通河)  투하(渝河)  

평곡(平谷)  풍윤(豊潤)  

하점(夏店)  해성(海城)  향하(香河)  홍라산(紅羅山)  환향하(還鄕河)  황성(皇城)  황순(荒旬)  황창문(皇廠門)

출처: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2&sn1=&divpage=3&sn=on&ss=off&sc=off&keyword=%BC%DA%B4%EB&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0404









**2.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에 나타난 조-명 국경선 기록 **



***<문헌의 근거>*** (읽기 싫으면 패쓰하세요)



성조(聖朝) 홍무(洪武) 21년 2월에 
호부(戶部)의 자문(咨文)을 받았사온데, 
호부 시랑(戶部侍郞) 양정(楊靖) 등 관원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주원장)의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기를, 

‘철령(鐵嶺) 이북(以北)·이동(以東)·이서(以西)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에 속하였으니, 군민(軍民)을 
그대로 요동(遼東) 관할에 소속시키라.’ 하였습니다. 

(명나라 주원장의 철령 일대에 대한 영토요구)

* 철령 북쪽, 동쪽, 서쪽은 
개원로(지도의 심양 북쪽 개원) 소속이라고 주장하며,
요동(=요양) 관할에 소속시켜라. 

2. 
명나라가 1461년 편찬한 지리서인
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철령위에 대해 
“도사성(都司城) 북 240리에 있다.(요동 도사성=요양)
 옛날에는 철령성이었고 지금의 철령위 치소(관청 위치) 동남 500리에 있었다.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 
홍무 21년(1388년)에 철령위를 그곳에 설치했다가 
26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고려 영내에 설치했다가 5년만에 현재 위치로 철수) 


3.

영락 2년 5월에
흠차 사신(欽差使臣=명나라사신) 
동녕위 천호(東寧衛千戶) 왕수(王脩)가 칙서(勅書)를 받들고 왔사온데, 
‘삼산(三山)·독로올(禿魯兀) 등 열 곳의 여진(女眞) 백성을 초유(招諭)한다.’하였고, 

홍무 21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성지(聖旨)를 받자와, 
‘공험진(公탪鎭) 이북은 요동(遼東)으로 환속(還屬)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本國)에 붙여 달라.’고 청하기 위하여, 
배신(陪臣) 김첨(金瞻)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가서 주달하게 하였사온데, 

그해 10월 11일에 <김첨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공경히 칙서(勅書)를 받자오니, 
‘삼산 천호(三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열 곳의 인원(人員)을 허락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신(臣)이 일국(一國)의 신민(臣民)들과 더불어 감격하여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조선이 반발하자, 다시 조선에게 여진의 관할을 넘김=이 지역은 고려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슴.)

(태종실록)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탪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동북지방은 
원산만 근처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공험진지역임..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췓)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컉)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탪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태종실록)

 “홍무(洪武) 5년 7월 25일 아침 봉천문(奉天門)에서 조회할 적에, 
배신(陪臣) 장자온(張子溫)이 <태조 고황제의> 선유(宣諭)하신 성지(聖旨)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여진[女直]들이 너희 나라 동북 지방에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예로부터 호걸(豪傑)이라서 분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거든 왕에게 말하여 근본을 용심(用心)하여 방비하게 하라.’ 하였으므로, 

홍무(洪武) 21년 2월 28일에 
본국(조선)에서는 배신(陪臣)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주청(奏請)하게 하기를, 
‘공험진(公탪鎭) 이남으로부터 철령(鐵嶺)까지는 
원래가 본국(조선)의 토지이오니, 바라옵건대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게 하소서.’ 하니, 


(*공험진은 윤관이 개척한 고려-조선의 동북지방인데, 
강원도 동북지방인 역시 동북지방인 강원도 철령까지를 고려의 영토라 주장하는게 이상하지 않은가?
차라리 공험진에서 경남이나 전라도까지 고려의 영토다라고 주장하면 모를까.ㅋㅋ 
문맥상 동북지방 공험진과 서북지방 철령을 의미하는게 훨씬 정확하다. 
주원장이 주장했듯 개원이 관할한 고려의 철령이 핵심 문제가 되니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명나라랑 국경 문제를 논하는데 
동북 공험진-동남 중부지역 강원도 철령을 말하는 건 말이 안된다. 
명나라와 접하는 서부와 동부 경계를 말하는게 당연하다.


그해[本年] 6월 12일에는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으로 인준을 받았고, 
그해 4월 18일에 본부 상서(本部尙書) 이원명(李原名) 등의 관리가 
대포서(大?西)에서 성지를 공경하여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철령의 연고에 대해서는 왕국에서 말이 있으니, 그렇게 하게 하라.’ 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영락(永樂) 2년 5월 18일에 배신(陪臣) 김첨(金詹)을 보내어 주청하게 하기를,
‘삼산(參散)·독로올(禿魯兀) 등처의 여진 지방은 
태조 고황제께서 허락하여 주신 땅에 속하오니, 
그곳에 사는 관민(官民)을 본국으로 하여금 
그전과 같이 관할(管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니, 

그해 10월 초1일에 칙유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삼산(參散)의 천호(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10처(處)의 인원을 청한 대로 허락하니 그리 알라.’ 하신 바 있고, 


(철령 이남 ~ 공험진 이남은 모두 조선 땅이다, 
 삼산, 독로올 등 여진지방도 조선 관할이다라고 명나라가 인정함)


(세종실록)


우리 고황제(高皇帝=주원장)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성종실록-공조판서 남원군 양성지)
 
*조선-명나라 경계는 압록강이 아니라 연산 파절(連山把截)이라고 
 조선 세조-성종 시기 문신 양성지는 말하고 있습니다.*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 이 말의 뜻은 즉슨.. 

요동(=요양) 동쪽 180리가 조-명 국경선이고..

그 지역 밖에 동팔참이 있는데.. 
이 동팔참 지역이 목축과 수렵에 유리함에도
명나라가 직접 다스리지 않고 비워뒀다는 소리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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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a 12-02-15 10:43
   
로마교황청에서 나온. 옛날 조선을표시한 지도를 보니 연해주와. 북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나와잇습니다.1920년도. 이후 19세기때. 표시되던 조선의땅으로. 표시된 만주. 연해주 땅들이 표시되지않앗지요
81mOP 12-02-15 13:57
   
역시 센추리온님은 능력자셨군요..헐...대단하심...
싱싱탱탱촉… 12-02-15 17:02
   
많이 혼동된다. ㅎㅎㅎㅎㅎ
억조경해 12-02-15 17:23
   
센추리온씨!
뭘 잘못 알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그거 그냥 유조변 지도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국경선이 됩니까?
다른 사실들도 좀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위 지도는 사실대로 그린 겁니다.
지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게 국경선이 아니고 단순히 유조변을 표시한 겁니다.
지도만 보면 (거기다 헛소리에 구라까지 덧 붙이면) 정말 조청국경선이 그런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발행된 (청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기록들이 포함된) 수 만권의 문집을 포함 다른 책들, 전부 다도 아니고 서너 권만 읽어보면 그게 그냥 유조변 표시한 거라는거 금방 압니다.
그래서 위 지도에서 조청국경 운운은 구라*100만 입니다.
억조경해 12-02-15 17:50
   
조선시대 1년에 사행(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을 동지사 하지사 2번은 기본이고 무슨 핑계라도 대서 추가로 보냅니다.
오죽 지긋 지긋 하면 중국에서 그만 오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황제가 휴가 갔으니 오지 말라는데도 이 지독한 조선 사신들이 요새말로 리조트까지 찾아갑니다.

조선 호조에서는 역관 1명당 은을 수 천냥 씩을 대출해 줍니다.
조공무역에서 엄청난 수익이 남기 때문이었습니다.
역관은 호조에서 대출받은 은으로 거의 대부분 인삼을 사서 싣고 갑니다.
역관들도 인삼 팔아서 따 따블로 벌어가지고 호조에 갚고 이익을 남기는 거지요.
사행 인원은 평균 3백명, 그 중에 공무원은 10명도 안 됩니다.
정사, 부사 외 나머지는 역관과 짐말에 인삼싣고 가는 말구종꾼 들이지요.
기타 정사 또는 부사는 조선의 젊은 인재 중에서 종사관을 선발해서 데리고 갑니다.
추사 김정희 연암 박지원 등외 수많은 조선 천재들이 소시적에 종사로 선발되어 중국에 다녀 온 사람들 입니다.

아뭏든 압록강의 의주를 넘으면 청나라 국경인데 여기서 부터 봉황성까지 유조변을 따라 가야 합니다.
유조변을 따라 가면서 봉황성까지 조선 스스로 경비를 책임져야 합니다.
봉황성에 도착하면 청나라 군이 조선 사신의 경비를 책임 집니다.
유조변이란 봉금 한계선 입니다.
봉황성 넘어서 부터 주요 지역마다 하루씩 머물면서 장을 엽니다.
이때 중국 현령 또는 자사는 조선 사신들을 데리고 연회를 벌입니다.
그래야 쫄다구들이 장을 벌일 수 있으니까요.
장을 안 벌이면 - 예를 들어서 봉황성 인근에 인삼이 씨가 말라서 다음 사신이 올 때 까지 아픈 놈은 다 죽어야 합니다.
또 지역 현령 등은 인삼 장이 안 열리면 세금이 안 걷힙니다. 인삼 장이 열려야 1년치 세금을 다 벌충 합니다.
다 이 넘도 먹을게 있고 저 넘도 먹을게 있으니까 푸짐하게 대접하면서 붙잡아 두는 겁니다.
아뭏든 그래서 한 군데서 3일 씩 머물러서 가야 하므로 북경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무지하게 걸립니다.

연암일기를 읽어보면
연암은 사행에 종사관으로 따라갈 때 - 요새 말로 하면 청년 백수 입니다.
가는 곳마다 연회가 벌어지는데 그곳 현령이 근동의 글 잘하는 넘은 다 불러 모읍니다.
이 넘들이 질문하는거 다 답변하고, 시 짓기 대회로 중국 시골선비 한 방 눌러주고
그 다음 날에는 백수도 벌어야 되니까
글씨를 써 줍니다.
아뭏든 한국 선비 글씨를 받아 가려고 은을 들고 줄을 섰다고 합니다.

다시 돌아 올 때는 유리창에 들러서 단계석 등 중국 특산물을 사다가 조선에서 다시 팔아 이문을 또 남깁니다.
그리고 호조에 빌린 돈에 이자까지 갚고 내년을 기약하는 거지요.

아뭏든 위 지도는 조선시대 행을 가는 통로인 유조변을 표시한 겁니다.
왜? 유조변 넘어가면 봉금지역 침입으로 청나라 법에 의해 처벌을 받습니다.

청나라 후기 러시아가 남진하면서 러시아세에 대응하기 위해 만주지역에 인구를 이식하면서 봉금이 유명무실해져서 유조변은 없어졌습니다.

유조변은 봉금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연달아 어서 표시한 것을 말합니다.
억조경해 12-02-15 17:57
   
자꾸 국경선을 이상하게 북쪽으로 옮기시려는 분 들이 계시는데
조선의 국경이 어딘지 정확하게 확인하시려면
이순신 장군이 어디서 근무했는지 살펴보시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발보병으로 소위 임관해서 전방 GOP 소대장으로 배치 받은 다음에,
거기서 말뚝 박혀 GOP 중대장까지 마치고 나이 40 넘어서 겨우 소령 진급한 다음에 후방으로 빠집니다.
이순신 장군 근무지가 어딘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신립장군도 GOP 연대장, 사단장으로 근무했는데 근무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냥 거기가 조선 국경이고 명나라 때는 날마다 여진족과 전투를 벌이던 최전방으로 바로 압록강 두만강 선 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소대장 땐가 중대장 땐가 아뭏든 여진족과의 전투에 패배해서 징계를 먹는 바람에 진급이 늦어집니다.(원래 임관도 서른 넘어서 늦게 했습니다만)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는 그대로 압록강 두만강선이 조청국경으로 인정됩니다.
Centurion 12-02-15 18:40
   
억조경해씨//

제가 청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유조변책 갖고 지금 국경 운운하는게 아닙니다.
조-명 국경선은 명나라 주원장이 고려의 강계지역에 일방적으로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면서 시작하게 되는데요.

이 무렵 원명교체기를 이용해, 공민왕 때부터 시작된 영토수복작업이 박차를 가하면서,
한 때, 이성계와 지용수의 군대가 요양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철군할만큼 대단한 기세였죠.
명나라는 그 이후에야 북원을 공격하면서 만리장성을 넘어와 요서지역에 교두보를 만들고 요동공략을 시작합니다.

실질적으론 나하추 등 원나라 잔당들이 요동을 지배하고 있었죠.

그러다, 이 나하추 세력이 제거되자, 명나라와 고려가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명나라 주원장이 원나라 개원로가 관할한 철령을 일방적으로 관할하겠다면서 군대를 파견하죠.
이에 고려는 명나라에 항의를 했으나, 먹히지 않았고, 국경에 진입한 명나라군을 잡아 죽이고 요동정벌을 꾀합니다.

개원로는 현재 심양 북쪽에 있는 '개원'입니다.
철령시는 요양시(요동 도사가 머무르던 요동 도사성)와 개원 사이에 있죠.

이 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게 되는데..

저 위에 언급한 자료에 나오듯..

명나라가 고려 국내에 설치하려 했던 철령위는
본래 현재 요녕성 철령시의 동남 500리쪽에 있었죠.
(명나라가 설치하려했던 첫 철령위 위치는 압록강 유역 강계 지역으로 추정)
그 현재 철령위는 요동 도사성(요양시) 북쪽 240리에 있었구요.

그러나, 조선의 개국 이후 태종 시기에 집중적으로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 국경 문제를 언급하여, 철령 이남 - 공험진 이남 지역, 여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삼산, 독로올 등 여진 지역들은 본래 고려 땅이었으나, 동여진이 반란을 일으키고,
 다시 원나라 시절에 매국노 조휘, 탁청이 땅을 갖고 원나라에 투항하게 되면서 잃게 되어, 여진족 근거지로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조선이 이 지역 일대의 영유권을 모두 인정받아 관할로 되찾은 것이죠.
이게 조선왕조실록 태종, 세종, 성종 대의 기록으로 나와있고, 명나라 공식사서인 명사에도 실려있습니다.
명사 지리지 및 성경통지 등등에 말이죠.

유조변책은 중요한게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1. 조-명 국경이 되는 '요동(=요양)시 동쪽 180리에 있는 연산 파절(連山把截)=연산 파수막입니다.

우리 고황제(高皇帝=주원장)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위는 조선왕조실록 성종 대 공조판서 남원군 양성지가 개주위 설치에 대해 간언한 내용입니다.
명나라가 과거 주원장이 철령위를 뒤로 물리고, 연산파절을 경계로 삼기로 했음에도,
이 약속을 어기고, 야인(여진족)들의 출몰을 막는다는 이유로,
봉황성 일대 개주 지역에 군사 주둔지를 마련하려고 하자, 양성지가 이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진언을 올리는 대목이지요.

즉, 그 말은 개주(봉황성 일대)가 명나라 직할령이 아니었다는 소리입니다.

사실, 조선의 경우에도 이 근처 일대의 관할권을 인정받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직접 군대를 배치하진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신단들이 의주에서 봉황성으로 가면, 노숙을 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봉황성에 오늘날처럼 유조변책이 설정된 것은 청나라 때부터죠.
그 이전에 명나라 시기에는 저 '유조변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대에 세워진 국경지대를 포함하긴 했지만요.

http://blog.daum.net/kimyjc01/15710014

결국 실질적으로 명나라 시절부터 조선은 석문령, 청석령 남쪽의 연산관을 국경으로 삼아,
그 동남부 간도 일대에 대한 명목상의 영유권을 명나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소리입니다.

*요동에서 의주까지가 동팔참이죠(동쪽 여덞개의 역참)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남원군 양성지

그리고 조선 후기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온 홍경모는 고려시기에 거란에게 석문령을 뺏겼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그 석문령이 바로 혼하를 건너 요동(=요양)시의 맞은 편이죠. 

이건 현지 중국 요령성 조선족 신문에도 실렸던 내용입니다.
고려영자촌이 이 석문령, 청석령 일대에 존재하고,
청나라 시인이 고려군이 주둔했음을 읊조리기도 했다 이거죠..

청나라사람인 오조건(吳兆騫)이 이곳에 이르러
도도히 흐르는 혼하수를 마주하고 력사의 풍운을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하여 시 한수를 읊었는데 그중 이런 구절이 있다.

“문황석일전료해, 차지고려역주병(文皇昔日戰遼海, 此地高麗亦駐兵”
즉 고려에서도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있었다는 말이다.

http://www.moyiza.com/bbs/view.php?bbid=main_news&no=22838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544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FREE_BOARD&nnew=2&y_number=59

여기서 해당링크 기사에서 '석문령'을 검색해서 읽어보십시요.

그리고, 결국 청나라 후기에 와서 숙종(1700년대)시기에 유조변책이 일방적으로 설치된 이후 1600년대에서
몇십년이 경과해서, 다시금 국경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 정계비 문제가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정계비가 설치된 지역이 분수령이죠.
근데, 당최 백두산 천지 동남쪽 4km에 백두산 정계비가 있었다는 건 누가 장담할까요?
거기 지명이 분수령일까요?

백두산 정계비는 일본군의 만주사변 이후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북한이 그 터에 기념비를 세웠다고는 하는데,
이게 단군릉이나 김일성이 가랑잎 타고 솔방울로 수류탄 만든 이야기 수준일지 알수가 없는 겁니다.

고려의 북쪽 경계가 되는 윤관장군이 세운 선춘령의 고려지경 비석도 사라졌죠.
일제시대 때 발견되었다가, 일본이 강물에 던져버렸다고 하던데..
이게 대략 두만강이 아니라, 그 북쪽 훈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7370

그럼에도 아직도 진흥왕순수비로 오해를 산 곳을 경계로 고려의 영토가 왜곡축소되어 있던 것이죠..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Ddfl&articleno=11793688&categoryId=0®dt=20111104140309#ajax_history_home

흠.. 그리고 위의 내용은 역사스페셜 내용인데..

사실 저 연산관 바로 동쪽 분수령이 저 분수령이 아닌 것 같군요.
헌데.. 이 역사스페셜 내용을 보면 청나라 시기 외국인들의 눈에 비쳐진 조-청 국경선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확실히 간도지방은 조선에 관할권이 있었고, 백두산 정계비 자체는 백두산을 탐낸 청나라가 조선의 관할영토를
뺏기 위해 무리하게 들어온 흔적이 있다는 것이죠.

뭐, 이것도 청나라 때 이야기일 뿐, 명나라랑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명나라와의 국경선은 "요동(요양) 동쪽 180리=(대략 70km) ..
동팔참에서 요동으로 들어가는 4일 코스 중 마지막 하루 코스에 해당하는 연산관=연산파절이거든요.
Centurion 12-02-15 18:56
   
뭐, 통일신라- 고려 영토 변천사를 보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가 삼국 후기, 고구려 멸망 이후 무렵에 이미..
요동 지역 일대로 진출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청나라 역사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신라 국경이 개원, 철령, 길림이라고 했고,
발해가 흥할 때부턴 다시 이 지역에서 밀려나 압록강까지 밀렸다고 나와있죠.

고려 때엔 왕건의 북진정책 이래 거란과 요동 일대를 놓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랬다가, 훗날.. 윤관의 9성 개척 이후 금나라가 흥하긴 했다만,
금나라는 선춘령 이남으론 딱히 넘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 홍경모는 거란에게 고려가 동팔참3백리를 지키는 석문령을 뺏겼다고 했습니다.
이 석문령 위치가 바로 요동 동쪽 혼하 건너편이죠. 거기서 밑으로 밀려서 고려영자촌이 있는 청석령, 연산관 일대로
밀린 듯 합니다.

그리고, 훗날 원나라가 흥하면서, 이 지역을 지키던 고려 관료들이 원나라에 땅을 바치고 붙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죠.
쌍성총관부와 동녕부가 배치되어 고려 땅을 삼키고, 정동행성이 고려 국정을 내정간섭했죠.

그래도 한편으론,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터라, 고려왕이 심양왕 자리를 겸하고,
고려의 왕족이 심양왕 지위를 원말기까지 이어가면서, 요동에 대한 관할권을 확보하기도 했죠.

그러다 원명교체기 때.. 공민왕이 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공격했고, 동녕부 치소가 있는 요양까지 공격했죠.
이성계와 지용수가 요양을 공격해 점령한 것은 엄연히 역사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이후 철군 한 이후..
이 지역 패권은 다시 원나라 잔당인 나하추에게 넘어갔고, 북원세력 토벌을 위해 만리장성을 넘은 명나라군이..
요동까지 진출해, 고려 영토 안에 원나라 때의 개원로 관할인 철령을 내놔라고 요구하며,
무례하게 일방적으로 철령위 설치를 선언하자..이성계의 "요동정벌"군이 출동하는 계기가 되는거죠.

여기서 위화도 회군이 벌어지는 것이구요..

어쨌든.. 통일신라시대부터 발해, 고려 초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 간도 지역 일대의 영유권은 대체로 한민족 정권이 갖고 있었습니다.

다만, 고려시대엔 몽고족의 중흥으로 인해, 조선 중후기엔 여진족의 중흥으로 인해,
애매한 완충지역, 비무장지대 비슷하게 버려진 것이죠.

명나라에게 인준받은걸로는 명목상의 영유권은 인정받았으나,
실제적으론 이 지역이 여진족 출몰지역 + 조선인들의 이주지역 + 비무장지대 비슷한 모습이 된겁니다..
푸헐헐 12-02-17 09:26
   
센트리온님과 억조경해님 두분의 댓글 잘 보았습니다. 센트리온님이 쓰신 본문과 댓글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정설로 받아지진 않는 부분이기도 하죠..

두분의 뎃글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데 센트리온님은 16세기 이전, 억조경해님은 18세기(박지원)즈음의 사료를 보고 계신 점입니다.

따라서 두분 말씀 모두 틀리지가 않습니다. 센트리온님의 주장처럼 국경선이 아니더라도 명나라에 대한 자주적인 모습은 틀리지 않습니다.
당시 고려말-조선은 명나라.. 정확하게 한족을 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다른 댓글에 적었지만..) 그 쪽수로 몽고에게 먹히냐는 비아냥이 깔려 있었지요( 그래서 최영,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구상한 것이구요)
그래서 조선 초반 명나라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이방원이 2차 왕자의 난 후에 왕위에 오르고 책봉을 인정 받기위해 노력하며 관계가 개선됩니다( 정도전을 척살한 것도 이유가 되지요)

16세기 이후 성취신분의 속성이 사라진채 양반체제가 확립되고 사림이 집권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면서 명나라를 '리' 조선을 '기'로 보며 사대적으로 변하였지요. 이무렵에는 센트리온님이 제시하신 내용은 있었더라도 사멸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냐면 숙종이 기해독대던가? 송시열과 독대중에 북벌의 뜻을 밝히며
'구련성을 깨고 심양을 건너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치고자 한다' 라기 때문이죠.. 우리 영토가 아니라는 말이죠..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이 북간도 지방일 가능성이 더 높은 이유로는 정계비를 세운 후 북간도에 간도관리사(감찰사 직) 이범윤을 보낸 것이 있습니다.. 이분 을사늑약후 의병활동 하셨지요..

그리고 마지막 댓글 중 고려 충선왕 충렬왕에 대한 부분을 조금 잘못아신듯한데..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고 고려의 왕족이 심양왕 지위를 원말기까지 이어가면서, 요동에 대한 관할권을 확보하기도 했죠. -
이부분 말입니다..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은 어머니가 원나라 제국공주에 외할매는 쿠빌라이칸이였습니다.
원나라 황제계승서열 12위이기도 했구요. 어릴적 원나라에서 생활 했으며 충렬왕과 사이가 안좋아서 서로 한번씩 폐위되고 복위하곤 하는데..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때 황제계승서열 11위 회령왕(?)과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회령왕이 황제에 오르면서(앞에10명 다 죽음) 충선왕이 회령왕이 황제가 되는데 공이 있다며 심양왕을 겸하게 됩니다.
여기서 충선왕이 말년에 회령왕 사후 역적으로 몰려 티벳으로 유베를 가면서 고려왕은 아들에게, 심양왕 자리는 조카 '고'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잘못알고 계신게 고려왕이 심양왕자리를 동시에 가진건 충선왕때 뿐이고 심양왕은 고려를 탐하였기에 왜 고려만 본래의 풍습과 왕조를 지키냐면서 모함해  충숙왕때 원나라로 끌려가 왕조가 없어질뻔 합니다.
입성책동요.. (물론 세조구제로 위기탈출 했지만)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였기에 요동에 대한 지배력이 있었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무튼 좋은 댓글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