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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2-03 22:31
[잡담] 강화도 다녀와서 질문이 있습니다.
 글쓴이 : 이콩이
조회 : 2,442  

역사에 관한 게시판이 따로 없고, 동아시아 게시판은 너무 진지해서... 밀리터리 게시판과도

연관있는 항목일지 몰라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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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우연히 강화도를 다녀와서 궁금증이 생겼는데요.


신촌에서 3000번 버스를 타고 김포를 지나 성동검문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강화도더군요.

전 강화도가 섬이라서 아무리 육지에 가까워도 최소한 마포에서 여의도 거리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폭이 좁은 곳은 100미터도 안될 것 같았어요.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대몽항쟁기에 고려 왕실이 강화도로 옮겨서 40여년을 버텼다는데...

몽골이 아무리 유목민이라 배를 탄 경험이 없고 해전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100미터를 못 건너가서 40여년을 두고 봤다는게 이해가 안되더군요.


그 정도면 해전이랄 것도 없이 그냥 둑을 쌓던지 흙으로 바다를 메꾸던지

여러 방법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부교같은것 만들 능력이 없더라도 말이죠. 


왜 못 건너간 걸까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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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201 18-12-03 22:37
   
저도 그런 생각들이 많이 들었고 역사현장에서 왜 이런 좁은 곳을??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하나만 힌트 드리죠.
1000동안 쌓인 뻘을 치우면 ^^
you158 18-12-03 22:50
   
그때는 간척하기전
     
이콩이 18-12-03 22:55
   
간척사업을 해서 그렇게 김포랑 붙어 있게 된건가요?
          
4leaf 18-12-04 06:22
   
이전에도 근접해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김포와 강화도 사이엔 바다말고도 갯벌이 있었습니다.

간척이 되기 전 강화도는 배가 정박할만한 포구가 딱 두개라고 하죠. 그 포구도 썰물때는 물이 다 빠지고요.

비슷한 예로 진도가 있는데 진도도 지금이야 대규모 간척이 이루어져서 평지가 많지만 삼별초가 자리잡았을땐 섬 주위로 갯벌이 펼쳐져서 배가 들어갈 포구가 2~3개였다고 합니다.
무영각 18-12-03 22:52
   
평지 안시성도 공성에 실패했는데
성아래 천연의 해자가 있으면...
ijkljklmin 18-12-03 22:55
   
내 고향이 강화인데 아무리 어림짐작이라도 폭이 100m인 곳은 없습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700m 이상이고 사리 썰물 때 얕은 곳이 생기기는 합니다만 몇 백 m는 되고 갯벌입니다. 거기다가 지금의 해안선은 몽고 침공이후 몇백년의 간척사업의 결과입니다. 강화도의 30%이상이 간척지입니다.  강화읍까지 바다가 들어 왔었습니다. 지금의 해안선을 보고 고려당시의 해안선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몽고 침공시에는 훨씬 멀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기병에 쥐약인 갯벌 천지였을 것이고요.
기병위주의 몽고군이 대량으로 건널 배가 없었겠지요.
몽고 입장에서는 무리하게 건너느니 가둬 놓고 기다리는 전략이었을 것입니다. 40년이나 버텼습니다.
이렇게 변했습니다.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6/09/13/20160913103139328230.jpg]
booms 18-12-03 23:08
   
못건넌게 아니고 안건넌게 맞을껄요???

유목민족 종특이자 특성상 몽고 입장에서는 전국토가 무정부 상태였고 언제든지 약탈하고 털어먹기만하면 되니까 굳이 틀어밖혀서 안나온다면 "그것또한 나쁘지 않다. 다만 니들국민들이 고생할꺼다" 압박하면서 마음껏 유린했죠.

목적이 고려의 항복과 편입후 상납을 받던가 그렇지 않으면 뜯어가면 그만입니다. 지금으로썬 상상도 못할 끔찍한 전쟁범죄가 난무하고 국민들은 노예로 팔아버리는 와중에서 가장 접견지역부근에선 점차 몽고에 항복하는 지주들이 나오기도 했구요. 아마도 이성계집안이 그중하나였던걸로 아는데...
     
아비요 18-12-03 23:16
   
이성계 집안은 원래 전주에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권문세족이랑 충돌이 있어서 식솔포함 200여호가 함경도로 도망갑니다. 저어기 두만강 너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게 함흥 근처입니다. 거기서 고려에 내응해서 최고 세력가인 조씨를 처리하고 그 일대를 차지하게 되는거죠.
     
태강즉절 18-12-03 23:55
   
고려 무신 정권의 첫장을 연 이의방 그 동생.이린의 6대손이 이성계.
이린이 권력 투쟁에서 밀려 겨우 목숨만 부지한체 본진인 전주로 도주하였고..
권력의 보복을 피해  집안이 강원도로 도주..또 그렇게 살다가
강원도로 원수네가 부임해오니..다시 북쪽 국경 언저리로  도주했던거올시다..
어차피 고려 권력층이 지네들 집안 잡아 죽일려는 웬순데...고려에 애착이나 있었겠는지?..
거기서 이넘 저넘 끌어모아 용병집단 만들어 몽골 돈받고 뛴거지... 무슨 항복까지야?..
이걸 왜넘들이..이성계는 여진핏줄이다 라고 개솔하는거고 그걸 믿고 떠드는 일뽕들도 있고여
          
발자취 18-12-04 01:14
   
이성계 5대조 묘가 삼척에 있습니다.

설명을 들으니 그 이유를 알겠네요.
태강즉절 18-12-03 23:09
   
저 역시 거길 가보곤 그런 생각을 했던 경험이..ㅋㅋ
우선 ..병력을 나를만한 배를 만들지 몼했겠죠..만들만한 고려 장인들은 배타고 튀었을테니..
그 기간중에 남쪽에서 거대한 나무들을 벌목해 강화로 운반할 정도로 해상 제해권을 잡았다 미뤄 짐작..
그런 형편이니..강화 주변엔 고려 수군들이 있었겠죠..
몽골이 육지쪽에서 뭐라도 만들라치면  해상을(육지로도) 통해 기습이라도 했겠죠..아마도!^^
어쩌다 상륙해도 어차피 뻘인데..무장에 갑옷이면..뻘에 그냥 말뚝인데..조건없이 화살 표적으로 당첨됐겠죠..
전차에서(말) 내린 전차병이 뻘에서 무슨 힘을 썼겠습니까?..초원에서나 기병이 먹어준거죠..ㅎ
당시 몽골 사정도 고려에 올인할 정도로 그렇게 여유만만한 것만은 아니었고여.
강화에서  느꼈던...100% 저의 뇌피셜입니다..ㅎㅎ
TheCosm.. 18-12-03 23:28
   
아 지금와서 보시면 다들 오해하시기 좋은데. 이미 많은 분들이 설명해주셨듯이, 서해안 일대를 비롯하여 강화도 등의 큰 섬들은 오래토록 간척을 해왔습니다. 특히 이러한 간척사업은 조선시대에 본격적이었는데. 이 이전인 고려 중기를 생각한다면 지금보다 더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samanto.. 18-12-04 02:10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이 센 곳이며
폭이 좁을수록 물살이 엄청 세죠...
유일구화 18-12-04 02:36
   
우리가 지키고저 하는 거...
겨울에 건넌다고
그것도 안됨.
동태냐 생태냐 일뿐임.
갯벌.. 갯뻘
범고래 18-12-04 02:47
   
그냥 무리해서 안 건넌 거죠. 이미 몽골은 한족 기술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더 큰 성과 더욱 넓은 폭의 물도 수도 없이 건넌 게 몽골입니다. 다만 작은 섬 강화도에 콕 박혀 있는 세력을 잡겠다고 한족 기술자 동원해서 배 만들고 거길 건너야 하는데 저항도 거셀 테고, 이리저리 골치 아프니 그냥 둔 거죠. 강화도 안 먹어도 이미 고려 본토는 몽골군에게 신나게 털리는 중인데 고려 조정이 GG 칠 때까지 몽골은 그저 본토에서 약탈하고 살육하며 놀고 있으면 되는 거였습니다.
도나201 18-12-04 03:30
   
몽골이 시도조차 안한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모든 정권의핵심이 강화도에서 진을 치고 있으니 섬멸의 대상이기도 했죠.
특히 총사령관의 암살로 인해서 (한마디로 왕가의 사람) 성이 날때로 난 몽고군으로서는
벼르고 온상황에서 시도를 했읍니다. 말그대로 난공불락이였읍니다.

첨엔 뗏목을 거치해서 준비하다가 물살에 휩쓸리고
배를 띄우자니 조수간만에 수심이 낮아서 들어오지 못하고,
그래서 겨울까지 기다리자.. 해서 다시 겨울에 소집.
한강물이 얼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심산이였는데....

물론 뻘밭에 조준점이 확실했죠.

근데 겨울때 문제는 이게 강바람에 바닷바람이 합쳐지는 곳이라서 강이 안얼음.......ㅜ,.ㅡ
그래도 뗏목을 만들어서 건너자 하고 건넘.

문제는 뻘판이 수백미터 ...........그리고 빠지면 움직이지 못함.  그것을 해결하려고 나무판자를 대면서 길을 터놓음. 화살로 족족히 맞아 가면서 전진. 판데기 깔고 한발짝 판데기 깔고 한발짝.. 으악..
막상 상륙하고 보니 다 절벽.....강화도의 평균각이 30도를 넘음.
거의 수직이라고 해야함..
돌굴러가유....................으악.

근데 화약이 발명되었습니다.

뒤로 보급선이 도착했읍니다.
화살지원 식량지원 그도 모자라서 섬내에서 농사짓고 있읍니다.


문제는 서해안의해상로를 몽골도 어쩌지 못했죠.
특히 목포를 중심으로한 고려최고의 수군들이 여기 다모여있었고.
한마디로 청해진은 해상통로에서 해적과 싸워온 실전베테랑들이라서
몽고수군으로서도 어쩌지 못한 상황.

특히 섬으로 이뤄진 다도해지형으로 인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섬마다 숨겨놓은 보급기지에  선박수리등등 해서
몽고군의 골치거리였고. 나중에는 몽고군이 섬멸한것이 아닌 고려군영에서 거의 항복권유로 대부분넘어오고
남은 잔당은 제주도에서 거의 섬멸된것이 삼별초.......
그전신은  웬간해선 건들이지도 못했음.

즉 서해상의 해상로는 완전히 살아있엇고. 그에 따른 수뇌부의 움직임과연락망이 건재했었기 때문에...ㅡ.ㅡ.
몽고군으로서는 굉장한 골치였음.

즉. 섬인데 배가 오지 못햇고,  뗏목은 물살이 거셌고 도착한면 뻘밭
물이 빠지면 바로 후퇴길조차 막혀 버림.

거기다 봄가을에는 조수간만의차가 심해서 작전이 불가했고,

여름에는 뻘이 드러나서 기동자체가 불능 거기에 퇴각로마저 없음.

겨울에는 이제 가자 했는데 ......................... 간척전에 지형이 완전히 집중포화지형.
 
도착했더니 등판로가 30도이상. 문젠 대규모병력이 상륙할 공간이 없음. ...
그렇다고 반대편으로 가려고 하니 수군기지 자체로 정면돌파하는 것은 거의 자 살행.

그것도 조수간만으로 들어갈시간이 한정되어 있음.
그시간 놓치면 뻘밭............ㅡㅜ...

특히 조류의 움직임은 한시도 일정하지 않아서 뗏목이 어떻게 방향을 잡을 지 모름.........


이게 .. 강화도가 불패의섬이라고 불린 이유.........

이게 함락된 적은 딱한번  병자호란때...
없습니다 18-12-04 04:27
   
게다가 당시 무신정권은 삼별초를 비롯한 수만명의 고려정규군을 전부 좁은 강화도에 집결시켜 놓았음. 그래서 숫적으로 열세였던 몽고군이 바다를 넘어 공격한다고해도 공성전을 감당하는건 무리였음.

그 댓가로 정규군없이 백성들이 저항해야했던 본토에서는 인구의 20%가 학살당하는 참상이 벌어진것..
러키가이 18-12-04 10:24
   
갑곶 ===> 이란 곳이 가장 육지에서 가까운 강화도 북동쪽 지역인데 ~~~

이 명칭이 붙게 된 유래가~~~

몽골군 애들이~~~

우리가 갑옷을 연결해서(곶감할때 곶 = 꿰다) 즉  = 갑곶

건너갈수 있는 거리인데~~~

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해서 붙은 지명~~~!
ranteria 18-12-04 12:31
   
저때 무신정권 주력병력(삼별초)이 강화도에 집결해 있었고 지금으로 치면 상시 초계를 돌았다고 합니다. 사서에도 안산 근천인가에서 상륙하려다 투석기배치된 고려군선단에 걸려 박살난 기록이 있을겁니다. 또 1차 침공때인가는 몽골군 물러나고 배신때린 서경유수인가 잡으려고 기병만 3천을 보내기도 했다는 기록도 언뜻 기억나네요. 즉 본격적인 수군이 없이는 상륙자체도 불가능했고 당대 남송을 넘지 못했던 몽고군 사정상 대규모 선단 조직은 아예 불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꾸물꾸물 18-12-04 17:12
   
윗분들이 말씀 해주셨기도하지만..

같은 폭이어도 바다와 강은 아주아주아주 다릅니다.
오봉산 18-12-04 17:30
   
'한헌석의 천하사'를 검색해보시지요.

거기에 나온 내용을 인용해보겠읍니다.
우리가 배운 역사는 일본인 아베노부유키 감독하에 쓰여진 나쁜소설책같은 것인것은 아시지요?
지난 160여년간 조선인 수억명이 살해됐고,1900~1930년도에 2000만여명이 강제로 한반도로 이주되었고요.

우리의 강화도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로 추정하더군요.
원나라는 그서쪽 400여Km?서쪽까지 점령하였고요.
그곳에 바미얀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중국의(차이나가 아닌 조선황제가 친히 다스리는 중국,즉 경기도) 한양으로 추정합니다. 중국 주변은 대군들이 지키고,더 먼곳은 관리들이나 막부의 소군들을 시켜서 다스리고요.도요토미히데요시는 막부의 소군(쇼군)이라 불리웠지요?중국과 주변을 포함하여 조선이 되고요.

페샤와르와 바미얀사이의 400Km는 삼국지등에 나오는 소위 '촉도'라 불리워지는 지역입니다.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만의 란공불락의 요새지요.

고려의 수도가 관중(요새중의 요새)인 한양(바미얀)에 있어서 원나라와 수년간 싸워서 버티는데
문신들이 배신하여(원나라의 이간책에 넘어가서) 한양을 버리고 촉도를 건너 남경,강도,강화도로 불리우는 페샤와르로 피난합니다.
무신들은 한양을 사수하고요.
결국 한양(바미얀)은 원나라에 넘어갔고,고려는 촉도를 철통같이 지키며 나라를 유지하였읍니다.
결코 원나라는 고려를 이기지도 못했고,여전히 천자국은 고려였지요.

결론은 원나라는 촉도를 통과할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 원나라를 이성계가 멸한후 고려를 인수하였다고 '한헌석의 천하사'쓰여있읍니다.

그 글을 읽어보시면,옛한글은 중국어이고 한자는 조선어인것도 이해하시게 될것입니다.
지금 한글은 아베노부유키 감독하에 망가뜨려진 (뜻과 발음등을 교묘히변경함) 한글이고요.
     
꾸물꾸물 18-12-04 20:40
   
........
빨갱척결 18-12-04 22:29
   
그때를 현재와 혼동...
그당시 몽고 조선업 수준을 보면..답 안나오지.