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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16 00:02
[전략] 2차대전 아르덴 전투 의문점
 글쓴이 : 하시바
조회 : 2,322  

살상,테러,IS,혐오등의 관련된 모든 영상이나 이미지는 절대 금합니다.(단순 전투영상,이미지 포함)<br>
통보없이 삭제하며, 재발시 강제조치합니다.

 알만한 사람들은 대략 전개된 양상에 대해 알고있을테니, 평소궁금하던걸 여쭙고 싶습니다.

구데리안이 덩케르크로 진격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영,프 등 연합군이 전부 무너져버렸는데,

실상 물량이나 병력수, 전차등 병기의 수준은 연합군이 더 우세했던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그 많은 군세로 길어진 독일군의 진격로 및 보급로를 어디든 남하해서 뚫어버릴수
도 있었고 남쪽 프랑스 예비군이 조선시대 의병처럼 공격할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그 많은 수백만의 군대가 허겁지겁 무기도 팽개치고 도망을 친겁니까?
그대로 50만쯤 떼어내서 독일본토로 공격을 감행할수도 있었을텐데...

 아마도 연합군 지휘부입장에서ㄴ 보급이 끊기면 전투가 어려워질테니 빨리 퇴각했던거 아닐까란 생각을 해봤는데요.

좀더 깊게 생각해보셨다면 가르쳐주세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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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마루요 18-03-16 00:11
   
제 기억이 맞다면 항공전에서 털려서 프랑스 전차들이 죄다 슈트카 먹이가 된걸로 압니다.
     
하시바 18-03-17 00:46
   
슈트카가 상당한 견제는 됐겠지만 연합군 병력이 수백만인데,  그걸후퇴원인으로 삼긴 어렵지않을까요?
나기 18-03-16 00:27
   
"아르덴전투"가 아닌 "낫질작전" 얘기를 하고싶으신 듯 하군요. 다음 블로그 봉달이님의 "봉달이의 삐딱한 전쟁사" 가보시면 "연합군 전차부대의 삽질 원인" 이라는 장문의 게시물이 있습니다. 참고해 보시길...ㅎㅎ
     
랄랄라라라 18-03-16 00:29
   
그 포스트를 읽어 보면 괴담이 튀어나요죠. 적으 측면을 공격할 예비대가 아예 없었다는 머 그런 괴담이...;;;
     
나기 18-03-16 20:32
   
읽어보셨는지 알 수가 없으므로 조금만 정리해 드립니다.

1.1차대전 종전 후, 각국에서는 군비축소와 함께 탱크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지만, 군대 내의 보수파는 격렬히 반대를 했으며, 아직 탱크라는 무기체계에 대해서 명확한 특성조차도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또한 이시기의 탱크는 기계적 신뢰도가 극히 낮았다.

2."풀러"는 전격전의 청사진과 다름없는 "작전계획 1919"를 출간하였고, 각 나라에서는 기계화 부대에 대한 선구자들이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탱크를 보병부대에 종속시키려는 보수파의 반대는 매우 극심하였다. 1927년 영국에서 여단급 "실험적 기계화 부대"가 창설되었고, 그 훈련과 전쟁연습에서 소규모의 기계화 편제로 우수한 기동전을 펼치며 대규모의 재래식 군대를 개박살내는 과정은 "보라색 가이드북"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1931년에는 개별 전차들에 무전통신장비까지 설치한다. "보라색 가이드북"은 구데리안 같은 독일군 기갑 예찬자들에게는 바이블이 되었지만, 영국의 유능한 기갑부대 선구자들은 영국군에서 예편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한다. 이는 미국 프랑스 소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프랑스는 전차라는 양과 질에서 독일을 능가하였으나, 유능한 기갑장교가 부족하였고, 특히 최고사령부는 전차나 항공기 등의 최신 장비들을 집중 운용하는 것에 무지하였기 때문에, 전차에 실용적인 무전기를 다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4.프랑스 최고사령부의 주관심 사항은 마지노선을 유지하면서, 프랑스 국경 밖에서 독일에 맞서 싸우는 일이었으며, 이를 위해 벨기에 네덜란드 같은 동맹들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마지노선을 제외한 유일한 예비대인 7군을 포함한 전군을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 근처로 대규모 기동을 해야만 했으나 프랑스군의 보급체계는 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5.유일한 예비대였던 7군의 주둔지는 랭스였는데, 독일 A집단군이 출구인 스당에서 파리 혹은 벨기에 쪽으로 기동을 하게된다면, 랭스에서 출동한 7군은 A집단군의 옆구리를 남쪽에서 사정없이 후려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A집단군이 아르덴 숲을 지나서 스당에 나타나자, 가용가능한 예비대가 없는 프랑스군은 급격하게 무너진다.

위에 내용들은 축약된 내용이므로, 되도록이면 직접 한 문장도 빼지 말고 다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솔직히 제 생각은 누군가가(God?) 독일이 초전에 맘껏 승리하도록 판을 쫙 깔아준 느낌입니다.
          
하시바 18-03-17 00:14
   
4에대해서 ...프랑스 정도면 영국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선진국일진데 보급체계가 그렇게 형편없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렇게 움직임이 둔하니까 당한것일지도
KCX2000 18-03-16 00:51
   
1차대전때 프랑스와 독일 국경외에 벨기에를 통해서 독일이 진격을 하는바람에 전선이 뚫릴 염려가 있엇죠.
이거때문에 벨기에쪽에 영프 연합군이 배치가 된건데 아르덴이라는 숲을 통과해서 프독 국경선, 벨독 국경선
사이로 교묘하게 전선을 돌파해버리비다.
그리고 이 돌파부대가 그대로 도버해협으로 돌격을 시작했죠.
전형적인 돌파 우회후 포위라는 지금은 교과서적인 전투를 선보인겁니다.

모든 군대는 퇴로가 없으면 끝장이죠. 벨기에쪽에 배치됐던 영프 연합군 약 40만이 포켓안에 갖히건데
영프연합군이 상대하던 독일집단군은 상대적으로 약체지만 그냥 방어만 하는데는 무리가 없었죠.
이걸 뚫고 독일로 진격한들 퇴로도 없고 보급도 없는 상태에서 죽을꺼 뻔히알면서 돌격?
그런건 있을수없습니다. 물자는 있다해도 병사들 사기가 0 인겁니다.
     
하시바 18-03-17 00:11
   
연합군 심리로 대입해보면 역시 불안해서 후퇴 후 결집을 택하기 쉽겠지요.

근데 무기는 들고 퇴각해야 역습도 가능할텐데 다팽개치고 도망한건 너무 어이없네요.
바람노래방 18-03-16 01:03
   
아주 상식적이면서 정상적인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프랑스는 100만이 넘는 군대가 여전히 건재한 상태였죠.
개인적으로 당시 프랑스군의 이슈는 두가지 였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네델란드로 크게 우회하려는 독일군을 저지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였습니다.
이는 몰트게의 유훈 같은 것으로 독일군도 알고 프랑스도 알고 있어서 독일군이 정말로 우익을 강화하려 한다면 네델란드로 진격해서 막아야 하지만 행여나 벨기에 통해 관통 당한다면 프랑스군이 절단 될 것을 우려하여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횡설수설한 이동 명령으로 프랑스군 전체가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벨기에군이 너무 쉽게 돌파 당해 버림으로써 이런 혼란 상황이 초래 된 것입니다.

둘째는 수송 능력의 부족입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 보다 숫자도 많고 강력한 전차와 더 많은 병력을 보유했지만, 우왕좌왕 하는 사이 병력이 분산되어 버렸고 독일군에게 계속해서 각개격파 당해버리는데, 이게 수송능력의 부족으로 병력을 빨리 이동시키지도 못하고 전차의 연료 공급이 원할하지도 못해 프랑스군 전차의 상당수가 연료가 떨어져 버리지게 됩니다.
수송력의 부족으로 많은 병력과 자원이 있음에도 원하는 지역으로 병력을 모을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초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병력은 여전히 많았지만 지휘부가 이미 멘탈이 붕괴해서 자포자기해 버렸습니다.
1차 대전 세대였던 프랑스군 지휘부는 참호전의 지옥을 떠오렸겠죠.
프랑스군의 패배는 지휘부의 멘탈붕괴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휘부의 붕괴와는 별도로 실제로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전투는 이후에도 한참이나 지속됩니다.
     
하시바 18-03-17 00:07
   
음 아주 좋은 답변인것 같습니다. 전차도 당대최고수준으로 보유했던 프랑스가 수송능력이 딸려 그렇게 허망하게 쓰러졌다니 기가차는군요
ultrakiki 18-03-16 01:16
   
수십년이 지나서 모든 상황을 보면 그런 생각하실수도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숫자만 가지고 게임처럼 덧샘뺄샘으로 판단할수 없는 문제입니다.
대장장이 18-03-16 01:48
   
일단 2차대전 전까지 전차의 개념부터 알려드려야 할듯합니다
일반적으로 2차대전 전까진....아니 독일이 2차대전때 전차를 운용하는 모습을 보기전까진 전차라는 무기는 그냥 보병을 화력지원해주는 지원부대격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개념이 틀어박히게 된 원인은 1차대전때의 전차 운용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독일은 웃기게도 상대적으로 프랑스보다도 전차 전력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가 전차들을 일선 보병부대에 뿌려놓듯이 운용하기보단 하나의 부대로 집단운용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전까지는 전차를 여단이나 사단으로 뭉쳐서 운용할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전차들이 집단으로 돌격해오는 것을 몇대의 프랑스 전차들로서는 막지를 못했습니다...
전체적인 전력이 우세해도 집중운용하는 것과 넓게 흐터져서 상대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죠...
G스마트SM 18-03-16 02:01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연합군의 예상을 상회하는 속도로 무너지고
수많은 독일군의 공작원 스파이들이 유언비어로 사기를 흔드는 타이밍에 슈투카의 폭격이 더해져 혼란은 가중되고 독일군의 30~60마일가량의 속도로  이동함에 있어 연합군과 가까워 질수록 독일군 입장에서는 병참선은 더욱 늘어나는 문제가 생겨나지만 오히려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고
독일군은 기갑의 집중과 활용인데. 연합군은 보병지원에 한정적으로 활용하고 독일군의 급강하 폭격기 나 전투기와 대공포 등으로 제공권 확보는 되지만 개전 초기 연합군의 공군은 분산되어 대응이 힘들었던
이래저래 숫적으로 양적으로 또는 부분 질적으로 우세하기는 하였지만 워낙 복합적인 요소로 인해 대전 초기
패배...
혹시 이탈리아 군 때문에 프랑스 군의 병력 일부가 남부지역이나 아프리카로 분산된것도 포함 될려나요?
입싱 18-03-16 02:13
   
독일 C집단군은 마지노 선 견제 중이였고,
B집단군은 벨기에 정면으로 진격 중이였고,
A집단군이 아르덴을 치고나와 영불 해협으로 달렸습니다.

프랑스는 당연히 기존 전쟁 하던데로, B집단군의 벨기에 서진이 주력이라고 생각하고,
150만 주력을 벨기로로 이동,
가만히 있었으면 그렇게까지 괴멸까진 안되었을텐데, 이동까지 해버린 상태에서,
A 집단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어서, 완전히 조직이 괴멸되버린 것이 독프 전쟁.

나머지 잔여 프랑스 사단들은, 그냥 숫자일 뿐, 전쟁 수행 능력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하시바 18-03-17 00:20
   
그래도 나름 현대군이고 소총을 든 집단일텐데 전쟁수행능력이 없었다니...억측아닐까요?

아마도 주력이 증발해버려서 당혹감 때문에 나머지 다수가 자신감을 잃고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주력이 몰살당한것도 아닌데 너무 허무하게 당한듯싶네요
Har00 18-03-16 07:15
   
당시 프랑스의 대전략은 전선에 마지노선을 구축하여 적의 선봉을 막는 한편, 마지노선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후방에 기동 방어군을 두어 격퇴한다는, 마지노+기동방어 전략을 수립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르덴 숲을 통과한 독일군이 그 기동 방어군을 조기에 격멸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로서 프랑스로서는 전선에 고착된 병력만 있을 뿐, 이들을 지탱해줄 후방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또한 역공을 펼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당시 독일도 마지노선에 대응해 그 못지 않은 지크프리드 선을 전방에 펼쳐둔 상황이었습니다.
마지노선 못지 않은 지크프리드선을 돌파하기 위해선 전력을 한곳에 집중하고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할 지경인데, 이미 후방이 괴멸된 상황에서 한곳으로 뭉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거니와 각 부대별로 공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와 다름 없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후방으로 퇴각해 재편성하는 것인데, 적을 눈 앞과 뒤에 두고 후퇴하기는 쉽지 않았고,
이 방법 마저 독일군의 전격적인 공세로 가닥가닥 끊어지고 말았죠.
     
하시바 18-03-17 00:26
   
아~  멋진 답변인것 같습니다.

지크프리드를 뚫을지 자신이 없어 독일로 진격은 못하고,

지휘부가 명령체계가 잘 작동하지 못했는지 결집도 신속히 이뤄지지 않은데다가

독일군의 지속된 견제 및 선제공격감행으로 결집이 더 어려워졌다는 뜻인것이죠?
더불어 형세가 보급은 계속 어려워질 상황이고
노브레인 18-03-16 09:50
   
당시 독일은  전격전이라는 신개념 전투방식을 도입하고  적의 허를 찌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전투방식.
한마디로 싸움 하는 방식이 달랏지요, 거기서 멘붕,

몽고군이 유럽대륙을 아작낼때도 보면은 신개념 전투방식에 털려버린것,
우주인간 18-03-16 14:03
   
'전격전의 전설' 이라는 책에 그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있죠.

당시 너무나도 빨랐던 독일군의 공세속도에 아군도 놀라고 적군도 놀라는 상황에서

1차세계대전때 독일군에게 탈탈털렸던 프랑스인들의 멘탈이 와장창 되버린 관계로
마지노선의 병력을 오히려 증원시키는 오판을 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공세중인 독일군을 저지시킬 병력이 부족해지고요,

1차 세계대전의 소모전에 익숙해진 높으신 분들이 공군을 최대한 아끼려 들었고,
자연스레 최대한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마치려는 독일 공군에게 축차적으로 병력을 내어준 샘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제공권도 독일이 갖게 되겠죠?

거기다 프랑스인들의 고전적인 문제점인 행정적 이유로 (예를 들어 전화수들이 밥먹으러 간다며 2시간동안 사라진다거나 작전지역 둘러본다며 사령관이 지휘도 내팽겨치고 나갔다온다거나) 하며 반격을 가할 타이밍도 제발로 차버린 셈이 됬지요.

마지막으로 연합군은 최대한 전쟁이 나지 않을거라며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폴란드가 쑥대밭이 되도 무시한다거나....

이러니 제대로 된 대처방안도 없었죠.

말씀하셨듯 동부전선의 마지노선에는 수십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할때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라는 명령 이외에는 받지 못했습니다...
     
하시바 18-03-17 00:31
   
참 통신이 어떻게 저리도 미개할수 있습니까? 그것도 당대 최고의 선진 프랑스가

마지노의 병력에 대한 명령이 저 지경이니

벨기에 전역에 깔린 군이라고 재빨리 명령을 내려 자유자재로 지휘하긴 어려웠겠군요.
관심병자 18-03-18 10:33
   
한국전쟁때 상황으로 비교해보면,
프랑스는 참호전, 고지전을 준비했다면,
독일은 상륙작전을 한겁니다.

당시 최강 육군을 보유했던 프랑스였지만,
독일에 비해 군사교리에서 뒤쳐져있어서 독일의 공세에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싸우고 이기고 전진 < 이런식의 전투에 프랑스가 대비했다면,
안싸우고 돌아가서 퇴로를 끊고 전투 < 독일은 이런 방식을 사용한겁니다.
퇴로가 끊기니 사기가 떨어지고 보급이 끊기고 그렇다고 뒤의 적을 상대하려니 앞에도 적이 남아있고,
앞으로 공격해서 이겨도 보급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뒤를 잡은적을 공격하자니 기동력이 따라가질 못할뿐 아니라 자신의 뒤가 약해지게되고,
최고의 수가 버티면서 다른 기동가능한 아군이 자신들의 후방으로 치고들어온 적을 처리해줘야 하는데,
치고 들어온 적이 전차로 중무장한 병력인거죠.
프랑스는 정예군을 전방에 모두 꼴아박아놓은 상태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된거죠.

중국 고사에 있는 말관련 경주 얘기처럼,
A가 B / B가 C / C가 A 를 상대한것처럼,
독일군은 프랑스군이 어떤식으로 대응하든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수 있게 짜놓고 움직인것이고,
군사적으로는 우세했으나 이런식의 전투에 대비하지 못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계획대로 무력화된것이죠.

이런 독일의 전격전의 결과에 대해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이해될 예가 인천상륙작전 입니다.
낙동강 방어선만 넘으면 북한이 이길 상황에서,
연합군이 인천을 쳐서 보급로, 퇴로가 끊길 위험에 처하자 북한은 장비를 버려가면서 급하게 퇴각했습니다.
이는 북한군이 소련군에게 훈련, 교육받은 이유또한 있는것으로,
소련은 2차대전때 독일의 이런 전술에 크게 당했고, 대전 후반기에는 반대로 소련이 독일에게 똑같이 썼었던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이 우회해서 포위된 국군이 사기가 박살나고 참패를 당한것도 위와 유사하다고 할수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