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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21 02:01
말메디
 글쓴이 : 던킨스타
조회 : 2,564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의 대반격으로 시작된 '벌지 전투(Battle of Bulge)'가 벌어진
벨기에 아르덴느 전선. 제프 디트리히 SS대장이 지휘하는 제 6장갑군(6th SS Panzer Army)의 좌익(左翼)을 담당한 제 1 SS전차연대장 요하임 파이퍼 중령이 지휘하는 '파이퍼 전투단(Kampfgruppe)'은
아르덴느 북방 Monschau 와 Losheimergraben 사이의 연합군 전선을 돌파하고 뮤즈강을 건너 안트워프를 탈환하기 위해 전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점령한 도로 중 상태가 좋은 것은 제 1 판쩌사단을 위해 남겨졌고 파이퍼 자신은 그 보다 떨어지는 도로를 사용하게 되는데 티거 II와 같은 중장갑 차량이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입증해 보였죠. 작전의 성공은 신속한 기동을 통해 뮤즈 강을 건너는 다리의 확보가 관건이였는데.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그 어떠한 미군의 저항도 모두 일소시키고 미군 유류저장고를 습격해 저장된 가솔린을 탈취한다는 것도 고려되었습니다. 특히 히틀러로부터 직접 하달받은 특별명령은 작전수행에 방해가 되는 적은 포로를 만들지 말고 잔인하게 처단하라였습니다. 나중에 Sepp Dietrich가 전범심판 당시 인정한 부분이기도 하죠. 어떤 소스에 의하면, 파이퍼가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부하들에게 브리핑하는 과정에서 벨기에 시민들이나 적에게 그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말고 포로를 잡지말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1944년 12월 17일 새벽, 작전에 돌입한 파이퍼(Joachim Peiper)는 Honsfeld로 진격중 수십 명의 미군 포로를 잡아 잔인하게 학살하고 이어서 연료보급을 위해 뷜링겐의 미군 연료보급소를 급습하여 연료를 탈취하고
(루마니아가 붕괴된 이후로 독일의 연료난은 심각한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죠.) 또 다른 미군포로 50여명을 학살합니다. 이 시점에서 파이퍼는 적 후방에 위치하게 되는데, 만약 그가 뷜링겐에서 북쪽 Elsenborn쪽으로 나아갔다면 아마도 미군 제 2사단과 99 보병사단에 의해 포위될 상황이였습니다. 여기서 파이퍼는 우회해 Mödersheid, Schoppen, Ondenval 그리고 Thirimont를 거쳐 Ligneuville을 공격하려고 마음먹습니다.
이 기동은 지형이나 도로여건으로 볼 때 무척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Thirimont에서 직접 Ligneuville 방면으로 진출하는게 여의치 않았고, 그 결과 이동계획을 다시 한 번 전면 수정하게 되죠.
상황이 이렇게 되어 Thirimont에서 좌익으로 틀기보단 우익으로 나아가 Baugnez 교차로로 진출하게 됩니다.
Malmedy, Ligneuville 와 Waimes 로 부터 같은 거리에 위치한 곳이였죠.

이 때가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였는데...
파이퍼는 '말메디(Malmedy)'로 부터 남쪽으로 4Km 떨어진 '본드' 마을에서 휘르트겐 숲에서 남쪽 '빌살름' 읍으로 이동하는 미군 제 285 독립포병 대대(American 285th Field Artillery Observation Battalion (FAOB)) B중대 convoy 행렬을 공격, 이동을 멈추게 한 다음 120여명을 포로로 잡습니다. 이들은 Baugnez 교차로를 점검하고 Sankt Vith에 위치한 미 제 7장갑사단(7th Armored Division)과 합류한 후, 도시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Ligneuville 방향으로 우회해서 나아가는 중이였죠. 중화기는 없이 소화기로만 무장이 된 상태였습니다.



독일군들이 계속 Ligneuville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안, 미군포로들은 친위대들에 의해 이미 포로로 붙잡혀있던 다른 포로들과 합류하게 됩니다. 이미 동부전선과 벌지전투 초반부터 포로의 학살을 자행하던 파이퍼 전투단의 무장친위대는 이들 미군에게서 필요한 물품을 빼앗고 인근 목초지로 끌고가 하노마그 장갑차의 기관총을 시작으로 포로들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포로들은 바로 패닉에 빠지고 일부는 탈출에 성공하지만 거의 대다수 서있던 자리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영화 '벌지 대전투 (Battle Of The Bulge, 1965)'에서도 과정이 자세히 그려지죠. 기억하실 분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일부는 처음 사격이 있었던 목초지에서 숨진 전우의 시체 밑에 죽은 척 가장해보기도 했지만, 사살이 끝난 후 무장친위대는 아직 살아 있는 포로들을 찾아 머리에다 확인사살을 하기도 합니다.
일부 탈출에 성공한 포로들은 Baugnez 교차로에 위치한 카페에 은신했지만 친위대는 이곳에까지 추격해와서 건물에다 대고 집중사격을 가합니다.  그리고 집중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건물에서 빠져나가 도망치려던 병사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죠. 이 과정에서 43명이 (일부는 벨기에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생존하여 얼마 후 미군 제 99 보병사단 정찰대에 의해 구출됩니다. 첫 생존자는 같은 날 오후 2시 30분 쯤 291전투공병대대 (291st Combat Engineer Battalion)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고 사건 발생 약 서너시간 쯤 후에 제 1군(the First Army) 감찰관도 인지하게 됩니다. 이들은 구출된 뒤 당시 학살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게 되는데, 사전에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도 진술내용이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더군요.


이후 1944년 12월 17일 독일 무장친위대에 의해 '말메디Malmedy)'에서 미군 84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말메디 학살(Malmedy Massacre)' 이라고 불리워지게 됩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미군의 입장도 단호해서 "No SS troops or paratroopers will be taken prisoner but will be shot on sight." 이런 명령을 내리게 되죠. 결국 이 사건의 연장선 상에서 보복으로 1945년 1월 1일 독일군 포로 학살사건인 "Chenogne massacre" 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부전선의 재판이 된 거죠.
http://en.wikipedia.org/wiki/Chenogne_massacre 


* 1945년 1월 15일, 눈밭에 파묻힌 상태로 발견된 희생자들의 시신입니다.

1월 14일 Baugnez crossroads가 연합군에 의해 접수됨에 따라, 미군은 학살현장에 도착
눈 속에 파묻힌 채 얼어붙은 시신들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사건조사에 착수합니다. 추운 겨울 날씨와 낮은 기온 때문에 보존이 잘 된 편이였죠. 전쟁기간 중 독일에 의한 다른 잔학행위 중 그 희생자 수로는 적은 편이긴 하나 유럽에서 미군이 학살로 입은 피해로는 단일 사건으로 최대였습니다.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죠.
 사건현장 촬영을 마친 후 시신확인 절차를 거쳐, 소속과 계급, 이름 등을 확인하고. 옮겨져서 시체부검에 들어가게 되죠. 나중에 전범재판에 쓰일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이 과정은 아주 철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부검결과 적어도 20명의 희생자들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치명적인 두부총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기관총/기관단총과 같은 자동화기에서 발사된 사실도 밝혀냈죠.
또 다른 20명의 희생자들로부터는 Kar98같은 소총으로 부터 발사되어 두부총상에 화약으로 인한 화상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알았냈구요. 또 다른 10명의 시신에선 소총 개머리판 등이나 다른 둔기로 맞은 치명적인 골절상 흔적이 발견됩니다. 부검으로 알아낸 다른 중요한 사실은 일부 희생자들 귀 뒤나 관자놀이에 대고 one single shot으로 끝냈다는 겁니다.

실제로 72명의 희생자 시신이 1945년 1월 14일과 15일 사이에 수습되었고,
학살현장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서 12명의 시신들이 1945년 2월 7일과 4월 15일에 발견됩니다.
마지막으로 절대 다수의 시신들이 극히 좁은 장소에 밀집된 형태로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이들이 살해되기 전에 한 곳에 모여졌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70명 이상이 기소되어 이 중 43명이 사형(실제로 집행되진 않았습니다.)을 22명이 종신형을 선도 받습니다. 8명은 좀 더 짧은 형을 언도받죠.
* 이 다하우 재판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그 이유로는 심리초기엔 점령군의 반공정책에 따라 다시 파워를 얻게 된 전 나치출신 장교들이 맡았고, 이후엔 독일계 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 미드웨스트 출신 의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 파이퍼와 친위대는 말메디 이후 또 다른 지역에서 미군포로 학살과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적어도 100명의 벨기에 민간인들 학살혐의를 받게 됩니다.

* 1944년 12월 21일 Gleize 전투에서 파이퍼의 Kampfgruppe는 미 제 119 보병연대를 지휘하던 (119th Infantry Regiment)미군 소령 Harold D. McCown을 사로잡게 되는데 이 미군장교는 이미 말메디 학살을 전해들었기 때문에 파이퍼에게 직접 그와 그의 부하들의 운명에 대해 묻습니다. McCown이 말하길 파이퍼는 McCown와 McCown부하들을 위협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자신의 Kampfgruppe는 포로를 살해하는 그런 부대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McCown은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이 그 어떤 식으로든 위협을 받은 적이 없으며 나중에 1946년 다하우 심리에서 파이퍼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게 됩니다.

* 하지만 이후로도 벌지전투 기간 중 파이퍼와 Kampfgruppe에 의한 포로들의 학살은 꾸준히 보고되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진 않았지만 538명에서 749명의 전쟁포로들이 파이퍼의 Kampfgruppe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죠. 나중에 미 의회 의원들로 구성된 부속위원회에서 밝혀낸 희생자는 포로 362명과 민간인 111명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출처: 디시갤로거 cleve님의 글)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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