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잠수함 기술 지원에 참 관심 많은 한국분들이 계시는 군요.
그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중요한가요? 참~대만 간첩들 많아요. 많습니다.
뭐 어쨋든...오늘은 프랑스의 해양 전력에 관해서 소개를 좀 해 보고, 당장 대한민국의 해양 전력, 그리고 그와 비견할 수준인 이탈리아 해양력에 관해서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일주일 가까이 따로 글을 올리지 못해 오늘 하루 벼락치기 하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길 바라며 프랑스 해양 전력 소개합니다.
작년에 제가 이글루에 이와 같은 글을 잠시 포스팅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 쪽이 대용량 이미지를 올려서 후에 링킹하기에도 좋고 해서 애용했었습니다. 현재도 대용량 이미지나 *.PDF 파일을 올리고 싶을 떄 이용합니다. 그리고 제가 큰 이미지용으로 걸어놓은 하이퍼링크들이 모두 이글루의 제 블로그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이미 이 프랑스 해양 전력을 소개한 글을 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굳이 이걸 말씀드리는 이유는 정작 프랑스에 관해 말씀드리면서, 최근 프랑스와 한국 해군의 연계를 따로 더 말씀드리는 게 퍽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관계되신 분들의 실명을 거론하는 것도 불편하고 현재 진행형인 내용을 떠들고 다니는 것도 불편하고 잘못되기도 하고 잘되기도 하는 배경에 어떤 인물의 애국심과 나름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그런 사명감까지 제멋대로 재단하기도 퍽 불편합니다. 다만 나중에, 과연 그것이 정작 우리 해군의 전력 발전 뿐 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는 지, 될 것인지 고민해 주시길 부탁드릴 뿐.
제가 들은 기억으로 1984년 즈음 프랑스 직항 노선도 없던 시절 한국인들이 파리 오를리 공항으로 입국할 때 한국에서 온 상사 주재원들을 괴롭히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아마 당시 유럽에 주재하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똑같이 경험했던 아픈 이야기입니다. 바로 프랑스로 데려 온 한국 출신 입양아들의 울음 소리...
그렇게 수출(?)되었던 입양아들이 성장해 그 중 몇몇은 프랑스의 핵심 엘리트들이 되었고 前 올랑드 정권 하에서 주요 정책 결정에 개입하게 되는 등 프랑스 내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데요. 과거 대우의 김우중 씨도 그러하고, STX도 그러했고, 지금의 바라쿠다도 그러하고...참 고생하고 계시는데,
쟝 폴 플라세 전 프랑스 사회당 당수
플뢰르 뻴르랭 전 프랑스 디지탈 스태이지 장관
김우중 씨의 국가에 대한 충정이 부족했을까요?
다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 뿐.
분식 회계 때문이라구요? 공기업 인수 과정에서 그럴만도 했습니다.
특히 한국 중공업(현 대우조선해양)은 아직도 헤메고 있을 뿐이고.
안보리 상임 이사국들은 소위 전략 대화라는 걸 합니다. 5개국 중 하나라도 오판에 의해 세계가 멸망하는 걸 막기 위해 각자가 가진 패를 보여 주면서 치는 카드 게임과 같은 건데요. 예를 들어 미사일 방어 체계 기술이 있다면 이걸 각국에 대략의 제원과 함께 그 정보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사드 무기 체계의 내용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중국은 이미 그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전략 무기 체계의 정보는 최소한 안보리 상임 이사국들 사이에 공유되는데다, 이들이 같은 목적으로 공유하는 정보가 바로 전략 무기 체계 기술을 도입/운영/학습하려는 모든 접촉과 그 대상에 대한 정보 공유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대만은 알고 있었으나 우리는 모른 차이가 IMF를 불러 왔던 것이고...
만약 우리가 프랑스로부터 핵 관련 기술이나 정보를 가져 오려고 한다면 그 내용이 다른 5개 안보리 상임 이사국들에게 모두 공유되고 이러한 접촉이 전략적 도발이라는 그들 나름의 판단이 서게 되면 UN 산하 모든 비확산 체제를 동원해 제제를 가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양차 대전 이후 범세계적인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입니다. NPT, IAEA, CTBT 모두 다...여기에 각종 금융 수단들 IMF, WB, IBRD 등등 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우리가 IMF를 겪은 것은 흔히 말하듯 대한민국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 아니라, 정작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며 도발한 못난 지도자와 공직자들의 우국충정 덕분에 핵무장 및 원잠 도입 등 범세계적 전략 도발을 벌리고, 이로 인해 결국 고작 '92년에야 비로소 유엔에 가입한 신생 한국(과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기 위한, 범 UN 산하 비확산 체계가 총동원되어 한쪽은 IMF를 다른 쪽은 고난의 행군을 겪게되었습니다.
그걸 2018년 또다시 국가가 주도하려 한다면 역대 탄핵당했던 정권들과 마찬 가지일 뿐만 아니라 이를 막지 못한 국민들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실 거라는 걸 재차 말씀드립니다. (_._)
그리고 현재 프랑스의 해양 전력에 관해 이글루의 글을 그대로 복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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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UN 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서, 또한 전략 게임의 플레이어로서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고, 그 역량을 과시하지만, 좀 더 깊이있게 해양 전력을 분석해 보면 다른 전략 주체들보다는 이웃 국가인 이탈리아의 해양 전력과 비교하는 게 더 당연한 구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보통 프랑스가 이러한 해양 전력 구조를 갖게 된 배경/원인을 1880년 대 후반부터 1900년 대 초반까지의 약 15~20 여 년 간 프랑스 내에서, 소위 "청년학파"라고 국내에 잘못 알려져 있는, "Jeune Ecole"이라 불리는 소장파 해군 장교단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해양 전략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최근 들어선 노르웨이 해군 출신의 어느 작가가 "약소국의 해양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마치 약소 해양국이 해양 강국을 상대로 전략을 세울 때, 이런 비대칭 전략이 마치 신줏단지인양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는데요. 이게 일본에서 출간되고 또 국내에 일부만 번역 소개되어 군사계 전반에 잘못된 상식으로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군 전력 구성이 이런 잘못된 해석에 가장 가까운데요. 현재 북한 해군 건함 정책의 방향을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가 될 만하다고 생각하오니 적전술 이해를 위해서라도 번역이 좀 필요할 듯 싶습니다. 노르웨이 해상 전력의 구성이 향후 북한 해상 전력이 추구하려는 목표에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봅니다.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당시 프랑스 해군의 실상에 접근해 보는 계기가 되셨으면 합니다.
Arne Røksund (1959.06.12.~ )
우선 알려진 명칭에서부터 오해가 시작된 것이니 짚고 가겠습니다.
여태 알려진 소위 "청년학파"는, 1920년 대 마르크스 이론 철학을 비판하던 프랑크푸르트 대학 내 실존주의 철학자 가운데, 인본주의를 강조한 마르쿠제와 하버마스 등 젊은 철학자들이 언어 분석적 방법론으로 비판하는 학풍을 일컬어 "청년학파"라고 합니다. 시기상 1920년대의 사조이니 지금 다루려는 1890년 대의 "Jeune Ecole"이 기왕 그런 번역에 우선권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철학 사조가 국내에 먼저 소개되었고, 그 뒤에 군사학적 번역을 통해 알려진 것이니 뜻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명칭을 혼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년학파"라고 부르게 되면, 이처럼 해군 전략 등을 다루려는 글에서, 정작 프랑스 해군의 전략 이론/이론가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마르크스 이념 철학으로 오해받기 쉽상인 문제가 있고, 또 이를 애초 번역한 일본 출판계 내에서도 신진학파, 신생학파라고 각각 제멋대로 번역되고 있는데다 국내에선 "소장학파"라고까지 번역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Jeune Ecole"은 고유 명사이고 프랑스어의 국내 표기법에 따라서 소리나는 대로 표기해야 하므로 "쥰 에꼴"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쥰 에꼴"이라는 개념의 부상 배경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까닭은 배경, 그 자체가 바로 "쥰 에꼴"의 내용과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제 설명이 좀 진부하게 느껴지시더라도 차분히 읽어 주신다면 현재 대한민국 해군이 취사할 만한 문제 의식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른 글들에선 군사학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해 약간 다른 관점으로 그 배경을 풀어 보려고 합니다. 읽으시는 분 나름의 해석을 요구하기도 하는 내용이오니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면 1차 대전의 원인과 배경에 관해 알아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우선 1870년 경 보오 전쟁, 보불 전쟁-
프로이센은 북부독일연맹 중 십자군 전쟁 이래 기사단 출신들이 현재 독일 북부에서 폴란드 북부를 거쳐 칼리닌그라드에 이르는 지역을 영유한 독일 민족주의의 뿌리를 형성하는 공동체입니다. 독일어로는 프로이센, 영어로는 프러시아, 라틴어로는 보루시아, 한자로 음차하기로는 보로사라는 명칭때문에, 근대 세계사를 잘 모르는 분들께서 보시기에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국명이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왕국 전쟁을 줄여서 프-프 전쟁이라고 하거나 프-불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구분하기 어려워 라틴어를 음차한 보로사라는 국호를 쓰는 것이니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보-오 전쟁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보-불 전쟁(1871, 1년 전쟁)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입니다.
혹시 1899년 경 현재 남아공 북부에서 영국군과 보어인들 사이에 벌어진 보어 전쟁과도 명칭이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을 통해 중부 유럽엔 독일-오스트리아_헝가리 제국-이제 막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의 3국 동맹이 맺어지고, 반면에 숙적이었던 아일랜드-영국-프랑스-러시아 제국 등이 3국 동맹에 대항해 손을 잡게 됩니다.
"쥰 에꼴"은 수백년간 숙적이였다가 오랜만에 손을 맞잡은 해양 강국 영국을 가상적으로 삼아 프랑스가 구상한 전략 개념이 아니라, 보불 전쟁 중 발트 해까지 원정 간 프랑스 해군의 각종 포함들이 프로이센의 연안 공업 시설을 유효하게 타격하지 못하자 당시 신규 발명된 해군 무기 체계를 가지고, 마침 새로 통일해 급부상하는 이탈리아 왕국을 상대로 한 대단히 안이한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기술적으로 1850년 대 이래, 프랑스의 조강 능력은 영국이나 그 영국을 그대로 추종하는 독일에 비해서도 기술적으로 낙후해 있었습니다. 1871년 보불 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프랑스도 개방형 고로(Open hearth) 방식을 채용해 연철에서 강철로 야금 기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요. 이 당시 영국도 신규 기술의 적용에 계속 실패해 1881년까지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철갑선을 제대로 건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프랑스는 가까스로 영국의 조강 능력(생산량, 인장 강도 등)을 따라 잡게 되지만, 프랑스가 조달하는 철광석과 코크스의 가격은 주변국보다 상대적으로 비쌌고 프랑스는 애초 조선 산업과 같은 긴 루프의 자본 운영에 익숙치 않은 데다가 돈줄 자체가 막히는 상황에서 조선 기술의 발전을 꾀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막 보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의 경제는 악화일로를 겪게 되는데, 결국 1882년엔 파리 증시까지 붕괴하게 됩니다. 시장에 신용이 거래되기에 너무도 열악한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프랑스 정부 자료에 따르자면 1883년 2억 1,720만 프랑이던 해군 예산은 1885년 4,560 만 프랑으로까지 줄어들게 됩니다. 이런 상황뿐 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조선 비용이 영국에 비해 30% 이상 더 비쌌기 때문에, 부족한 예산 환경 속에서 "쥰 에꼴" 등이 주도한 대형 전술함의 가성비 논쟁에 불이 붙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부터 해군의 무기 체계가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하는 데요. 1875년 화이트헤드에 의해 최초로 어뢰가 발명되고, 1881년 영국에서 증기 추진의 철갑 순양함이었던 에스메랄다가 칠레향으로 진수되자, 바로 직전 시기에 제철 산업에서 기술 혁신으로 영국의 조강 능력을 따라 잡았던 경험을 가진 프랑스는, 패전 직후 국가 경제의 침체 속에서 새로운 기술 혁신을 통해, 오히려 전통적 방식으로만 해양력을 육성하려는 주변국보다 더 효율적으로 값싸고 손쉽게 해군력을 향상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품게 됩니다.
또한,
보불 전쟁을 통해 제 2 제국에서 제 3 공화국으로 정치 체제의 변환을 겪은 프랑스 의회는, 해군 장교단에게 종신직인 국회의원을 겸직할 수 있도록 맡김으로써 신생 공화국의 취약한 지도력을 확보하려 했지만, 덕분에 해군 내부에선 더이상 진급이 불가능 해 지고, 특히 하급 장교직에선 사리사욕에 눈 먼 부패가 만연하게 됩니다.
동시기 영국 해군 중위의 평균 연령이 32.2세였는데 프랑스 해군 중위의 평균 연령이 52.3세였다고 하니, 아예 진급이나 호봉은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인사 체계가 공정/투명하지 않고 폐쇄적일수록 조직 내부의 부패와 비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니까요.
이런 해군의 인사 체계 내에서, 막상 전역 후 상선에라도 취업하려면, 최소한 승선/지휘 경험이 필요한데, 함선들도 증기선으로 개량되면서 기존 범선 때보다 척수도 줄고, 경험을 쌓을 기회마저 박탈당한 그들의 처지에서 자연히 눈돌리게 되는 것이, 작더라도 승선/지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게다가 당시로선 최신 기술인 어뢰를 장착한 함정에 주목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보직을 위해 전체 해군 전력을 깎아 먹는 일이고 원칙대로 하자면 먼저 해군 병력을 줄이는 것이 정석이였겠지만 당시 프랑스 해군에도 조직 생리를 극복할 만한 리더쉽을 갖춘 지휘관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드러난 일이긴 하지만 이 작은 어뢰정은 파도에 휩쓸려 수상에서 어뢰를 투사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평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낚싯배였던 거죠.
당시 프랑스 해군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아예 없었습니다.
Théophile Aube (1826.11.22~1890.12.31)
데오필 오브 자신도 이 어뢰정의 항행 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 지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어뢰정이 폭풍을 견디면서 임무를 수행했다는 수필까지 일부러 출판한 걸 보면 말이죠...강조의 역설일 뿐입니다. 아마 그에겐 조직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 아니였을까 짐작해 봅니다. 정작 청년학파를 창시했다고 알려진 오브는 "쥰 에꼴"이 추구하는 개념의 신봉자도 아니였고, 더구나 모호한 이념이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도 아니였기 때문인데요. 1882년 그의 저서 "La Guerre Maritime et les ports Francais"를 보면 Force on Force, 힘에는 힘. 즉 꼴통스런 단순 무식함으로 명령에 따라 무조건 진격하는 것을 직업 군인으로서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타입의 인물이였습니다.
멕시코에 막시밀리아노 왕을 옹립하고 스페인 왕정에도 개입하던 프랑스였지만 대서양으로 진출해 영국이나 독일과 제해권을 다툴 것을 대비한 것이 아니라 3국 연맹에 대항해 새로 맺어진 영-불-러 데탕트로 인해 지브롤터 해협의 동쪽, 프랑스와 알제 사이, 지중해 서안의 통상로 보호에 집중할 수 있게 되다 보니, 가상적으로 내세울 만한 상대가 결국 신생 이탈리아 왕국뿐이였기 때문에, 프랑스 해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차라리 조직의 재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오브 등 해군 지휘부가 신진 장교단을 부추겨 내세운 건함 체제를 "쥰 에꼴"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오브가 지휘부에서 물러난 뒤, 프랑스의 재정 상황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쥰 에꼴"은 조직 생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관료화되면서 1900년 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15년 간 어뢰정의 양산에만 매달려 오히려 전체 해군의 유지 비용을 더 부풀리게 됩니다. 딜레마를 자초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쥰 에꼴"은
1. 무기 체계의 효과만 강조한 나머지 전술 환경의 다양한 요소들을 무시하고 결정론적 사고에만 의지했다.
2. 비대칭 전력에 상대가 얼마나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지를 간과했다.
3. 비대칭 전력이 추구하는 특정 시나리오를 모든 전술 상황에 대해 일반화했다.
4. 전통주의적 비판을 이념적 오만으로 무시했다.
5. 충분한 실험을 거치지 않았다.
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태 잘못 알려져 있다고 비판하는 이유는,
"쥰 에꼴"은 당시 영국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양 소국이였던 프랑스가 주변의 해양 강국을 상대로 구상한 비대칭 전략 이론/이론가였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대서양으로 진출한 것이 아닌, 좁은 지중해 내에서 프랑스에 비해 더 열악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을 가상적으로 상정하고 발전시킨 안이한 전략이라는 것이고, 또한 당시 신규 발명된 무기/기술 등에 기반한 진보와 보수 간 전술적 이념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라, 열악했던 프랑스 국가 경제와 정치 체제 하에서 해군 내 인사 적체로 붕괴 직전이었던 조직을 재건하고 새로 임관한 장교들의 보직을 위해 별쓸모도 없는 소형 어뢰정을 양산하고자 꾸민 이론적 설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프랑스가 나태한 삽질을 하는 동안 신생 이탈리아는 꾸준히 해양력을 육성해 20세기 초반 당시 유럽에서 영국, 독일에 이어 3번째 해양 전력을 갖추었던 프랑스를 질적으로 추월했고 양적으로는 비슷한 전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1차 대전과 전간기, 2차 대전 이후에도 꾸준히 프랑스의 해양 전력과 이탈리아의 해양 전력은 엎치락 뒤치락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최근 결과물입니다.
큰 이미지는 이 쪽으로
http://arsium.egloos.com/1189086
프랑스의 해양 전력은 총 톤 수 44만 9,920 톤이고 총 척 수는 121 척, 척당 배수량은 3,719 톤/척으로 구성되고,
프랑스 해군 전력은 총 톤 수 32만 1,885 톤, 함 척 수는 85 척, 척당 배수량은 3,787 톤/척으로써
프랑스 해군의 전술함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함 척 수 총 톤 수
잠수함 10 72,940 톤
수상함 61 174,927 톤
상륙함 14 74,018 톤
잠수함과 수상함, 상륙함의 함 척 수 비율은 약 1:6:1의 비율을 갖고 총 톤 수는 약 1:2:1의 비율을 갖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각 용도별 척당 배수량은 잠수함 7,294 톤/척이고 수상함은 2,868 톤/척이며, 상륙함은 5,626 톤/척의 수치로 약 3 : 1 : 2의 비율을 갖습니다.
프랑스의 건함 구성을 보면 특히 해외에 해군력을 투사할 만한 전략적 목표가 없다는 걸, 혹은 전쟁 예방의 책임 따위는 지중해 연안에서나 지면 그만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해 보일 듯한 규모의 군수/지원/보조 전력을 갖추고 있는데요. 다른 말로, 프랑스 해군의 목표가 현재도 이탈리아보다 우위를 갖는, 지중해 통상로 유지 수준의 제해권 확보라는 걸 잘 보여 줍니다.
이러니 드골 항모가 왜 툴롱에 틀어 박혀 있는 지가 설명이 되는 것이고, 겨우 지중해나 돌아 다닐 거였으면서 원자로를 넣은 몰상식에 영국이 아연실색하며 QE에 증기 기관을 장착한 것이 되고요. 루비급 공격 원잠의 그렇게나 아담한 크기도 이런 맥락이라면 아주 쉽게 납득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최소한 원자력 추진 항모를 갖추겠다고 한다면 호라이즌 급 방공함이라도 충분히 확보해 고가치 자산을 보호하려는 흉내라도 냈어야 하지만 그것도 달랑 2척 뿐입니다.
올해 드골함이 작년 IS를 격퇴하느라 고생했다고 정비에 들어 간다고 합니다. 전력 지수면에서 프랑스 해군 전력의 6%가 일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고로 1차 대전으로 참호전에서 희생된 프랑스의 병력 숫자가 당시 인구 구조에 준 충격이 -4.5 %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체 전력 가운데 5% 이상의 소모율이란 건 엄청난 겁니다. 그 어려운 걸 프랑스는 대비도 없이 해 냅니다.
프랑스의 해경 전력 역시 영국과 마찬 가지로 동북아와 비교해서 아주 적은, 총 톤 수 11,704 톤, 함 척 수 11 척, 척당 배수량 1,064 톤/척 규모의 아담함을 보여 줍니다. 안이한 나토국의 행태가 정말 잘 드러나는데요. 그러니 똥파리들이 꼬이는 것일 지도...샤를리 앱도같은 언론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국내 언론사도 계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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