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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1-06 11:40
[기타] [대만글 번역] 어느 대만 해군 장교의 군생활 썰 (1편)
 글쓴이 : 노닉
조회 : 5,412  


몇 번 올라왔던 대만 해군 잠수함 비리를 고발한 前 해군 대령이 자기 블로그에 쓴 군생활 일대기를 번역한 것. 

왜 저런 장교가 별을 못 달고 대령으로 예편했는지 앞으로 번역예정인 2편부터 그 이유가 나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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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기 전, 나에게 미래를 위한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따윈 없었다. 졸업의 순간이 되자 내 앞에 놓인 미래가 어색하며 그걸 해쳐나갈 준비조차 안 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해군에서 내가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내게 미래는 없으리라. 나는 이 사실을 실삼하고 뼈 빠지게 일했다.


좋은 학생이란 무엇일까?

규칙을 준수하는 학생이 좋은 학생이다.


좋은 장교란 무엇일까?

임무를 완수하는 장교가 좋은 장교다.


나는 훌륭한 장교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나 좋은 학생의 자질을 타고나진 않았다.

임관 1년, 나는 남양급(미국한테서 공여받은 미국 글리브스(Gleaves)급 구축함, 2차대전 때 생산)의 포술 장교로 임명되었다. 남양급에 있었을 동안 나는 20일 이하만 휴가를 나갔다. 평일에 외출조차 자주 나가지 못한 채 불철주야 임무에만 몰두했다. 이런 종류의 노력은 시간을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내 정신력도 한계까지 도달시켰다.

군함의 교본을 꺼내어 사격 통제 체계 관련 부분을 읽어봤다. 배에는 5개의 함포가 있었는데 함포실에 있어야 할 수신기는 떼어져 대신 침실에 부착되어 있었다. 남양급의 장비가 온전하게 붙어있고 유익한 정보로 가득찬 교본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남양급은 2차 세계 대전 시절의 오래된 군함으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군함의 설명서들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어디론가 행방불명 되어있었다.

나는 그나마 남아있는 교본을 읽으면서 사라진 장비와 소위 '정체불명의 도구 - 아무도 사용할 줄 모르는, 그래서 아무도 건들지 않는 - ' 를 일일이 시행착오를 무수히 몸으로 겪어가며 확인하여 어느 장비가 무엇을 위해 있는 지 몇 달에 걸쳐 확인했다. 이는 분명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는 장비에 관한 생각들을 글로 적고 그림을 그러가며 노트에 기록했다. 몇 년이 지나자 9권의 노트가 만들어졌다. 만약 학창시절에 이렇게 공부했다면 아마 난 국립타이완대학에 입학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내가 학습한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대만 해군 월간지에 제출할 에세이를 썼다.

첫 에세이의 길이는 1만자 이상으로, H-93 사격 통제 시스템의 사격 정확도를 높이는 방법이 주제였다. 이 에세이는 해군 월간지의 '무기' 카테고리에서 첫 번째로 수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군 장성이자 병기 공장장 이사를 맡고 있던 분의 찬사를 듣는 영광을 누렸다.

이 에세이를 통해 나는 해군 무기와 관련해서 좋은 명성을 얻었다. 차후로 쓴 에세이는 '127mm 함포를 조정하는 데 퓨즈가 차지하는 역할과 과정', '주포 교정 방법' , '기관포 교정 방법' 등이었다. 모두 평가가 좋았다.

특히 기관포 관련 에세이를 작성할 때 나는 선박 훈련 부서의 선임 인스트럭터를 찾아갔는데 그 사람한테 '거긴 함부러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다. 뭘 만지면 안 되는지 알기 위해선 보다 많은 걸 만져봐야 하는 법이다. 나중에 의문점을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원인과 결과를 규명했다. 놀라운 결과물이었다. 뭔가 새로운 걸 습득하기 위해선 전임자들이 세운 룰을 따를 필요는 없다. 이런 류의 작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고, 재능도 충만했다.

내 노력은 신속하게 함정의 확인을 얻어냈다. 당시 함장과 부함장이셨던 분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으며, 지금도 긴밀히 연락하고 지낸다.


1년 후, 나는 유류 보급함으로 자리를 옮겼다. 완전 새로운 종류의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특유의 연구 정신을 유지한 채 유류 보급함에 관한 정보를 노트에 적었다. 배치 수개월 후 유류 보급함이 전술 훈련을 떠났다. 항해하면서 호스를 반대쪽 배에 연결하는 훈련이었는데 유류 보급함이나 보급을 받는 배나 보급 과정에 관해 잘 모른다고 판단해서 튜브 연결을 중단시켰다.

훈련 다음 날, 함대장이 보급함에 승선했다. 나는 사다리 밑에 있었는데 그가 밑에 있는 나에게 물었다. '이 배 책임자가 누구인가?'

나는 그 때 함대장이 찾는 게 분명 나라고 직감했다. 함대장이 내게 물었다. '왜 기름 튜브 연결을 중단시켰지?'

나는 그 자리에서 이유를 설명했지만 설명이 분명치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노트를 가져온 뒤 기록한 그림에 따라 상세히 설명했다. 함대장은 함대로 돌아가 '저 배에 재미있는 장교가 있다' 면서 나를 칭찬했다. 그러면서 함대에 있는 모든 장교와 사병들을 모아 해상에서의 유류 보급에 관한 수업을 진행시켰는데 그걸 강의하는 장교로 나를 지명했다.

기름 튜브를 내 독단으로 빼버린 건 잘못된 행동이었고 처벌이 뒤따라야 했다. 온 좋게도 위기를 면한 나는 그 때 '위험은 느닷없이 들이닥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를 위기에 대응하여 내가 평상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 때가 내가 끝나는 때다.


유류 보급함에서 근무한 기간은 8개월 정도였다. 그 다음 간 배는 공여받은 기어링급 구축함으로, 난 대잠 장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기어링급의 대잠 장교는 대잠뿐만 아니라 함포 사격도 책임져야 했다. 배치 첫 날 배의 함포 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 내용의 반약함에 치를 떨었다. 배의 누구도 장비에 대해 알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난 불철주야로 배의 모든 장비에 관해 연구하고 기록했다. 두 달이 지나자 난 모든 장비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심장병에 걸려서 입원했다. 이 병은 완치되지 못했고, 나중에 더 심한 고통을 가해왔다.

당시 나는 임관 2년도 안 된 애송이였다. 함대장은 이 애송이를 우려했다. 어느날 오후, 함대장은 기어링급에 승선하여 함장실에 배의 모든 장교를 소집했다. 함대장이 병기장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 병기장이 애송이란 걸 알았을 때 함장은 실망을 숨기지 않으며 기어링급의 무장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정확하게 대답했다.

함대장은 조금 놀란 채 많은 질문은 연속적으로 했다. 대답하기 힘든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답변했다. 그 함대장은 해군의 무기통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이런 류의 애송이를 처음 본 함대장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내가 그 함대장만큼의 지식을 지녔다는 말은 안 하겠다. 그 때 난 기어링급의 무장 상태를 완벽히 파악한 지 얼마 안 되었고, 관련 지식이 충만했었을 뿐이었다.

그날 함대장은 나에게 2-3시간 동안 질문했다. 돌아간 함대장은 '저 기어링급에 함대 최고의 장교가 있다'면서 공개적으로 나를 칭찬했다.

몇 달 후 기어링급에 구멍이 뚫려 탄약고가 범람하는 사건이 터졌다. 당시 난 근무 중이었다. 선실을 점검했을 때 바닥에 고인 물을 발견한 나는 배 밑에 탄약고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돋았다. 한밤 중에 기어링급 선원 전원이 물 빼는 작업을 했다. 그 후 탄약고에 있던 5인치 포탄과 잡다한 탄약을 일일이 닦아 건조하는 일을 했다. 부두로 돌아온 배에서 탄약을 옮겼다. 이 작업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대사건이었지만 함대 회의 때 저 놈이 그날 당직을 서지 않았다면 이튿날 아부도 탄약고 침수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라며 함대장이 나를 칭찬했다.

어쨌거나 물에 흠뻑 젖은 기어링급은 1년 간 도크 신세였고, 난 크로스리(Crosley)급 병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크로스리급에 배속된 첫 날, 내가 처음 들은 얘기는 승조원 4명이 배 안에서 몰래 마작을 치다 걸렸다는 소식이었다. 그 얘기를 동료 장교가 웃으면서 해줬는데 이건 웃으면서 할 게 아니었다. 배의 군기가 파괴되어 있었다.

당시 내가 들어간 크로스리급의 군기는 내가 군생활 동안 타 본 군함 중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된 이유는 장교들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을 통제하기엔 수가 너무 적었다. 결국 간부들은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다른 병사를 써먹는 수를 쓰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조원들의 군기가 낮은 이유을 파악했다. 6-7명의 병사가 주범이었다. 그들은 근무 시간 중에 몰래 차나 알콜을 마시고 낮잠을 자고 도박판을 벌였다. 병사들은 그 놈들을 두려워했으며, 장교들조차 놈들을 제재하기는 커녕 오히려 질시의 눈으로 쳐다봤다.

2개월 후 새로운 간부 2명이 배에 들어왔다. 나는 그 둘과 합심하여 놈들을 갈아 엎기로 했다. 주동자들은 영창이나 군사법원에 끌려갔고, 머리가 사라지자 수병들은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배의 군기가 반드시 엄격해야한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정의는 수행되어야 한다고만 말하겠다.

내가 다른 배로 가기 3개월 전, 대만 국방부는 '제 1회 국방군 체육 대회'를 개최했다. 해군 6대 함대와 공군 9개 비행대에서 각각 팀을 뽑아 15개의 팀이 B 그룹을 이뤘다. 육군과 해병대는 따로 A 그룹에서 경기를 치뤘다.

종목은 3개로, 무장 200m 수영, 3km 달리기 그리고 91.44 소총 사격이었다. 운 나쁘게도 당시 내가 있던 크로스리급이 오버홀에 들어갔는데 함대에서 우리 배한테 그걸 감독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더욱 운 안 좋은 건, 함장이 나에게 대회 준비를 떠넘겼다는 사실이다.

함장은 매일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서 대회를 준비하는 나와 수병들을 방문하며 '무슨 문제 없나?'라고 물었다. 나는 항상 아무런 문제 없다고 대답했다. 답변을 들은 함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페달을 밟고 자리를 떠났다.

훈련시킨 수병들은 내가 있던 제131 함대에서 대표로 모인 놈들이었다. 131 함대에 관한 소문을 들어본 적 있는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적 수병들을 한 데 몰아놓고 관리하는 함대가 바로 131 함대였다. 131 함대의 군함들한테 대회를 위한 정예 수병을 보내달라는 공문이 내려오자 함장들은 자기네 배의 관심수병들을 대표랍시고 보낸 것이다. 대회 훈련 때 무슨 일이 발생했을지는 짐작하리라 믿는다.

이런 수병들한테 명예에 관해 가르치며 대회 준비를 하는 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대회 준비 기간은 2개월이었다.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고강도의 훈련이 필요했지만, 내가 훈련시킬 수병들 대부분에게 사격 경험이 전무했으며, 몇몇 수병은 헤엄칠 줄 몰랐고, 그 누구도 뜀박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놈들을 훈련시켜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저 밤낮으로 수병들과 붙어 다니며 천천히 설득했다. 수병들과 머리를 맡대어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을 수행했다. 수영이나 달리기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였기 때문에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1위나 꼴지나 둘의 차이는 현격하지 않았다. 당시 수영/달리기 1위가 91.2점을 받았는데 꼴등은 86-7점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요점은 사격이었다. 사격 대회에서 수병들은 6발을 쏴야하는데 0발을 맞추면 0점을 받고 만발이면 만점을 받았다. 수영과 달리기 기록이 낮다 하더라도 사격에서 순위를 엎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고, 수영과 달리기는 평균만 하되 사격에 집중 노력하는 식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사격 대회는 단순히 과녁을 맞추는 식이 아니었다. 여기에 관련해서 쓰고 싶은 게 많지만 주제와는 상관 없으니 생략한다. 어쨌거나, 내 팀의 사격 점수가 다른 함대의 점수를 훨씬 앞섰기 때문에 총점 1위를 달성하여 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수병들은 괴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그 때의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격 대회 전 날에 벌어진 에피소드가 있다.

131 함대 사령부에선 만약 팀이 우승한다면 모든 참가자들에게 즉각 10일 포상 휴가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사격 대회 전 날, 함대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대회 끝나고 수병들이 복귀한 뒤 각 배 사정에 맞춰서 휴가를 보내기로 약속을 바꿨다.

이 소식을 들은 팀의 몇몇 간부들은 불평을 쏟아냈다. 그리고 사격 대회가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수병들에게 알리지 말자고 내게 건의했다. 하지만 나는 기만책을 쓰기 싫었다.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하는 게 싫었다. 대신 마음으로 그들을 설득시키고 싶었다. 이런 류의 속임수는 언젠가는 들통나기 마련이다. 마음을 끌어내지 않고서 어찌 사기를 높이겠는가?

나는 수병들을 모아 진실을 털어놨다. 수병들은 통제력을 읽고 저주섞인 단어를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소란이 잦아들때까지 기다린 후 모두가 납득시킬만한 연설을 했다. 내 입으로 말해서 낮간지럽긴 하지만 내가 가진 능력 중 가장 뛰어난 게 바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설득시켜 그들로 하여금 같은 목표를 위해 단결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란 바로 다른 사람들을 정직하게 대우하는 거다.

앞서 근무한 배들에서 얻은 성공은 내게 해군 생활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줬으며 내 미래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예나 지금이나 대만 해군에서 고속 승진을 하는 지름길은 고위 간부의 부관이 되는 거다. 이들한테는 고위 간부한테 접근할 기회가 많으며, 고위 간부 그 자체가 될 길이 충만하다. 고위 간부와 부관이 부자 관계같은 끈끈힌 인연을 맺고 부관의 뒤를 밀어주는 일도 잦았다.

나는 정말로 부관이 되고 싶었다. 갈망한다는 표현을 써도 될 만큼이나. 불행하게도 주위의 그 누구도 내가 부관으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나한테 부관직을 제의하지 않았다. 특정 고위 장교가 나를 부관으로 택했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그분한테 충성할 태세였다.

그러나 만약 부관이 되었다면 미국 유학을 떠나지도, 타이베이에 집을 꾸리지도, 아내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겠고, 오늘의 내가 어떤 인물이었을지 궁금하다. 아마 십중팔구는 관청에서 일하는 간부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부관이 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나한테 남은 길은 더 많은 연구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열심히 독학하여 해군사관학교의 과학기술 선수반에 들어가 수학과에서 조교로 일했고,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4년을 공부하고 대만에 복귀했을 때, 해군 승진 라인과 난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함대로 돌아온 난 배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미국에서 학위를 딴 덕분에 해군 참모총장과 면담을 할 기회를 얻었고, 그 때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결국 기어링급 구축함의 병기장으로 복귀했다.

복귀한 년도에 참 많은 일을 했는데 여기에 2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해군참모총장이 주재하는 전술 검토 회의에서 나는 대잠작전을 주제로 무수한 사진과 글을 동반한 발표를 진행했는데 당시 대만 해군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대잠 작전 독트린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내용이라 그 파장이 대단했다. 이 때 내가 한 강의의 요약본이 해군 연례 에세이에 첫 번째로 실리게 된다.

다른 하나는 해안 포격 훈련이었다. 나는 선박 훈련 부서에서 오랫동안 유지해 온 포사격 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내가 제안한 사격 방식을 훈련 부서의 교관에게 알려주자 그는 기절할만큼 놀랐다. 뭐가 되었든 효과가 있었다. 명중률이 8-90% 상승했으니까.

사실 8-90%는 겸손하게 표현한 거다. 현장에서 함대 사령관이 실사격을 관람했고, 다음 날 훈련 결과를 보고 받는 자리에서 내가 탄 기어링급이 XX발을 사격하여 과녁을 거의 다 명중시켰다는 기록이 언급되었다. 사령관께선 '거의'라는 단어를 빼라고 말했다. 명중률이 100%란 뜻이었다.

이 기록은 함대 사령관에서 해군참모총장한테까지 올라갔다. 해군 무기에 정통했던 참모총장은 서류를 다 읽은 후 왜 저 기어링급의 기록이 좋은 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일련의 두 사건이 일어난 후 내 명성은 함대를 넘어 해군 전체에 퍼졌다. 많은 해군 장교들이 내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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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사냥꾼 18-11-06 12:43
   
이게 사실이면....정말 충격이네요....대만군이 설마 이정도 까지 개판이었다는게....
이게 군대냐~~~
Joker 18-11-06 13:15
   
국적을 떠나서 멋진 분이시네요
뭐꼬이떡밥 18-11-06 14:00
   
그냥 영웅담으로 들리는데요...

난 천재  감히 이런 천재를 몰라봐?
     
우주인간 18-11-06 14:09
   
음, 천재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거 같은데요.

막판에 썼다던 대잠 독트린 발표 보니까 마치 기존 독일의 회전문 이론을

만슈타인이 전격전 이론으로 발전시킨격 아닙니까.
우주인간 18-11-06 14:03
   
번역 감사드립니다.

정말 존경할만한 군인이군요. 우리나라에도 저런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첨인듯 18-11-06 14:05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자랑
별을 왜 못 달았는지 짐작이 가는.. ㅋㅋㅋ
마그리트 18-11-06 14:07
   
죄 자기 자랑이네 ㅋㅋ
태강즉절 18-11-06 14:11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구만...자존감이 승천하는구먼..
읽다가 군경력 10년 이훈줄 알았더만..꼴랑 임관 2년차?..ㅋㅋ
부하로 유능한 재원을 탐하는게 상급자들의 인지상정인데..
아무도 부관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결국 똑똑하긴 하나..인성에 문제가 있는..조직에 융화하지 못하는 개싸가지란 방증?..ㅋㅋ
짱꾸이들의 특성..(내 과오나 잘못,반성은 전혀없고.. 세상사 다 남탓)!..을 그대로 보여주는..ㅋ
     
꾸물꾸물 18-11-06 14:25
   
2년차는 중간 위쪽까지. 부관 지명(?) 이야기 나오고 유학 이야기 나오고 하는 걸 봐선
몇줄사이에 오랜 시간이 지남.
B형근육맨 18-11-06 14:25
   
풋ㅎㅎ
긴글 쭉 읽었는데
시종일관 자기자랑만 늘어 놓네요 ㅋㅋㅋㅋ
sangun92 18-11-06 15:05
   
음...
아직까지는 어떤 인물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오버랩되는 인물은 있음.

지.만.원.
쓰레기.

지만원은 육사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파병되었었음.
당시 상황을 모 언론 매체에 수기 형식으로 연재를 했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완전히 전쟁 영웅으로 포장을 해놓았음.

그 기사를 읽었을 때는 지만원이란 인물이 어떤 쓰레기인지 물랐을 때였는데도
그 글을 읽으면서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었음.

이 대만 장교 출신의 글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냄새가...
참치 18-11-06 18:32
   
무슨 소설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