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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6 14:50
[기타] 한국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본 한국군
 글쓴이 : 노닉
조회 : 5,672  



...Common South Korean practice was to fight in place until overwhelmed or out of ammunition, then flee in small parties wherever the terrain allowed, but not on the roads, which were almost always blocked by Chinese ambushers. The Koreans would not fight for the last truck or artillery piece or road junction, which angered the Americans, who thought they should. The Koreans fought well in the mountains, but not in corridors, which tended to jam with vehicles and support units who raced out of danger in a crisis. Only the ROK 1st Division received American augmentation: two artillery battalions and a tank battalion. The Chinese initially thought it was an American division. The Chinese also learned that ROK divisions could not bring much indirect fire to bear on a swift night attack and thus targeted ROK divisions for their initial penetrations. The Chinese actually thought Korean infantry fought with more stubbornness than American GIs (Marines excluded) and proved harder to catch when they took to the mountains...

한국군은 중공군을 맞이해서 일반적으로 압도당하거나, 혹은 탄약이 모두 소진되기 전까지 위치를 고수하며 전투를 치루는 게 대부분이었다고 함. 비록 일부 소규모 부대들이 탈주하기는 했으나 중공군이 주 도로를 장악하고 포위를 해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고.

개별 단위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고, 특히 한국군이 산으로 퇴각하여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중공군도 이들을 제압하는 것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꼈다고 함. 다만 도로로 철수하면서 중공군과 붙으면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고, 차량이나 지원부대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함.

한국군 1사단에 대해서는 2개 포병 대대와 1개 전차대대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의 강습을 받아치자, 중공군이 한국군 1사단을 미군으로 오인한 적도 있었다고.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 산에 들어간 한국군은 미군보다도 상대가 어려우며 (미 해병대 제외) 매우 완강한 상대였다고 오스트레일리아 측은 언급하고 있음.

다만 적어도 당시 한국군 지휘부는 무능하고 겁쟁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비난하고 있는데 아마도 현리 전투 등을 보면서 오스트레일리아군이 한국군 병사들은 용감하지만 사령부는 무능하다고 지적한 것으로 보여짐.

중공 측 기록도 비슷한데, 위의 내용은 Peng Dehuai report as quoted in Zhang Shu Gang, Mao's Military Romanticism: China and the Korean War, 1950-1953 (Lawrence, Kansas: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5), 106-107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라고.

P.S. WhiteCloud님께서 '단순히 저렇게만 봐서는 사격 군기가 문제인건진 잘 모르겠고 동시기에 비교적 잘 훈련받은 미군의 경우는 어떠했는지를 비교해보고 싶군요.' 라고 언급하셨는데, 미군 사례는 찾지 못했고 대신 오스트레일리아군 소속 3RAR가 소모한 탄약량에 대한 자료는 찾았습니다.

3RAR는 마량산 전투에서 51년 10월 3일부터 8일까지 오스트레일리아군 3RAR 소속 3대대가 중공군과 격전을 치룬 전투로 5일간 전투에서 90만 발을 소비했고 12,000발의 수류탄을 사용하여 289명을 사살하고 3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다수의 부상자를 내도록 했습니다.

옹진반도에서 하루 만에 140만 발 이상을 쓴 국군 제17연대와는 대조되는 소모량입니다. 비교적 훈련을 잘받은 제대들은 철저하게 사격 통제를 통하여 최대의 전과를 올렸는데 오스트레일리아군 제3대대가 그런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출처
THE KOREAN WAR 1950-53: A 50 YEAR RETROSPECTIVE 
Peng Dehuai report as quoted in Zhang Shu Gang, Mao's Military Romanticism: China and the Korean War, 1950-1953 (Lawrence, Kansas: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5), 106-107

[출처] 작성자 오로라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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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ke 18-03-06 14:56
   
총소리 나자마자 도망친 개승만 따라 하기에 익숙한 지휘관들...
국민,백성 모두 버리고 지들만 살라고 한강다리 폭파하고 도망쳤는데.. 그깟 강제동원병력이야
발바닥에 껌취급도 안했을거예요...
     
아비요 18-03-06 15:07
   
어쩔수 없었죠. 사실상 그때 군대 지휘부는 엽관제로 대통령이 그냥 데려다 앉힌 비전문가 집단이었죠.  지금처럼 제대로된 군사교육을 받고 부임한 사람들이 아니여서 별의별일이 다생겼죠. 적어도 625당시 한국군 대가리들만 제대로된 군사 전문가들이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거 같네요.

문제는 그넘들이 지금도 할배가 되서 군대 원로들이라고 대접받고 있어서 지금 군에도 저넘들 영향받은 애들이 중요한 자리에 많을지도 몰라요.
술나비 18-03-06 15:08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무능할 수 밖에 없었던 게 대부분 일본군 출신 친일 매국노들이었기 때문이죠.
자기 목숨에 1촌이라도 위해가 갈 듯하면 바로 튀는 놈들인데뭐....
1사단 얘기가 나오는데 1사단장 백선엽도 일본군 출신이죠.

이놈은 나중에 전역후 인천으로 돌아와 선인재단(백인엽 백선엽의 이름을 딴 거임)을 만들어 황제처럼 군림하다가 80년에 전두환이한테 쓸려 나갑니다. (부정부패에 의한 재산몰수)
그래서 생긴게 지금의 인천대학교죠.  원래 70년대에는 선인공전이었습니다.
     
SimonHS 18-03-06 17:44
   
당시 일본군 교리상 오히려 후퇴라는게 없이 전원 옥쇄의 느낌으로 싸웠어야 될텐데요?
     
청량산아래 18-03-06 19:08
   
무슨 얘기인지... 한국군은 제대로 된 군사훈련 받은 적이 없는 오합지졸에 무기도 형편없음에도 열심히 싸움.
백선엽은 그중 훌륭하게 싸운 양반인데... 왜 욕하는 거지? 너님이 젊었으면 더 훌륭하게 싸웠을 것 같음?
내가 볼때는 키보드워리어 같다능...

목숨걸고 싸운 사람한테 친일파 운운하는 건 정말 나쁜 짓임. 차라리 우리 역사상 최악의 동족상잔 원흉인 김일성한테 김일성 개생퀴 해봐!
4leaf 18-03-06 15:18
   
당시 한국군 수뇌부 중 수천 수만단위의 군을 움직인 경험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위에 나오는 백선엽장군, 김종오장군 등 한국군내의 경쟁력있던 장군들도 당시 30대였어요.

지금 시대엔 겨우 영관급 달고 할 나이에 사단, 군단을 책임졌으니 대규모 군대운용이 매우 서툴다는건 당연지사일겁니다.
     
현시창 18-03-06 16:02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실전에서 사단급 제대지휘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을 한직에 처박아둔 이승만의 실책이 정말 뼈아픕니다.
전쟁망치 18-03-06 16:06
   
저때 백병전 1, 2가 호주랑 터키
담덕대왕 18-03-06 16:12
   
생각보다 좋게 평가했군요.

그 당시 군대 성격의 무장투쟁을 한 것은 중공군에 소속된 항일 빨치산 정도로
한국군에 투입된 군자원은 일본군에 속해서 전쟁 치뤄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투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은 6.25전에 대대장들이 한국군 대대를 이끌고 집단 월북하는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등..
군의 체계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 마저도 남로당 소속의 군인들이 많아서 6.25 전에는 이들을 숙청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숙청 당시에는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지만... 6.25 발생 후에 이들을 숙청
하지 않았으면 한국은 망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문제는 한국군이 북한군에 밀릴 때는 당나라 군대 처럼 행동했는데... 북한군도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후퇴할 때는 당나라 군대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전투에는 강했지만... 일단 한 번 기세가 꺽이면
아주 형편없는 군대로 변하는 문제가 남북에 모두 있었지요. 오죽하면 미군에서 체계적으로 후퇴하는
방법을 훈련하고 했을까요. 이 점에서 백선엽은 나름 공격과 후퇴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었죠.
개개미 18-03-06 16:17
   
우리나라 전작권이 넘어간 이유이기도 하죠....
군 쉬뇌부의 무능..
랄랄라라라 18-03-06 16:42
   
625하면 개전 극초반에 교량을 끊어 지연 전술을 펼쳐야 한다는 건의에 대해 '우리는 북진을 할 것이므로 교량 파괴가 뭔 말이냐?'라며 교량 파괴를 반대하다 한강 철교를 끊어먹은 채병용이 떠오르네요.

그리고 바스티옹 전투에서 101사단과 함께 제 10 기갑 사단의 기갑 장교로 복무하다 종전후 한국에서 군사 고문으로 있었던 로버츠 준장이 떠오르죠. 우리 장군들이 '기갑전에 무지하다'는 그 로버츠 준장.. 쩝. (누가 누굴 보고 무지하다는 건지.)

솔직히 말해 개전 초기에 대기갑 전술이 제대로 작동되어 대전차 지뢰만 제대로 매설하고 그걸 바탕으로 대전차 화기를 운영했어도 마켓 가든 작전처럼 진격 자체가 돈좌되었을테고, 그 이후에 미공군의 폭격으로 북괴군은 빠르게 섬멸되었을텐데... ㅠ
     
바람노래방 18-03-06 17:43
   
로버츠 준장이 정확히 판단했죠.

대전차 지뢰가 엄청나게 쌓여있고, 다리 몇개만 부셔도, 좁은 산악 도로가 태반인 지형에서,
오로지 퍼싱 달라고 때만 쓰는 국군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요.
대전차포도 포탄 아낀다며 사격 연습도 안시키고, 그래놓고 홀라당 다 인민군한테 갖다 바치..
무능한 일본군을 고대로 빼닮았죠.
또공돌이 18-03-07 02:38
   
병사가 오합지졸이 아니라 지휘관들이 오합지졸!
승리만세 18-03-07 07:12
   
병사들이나 장교들이나 질적으로 무능했고 그나마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사람은 일본군 출신밖에 없었습니다. 백선엽 같은 사람들이요, 안타깝지만 쓸만한 자원이 일본군에서 일본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 뿐이라 그들을 뽑을수밖에 없었죠. 그나마 백선엽은 공이라도 세웠지 진짜 무능한 지휘관들이 너무 많았음
     
모래장수 18-03-07 13:48
   
위에 현시창님이 언급했지만, 그나마 사단급 병력을 이끌고 실제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같은 분은 뒷방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장개석의 중국군이 었지만 전투를 아는 지휘관은 버려둔체, 만군출신과 일본육사출신들이 승승장구했습니다. 그게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어떤인간인지를 잘 알려주는 상징이죠. 그러니 채병덕같은 병참장교나 했을이를 참모총장으로 앉혀두고 6 25 터지고 서울함락당할 때...  그 끔찍한 무능함으로 썰려나가는 국군을 방치했던것이 이승만입니다.

대전으로 도망갔다 이도 안심이 안돼 다시 대구까지 야밤으로 내달렸던 이승만무리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선조같은 꼴이었습니다.
          
다크사이드 18-03-07 20:02
   
뒷방에 쳐박아두진 않았죠~ 이승만 특별지시로 육군사관학교로 임관해서 6.25때도 활약을 펼치다가 영어가 안되서 미군에게 잘린분...  이때부터 능력보다 영어가 중요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