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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8-15 11:37
[전략] 영국의 Commando! 한국의 유격부대!
 글쓴이 : 넷우익증오
조회 : 2,364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뮌헨 평화협정문"을 보라는 듯이 찢어 버렸다.

그리고 독일군은 폴란드를 전격 침공했다.

폴란드는 다급하게 영국ㆍ프랑스에 지원요청을 한다.
9월 3일, 영ㆍ프랑스는 평화조약을 파기한 독일에 즉각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폴란드전쟁은 그들에게 강 건너불. 남의 전쟁에 선듯 뛰어들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폴란드는 다시 애타게 소련에 구원 요청을했다.


음흉하고 포악한 스탈린.
도와주기는 커녕 폴란드 뒤통수를 내려첬다. 독일과 협공으로 폴란드 절반을 집어 삼켰다.


폴란드를 움켜쥔 스탈린은 25,000여 명의 폴란드군장교ㆍ지식인들을 카친숲으로 끌고갔다.
있을지 모를 저항의 싹을 송두리째 뽑고자 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 참혹한 "카친숲" 학살현장을 나중에 독일군이 발견한다.


야비한 스탈린은 독일군의 만행이라고 날조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자들의 거짓말 선동수법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와해된 폴란드군 20만은 루마니아를 거쳐 필사적으로 영국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자유폴란드군을 결성하여 조국을 되찾고자 독일군에 맞섰다.


1945년 5월 8일, 유럽전쟁은 끝났지만 폴란드는 소련 위성국가로 변했다.
졸지에 자유폴란드군인들은 세계 유랑민으로 남았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석권하는 동안, 히틀러는 서부전선 영ㆍ프군의 공격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러나 오히려 두 나라가 결사항전 의지가 없는 것을 확인한다.


1940년 5월 10일, 드디어 이 독재자는 프랑스공격을 명령한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가졌던 영ㆍ프ㆍ벨기에군은 독일군의 전격전 앞에 불과 6주 후 무릎을 꿇었다.
전선에서 연합군은 피터지게 싸우는데 프랑스 고속도로는 휴가차량으로 메워졌다.


전쟁은 군인들의 몫이고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프랑스인들은생각했다.
심지어 농부들이 출격항공기를 활주로에서 트랙터로 막았다.
"혹시 아군비행기가 출격하면 적이 이 지역을 폭격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끝까지 평화만 부르짖었던 프랑스인들!
결국 그들은 히틀러의 칼날에 사정없이 찢겨지는 운명에 쳐해졌다.


그러나 영국은 달랐다.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유약했던 체임벌린 다음 수상은 처어칠이었다.

1940 년 5윌, 영국군은 덩케르크에서 기적적으로 귀환한 약 34만 병력을 주축으로 군대재건에 나섰다.


처어칠은 즉시 공세작전을 위한 Command(특공)부대 창설을 지시했다. 떨어진 국민 사기진작과 독일의 콧대를 꺽어놓기 위해서였다.


코만도 대원으로 선발된 장병들은 스코틀랜드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
영국 하이랜드는 지금도 세계특수부대 훈련장소로 유명하다.


바로 그 현장에 코만도 기념탑과 전시관이 있다.
네시호로 가는 관광버스는 빠짐없이 들려 영국 코만도의 전설을 소개한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코만도대원 기념동상


1942년 8월 19일, 코만도1005명, 캐나다군 4000여명은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 디에프항을 기습공격했다.
그러나 작전결과는 참담했다.
작전병력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런 실패를 거듭하면서 코만도는 단련되어졌다.



코만도작전 관련 사진자료


결국 코만도부대는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최선봉에 섰다.
그리고 유럽ㆍ북아프리카ㆍ이태리ㆍ말레이전역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된다.

한국전쟁시 영국 해병코만도 250여명이 장진호ㆍ원산만 일대에서 약 2년간 참전하기도 했다.



코만도기념관 내부 전시물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만도부대에 추가하여 공정군단도 창설했다.
국가자원의 한계로 공정부대를 지원할 엄청난 수의 수송기확보는 불가했다.

대신 호사(Horsa)라는 병력수송용 글라이드를 생산했다. 수송기 뒷꼬리에 견인줄로 매달려가는 이 글라이드는 많은 위험을 동반했다.



영국 공정부대 글라이드 Horsa


돌풍ㆍ조종미숙ㆍ착륙간 충돌 등으로 수많은 인명손실이 있었다.
공정대원들은 전원 지원자들로 충원했다. 적진후방 깊숙한 곳에 낙하ㆍ착륙하는 공정부대는 구름처럼 몰려오는 영국청년들로 병력보충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공정대원에게 주어진 특권(?)은 단지 "붉은 악마(Red devil)"라는 별칭과 빨간 베레모를 착용한다는 것 밖에 없었다.



영국 공정부대원 붉은 베레모


영국은 무려 6년 간의 혹독한 전쟁을 극복하고 결국 승리의 영광을 차지했다.
처어칠의 확고한 전쟁수행의지와 영국인들의 애국심이 가져온 결과였다.


한국도 6ㆍ25전쟁 당시 영국 코만도와 비슷한 25,000~30,000명의 유격부대원이 있었다.


주로 북한출신 청년들이었고 UN군이 이 부대를 지원했다.
이들은 고향을 자기 손으로 수복하겠다는 순수한 애국심으로 앞다투어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


부산 태종대 Y부대의 경우 900여명이 낙하산, 함정으로 주로 함경도지역으로 침투했다.
이들 중 기지로 돌아온 생환자는 수십명에 불과했다.


당시 서해안부대 유격대원 최일성씨는 평양근교 구월산이 작전지역이었다.
1953년 7월 27일, 그는 휴전이 된 줄도 모르고 북한에 남아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4명의 대원은 뒤늦게 휴전사실을 알고 백령도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선박을 구할 수 없었다.


해상탈출이 불가하자 그는 최후수단으로 평양~임진강까지 육로퇴출을 결심한다.

적의 추격을 뿌리치면서도 때로는 공산당 회의장을 기습하여 골수당원을 처단했다.


허기진 배는 풀뿌리로 채우며 휴전선을 향해 달렸다.
휴전이 된 지 거의 석 달 가까운 1953년 10월 14일, 이들은 기적적으로 적진 수백Km를 돌파하여 자유의 땅에 도착했다.


산짐승같은 5명의 유격대원이 갑자기 전방초소에 나타나자 아군초병은 까무러쳤다.
이같은 적진탈출기는 충분히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무용담이다.
그러나 1953년 10월, 일간신문에 잠깐 언급되고 이 사실은 역사 뒷편으로 사라졌다.


수년 전 5명의 영웅 중 마지막 생존자 최일성씨를 6ㆍ25전쟁기념일에 즈음하여 모 언론사에 소개하고자 했다.
"혹시 그 분 훈장받은 적이 있습니까?"라고 담당자가 물었다.

아쉽게도 그는 수훈 사실이 없었다. "기사화되었을 경우 민원소지가 있습니다"라며 보도를 거절했다.
결국 이 영웅은 2017년 쓸쓸히 눈을 감았다.


영국인들보다 조국을 위해 더 애국적ㆍ영웅적으로 싸운 우리 선열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현재 생존 유격대원은 수백 명 내외.

그러나 이들의 희생을 기억케하는 전시관ㆍ기념비 하나 없는 것이 한국과 영국의 다른 점 같았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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