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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3-09 20:54
공산중국 항공 산업의 역사-(유용원의 군사세계에서 펌)
 글쓴이 : 서울뺀질이
조회 : 3,624  

글번호 66144 조회수 : 18026 추천수 : 2 다운횟수 : 6
작성자 무명씨
제목 제1편 공산중국 항공산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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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1: 좋았던 시작과 기나긴 암흑

 

 

 

공산중국의 항공산업은 20세기 50년대초 한국전쟁에 참여한 댓가 및 소련의 이데올로기 경쟁의식하에 시작한 대규모산업지원계획(156계획)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계획에 따라 소련은 전투기 및 엔진 수리설비, 조립라인 등을 선양에 협조하여 구축하고 선후로 미그17/19의 도면들을 이전하였는데 이는 바로 중국 군용항공산업의 시초인 선양비행기연구소(SAC)의 전신으로 되었다.

 

주목할 점은 오직 조립도면만이 아닌 설계도면과 일부 데이터, 풍동시설 등 전투기개발에 필요한 여건들을 패키지로 만들어주었다는것인데.. 이를 기초로 중국은 자신의 전투기설계능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55년 미그-17 국산화와 58년의 미그-19 국산화로 선진공업국 뒤로 가장 일찍 제트전투기 생산능력을 갖춘 나라중의 하나로 되었다.

 

소련은 중국의 젊은 기술자들을 자국의 여러 대학과 설계국들에 합류시켜 일을 배우게 하였다. 이러한 기술자들은 중국의 독자설계능력의 밑거름으로 되었고.. 아이러니하지만 30년 뒤, 중국의 항공산업에 있어 큰 영향을 가진 943공정(소련해체뒤 소련의 기술 및 엔지니어들에 대한 계획적-국가적인 수탈 프로젝트) 진행시 이때의 동료 또는 선후배식 인맥관계가 거의 결정적인 작용을 보았다.

 

 

또한, 적지 않은 미국 등 나라들에서 합류한 경험엔지니어들이 합류하였고, 이들은 전통소련식인 전방흡기구 방식이 아닌 양측흡기구 방식을 권고해, 선양SAC는 50년대말 중국 최초의 제트기인 JJ-1(58년 초도비행,총담당자는 40년대 미국 맥도니엘사에서 근무했던 엔지니어 쉬쑨서우)과 미그-19를 양측흡입구로 바꾼 Q-5공격기 등 나름 신모델의 제트기들을 선보이게 된다. 프롭기-제트기 기술의 업그레이드시절 적시에 편승한 좋은 예가 되는듯 싶었다. 완제품 형태로 선진국에 단 몇해만 뒤쳐진 개발-장비레벨 이었으니말이다,

 

 

 

단, 이는 단지 소련의 제반 기술지원에 의한 공중누각식의 착각이었고..정치적인 이유로 오래가지 못했다.


56년부터 뒤틀어지기 시작한 소-중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58-60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이 모든 지원프로젝트의 전문가들을 복귀시켜버렸다. 특히 중요한 엔진공급의 중단으로 중국의 항공산업은 급속히 정체되기 시작하였고, 60년대부터 끊임없는 정치운동들은 여러 항공회사들과 프로젝트들의 정상적인 진행 심지어 엔지니어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기도 역부족이었다.


이시기 유일하게 주목할 점은 바로 청두연구소(CAC)의 설립이다. 69년 소련과의 국경분쟁시기,중국은 소련의 선제타격에 극도로 민감했었고 유일한 전투기생산거점인 선양SAC가 소련에 인접한 동북지역에 있다는게 마음에 걸렸다. 종합 후방군수산업 백업계획(대3선계획)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제2의 방산업체들을 내륙의 사천성(중일전쟁시에 국민정부가 숨어있던 충칭-청두지역)에 설립했고, 그중에는 선양사에서 분리된 수십명의 엔지니어들이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엔 선양사에서 진행중이었던 J-9개발팀 인력들이었고, 새로운 전투기연구소(처음엔 선양사 청두자회사, 몇년뒤 독립) 밑 제작공장을 완전 새로 일쿠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들은 소련의 위협은 피해갈수 있었지만 정치적인 혼란은 역시 벗어날수 없었다,

 

연구소의 마비와 생산공장의 대혼란 시기,  선양에서 천여기씩 생산된 J-6(Mig-19)전투기들은 잔고장에 분노한 공군에 의해 연거퍼 인수거부를 당하게 되었고.. 60년대 초 우유곡절로 소련에서 수입한 Mig-21는 인계받은 도면의 부족과 부품생산능력의 부재로 70년대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정상적인 운용이 가능해졌다.

 

60년대-70년대말 사이, 수많은 신형기들의 개발계획들이 있었지만,기술부족으로 번번히 결실을 얻지 못했고 단지 미그-21을 쌍발화시킨 J-8만이 실용화단계에 들어섰다.


이사이의 전투기개발계획들을 살펴보면:


J-8: 1965~1972년, 선양사 개발. J-7(미그-21)쌍발형, 동일엔진 사용.초기형은 미그-21형 전방공기흡입구.

J-9: 1965~1980년, 선양-청두사 개발. 고속요격용 단발형 중형전투기. 여러가지 방안이 있었고 후기형은 카나드-델타익.

J-10: 구형 J-10, 공개자료 없음.

J--11: 구형 J-11, 공개자료 없음.

J--12: 1968~1972, 남창사 개발. 공허 4.5톤급 초소형 초음속전투기. 시제기 몇기 제작뒤 중단.

J-13:  1973~1982, 선양사 개발. 발전형 경형전투기계획. F-16 참고형

 

 


(J-9 후기형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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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메인 군용항공업체 설명:

선양사 (현 선양 SAC):중국의 제1전투기 개발+제작업체. 제품:JJ-1,J-5,J-66,J-7,J-8,J-11)

청두사 (현 청두 CAC):중국의 제2전투기 개발+제작업체. 제품:J-7,J-9,J-10, 샤오롱)

남창사 (현 훙두 HAC):중국의 훈련기 개발+제작업체. 제품: CJ-6(Yak-18),JL-8,JL-15(Yak-130)

시안사 (현 시안 XAC):중국의 폭격기,수송기 등 대형기 전담 개발+제작업체. 제품:H-6(Tu-16), H-7/FBC-1전폭기,Y-7,Y-8,Y-9 수송기.

 

기타 지역에도 일부 있지만 생략.

 

 

에피소드2:  다시 동이 튼다, 그러나...

 

 


70년대 중-후반, 문화혁명의 종결과 서방과의 관계개선으로 다시 눈을 뜬 중국항공공업이 본 세계속 자신의 위치는 그야말로 절망 그자체었다.


아직 2세대전투기에 목매어 버벅거리고있고 주력기들은 1세대후반인 J-6(미그-19)형뿐이었고 단거리미사일 운용능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주변국들은 이미 2세대( F-4/F-5/F-104,Mirage-5, Mig-23/25)들로 도배를 해놓았고 미국은 심지어 3세대기인 F-14/15/16으로 하늘을 메워버린 상태었다. 1980이후 년일본은 F-15J를,한국은 뒤이어 F-16을 도입하는 시기었다.


극심한 기술격차를 체감한 중국은 서방의 손길을 받기로 결심했고, 그 첫 시작은 홍콩을 통하여 물밑거래가 활발했던 영국이었다(문화혁명 시기에도 영국으로부터 트라이던트 여객기, spey엔진 등을 수입한 경력)


쉐필드급 구축함,경항모,조기경보기 등을 망라한 방대한 리스트가 뽑아졌고,그중에는 토네이도 전투기와 해리어공격기가 포함되어있었다. 하지만 너무 가난했던 중국에게 영국의 견적서는 너무 경악스러웠고(F-16이 수백만불 하던 시절, 해리어 견적가 천만불) 그러한 돈이 없었던 중국은 단지 전투기레이더,HUD등 항전장비, spey개량형엔진 등 부품위주의 소량구매를 진행하였고 이런 신형항전들로 J-7등 전투기들을 개량했다.


이때 중국에 먼저 손길질한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바로 두둥..프랑스였다. 미라지2000이 갓 시험비행단계에 들어선 상태서 중국공군을 초청해 시승시켜주고,라인이전 등을 망라한 패키지상품을 극력 추천했다. 플라이바이와이어에 기반한 우수한 비행품질과 신뢰성있는 중거리미사일은 중국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족했지만..거지같은 M-53엔진의 가속력과 영국 이상의 프랑스식 견적서(미라지 단가를 3~4000만불 불렀음,80년대) 에 중국은 마찬가지로 발길을 멈출수밖에 없었고, 단지 항전제품만을 팔수 있느냐 협상에 들어갔다.


                                        ( 1982년 프랑스 닷소로 간 중국군 시험평가단)


프랑스는 물론 완제품형태를 고집했고, 오랜 협상중이때 새로 날아든 다른 소식은 중국의 발길을 끊었다. 미국이 F-16다운그레이드형(F-16/J79)의 중국수출허가를 냈다는것이다.  유럽보다는 늦었지만..가장 강력했던 시기의 소련을 대항하기 위해 거물급의 중국을 자신의 전차에 끌어올리기로 결심했던 미국은 80년대 중반부터 대대적인 군사협력을 허가했다.

 

M-60A2 기술로 중국의 69식전차를 개량하기(진행시작,나중에 중단), AN/TPQ37형 대포병레이더 수출(성사),블랙호크 헬기(성사),C-130수송기(검토후 중국이 수입하지 않음) 등 수출사업들이 허가받았고.. 보잉/그루먼은 청두CAC와 J-7개량형(Super-7, Sabre II등 이름.주요부품은 F404엔진과 APG-67레이더) 의 협력개발을.. GD는 선양SAC와 J-8-2개량형전투기(APG-66과 F404쌍발)사업인 피스펄 (우리나라는 피스브릿지)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 처음에 F-20의 전방동체와 F404엔진을 장착하게 개량한 Mig-21 중앙-후방동체형의 Super-7전투기)

 

 

(미국으로 보내져 APG-66의 장착성을 테스트한 J-8-2형 전방동체, 천안문사건 뒤 미국에 압수중)

 

 


소련방식에 익숙했던 중국에게 세부적으로 소개된 서방의 기술들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수입한 항전부품들과 규격은 또한 새로운 컬쳐쇼크였다. 미국의 MIL-STD군용기술규범에 탄복한 중국은 급기야 거의 완전-카피해 자국의 군용기술규범체계로 만들었고(하여 웃기는게 현재 중국국방기술기준은 나토체계에 거의 근접),서방의 기술 및 생산장비들을 다량 인입해 자신의 방산업체들의 라인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J-7수출형을 두고 영,프,미 등 서방업체들과 다량의 기술교류를 진행했던 청두CAC는 이때로부터 본사였던 선양SAC의 기술력을 추격 및 초과하기 시작했었다. 그루먼사과 달리 사내 기술규제가 엄격했던 GD와 협력했던 선양사는 이런 면에서 뒤처졌었다.

 

오랜전부터 중국은 F-16의 컴팩트함과 우수한 기동성을 알고 있었고,이러한 기체를 보유하고픈 열망에 빠져있었다. 하여 70년대말부터 이들은 중국버전의 F-16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썩 후에 F-16 수출허가가 떨어지긴 했지만 기당 천만불+짜리 고가전투기를 수십수백기씩 구매할 자금력이 없었다. 이때의 중국은 일년 국방예산이 40~50억불뿐이었고 동시 베트남과의 장기적인 지역 전쟁중이었다.)


단발 대형엔진에 우수한 기동성과 좋은 초음속요격능력을 요구하는 이 신형전투기(중국명 신섬:신형섬격기,81년 개발요구서 발행)사업에 선양SAC와 시안XAC, 청두CAC는 각기 방안을 제출해 경합했고... J-9개발을 거쳐 카나드-델타익 노하우를 십여년 쌓아온 청두CAC는 거의 F-16카피판인 정상익구조의 SAC 방안을 이기고 선정된다. 후에 중국은 예전에 이미 사장되었던 코드네임 10번을 이 기체에 다시 부여하고 이는 바로 익숙히 알려진 현재 J-10의 원형으로 된다.(하지만 이시절의 J-10은 아날로그FBW에 주익-동체융합이 아닌 꽤 재래식의 디자인이었다) 

 

 

(초기 J-10 컨셉.F-16/79형과 같은 컨셉의 고속형 피톳식 에어인렛에 주목)

 

 

동시, 중국은 민항기 백업엔진으로 사간 CFM-56(코어엔진은 미국 F110군용엔진 동일계열)을 해체하고 카피해 J-10용 WS-10엔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미국은 눈감아줬다..J-10 초기버전의 엔진은 이집트로부터 입수한 MIg-23의 AL-21 터보젯엔진 카피판이었다


CAC는 그루먼의 도움으로 기체설계노하우를, 닷소의 비행설계툴(CATIA본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보조DB까지 구입,지원강사 판견 등)과 부품을,그리고 신섬 개발이 시작된5년뒤에는 개발중단된 이스라엘 LAVI의 도면 및 미국 Lear Siiegler사가 개발한 비행제어프로그램소스 등을 구입하게 된다. (단 실기체는 없다) 동시 이스라엘산 레이더부품에 대한 구매가 따랐다.

 

중국은 LAVI데이터를 통하여 신개념의 항전블럭구조를 익히게 되었고, 또한 LAVI축소형모델 풍동실험을 통한 데이터로 대대적인 외형수정에 들어간다. 이렇게 수정된 J-10은 큰 외형상 거의 현재의것과 비슷하지만,에어인렛 부분은 아음속기체인 LAVI나 F-16의 피톳방식이 아닌 프랑스 미라지2000형 반원형 초음속조절추방식을 사용한다.(단 위치는 양옆이 아니라 현재와 같음.)


LAVI의 복제판이라는 속설과 달리.. J-10은 사실 컨셉초기부터 카나드-델타익 구조(원형이 카나드-델타익인 J-9)었고, 고속 전투-요격능력을 요구받은 중형전투기로, 카나드-주익 겹침구조의 경전투기 LAVI하고 와류발생 밑 제어원리가 틀리다. 또한 LAVI 개발중지의 원인으로 익면설계의 중대결함이 큰 몫 차지하는바 그리 좋은 참고모델이 되기 어렵다.(LAVI기술중 가장 중요한 파트는 바로 미국이 LAVI를 위해 짜준 비행제어부분인데..이스라엘이 중국에 소스채 덜컥 넘긴 바람에 미국이 노발대발했었다)


오히려 역시 카나드-델타익컨셉에 노하우가 많은 닷소(얘넨 50년대 벌써 카나드식실증기를 만들었다,미라지5전이다)가 CAC가 확보한 FBW해독 및 개량에 많은 도움을 줬었고,중국이 만들지 못하던 물방울형캐노피, 항전장비를 비릇한 많은 부품들을 금수조치가 있던 90년대에도 계속 공급했었다..써글 프랑스놈들.. (물론 이런 거래는 미자리전투기와 라파엣급 프리깃 대만수출에 뻑 돈 중국이 프랑스와의 민수계약을 모두 중단하겠다고 한 상황에서 무마용으로 했을 원인이 크다.사실 이런건 중국에 팔아도 별루 돈이 안되거든..)


본문으로 돌아와.. 전반 80년대는 중국항공산업에 있어서 다시 동이 트는 시기라고 볼수 있다. 서방과의 허니문 시기었기때문이다.


지금보면 완전 코미디지만.. 중국공군이 미라지2000하고 F-16을 몰고,대만공군의 Mig-29/Su-27전투기와 싸울 기회가 있었다. 중국이 서방하고 친할 시기, 미국으로부터 잠깐 버림받았던 대만은 중국의 주적인 소련과 신형전투기수입을 은밀히 추진했었고,전직 대만공군사령은 직접 Su-27을 탑승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정책변화로 이 거래는 무산되어갔다.


그러다..두두둥.. 89년 천안문 사건이 터졌다. 민주화,반탐오 시위민중를 군대로 밀어버린것이다. 서방세계는 강한 규탄을 보냈고 군사행동을 지원할수 있는 모든 프로젝트들을 잠정 중단시켜버렸다.


졸지에 왕따 된거다.


중국 항공업은 머리가 띵해졌다. 서방기술협력이 하루아침에 끊어지니..또다시 답답해 졌다. 수많이 벌려놨는데 또 말짱 도무룩인가.. 1선급 주력기인 J-8-2전투기도 항전개장하러 미국에 보냈는데 압수당해 있었다. 온갖 생각에 머리가 착잡해지는것이다.


남의꺼 사서만 오는것은 믿을길이 못된다, 뼛속까지 들어오는 냉기이자 깨달음, 그리고 삐딱해진 새로운 결심의 시작이다.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자체적인 기술을 확보하자.. 이것만 내가 살 길이다.. 이로써 대놓고 카피의 길로 들어선다.


사실 80년대 중국은 서방에 있어 꽤 성실한 고객이었다. 돈이 적지만 구매능력만큼 부품 구입해주고 라이센스하고 했었다. 프랑스의 돌핀,퓨머 헬기,고속함포, 미사일,이태리 경어뢰,대공함포 등등 모두 라이센스비용 지급하고 사갔다. 결코 불법카피가 아니라는것. 물론 지난 얘기지만...

 


에피소드3: 옛 정을 찾아서

 


사실 천안문사건에 앞서 서방의 심기를 다친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바로 89년초 코르바초브가 중국을 방문해 소-중 관계정상화를 공개한 사실이다. 양측은 10년의 중국-베트남전쟁으로 지속되었던 소-중 군사대치의 완화, 군용기술 협력의 재시작 등을 논의했는데.. 이는 미국이 중국의 정책방향에 대해 큰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헌데 소련이 이때 막장이던 시절이라 먼저 손길을 내미는것이다. Mig-29를 중국에 파견해 멋진 비행시범도 보이고 사가라는것이다. 미코얀,수호이 등 옛 거래처들로의 방문도 가능해졌다.


중국 대표단이 소련에 갔을 때, 수호이설계소 방문시 옛 동창이 막 보인다. 수십년 전 함께 알초짜었던 넘들이 30년 지나니까 모두 중견급으로 커져 양쪽에 서있는거였다. Mig-29는 숏다리고 종합지휘시스템 없이는 쓸모없는 물건이라며 Su-27을 택하라고 귀띔해준다. 서방 최강의 F-15에 대항할수 있는 기체 보유가능성에 중국은 눈이 번쩍 떠졌다. 이놈도 잡고늘어지면 구매할수 있나...


사실 이때 소련은 Su-27은 수출을 고려한적이 없고 동유럽처럼 Mig-29만 팔려고 생각했는데.. 웬걸 중국넘들이 한바퀴 돌더니만 Su-27 아니곤 못사겠다고 배째라고 한다. Mig-29 곡예비행 볼 때 눈깔이 뒤집혀졌던 넘들이..


맹구29가 싸고 좋다고 유혹해도 도리도리, Su-27은 유지비가 엄청 든다 해도 도리도리.. 진짜 Su-27 팔라문 최신장비라서 감시원 파견하고도 모잘라 소련에 가까운 황하 이북에 배치못한다 해도 오케이.. 대책 없었다.. 윗선에선 관계개선 하라 쪼고.. 걍 팔았다. 사용상태감시 인력파견까진 오버고 그저 황하이북에 배치 못한다는 조건으로 91년초에 Su-27SK 24기 계약 체결한다. 소련의 1선급전투기 Su-27의 첫 수출이다.


그리고.. 다음해 소련은 없어졌다. 헐..


중국에 있어서 좋은소식이기도 하고 나쁜 소식이기도 하다.


좋은 쪽 얘기하면 지난 20년간의 최대주적이 하루아침에 없어졌고, Su-24와 백파이어 군단의 돌연타격에 중국공군이 밤새 떨 일이 다시는 없어졌다. J-8이나 J-10같은 요격-전투기들의 개발배후엔 항상 백파이어의 위협이 있었다. 물론 방금전 관계개선은 됬지만 소련이 예전처럼 하루아침에 돌아설수도 있었으니말이다.


나쁜 소식 얘기하면.. 서방과의 관계개선 가능성이 없어졌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서방과의 군사협력은 소련대항이 유일한 공동목표었는데.. 그 목표가 없어진거다. 서방의 무기금수조치가 처음엔 "잠정" 딱지가 붙어서 좀 지나면 무마될꺼라 생각했는데.. 이놈의 목표가 없어지니 얘네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사회주의나라인 중국(부카니스탄, 쿠바,베트남 같은 조무래기들 제외)을 삐딱하게 본다는것이다.. 군사협력할 껀덕지가 없어져 "잠정"이 막 "영원"으로 번질 추세인거다. (사족으로, 89년의 서방의 중국무기금수는 2012년 오늘까지 지속중이다)


소련, 아니 러시아를 붙잡자.. 중국은 결심했다. Su-27대금도 빨리 물고 기체를 빨리 인도받자..러시아가 민주화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처음에 옐친은 삐딱했다. 근데 좀 지나고 보니 서방은 말뿐이고 실질적인 지원이 없다. 군사공업으로 일쿤 나란데 막 밥줄이 끊어진다.. 도처에서 굶어죽는다고 아우성질이다. 중국에 Su-27 인도고 후속 계약이고 닥치는대로 잡자.. 해서 라인수출까지 허락한다.


수호이사 살길 만난거다. 그 앞쪽에서 귀띔한 사람 공 세웠다(그사람이 시몬노브라는 썰까지 있다).90년대 중국에서 물꼬 틀어 70~80기 완제품에, 라인설비에,100여기 조립킷트까지 수출하니 목이 확 트이는거다..덩달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수호이전투기 사가겠다고 아우성질이다. 심봤따.


반대루 미코얀사는 죽을 맛이다. 생산한 미그29들은 공장에 쌓이지 러시아공군은 돈이 없다고 인계해가지 않는다. 게다가 Su-27은 수출안해 실적이 없는 동시 실점도 없는 반면, 일찌기 수출한 미그23, 29들은 도처에서 얻어맞는 소리가 들린다.


주로 소련 전선공군 용도로 만든 미그29A는 1500시간짜리 기체수명에 350km도 안되는 실제전투반경, 간단한 에비오닉 장착으로.. 소련의 전선공군지휘시스템에 기반하여 전쟁발발후 파상공세로 전장 200km내에서 적기목표에 떼지어 미사일세례를 퍼붓고(Mig-29의 BVRRAM발사는 절차가 엄청 복잡해 지상통제센터의 통합지휘하에 미리 준비하여 떼거리발사하는 방식) 바로 근접전에 들어간다는 알고리즘으로 만들었는데.. 이놈 사간 나라들에선 소련의 종합지휘시스템이 없으니까 소수의 독립형 제공전투기로 운용한다는거.. 자체 항전이 반쪽짜리인 기체를...


굶어죽을 처지니 도처에 찔러본다. 기술을 전수해 달래도 오케이. 미국하고 협력선이 끊어진 청두CAC가 F404대체할 중형엔진 알아보러 클리모브(미그사 자회사)에 방문간다 하니까 미코얀 사장이 직접 가서 같이 협력하자고 제안한다. Mig-33(후에 미그29 개량형인 그놈 말고 단발형 또 있다)방안을 들고 Super-7에 접목하기 딱 좋다고 한다. 똑같은 수법으로 이란하고도 전투기개발 진행한다.

 


(미코얀 LFI 후보기종 구형코드명 Mig-33)

 

 

기술에 배고픈 CAC는 흔쾌히 수락한다.93년 뒤로 CAC기숙소에서 한손엔 소시지,한 손에는 빠이주 들고다니는 코큰넘들의 자취가 심심찮게 보인다. 민항기부품 가공계약으로 청두사를 출장했던 에어버스나 보잉직원들과도 우연히 맞딱드린적이 여러번이다.


동시, 개발이 요원한 WP-15,WS-10엔진을 마냥 기다리기엔 너무 리스크가 커서, J-10초도형의 엔진을 Su-27에 장착됬고 당장 획득가능한 Al-31F엔진으로 방향 틀기로 결심했다. 청두사의 불만이 컷지만,91년 목업기가 나온 다음해 AL-31에 맞춘 J-10의 에어인렛 밑 후반동체에 대한 수정이 시작되었고 이로서 다소 언밸런스한 J-10의 최종 레이아웃이 완성되어간다.

 

(90년대초 J-10의 컨셉목업)

 

이때 WS-10엔진은 빈약한 기술기반으로 인해 코어엔진(개스제너레이터) 개발단계서 버벅거리고있었고, 새로 지원받게된 소련엔진기술(비록 Al-31엔진이 수명 900~1200시간짜리 소모품뿐이었지만)은 큰 가뭄에 단비었다. CFM-56의 변형된된 코어엔진을 대략 유지하되, 제어장치와 압축기 부분 등을 AL-31F의것을 참고한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로 내부적으로 F-110과 Al-31F의 먼 사생아란 이름을 단 WS-10A엔진의 시작이다.

 

에피소드4: 배신과 졸업의 관계

 

 


완제품들을 러시아에서 구매하러 돌아다니면서 대혼란을 본 중국이 문득 깨달은것, 좋은 찬스구나. 비록 서방에 비해서는 뒤떨어졌지만, 중국레벨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앞서있던 소련의 기술, 특히 국방공업기술들을 일거에 빨아들일수 있는 절호의 기회었다.


주정뱅이 옐친 대통령은 서방방식의 완전자유화에 눈멀어, 소련시절의 여러 OAK와 NPO들을 기업단위로 사유화시켰고, 중요방산 완제품이 아닌 것들 수출에 대해서는 기업의 자율화판단에 맞겼던 시기이다. 일거에 생활난에 빠져들었던 많은 경험 기술자들은 출국해 일자리를 찾으러 떠났고, 미국,영국을 선두로 조직적인 핵심인력확보가 진행되었다.


일례로 록히드마틴이 야코블레브사 팀 하나를 스카웃 해가는게 가능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었고,그나마 잘나가던 수호이사도 엔지니어들이 인도에 S-54로부터 S-65에 이르른 다량의 차세대기 도면들을 파는것을 눈감아주던... 그리고 회사자체가 S-37(Su-47의 그 S-37이 아닌 단발대형엔진의 유파형 전투기) 컨셉도면을 일본의 밀리터리잡지에 익명투고하여 관심을 끌 정도로 다급했던 시절이었다.

(Sukhoi LFI 코드네임 S-54)

(수호이사가 일본잡지에 익명투고한 S-37 Al-41F대형-단발전투기, 이때 Berkut의 코드네임은 S-32)

 

청년시절 소련유학생이었고 러시아어에 유창한 리펑 부총리(후기에 부정부패로 중국에서 이미지가 개판, 전편 J-10초기형사진속 인물)가 제안한 <쌍인공정(기술,인재 인입공정)>이 중국의 국책으로 긴급 책정되었고,그중 구소련 국방공업에 대한 기술,인재 약탈부분은 943공정이란 비밀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소련에 유학했던 기술자들에 설문지가 보내졌고, 그중 중국정보부서가 확보한 각 소련연구소들의 인력리스트에서 각자 익숙한자를 찾아 컨택하기를 장려했다. 중국 방문초청장, 민간간기업 엔지니어채용 등 많은 명의로 수만명에 이르른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시 등 나라들의 엔지니어들한테 뿌려졌고,그중 수천명은 중국행을 택했다. 진짜 고위급 두뇌는 이미 미,영,독에 한발 늦은 상태었지만, 중위권 엔지니어들을 대거 쓸어간 셈이다.


사실 역사는 돌고돈다는 말이 있다. 사실 소련공업화의 일등공신이 바로 요즘 자주 화두되는 1929-1933의 세계 경재대란이다. 상대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주기에 덜 민감한 소련으로, 미,독의 실업기술자들이 밀려왔고, 판로가 막힌 많은 미,영,회사들은 소련에 공장을 세웠다. 소련은 이때 가용예산의 60%이상을 해외기술영입에 총력화했으며, 이를 통한 공업화가 없었다면 고난의 소독전쟁을 이겨낼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뒤 50년이 지나니 정반대로 된것이다.


이러한 무질서는 푸틴이 등극한 2000년 전야에까지 이어졌고, 이에 분노한 푸틴이 2000년말 방산관련 전부의 기술교류,부품,완제품수출을 100%국가소유의 러시아방산수출입회사로 단일 통합하는 대통령명을 내림으로 그 막을 내렸다.

 

하지만, 중국에 있어서는 원하는것을 거진 다 이룬 상태었다. 단 항공업에만 관련해서 보면:


Su-27의 라이센스생산계약(J-11)을 통해 이런 대형전투기생산에 필요한 제작기술과 설계도면들을 입수했고,비행제어의 대부분 소스코드까지 확보했다. 90년대 말, 화력제어부분 소스를 디코딩했고, 중국산무기들도 통합할수 있게 되었다. 뒤이어 중국은 러시아산 조립킷트의 인수를 거부했고, 엔진제외 국산화시킨 부품으로 만든 J-11개량형을 자체개발한다. 이 뒷이야기는 우리도 익숙히 알고있는 내용들이다.


미국과의 피스펄프로젝트에서 이루지 못했던 J-8개량계획도 순항했고,ZHUK-8 레이더개발이란 명의로 NIIR사와 다량의 기술협력을 진행했었다. 단 1기도 팔지 못한 J-8수출형이에 개발비 억불규모로 쏟아부었지만, 불만은커녕 엄청 남는 장사였다. 80년대 이스라엘선에서 습득한 레이더하드웨어기반에 NIIR과의 협력으로 PD레이더 사격통제에 관련한 소프트웨어 노하우들을 대거 결합할수 있게 되었다. 하여 중국 스스로 1996년을 전투기레이더에 있어서 대학 졸업한 한해로 여긴다.


한편, 90년대 ESA레이더에서 NIIP보다 개발생산이 좀 더 빨랐고 실용제품을 내놓았던 NIIR이 신형전투기사업(PAK-FA)에서 낙점을 맞은것도 기술보호가 NIIP보다 허술했고,SOKOL같은것을 중국,인도에 보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푸틴의 태도도 어느정도 영향이 있지 않을가 조심스레 추측해보기도 한다.

 

청두CAC는 거의 10년간 개발했던Super-7 전투기를 위해서 마지막 퍼즐을 맞출수 있었고(미그사 엔지니어 참여, 클리모브 RD-93엔진 채용) 동시 일부 Mig1.42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미코얀사 엔지니어들까지 잡아놓을수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전투기가 바로 샤오롱인데, 중국CAC ,미국 그루먼,소련 미코얀의 혈통이 뒤섞인 아주 특이한 역사를 가진 넘의 탄생인것이다. 파키스탄을 앞세운 아랍권과 아프리카를 겨낭해 철저한 저가형 3세대모델전투기인것이다. BVRRAM운용을 가능케한 항전 장착에, 기체제작을 미그-21라이센스 해본놈이라면 만들수 있게 간단화시킨 조합이다.


AL-31을 장착한 청두사의 J-10도 비교적 순항해,96년 완료,98년 초도비행을 진행한다. 많은 기술원천의 뒤엉킴으로 급조한 흔적이 여러군데 엿보이지만, 무장장착능력 외 기동성능에서 F-16에 뒤질데 없는 결과물에 중국은 매우 만족한다. 중국에서는 J-10을 전투기개발의 대학졸업논문으로 본다.

 

(박물관에 전시된 J-10 프로토타입 1호기)

 

선양SAC가 수호이사쪽에서 주로 기술을 털었다면,청두CAC는 주로 미코얀사에서 털었다. 수호이사에서 턴 T-60S폭격기도면은 폭격기담당인 시안XAC로 갔고, H-8같은 이름으로 중국 차세대폭격기를 만들자는 등 뒷심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러시아-중국 방산기술 트러블들을 보면서 항상 의아해하는 부분이 바로, 왜 다른 나라 무기가 아니고 러시아무기가 중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마냥 카피당하냐 이다. 본문을 통해 이 의문이 조금만 풀렸으면 좋겠다.


답은 무지 간단한바, 많은 기술의 비밀은 사실 종잇장 한장 차이다. 모르면 정말 이해불가지만 귀띔만 있으면 오~ 다 알게되는 그런거 있다. 중국엔지니어들은 소련식의 무기들 중 많은 파트의 개발내역에 익숙했고, 분해카피로 알아볼수 없는 일부 핵심가공 기법들을 943공정을 통해 확보한 인력의 직접참여 또는 조언에 의해 돌파할수 있었기때문이다.


2000년대 러시아방산수출입회사 탄생 이후,러-중 방산판매가 저조한 원인중 핵심이 바로, 러시아가 수출하는 신형부품들은 거개 구형부품의 발전형인데.. 중국넘들은 뜯어보면 그 차이점을 알아, 발전된 부분만을 차용해 비슷한 신형 중국산부품을 만들어낸다는것이다. 때문에 대량구매 아니면 중국에는 안판다는 궁여지책을 불러왔다.


날로 위축되어가는 방산수출에서 러시아입장에선 인도 3배정도의 국방지출을 하는 중국이 엄청 필요 하지만.. 기술자 지원파견해도 버벅거리는 인도와 달리, 중국은 이미 부품을 주면 알아서 카피하는 기술단계까지 왔다는 점이다.


우리가 항상 가져야 하는 태도로 한가지를 짚고싶다. 원판복제 식의 대놓고 카피는 비난해야 하지만, 카피행위 자체와 카피를 가능케한 기술실력을 비하해서는 절대 안된다. 이는 선진기술에 대한 대리만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선진기술은 우리의것이 아니고 우리도 카피자들처럼 어떻게로나 배워야 하는것들이다. 부정적영향을 제어할수 있는 선에서 도둑질도 가선택 항이다.


공업계에서 "참고개발"은 필수다. "경쟁제품을 뜯어보고 그의 좋은 아이디어를 차용해본적 없는자 나에게 돌을 던지라" 하면 선뜻이 나설 엔지니어가 몇명 있을까.. 각 회사들에 있는 특허분석팀들은 "어떻게 걸리지 않게 카피하느냐"를 연구하는 부서일 뿐이다,좋은 이름으루 "벤치마킹"이란 단어를 쓰는데 뭐 별 차이가.... (혹여 관련분야 분들께는 죄송을 표합니다)


카피하는 능력을 일단 먼저 갖추고, 디자인까지 카피하지는 않는 덕목을 갖추자. 우리에게 있어서도 필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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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종료입니다. 다음편은,90년대부터 시작한 중국 스텔스기의 개발사 그리고 J-20에 대한 분석을 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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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뺀질이 12-03-09 20:55
   
80년대 미국이  소련 견제 한다고 중국에 항공 기술 퍼주고 그 후에도  보잉이 민항기 사업 많이 밀어 주는 것에 비해 돈주고  전투기 사쓰는 우리나라에는 너무 소홀 한것 같아 씁쓸합니다.
해달수달 12-03-09 21:03
   
지금은 중국을 견제해야 하니 우리에게 팍팍 밀어줄 수 없는겨? 양키님들아!
황제 12-03-09 23:10
   
미국이 마음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소련을 견제할 필요성 때문에 중국에게 기술을 준 겁니다.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우리에겐 그럴 필요성이 없었죠. 1980년대엔 우리가 항공산업에 진출할 능력이 되지도 않았고, 지금은 소련 견제의 필요성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자기 아는 거 다 준 것도 아니고 일부분만 준 겁니다. 물론 이것도 중국에게 엄청 큰 도움이 됐겠지만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기술을 아무 이유 없이 남에게 공짜로 줍니까? 조선이나 반도체 기술을 동남아에 넘긴다면 찬성하시겠습니까? 흑표 전차 기술도 터키에게 돈을 받지 않고 공짜로 주면 좋을까요? 미국이 다른 나라에 기술을 넘기는 이유는 자기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이득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게 안 줍니다.
스마트MS 12-08-17 19:12
   
좋은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