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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4-09 23:44
6.25 최악의 패전
 글쓴이 : 붉은kkk
조회 : 4,194  

3위 : 횡성전투


1951년 1월, 유엔군은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명령에 의거해 북쪽으로의 반격을 개시, 중공군이 물러난 지역을 접수하며 순조롭게 전진 중이었다. 그러던 중 2월에 들어와 횡성과 지평리 일대에서 전선을 정리하기 위한 반격 작전인 라운드업 작전이 개시, 한국군 3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북으로 전진해 나갔다. 한데 점차 적의 저항이 강해지며 진격이 무뎌지기 시작하면서 횡성과 지평리 두 곳에 돌출된 전선을 형성했고, 이렇게 진격이 무뎌진 미군과 한국군을 노리고 중공군의 대공세, 이른바 중공군 3차 공세가 펼쳐지게 된다.

펑더화이는 유엔공의 공세를 격파하기 위해 골몰하던 중,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진격한 유엔군 병력이 톡 튀어나온 걸 보자 이들을 잡아먹기 좋은 절호의 먹이로 판단했다. 당시 펑더화이는 라운드업 작전으로 돌출된 지평리 일대의 미군과 횡성 일대의 한국군을 놓고 어느 쪽이 격파하기 더 좋은 먹잇감인지 골몰했고, 횡성과 지평리중 어느 쪽을 우선할지에 대해 중공군 수뇌부 내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결국 횡성 일대의 한국군이 머릿수는 더 많아도 약체란 점 때문에 횡성이 우선 목표가 되었으며, 중공군은 횡성 일대에서 돌출된 한국군 8사단을 격파해 커다란 구멍을 만든 후 유엔군의 측후방을 유린하는 공격작전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중공군 공세의 가장 첫 목표는 한국군 8사단이 되었다.

당시 횡성 일대에 있던 한국군은 공격작전 중이라 제대로 된 방어진지를 마련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공세를 우선하다 보니 부대간에 촘촘한 방어선조차 꾸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한국군 8사단은 사단 예하 부대 사이에 빈틈이 많이 생겨 있을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단과도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왼쪽 오른쪽 옆구리까지 비여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거대한 중공군의 공세가 이런 8사단에게 몰아쳤다.

 전투

1951년 2월 11일 밤, 중공군 40군 42군 66군은 8사단을 향해 쓰나미처럼 몰아닥쳤다. 8사단이 만들어둔 부대 간격 간격마다 중공군이 파고들어 갔고, 빈틈을 따라 깊숙이 내달린 중공군은 곳곳에서 8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며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대대도 연대도 사단도 전혀 지휘 기능을 발휘하지 못 했고,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된지 몇 시간만에 8사단은 완벽하게 마비상태에 빠졌다.

조직으로서 움직이지 못한 채 고립된 8사단 병력들은 무질서하게 후퇴를 시작했으나 곳곳에서 퇴로를 차단한 중공군에 의해 후퇴 도중에 격파되고 말았다. 8사단의 전방 부대가 궤멸되면서 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던 미군 지원병력과 한국군 포병대도 그대로 포위망에 갇혔고,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중화기와 중장비를 전부 버린 끝에 겨우 몸만 건질 수 있었다.

2월 13일, 중공군의 공세 시작 후 대략 하루만에 8사단은 궤멸되었다. 살아 돌아온 8사단 병력은 3000여명 정도. 그 중에서도 태반은 애초 후방인 사단본부에 있던 병력으로, 사단 전방에 있던 8사단 예하 3개 연대는 소멸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결과

8사단을 격파하면서 만들어낸 돌파구를 통해 중공군은 공세를 계속 했고, 한국군 3사단과 5사단도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중공군은 계속해서 공세를 이어갔으나 지평리 전투에서 저지되고 만다.

횡성 일대의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와중에도 네덜란드 대대가 후방을 엄호해줬고, 그 덕에 그나마 한국군이 병력을 남길 수 있었다.

살아남은 8사단 인원은 후방으로 물러가 재편성에 들어갔다.



2위 : 사창리 전투

사창리 전투는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1951.4월) 당시, 한국군 제6사단이 가평 북방의 사창리와 화악산 일대에서 중공 제20군 예하 3개 사단(제58/제59/제60사단)과 제40군 예하 제120사단 등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3일 동안에 걸쳐 전개한 방어전투이다.

한국군 제6사단은 이 전투가 개시되기에 앞서, 미 제9군단의 작전계획에 따라 사창리 북방의 와이오밍선으로 진격을 계속하던 중, 중공군의 반격(제1차 춘계공세)을 받게 되자 사창리 부근의 명월리와 광덕리 일대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하였다. 그 곳에서, 한국군 제6사단은 급편된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방어에 실패하고 사창리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병력과 야포와 각종 차량 등이 협소한 사창리 계곡으로 밀려들게 됨에 따라 큰 혼란이 야기되고 지휘체계가 와해되었다.

그 후, 한국군 제6사단은 일부 수습된 병력을 화악산과 석용산에 배치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에 실패하고 가평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한국군 제6사단은 큰 타격을 입고 가평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으며, 중공 제20군은 가평과 청평 간의 주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가평 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위 : 현리전투


사실 위에 2개 합쳐도 이거 하나 넘지 못합니다...지휘관 유재흥. 이 분은 3군단 궤멸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일으킨 원균을 능가하는 졸장입니다.

중공군 12군단, 27군단북한군 5군단 3군단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 3군단이 포위당하자 당시 군단장이던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했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136쪽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이 도주 행각으로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에서 한국군 3군단 예하 3사단, 9사단 병력 19천여명이 희생됐고, 병력의 40% 가량만 복귀했다. 무기는 거의 다 뺏겼다. 한국전쟁 사상 최악의 패전을 기록했다.

정병석 인제문화원장은 15세때 3군단 3사단 18연대에 학도병으로 배치됐다. 그는 "적군이 점령한 능선과 계곡을 피해 가파른 산 중턱을 탈출로 삼아 밤낮없이 걸었으며, 곳곳에는 탈진과 굶주림으로 사망한 전우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으나 미처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플리트 미8사령관은 한국군의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3군단은 1951 526일 해체되었다.

 

유재흥의 변명

 

먼저 유재흥의 변명을 간단히 들어봅시다. 유재흥은 휘하 사단장 최석에게 30연대를 보내서 요충지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라고 했으나, 미군이 '관할권' 을 들먹이며 오마치에서 병력을 빼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재흥은 별수없이 병력을 뺐고, 덕분에 현리에서 포위당하여 군단이 해체됐다는 겁니다. 유재흥이 후에 국방부 장관까지 해먹은 관계로 국방부 편찬 '한국전쟁사'

유재흥의 회고록에선 이 점을 들어, 유재흥은 책임없단 식으로 몰고갑니다.



그러나 정작 당시 30연대장 손희선은 이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
저는 오마치 돌파 명령을 사단장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마치 고개 북쪽 고지에 배치되어 군단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명령받았을 뿐입니다." 라고 합니다.

뭐 미군이 군단 버리고 연락기타고 도망가라고 유재흥 군단장님께 권해줬나보죠?... 여기에 대한 변명도 있습니다.
바로 유재흥은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연락기를 타고 작전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 는 것인데, 아니 군단이 포위된 마당에 군단장이 군단놔두고 작전회의? 그나마 이것도 거짓말이란 게 드러납니다.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136페이지 () 12번에 보면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참 뻔뻔한 분이죠?

 

밴 플리트와 유재흥의 대화 내용

 

밴 플리트 :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 "

유재흥 : " 잘 모르겠습니다. "

밴플리트 :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 "

유재흥 : " 그런 것 같습니다. "

밴플리트 :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 "

 

더 웃긴 건 이런 분이 후에 국방장관까지 역임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전시작전권 빼앗겼으면서 노무현 정부 때 전전통제권 반환 움직임에 결사 반대하심양심 있으면 조용히 고개 묻고 살아야 하는거 아닌가? 사후 현충원에 안치됨….에휴, 정말 부끄럽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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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경 12-04-10 00:02
   
그랫군요.
권력을 갖는다는거, 사실을 바꿀수가 있어서 다들 그렇게 가질려고 하잖아요..
저양반이 양심적인사람이었다면, 그냥 걍 매국노로 지금껏 남아있을터인데..
권력을 살아생전 유지하니, 그게 진실인냥....쩝
길동이 12-04-10 00:20
   
부끄러운 일이군 .......  근데 정치적 인 글은  빼는게 좋겠다는..
서로 치고받고 하면 끝없은거 아시면서..
맘마밈아 12-04-10 02:47
   
6.25때 한국군은 오합지졸 맞습니다
     
산골대왕 12-04-10 08:24
   
인민군에 비해 장비나 지휘관들땜에 오합지졸였겠죠.
월남을 보세요.
월맹은 나중에 중국까지 짱떠서 이긴 나랍니다. 그 월맹이 오죽하면 한국군과는 왠만하면 교전하지말라는 공문이 하달됐을까요~
          
임페라토르 12-04-10 17:07
   
베트남전 한국군 말하는게 아니라 6.25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