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M1 전차가 공개되자 화력 분야에서 걱정하는 양반들이 많았는데, 거액의 개발비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M1 전차의 주포는 M60 패튼 전차와 동일한 M68A1 105mm 강선포로 다른 주요 3세대 주력 잔차와 비교하면 여전히 1세대 이전의 장비였다는 점 때문이었음.
영국군은 1965년부터 치프틴에 120mm 강선포를 장비했고 서독군 역시 79년부터 120mm 활강포를 탑재한 레오파르트2 전차를 내놓은 상태. 그럼에도 미군이 M68A1 105mm 강선포를 고집한 것은 다음의 4가지 이유가 있었음.
1. 120mm 주포를 도입하여 포탄을 사용하면 보급 체계의 혼란이 초래되고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반면 105mm 주포로 통일하면 NATO 회원국가들의 막대한 보급 재고가 있으므로 보급면에서 매우 유리하다.
2. 라인메탈사의 120mm 활강포를 도입하다가 M1 전차의 생산이 늦어지면 단가가 늘어나고, 최악의 경우 의회에서 생산 중지 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다.
3. 신형포탄을 쓰면 105mm 강선포라도 소련 전차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다.
4. 근본적으로 외국제 주포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로 나뉨. 특히 4번이 제일 강했다고 함. 물론 M68A1 주포도 영국제 L7 105mm 포를 개수한 후 라이센스한 거라 순수한 국산은 아니었으나, '준국산' 으로 쳐줬고 독일제는 미국의 자존심이 용납을 하지 못했다고함.
특히 반대파들은 기존 105mm의 신형탄으로도 충분하며 무엇보다도 서독이 E-3 센트리를 구입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독일제 120mm 주포를 M1 전차에 장비하려는 것이라며 극렬히 반대했다고.
이는 정치적 문제로 번졌고, 미 정부와 국방부는 M68A1을 고집하는 육군과 자국 기업의 반대를 찍어누르면서까지 독일제 주포를 채용할 의향이 없어서 결국은 105mm 강선포를 장착한 M1 전차가 나오게 됨.
물론 미 육군도 M68A1 105mm 강선포에 만족하지 않았고 76년에 테스트를 했는데 클리포드 알렉산더 육군 장관은 M68A1의 선정을 바라는 자국 기업과 군 상부층의 기대와는 달리 라인메탈제의 120mm 활강포를 선정함.
또 다른 문제로는 기술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었는데 도량형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다고 함. 독일과 달리 미국은 여전히 인치 단위를 사용하고 있었고 도면, 공작기계, 품질규격 등의 통일부터가 대규모 사업이었음.
여기에 독일제를 그대로 채용하지 않고 미국식으로 수정하겠다며 미국 측이 고집을 부린 것도 큰 문제로 지적됨. 경량화에 심각할 정도로 집착하던 미국은 포 체계, 특히 포탄을 장전하는 포미부 개수로 경량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라인메탈이 개수를 맡아서 원판 대비 20% 가량 경량화에 성공함.
원래 계획보다 4년 늦기는 했으나 1984년 8월부터 라인메탈제 120mm 활강포를 탑재한 M1A1 에이브람스 전차들이 생산에 돌입하게 됨. 이 때 M1A1의 도입이 늦어지면서 걸프전 당시 미군들이 곤욕을 치뤘는데, 바로 제24보병사단과 제1기병사단의 전차들의 문제였음.
얘네는 전부 M1 전차로 무장하고 있었고, 열화우라늄 장갑도 설치되지 않았으며 T-72 전차와의 정면 승부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 더 큰 문제는 개인 화생방 방호 장치의 여부였는데 미군은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나 M1의 경우 승무원들은 방호복을 입어 무사하더라도 전차 내부가 오염되어 전투력 하락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M1A1 전차로 대체하자는 의견이 대두함.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칼 부오노 대장은 중동에 전개된 M1 전차들을 전부 M1A1으로 개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노먼 슈워츠코프 중부군 사령관은 전차병들이 적응할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거부함.
그러나 부오노 대장이 슈워츠코프를 설득해서 급하게 M1A1으로 대체가 시작되었고 사우디 담맘항에 전차 개수공장을 건설하고 M1A1으로 개수를 시작함. 당시 개수 대상은 제1기병사단의 M1 전차 360대, 제24보병사단의 IPM1 전차 235대, 제1보병사단의 M1 전차 240대로 총 835대였음.
전부 M1A1이 4년 늦게 나오면서 배치가 지연된 본토 주둔 부대들이었고, 독일 등에 대량보관하고 있던 POMCUS 등에서 865대의 M1A1 전차들을 확보하면서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함.
담맘항의 개수 공장은 하루 평균 20대의 전차를 개수했고, 전쟁이 끝날 시점까지 개수된 M1 전차는 총 1,032대에 달했다고. 그래도 모든 사단들이 M1A1을 장비하지 못했고, 제1보병사단의 경우 사우디 배치가 늦어지는 바람에 2개 기갑대대가 M1 전차를 그대로 이끌고서 전장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음.
출처
걸프전 대전차전, 카와츠 유키히데 61~67P
[출처] |작성자 오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