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군이 도입한 게틀링건
1818년 오늘, 연발로 총탄을 발사하는 게틀링건을 고안한 미국의 발명가 ‘리처드 게틀링’이 노스캐롤라이나주 머니스넥에서 태어납니다.
게틀링은 어려서부터 기계조립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며,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기구의 작동 모습을 관찰하고 농업용 기계를 발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이앙기, 대마파쇄기, 증기 경운기, 모터로 움직이는 자동 경운기 등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죠. 하지만 발명가로서 게틀링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것은 1862년 그가 만들었던 게틀링건이었습니다.
여러 개의 총신이 돌아가면서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속사화기인 이 화기의 초기 모델은 수동으로 크랭크축을 돌려 발사하도록 했기 때문에 기관총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했지만, 개량형에는 전기 모터를 장착하여 그 성능을 향상시켰죠. 게틀링건은 1866년 미 육군에 의해 제식 무기로 채택될 당시에는 분당 600발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개량되었습니다. 특히 1898년 터진 미국-스페인전쟁에서는 미 육군과 해군이 사용하여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합니다.
애초 리처드 게틀링은 이 무기가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발명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병력이 우세한 군대가 숫자가 적은 군대를 일방적으로 살육할 수 있었고, 약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죠. 게틀링은 자신이 고안한 무기가 병력의 우위로 약한 집단을 공격하려는 강대국의 도발을 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죠. 하지만 게틀링 건이 그 치명적인 성능을 과시했던 것은 미군의 아메리카 원주민 소탕작전, 영국군의 아프리카 침략 등이었습니다. (뭐 멀게 갈 필요 없이 우리나라의 동학 농민군을 공격했던 관군과 일본군도 게틀링 건을 장비했습니다.) 여전히 강자를 더욱 강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그당시 전봉준의 기록
첫돌격때 1만명의 전력중 살아있는 사람이 3500명에 불과했다
2번째 돌격후 남은 사람은 500명도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