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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4 19:10
[기타] 한국군이 미군에 비해 전쟁 초기 사상자 발생이 높았던 이유 고찰
 글쓴이 : 노닉
조회 : 2,903  




지난 번에 올렸던 사상자 발생 원인 자료에서, 한국군은 미군에 비하여 개인화기로 인하여 발생한 사상자 비율이 5.2%나 높았고, 포격에 의하여 발생한 사상자 비율은 8.5%나 높았습니다.



이러한 원인이 발생한 것은, 개전 초기에 너무 많은 병력을 상실하고 제대로 된 훈련이 없이 마구잡이식 병력 충원을 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제작한 학예지 제3편, 한국전쟁시 육군의 교육 및 훈련체계라는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개전 1주 만에 한국군 제1사단은 사실상 전멸이나 다름없는 판정인 2,000명 수준의 병력 만을 통제할 수 있었고 가까스로 전 군을 재편했을 때 원래 편제 병력의 절반 수준인 5,000명 미만의 병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사상자는 6월 말~7월까지 7만에 달한다는 보고서도 있고 이 때문에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한국 정부는 헌병과 경찰들을 보내 길거리에서 강제로 민간인들을 징집하거나, 혹은 청년단을 징집하여 아무런 훈련도 없이 전선에 투입하게 됩니다.

당연히 훈련도 없이 투입한 청년단이나 징집병들은 엄청난 피해를 수반하면서 그야말로 갈려나갈 수 밖에 없었고 보충되는 신병보다 갈려나가는 일선 병력이 더 많을 지경이었습니다.

개인기본전투기술이 부족하니 전선에서 자신을 적절하게 보호할 수 있는 은/엄폐기술은 커녕 사격훈련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오니 동 시기 한국에서 싸웠던 미군보다 개인화기로 인한 피해와 포격으로 인한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Military Review, August 1957에서는 한국군의 신병 징집은 단순히 거리에서 사람들을 집합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언급할 지경이었고, 심지어 카투사를 모집할 때, 아픈 아내를 위해 약을 사기 위해 약국에서 나오다가 헌병한테 붙들려서 미군과 함께 싸우던 병사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한국군의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고, 당연스러운 이야기지만 기본전투기술에 대한 훈련은 거의 전무한 상태로 받았습니다. 그 결과 미군에 비해 더 큰 피해를 북한군에게 입을 수 밖에 없었죠.

심각한 병력 자원 문제로 인하여 1950년 여름과 가을에 총 5곳의 훈련소가 개장됩니다. 이 때부터 훈련은 제주도의 제5훈련소를 기준으로 16일의 훈련 기간 동안 체력훈련, 군대예절, 각개전투, 분/소대 전투, 경계, 수색/정찰 훈련을 진행하도록 했습니다만 표에서 보듯이 낙동강 전선 기간 내내 한국군은 여전히 큰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증언 사례에서 나오게 됩니다. 당시 대구에 위치해있던 제1훈련소장인 최석 중장의 증언에 따르면

-입소신병은 7일간 교육을 받게 돼 있었어요. 하지만 급할 때에는 2, 3일간 소총사격 훈련만 시켰고 더 급할 때에는 사격장으로 가다가 도중 에서 그대로 일선으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보통 하루에 제1훈련소에서 5, 6백 명을 일선에 보충했는데 많을 때는 2, 3천 명씩 보낸 적도 있지요. 특히 사단이나 연대를 재편하거나 신편할 때에는 보충해 줄 병력이 달렸어요. 

그럴 때는 기간사병들로 길거리를 막고 원주민이나 피난민 할 것 없이 20-35세까지 청장년을 급모해 보냈어요. 그때 신병을 일선에 보낼 때는 하루 전에 집에 보내서 가족과 면회하도록 했어요. 

그래도 도망치는 신병은 별로 없었고요. 내권으로 대구 도청 직원과 초등학교 교사는 빼주었습니다. 내가 8월 초부터 9월 하순까지 훈련시켜 일선으로 보낸 신병은 약 5만 명 정도됩니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전선이 급할 때는 사격 훈련만 급하게 시켜서 전선에 때려박거나 혹은 사격장으로 사격훈련을 하러가던 도중에 그대로 일선으로 나가는 사태가 빈번했으니 사상자의 발생이 늘어 날 수 밖에요.

물론 급박하던 전장 상황에서 5개 훈련소가 8만 명에 달하는 신병 자원을 배출하여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한 것은 큰 의의가 있지만 훈련 과정이나 혹은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들을 곱씹어보면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훈련소 역시 장비한 훈련용 장비들이 태부족이었으며, 제 5훈련소의 경우 5,000명이 훈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M1 개런드 소총 300정과 기관총 37정, BAR 5정이 전부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급히 긁어모은 신병의 질은 사실 기대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기본전투기술이 참 단순해보여도 실제 전선에서는 생사를 가르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저 수치에서 배울 수 있는 점에 참으로 많지 않나 싶네요.

출처
한국전쟁시 육군의 교육 및 훈련체계, 박일송
6ㆍ25전쟁시기 다부동지역에서 한국군의 군수지원에 관한 연구, 조봉휘
육군본부,「11연대전투상보(해평ㆍ다부동지구전투(1950.8.3-30)」,『한국전쟁사료』 제100권, 335-354, 617- 670쪽
육군본부,『6.25전쟁참전자 증언록』1권(대전:육군인쇄창, 2004), 131쪽
다부동 전투, 국방부

Military Review, August 1957

[출처] 작성자 오로라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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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개구리 18-04-14 19:32
   
안타깝지만  당시 상황으론 당연한 결과네요....
미군들이야  2차대전을 겪은 베테랑 지휘관이나  병사들도 참전 해서
준비된 군대였겠지만 
우리나라는  해방후 정치.경제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전쟁경험도 전무한  상태였스니
맥없이 당할수밖에요....
     
푸른능이 18-04-14 20:55
   
초기는 미군도 똑같았습니다.
NightEast 18-04-14 19:36
   
짱깨들이 미군, 카투사 이렇게 포로로 잡히면 대부분 카투사들은 바로 즉결총살 시켜버렸다죠
미군은 살려두고요
booms 18-04-14 19:54
   
안타깝네요..

전쟁에 투입되더라도 최소의 전투훈련이라도 시켜서 보내줄꺼란걸 다행으로 알아야하는건지.
총한번 못쏴보고 간단한 교육도 못받고 전쟁터로 보내질때 그 공포심이 상상이 안가네요.
승리만세 18-04-14 22:08
   
남한이 인구가 많아서 다행이였죠, 북한이 저정도 핀치몰렸으면 전선에 갈아넣을 인력이 바닥나 ㅈㅈ 쳤을껍니다. 그래도 남한이 북한보다 다른건몰라도 인구수가 많았기때문에 소련처럼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강제징집해서 전선에 다 때려부어 인력이 갈려나가며 위기를 버틸수 있었죠
마구쉬자 18-04-14 23:11
   
심지어 총은 커녕 지게꾼 부대도 있었음.
마음소리 18-04-15 03:24
   
한달도 안되서 학도병이 만들어지고
두달도 안되서 안동까지 내려왔으니
제대로된 훈련를 기대하는게 힘들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